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59. 10. 20, 미국 버몬트 벌링턴 |
---|---|
사망 | 1952. 6. 1, 뉴욕 시 |
국적 | 미국 |
요약
실용주의 철학학파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능심리학의 선구자이며 미국의 진보적 교육운동의 대표자이다. 독서열로 가득 찬 버몬트대학교 시절을 보냈으며, 1882년 존스홉킨스대학교에 입학해 신헤겔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모리스에게 영향을 받았다. 1884년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시간대학교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강의했다.
1894년에는 시카고대학교 철학교수가 되었다. 이 시절 진화론적 생물학과 심리학으로 사유의 범위를 넓혔고 <심리학에서 반사궁 개념>, <학교와 사회>, <어린이와 교과과정> 등 많은 논문을 써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04년 컬럼비아대학교 철학교수직을 맡아 47년 동안 재직했다. 이 기간 미국 최고의 해설가이자 사회비평가가 되었다. 1952년 폐렴에 걸려 죽었다.
개요
실용주의 철학학파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능심리학의 선구자이자 미국의 진보적 교육운동의 대표자이다.
초기생애
평범한 가문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3대째 버몬트에서 농사를 지은 농부였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버몬트의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 아치볼드 듀이는 청년이 되자 집안의 전통을 깨고 벌링턴에서 식료품 사업을 시작했다. 이곳에 살면서 아치볼드는 44세 때 20년 연하인 루시나 아터미사 리치를 만나 결혼했다. 이 부부는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존 듀이는 셋째 아들이다. 듀이가 젊은시절을 보낸 벌링턴에는 약 1만 5,000명이 살고 있었고 이 가운데 반은 원주민, 나머지는 주로 아일랜드와 퀘벡에서 온 이주민이었다.
원주민 가운데는 오래전에 버몬트나 다른 뉴잉글랜드 지방에 정착한 중간계층의 앵글로색슨족 프로테스탄트교도의 후손인 '옛 미국인'이 있었는데, 듀이는 바로 이 집단의 전통 안에서 자랐다.
벌링턴 공립학교 과정을 마친 뒤 버몬트대학교에 들어갔다. 대학생활에서 특히 중요했던 시기는 4학년 때로, 이때의 교과과정은 학생들에게 정치·경제·철학·종교의 기초이론을 소개하고 대학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학문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었다.
듀이는 이 수업들에 흥미를 느꼈고 큰 자극을 받았다. 다양한 지적·철학적 노선을 따라 생각해보는 그의 사유 태도는 대학 4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은 지적 관심이 넓어지고 독서열로 가득찬 시기였다. 듀이는 당시 자신은 '독서광'이었으며 책 속에서 깊은 만족을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독서열을 북돋아주었고 듀이는 자신을 사로잡은 거의 모든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대학원 시절과 달리 책에 대한 관심 때문에 다른 흥미있는 일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년시절 살던 집에서 3구간 떨어진 섐플레인 호를 찾아가 수영이나 낚시를 즐겼으며 그린마운틴 산으로 소풍가거나 야영하기를 좋아했다. 여름에는 벌링턴 만 해안선을 따라 광대하게 펼쳐진 목재작업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듀이는 공부나 오락활동에서는 자유로웠지만 다른 면에서는 제약을 받았다. 어머니는 듀이에게 안식일을 정확히 지키도록 요구했으며, 더 자란 뒤에는 섐플레인 호 입구 벌링턴 공업지역 주위에 살던 이웃과 어울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아들이 저녁에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캐묻기도 했다.
뒷날 듀이는 이당시 성장시절을 불쾌한 추억거리로 떠올리면서 자신은 어머니가 캐물을 때 실제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을 때조차 죄책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대학을 마치고 3년 동안 고등학교 교사로 일한 뒤 대학원에서 좀더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1882년 가을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홉킨스대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미시간대학교 초빙교수였던 조지 실베스터 모리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모리스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의 사상을 부흥시킨 신헤겔주의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듀이는 우주의 정신적·유기적 본성을 강조하는 신헤겔주의에서 자신이 이제껏 희미하게 모색해왔던 것을 발견하고는 열성적으로 이 철학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그는 대학 총장에게 너무 공부에만 매달리지 말고 사교활동을 하라는 충고를 들을 정도로 다른 일은 무시한 채 연구에 전념했다. 1884년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그해 가을 모리스 교수의 간청으로 미시간대학교로 가서 철학과 심리학을 강의했다.
그후 1888~89년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철학교수를 지낸 기간을 제외하고는 10년 동안 미시간대학교에 재직했다. 이 시기에 듀이는 주로 헤겔과 영국 신헤겔주의 철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했으며, 아울러 당시 미국에서 G. 스탠리 홀과 윌리엄 제임스가 내놓은 새로운 실험 생리심리학에 열중했다.
