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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유리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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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지방의 문명 중 어느 곳에서 유리가 처음 만들어졌는가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집트에서 BC 2500년경에 제작된 유리구슬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BC 1490년 이후에 정교한 유리그릇이 이집트에서 제작되었는데 이것은 거름을 섞은 점토로 기초형태를 만들어 금속봉에 고정시킨 다음 불투명 청색유리로 덮어 씌우고, 그 위에 대조되는 노랑색·흰색·녹색의 유리실로 감다가 빗 등의 도구로 깃털이나 지그재그형의 문양을 놓은 것이다.

이러한 그릇은 대개 작으며 향수병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미케네 문명시대(BC 1400~1200경)부터 만들어진 그리스 유리는 이집트 기법을 빌려 소형의 건축 세부형태나 용기 등이 만들어졌다. BC 6세기에 들어 그리스 유리는 대대적으로 생산되었고 이탈리아와 서방국가로 점점 퍼져나갔다. 유리장식은 이집트 제18왕조의 것과 비슷한 청색 바탕에 밝은색조의 유리띠를 두른 용기들도 있었으나 그리스 특유의 백색 바탕 보라색 유리띠 장식도 만들어졌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채색유리공예품으로 유명했는데, 다양한 색의 유리봉을 섞어 복합유리막대를 만드는 기술과 이것을 잘라서 반복되는 문양 등을 나타내는 모자이크 디자인이 발달했고 별이나 꽃 모양의 모자이크 디자인을 '밀레피오리(Millefiori:'1,000개의 꽃') 유리'라고 불렀다(→ 색인:밀레피오리 유리). 또한 유리를 거푸집에 압형하는 것과 유리가루를 거푸집에 녹이는 기법이 발달했는데, 이것은 후대에 널리 쓰였으며 밀레피오리 기법과 혼용되어 유리그릇에 무수히 많은 형태의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밀레피오리(Millefiori)

밀레피오리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유리꽃병

ⓒ VAwebteam | CC의 BY-SA 3.0

유리공예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은 BC 1세기경 시리아인에 의해 개발된 유리불기이며, 이로 인해 로마제국의 유리산업은 경이적으로 성장했다. 이 기법이 발달하면서 다른 도구가 필요없이 유리방울만으로도 손잡이·굽·장식 등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리불기 (glassblowing)

유리공예가가 유리불기 기술로 유리공예품을 만드는 모습

ⓒ Emilie.lauzon / WIKIPEDIA | Public Domain

시리아 유리공예가들은 유리제품의 수요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이주했는데, 1세기 중반 이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하면서 이탈리아는 유리제품의 주요생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특히 인그레이빙이 유행했으며, 선조들의 기술을 능가하는 '새장 컵'(diatreta)은 이탈리아 유리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색인:인그레이브드 글라스). 로마 시대 후반에는 시리아인의 트레일링(trailing)이 연성(延性) 유리에 적합했으며, 그릇의 몸통 또는 목을 유리실로 감거나 환상적인 형태의 손잡이를 만드는 데 적합했다.

중세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유리제작은 세계 여러 곳에서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

동방에서는 유리제작 기술이 이슬람으로 계승되어 발전한 반면, 북쪽에서는 연료가 풍부한 숲속의 작은 공장에서 불순물이 섞인 녹색 또는 노란색을 띤 단순한 형태의 유리그릇이 만들어졌다. 두드러진 특징이 없는 비잔틴 유리는 커팅이 그 주요 장식기법이었으며, 이슬람 문명은 그리스·로마와 비교될 정도로 독특한 이슬람 양식의 유리공예를 발전시켰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그레이빙이 활기를 띠면서 이전부터 행해졌던 파셋(facet 磨面)과 보스 커팅(boss cutting:돌출장식깎음)기법이 계속되면서 라이니어 인태글리오(linear intaglio 線刻)와 릴리프 커팅(relief cutting:부조장식깎음)에 의해 더욱 화려하며 새로운 형태의 유리공예로 발전했다(→ 색인:컷 글라스). 이집트에서는 새로운 기법의 개발과 전통기법의 고수를 동시에 유지하는 추세였다.