듀이가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미시간대학교에서였다.
독서와 관찰을 통해 그는 대부분의 학교교육이 낡은 전통적 방식을 답습하고 있어 당시의 아동심리학이 밝혀낸 여러 사실과 변화하는 민주적 사회질서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듀이는 이러한 결점을 치유할 수 있는 교육철학 연구에 주된 관심을 쏟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사상에는 새로운 차원이 덧붙여졌다. 미시간 생활이 만 2년이 되어갈 무렵 미시간 펜턴 출신의 해리엇 앨리스 치프먼과 결혼했다. 그녀는 이미 듀이의 강의를 여러 번 들은 학생이었는데, 1886년 7월 28일 두 사람의 친분관계는 부부관계로 극적 전환을 했다.
앨리스의 학문적 관심은 주로 사회·교육 문제였는데, 듀이도 그녀의 영향을 받아 이 문제에까지 관심을 넓히게 되었다. 그녀는 외향적 성격으로 사람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사춘기 때부터 낯선 사람 앞에서 부끄럼을 타던 듀이의 약점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두 사람은 아이를 좋아해서 아들 3명, 딸 3명을 두었지만, 아들 2명은 유년기를 못 넘기고 죽었다.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이 여행에서 만난, 아들과 나이가 비슷한 이탈리아 소년을 입양했다.
시카고대학교에서의 활동
1894년 미시간을 떠나 시카고대학교 철학교수 및 철학·심리학·교육학과 과장이 되었고 이곳에서의 연구성과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진화론적 생물학과 심리학이 그의 사유를 점차 지배해감에 따라 관념이 우주의 이성적 질서를 반영한다고 보는 헤겔 이론을 버리고 관념을 환경 속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보는 도구주의 인식론을 받아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진화론적 생물학과 심리학을 바탕으로, 절대정신이 이성적 구조를 가진 물질세계로 나타나고 관념변증법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헤겔의 절대정신 개념도 거부했다.
듀이는 과학적·일상적 경험 속에서 만나는 자연이야말로 궁극적 실재이며 인간도 이 자연의 산물로서 지금 여기서 살면서 자신의 의미와 목표를 찾아가는 존재라고 보는 실재에 관한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원리는 이후 듀이 철학사상의 핵심에 놓이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같은 과 동료들에게 연구의 틀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철학학파를 낳게 했다. 1903년 듀이와 동료 7명의 논문집 〈논리이론 연구 Studies in Logical Theory〉가 나오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 책의 출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이 책의 출간으로 시카고 학파라는 새로운 철학학파가 탄생했다고 선언했다.
심리학에 대한 듀이의 기여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에 쓴 많은 논문은 현재 심리학 문헌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듀이는 이 논문들을 통해 심리학의 역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논문인 〈심리학에서 반사궁(反射弓) 개념 The Reflex Arc Concept in Psychology〉은 일반적으로 기능심리학, 즉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전체 유기체에 초점을 맞추는 심리학 이론의 효시로 여겨지고 있다.
교육에 관한 저서, 특히 〈학교와 사회 The School and Society〉(1899)와 〈어린이와 교과과정 The Child and the Curriculum〉(1902)에는 교육철학의 주요 기본원리가 제시되어 있다.
그 원리란 교육과정이 아이들의 흥미에 바탕을 두고 시작되어야 하고 아이들이 교실 안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하는 가운데 사유와 행위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도록 해야 하며 학교는 '축소된 공동체'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사는 틀에 박힌 수업을 담당하는 감독관이기보다는 안내자이자 학생의 동료가 되어야 하며,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이 전인적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철학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듀이의 행정적 노력의 결과 교육학은 독립된 학과로 인정받게 되었고, 심리학과 철학이 제안한 교육이론과 실천방식을 시험할 수 있는 '실험학교'도 설립되었다.
1896년 1월 문을 연 실험학교들은 폭넓은 관심을 끌었고 진보적 교육사상의 중심지로서 시카고대학교의 명성을 드높여주었다.