인태글리오(linear intaglio)

인태글리오 기술로 자수정에 그림을 새긴 유리공예 작품

ⓒ Marie-Lan Nguyen and one more author / WIKIPEDIA | Public Domain

파셋(facet)

자른 보석의 여러 면을 보여주는 파셋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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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기법으로는 한 면의 끝에 무늬가 새겨진 집게로 유리를 찍어내는 것이다(→ 색인:스탬핑). 무엇보다도 금속성 광택 색상의 발명이 뛰어난데, 이것은 은을 포함한 물감으로 색칠해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소성(燒成)할 경우 연노랑색에서부터 갈색까지 다양한 얇은 금속막이 생긴 것을 활용하여 장식하는 것이다(→ 색인:광택유리). 시리아에서 이집트의 파티마(Fāṭmid) 왕조 멸망 이후 시리아로 건너간 유리공예가들에 의해 도금유리와 에나멜 유리 공예의 기초가 세워졌다.

13세기 시리아 유리는 크게 알레포에서 제작된 두껍고 보석 같은 에나멜 장식유리와 다마스쿠스에서 제작된 아주 정교한 그림이 있는 장식유리로 나눌 수 있다. 1300년경에는 몽골과 타타르족에 의해 중국의 유리공예는 이슬람 유리에 그 영향을 미친다.

15~19세기 중반

7세기에 들어 유리산업이 정착된 베네치아는 10세기에 베슬(vessel) 유리를 만들고 15세기 후반에 에나멜 유리를 선보였는데, 이는 시리아의 유리공예와 비슷한 면을 보이지만 자체적으로 기술개발된 것이다.

베네치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투명·무색유리의 생산인데, 이것은 중세에는 이탈리아에서만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수정과 유사하기 때문에 '크리스탈로'(cristallo)라고도 불렸다(→ 색인:베네치아 유리). 이중 소다 크리스탈로는 매우 무르고 빨리 식어 장인들의 뛰어난 속도감과 재주를 필요로 하는 재료이기도 하다.

베네치아 유리(Venetian glass)

베네치아 V&A 박물관에 소장된 유리잔

ⓒ VAwebteam/wikipedia | CC BY-SA 3.0

16세기초에는 단순한 형태에서 점차 정교하고 환상적인 모양의 유리제품으로 발달했다(→ 색인:라티치니오 유리). 특히 불투명한 하얀실로 장식하는 기법이 유행했는데, 후에 이것이 점차 더 복잡하게 발달하여 하얀 레이스 형태의 유리, 거푸집에 넣어 불어서 만든 유리, 뜨거울 때 얼음이나 평면에 굴려 깨진 듯한 표면을 가진 유리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되었다.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가들은 베네치아를 떠나거나 외부사람에게 비법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었는데, 16세기경 베네치아 유리공예가들이 제노바 근처 알타레 지방으로 도망을 가면서 이곳은 제2의 유리생산지가 되었다(→ 색인:알타레 유리). 도망간 베네치아인과 의욕적인 알타레인은 이탈리아의 유리기술을 스페인·포르투갈·오스트리아·독일로 전파했고, 이탈리아 공예가는 북쪽으로 영국·덴마크·스웨덴으로 전파시켰다.

16세기말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각 나라마다 유리공예의 변형 발달이 이루어지고 그 국제적인 양식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는데, 베네치아 양식이 그 근원이 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다이아몬드 침(針)으로 새긴 인그레이빙이 발달되면서 더욱 유리공예의 장식기법이 발달했다(→ 색인:다이아몬드 포인트 인그레이빙).

독일에서는 17세기말에 접어들면서 베네치아 유리공예 양식에 대한 반동이 자리잡았다.

로마 제국시대 후반기부터 꾸준하게 이어져온 지방 타입의 초록색 유리가 있었는데, 이것은 식물을 태워 얻은 칼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발트유리'(Waldglas:숲속유리)라고도 불렸다. 이 재료를 이용하여 아름다운 색상의 원통에 돋을새김 장식이 박혀 있는 맥주잔과 컵 모양 또는 달걀형 사발 모양의 포도주잔 등이 다양하게 제작되었는데 이는 독일의 고전적인 포도주잔이 되었고 18세기까지 사용되다가 약간의 변형을 거쳐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색인:뢰머). 17세기 후반에는 베네치아 타입의 크리스탈로가 독일형으로 개발되었다.

특히 1605년 프라하의 루돌프 2세의 보석세공가인 카스파르 레만이 만든 비커는 보석에서 사용한 인그레이빙 기법을 적용한 것으로 육중하고 수정같이 맑은 탄산칼슘-석회유리를 보다 깊게 깎아 가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17세기말에는 크리스탈 투명유리나 칼륨 라임 유리에 장식된 보헤미아-슐레지엔 지방의 부조 인그레이빙이 뛰어났으며,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음각 인그레이빙도 사용되었고 점차 더많이 쓰이게 되었다.

독일의 유리장식기법에서 인그레이빙만큼 중요한 것은 에나멜링이었는데, 이것은 16세기말 보헤미아에서 실용화되었다. 1650~75년에 뉘른베르크에서는 에나멜 그림을 좀더 세련된 양식으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스테인드 글라스 기법에서 빌려온 것으로 검정색과 암갈색의 그림을 조그만 원통형의 비커(입이 넓은 큰 잔)를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

또한 18세기 보헤미아에서 발달한 '금장식 샌드위치 유리'(gold sandwich glasses)는 비커나 잔을 2겹의 유리로 만들어 철침(鐵針)으로 원하는 디자인을 부식한 다음 금박을 사이에 끼워 넣어서 장식한 것이다(→ 색인:츠비셴골트글레저).

영국에서는 중세 후반부터 대부분의 유리공예품이 교회용품으로 만들어졌다.

영국의 유리는 16세기 후반에 들어 독일의 발트 유리 양식과 이탈리아 이주민들이 들고 온 국제적인 베네치아 양식으로 크게 나뉘어 발달했는데, 1615년 유리를 굽는 가마의 주연료인 나무 사용이 금지되자 나무에 의존하는 발트 유리 양식이 베네치아 양식으로 대체되었다. 1650년경이 되면서 유리산업은 왕에 의해 부여되는 독점사업형태의 하나였으며, 독립사업가인 로버트 만셀 경의 뛰어난 유리산업 경영으로 유리는 영국 산업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외국의 자원과 기술에 많이 의존해왔던 영국의 유리산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오르그 레이븐즈크로프트는 1675년경 자국에서 생산되는 재료에 산화납을 첨가하여 베네치아 유리보다 단단하고, 무겁고, 내구적인 납유리를 만들었다(→ 색인:레이븐즈크로프트). 이 납유리는 음료수잔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17세기말과 18세기초 영국 유리공예를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레이븐즈크로프트(George Ravenscroft)의 유리공예품

레이븐즈크로프트가 제작한 유리잔과 유리그릇

ⓒ Abaddon1337 / WIKIPEDIA | Public Domain

18세기 중반에는 한때 모든 유리제품에 인그레이빙이 유행으로 사용되었다가 후에 커팅 기법이 널리 사용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들어서 사용된 에나멜 기법은 중국풍을 띤 흰색의 불투명 유리에 장식되었고, 금도금도 포도나무 줄기와 같은 단순한 디자인과 함께 사용되었다. 18, 19세기를 통해 영국의 컷 유리는 유럽 전역에서 널리 모방되었다.