시카고 시에서 듀이는 거칠고 무제한적인 '산업주의'를 목격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대부분의 도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얻었다. 시카고 빈민가 복지시설인 '헐 하우스'의 임원으로 이주민과 소수민족의 착취상황을 자세히 알게 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자유주의자·급진주의자를 규합하여, 하층빈민을 구제하고 노동조합을 합법화하며 독점회사의 세력을 약화하는 입법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헐 하우스에서 그는 이 시설의 설립자로 유명한 제인 애덤스를 소개받아 절친한 친분관계를 지속했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의 활동
시카고대학교 교육 프로그램의 시행 및 재정문제와 관련하여 윌리엄 레이니 하퍼 총장과 불화를 겪게 되자, 듀이는 1904년 자리에서 물러나 뉴욕 시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 철학 교수직을 맡았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무려 47년 동안 철학교수와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25년에 걸쳐 정력적으로 강의하는 동안 그의 명성과 그가 설파한 여러 가지 중요한 견해 때문에 국내외에서 수천 명의 학생이 강의를 들었으며, 그는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영향력있는 교수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그는 대단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냈다. 어떤 문헌목록은 듀이가 이 시기에 발표한 각종 저술의 제목을 약 125페이지에 걸쳐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의 사상은 논리학·인식론·심리학·교육학·사회철학·미술·종교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으며, 이 분야 각각에 관한 주요 저작들이 해마다 발간되어 미국 최고의 철학자로서 듀이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1925년 발간된 〈경험과 자연 Experience and Nature〉은 그의 철학의 중요한 측면을 체계적으로 모아놓은 것으로 보통 듀이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듀이는 시사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유주의 경향의 잡지들, 특히 〈뉴 리퍼블릭 The New Republic〉에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그가 쓴 논설들은 폭넓은 독자층을 겨냥한 것이었고 국내·국외·국제 추세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사태를 분석·해석하는 탁월한 능력으로 곧 미국 최고의 해설가이자 사회비평가가 되었다.
사상가일 뿐 아니라 행동가였던 듀이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운동과 조직을 지원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아끼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카고의 변호사로 있던 오랜 친구 S.O. 레빈슨과 함께 '전쟁 불법화'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운동은 1928년의 '켈로그-브리앙 협정' 체결에 이바지했다.
또 '미국 대학교수 협회'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 초대 의장을 맡았으며, 뉴욕 시 첫 교원노조의 창립위원을 지냈다. 1919년에는 '사회연구학교'의 설립을 도왔고 1933년에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박해받는 학자들을 위한 '망명대학'의 설립을 도왔다. 그밖에도 '미국 시민자유연합', '산업민주주의연맹', '피플스 로비'에 참여했다. 의회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이 1930년대 공황으로 일어난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며 양당 모두를 '대기업의 하수인'이라고 비난하면서 제3정당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37년에는 78세의 나이로 조사위원회를 이끌고 멕시코 시로 가서 레온 트로츠키가 모스크바 법정이 1936, 1937년에 자신을 고발한 데 대해 반론을 펼치는 것을 듣기도 했다. 그의 명성이 국제적으로 알려짐에 따라 일본·중국·터키·멕시코·소련·남아프리카에서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그는 소련·멕시코·중국·터키처럼 사회 대변동을 겪고 있던 나라에서 체류하는 동안에는 〈뉴 리퍼블릭〉에 관련기사를 써보냈다.
말년
1927년 아내의 죽음으로 듀이는 개인적으로 커다란 불행을 겪었다.
두 사람은 유달리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아내의 빈자리는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아내가 죽은 뒤 아들·딸과 함께 살다가 1946년 로버타 로위츠 그랜트와 재혼했다. 듀이가 2번째 부인 로버타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10대 초반의 소녀였을 때 그녀의 부모를 통해서였다. 재혼할 당시 듀이의 나이는 87세, 로버타는 42세였다. 이 부부는 전쟁으로 고아가 된 벨기에의 오누이를 입양해 키웠다. 듀이는 많은 영예를 누렸다. 국내외 13개 대학교에서 명예학위를 받았고, 1939년에는 중국 정부로부터 제이드 훈장, 1949년에는 칠레 정부로부터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1932년 '전국교육협회' 명예회장, 1938년 '미국 철학회' 종신 명예회장, 1952년에는 뉴욕 주 자유당 명예 부위원장에 뽑혔다. 그의 70, 80, 9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만찬과 모임은 그동안 알고 지낸 많은 유명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여러 도시에서 열렸다.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그의 교육철학은 수많은 비난을 받았다.
비판자들은 학교교육이 주요 교과목뿐 아니라 예절·규율 면에서도 학생을 적절히 훈련하는 데 실패한 이유를 듀이와 그의 진보적 교육관 탓으로 돌렸으며, 논문을 잇달아 발표해 듀이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과 좌절의 속죄양으로 만들었다.
듀이는 워낙 건강했기 때문에 오랜 활동기간 동안에도 병 때문에 강의나 대학 밖의 일을 취소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쇠약해져 80대에 들어서는 병원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뉴욕 시와 고향 벌링턴에서 열린 자신의 90회 생일축하 모임에 참석하는가 하면 1951년 6월에는 예일대학교 개교 250주년 기념 명예학위 수여식에도 직접 참석했다.
1951년 11월 둔부를 다쳐 접골 수술을 했으나 실패함으로써 1952년 봄까지 쇠약해진 몸으로 아파트에 갇혀 지냈다.
그러나 그의 지적 활동은 여전히 계속되어 〈경험과 자연〉의 재판 출간 등 일찍이 계획해두었던 일을 계속 진행했다. 1952년 5월 31일 폐렴에 걸려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