미국의 유리산업은 유럽의 것이 들어온 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608년 런던회사(社)가 '유리'와 구슬생산을 위해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에 유리공장을 세웠고, 1739년 카스파 위스타가 뉴저지 주의 살렘 군(郡)에 실용 유리그릇을 만드는 공장을 세워 최초로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유리공예에 길이 남을 헨리 윌리엄 스티겔은 1763년 병과 창문유리의 생산만을 목적으로 펜실베이니아 주의 랭커스터에 공장을 세웠는데 위스타와 함께 유리 전통의 창시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스티겔 유리의 특징은 투명함과 인공적인 색유리의 사용이며, 특히 유리불기 기법으로 장식된 다이아몬드 데이지 패턴은 스티겔의 독창적인 모양이었다. 독립전쟁 이후 올리브 유리공장, 피킨 유리공장, 뉴브레멘 공장 등이 대표적으로 유리를 생산했으며, 요한 프리드리히 아멜룽이 세운 뉴브레멘 공장(독일 브레멘에서 시작된 공장)은 1800년 이전에 미국에서 생산된 고급 유리제품에 서명과 날짜를 새긴 재미있는 제품을 만들었다.

1808년 피츠버그에 세워진 베이크웰은 1817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에게 유리식기를 제공한 최초의 유리공장이며, 1825년 손잡이를 만들기 위한 기계식 압형 특허를 취득하는 등 뛰어난 업적을 이룩한 곳이다(→ 색인:베이크웰 유리). 1818년에 세워진 뉴잉글랜드 유리회사는 유리불기와 인그레이빙을 사용한 수준 높은 유리제품 생산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유리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1815~70년에 제작된 것인데, 이것은 그림을 그린 것과 같이 거푸집으로 만든 일련의 물병으로 숙련석공조합(freemason)과 관련된 문장들, 경제적 상황과 연결된 문장과 디자인, 국내 영웅의 초상과 그들의 행적에 관한 디자인, 대통령 후보의 정치적 선전문구와 초상 등 4가지로 구분되어 만들어졌다.

1825~50년 사이에는 레이스 시대(lacy period)의 유리공예라고 하는데 이는 거푸집으로 뜬 유리의 고르지 않은 표면을 레이스처럼 생긴 패턴으로 덮어 씌웠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1830년에는 거푸집에 들어가는 유리의 양에 관계없이 두께를 일정하게 해주는 캡링(capring)이 발명되고 압착유리가 접착되면서 미국의 유리는 대량생산품목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세기 중반과 20세기

1851년 영국의 대전람회에서 선보인 현대 유리는 자의식을 표현하는 장식예술의 하나였다.

이것은 곧 예술잡지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박물관에서는 유리공예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깊게 깎은 크리스털의 생산을 계속했고, 인그레이빙 유리, 색유리 등은 유럽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용해로를 사용하는 전통유리 제작기법을 주창해온 베네치아 유리공장도 유리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전람회를 계기로 절정기를 맞이한 영국의 유리는 1860∼70년대에 들면서 베네치아 양식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빅토리아 시대의 걸작품을 선보이게 된다.

빅토리아 중기의 획기적인 형태는 스타워브리지의 유리공예가들이 카메오 유리로 만든 포트랜드 꽃병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 특징은 어두운 바탕색 위에 백색 부조장식을 붙인 것으로 에칭과 조각술을 요하는 제품이었다(→ 색인:카메오 유리). '페가소스 꽃병'과 같이 초기의 중요한 작품이 1870년대에 존 노스우드에 의해 제작되었고, 19세기말에는 조지 우덜에 의해서 중요한 카메오 작품이 만들어졌다.

영국 예술비평가인 존 러스킨이 〈베네치아의 돌 The Stones of Venice〉에서 제창했듯이 유리분야에 대한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은 큰 의미를 지녔는데, 특히 조형형태와 용해로에서의 장식기법에서 볼 수 있다. 19세기 중반까지 고급용기의 디자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압형유리의 디자인은 더 복잡해지고 표면은 유리불기로 만든 것같이 부드러워졌다. 비더마이어 양식과 유럽의 후기 양식을 띤 정교한 유리제품이 1860년대에 만들어졌다.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 기간중에 컷 크리스털 작품이 부활하여 1880~90년대에 계속되었다. 1893년 루이스 컴퍼트 티퍼니가 첫 선을 보인 파브릴 유리는 지금까지 제작된 어느 유리보다 형태·색상·모양에서 한 차원 높은 수준 있는 유리작품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 누보 형식을 띤 것이었다(→ 색인:티퍼니). 특히 그들이 창작해낸 금속광택유리는 중부 유럽에서 새로운 유행을 일으킬 만큼 인기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새로운 형태의 미국 현대유리 디자인을 가진 압축유리가 등장했고, 오븐용 그릇 같은 대량품을 코닝유리사(社)가 제작했다. 특이한 것은 조각가와 디자이너를 고용하여 조각장식된 유리를 생산해냄으로써 이 회사가 상품유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또한 1960년대 순수미술적 접근을 시도한 하비 리틀턴과 도미니크 라비노 같은 유리공예가들이 개인 스튜디오에서 유리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중반 체크·오스트리아·독일 등의 중부 유럽에서는 비더마이어 시대의 보헤미아 유리와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겹유리와 색유리가 제작되었고, 영국 양식에 깊이 영향을 받은 컷 크리스털 유리도 많이 제작했으며, 이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1864년경 루트비히 로브메이어에 의해 시작된 인그레이빙 유리가 부활되었고, 중부 유럽에서 유겐트슈틸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아르 누보 양식이 호리호리한 형태와 자연스럽게 흐르는 유기적 모티프를 특징으로 성행되었다. 1897년 티파니의 유리전시회는 형태뿐만 아니라 과중하게 채색된 금속광택유리가 많은 관심을 끌면서 1900년대를 이끄는 유리형태를 선보이게 되었다.

1900년대는 빈의 산업미술학교와 뜻을 함께 하는 유리작품 디자이너들이 보다 순수한 접근을 시도하는 계기가 마련되는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체크의 유리공예도 대부분은 인그레이빙을 사용한 것이었으며, 공예가·건축가의 합동 디자인은 미래의 입체파적인 경향을 예시하는 듯했다. 오스트리아의 로브메이어 공장은 부조로 조각된 유리작품을 생산했고, 독일의 로젠탈회사는 자기와 유리를 조화시킨 생산품을 제작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도 중부 유럽이나 영국과 마찬가지로 질 좋은 유리를 생산했고, 주로 컷 크리스탈과 색유리를 생산했으며, 다양한 색상과 문양은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았다.

특히 개인작가들의 유리공예기법의 개발은 활발했다. 예를 들어 에나멜 유리를 연구하고 중세 시리아 유리를 부활시키려 했던 조제프 브로카르, 두껍고 반투명한 균열유리장식을 개발한 외젠 루소, 당시 유행했던 일본 예술을 작품에 반영했으며 비대칭형태의 작품을 제작하여 19세기말의 아르누보 형식에 크게 영향을 미친 에밀 갈레 등이 있었다.

1920년대 르네 랄리크는 유리불기와 압형으로 제작된 유리에 부조장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1920년대에 들어와 명맥만 유지해오던 스웨덴 유리가 스웨덴 예술공예협회의 노력으로 활기를 찾아 화가와 유리공예가의 연합으로 새로운 유리공예의 기운을 만들었다. 1920년대 스웨덴 유리를 대표하는 인그레이빙 유리가 1930년대에는 프랑스 작가들을 따라 색깔이 있고 형상화된 유리제품으로 바뀌었고, 덴마크와 노르웨이도 스웨덴의 유리제품을 모방했다.

핀란드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였던 건넬 니만이 두꺼운 재질의 유리를 자유롭게 불어서 비대칭적 형태를 만들었으며, 벨기에의 발생랑베르 공장은 깊게 파낸 컷 크리스탈 생산으로 중요하다. 네덜란드스칸디나비아 반도국들의 개발과정을 본받으면서 예술가나 건축가에게 디자인을 맡기거나 개별적인 장식을 한 식탁용기를 생산하는 등의 새로운 장식기법을 시도함으로써 현대 유리공예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와 이탈리아의 유리산업은 부분적으로 부활되었는데, 제품들은 무라노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베네치아 양식을 용해로에서 정교하게 변형시킨 것이었고, 1920년대 이후부터 색채와 형상유리를 새로 개발하고 화려한 유리색상을 구사하는 등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색인:베네치아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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