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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리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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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고고학 유적에서 출토된 것을 통해 적지 않은 고대 유리제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한국의 유리는 색·형태·용도·성분·기법 등이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그 유래와 제작법 및 제작자를 추정하기란 쉽지 않다.

황남대총 출토 유리잔

유리잔, 국보 제193호, 높이 7.5cm(왼쪽), 8.0cm(오른쪽), 황남대총 남분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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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하면 한국에서 최초로 제작된 유리는 구슬류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고 하여 최근 발견된 부여 합송리 유적에서 출토된 7개의 밝은 남색 유리 관옥이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 유리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유리 관옥의 성분은 납과 바륨이 함유된 것으로서 전국시대말이나 한대의 중국제 유리와 동일하기 때문에 아마도 중국에서 수입된 재료를 가지고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관옥구슬로 시작된 한국의 유리제작은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활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이미 현존하는 이 시기의 유적 가운데 고분·주거지·조개무지 등 장소에 관계없이 유리구슬류가 빠짐없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한국의 장식용 유리를 대표하는 유리구슬은 형태상 일반적으로 둥근 구슬(丸玉), 굽은 구슬(曲玉), 대롱 구슬(管玉) 등으로 구분되나 좀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하면 주판알 모양 구슬(多面玉), 대추 모양 구슬(棗玉), 참외 모양 구슬(蜜相玉), 꽃잎 모양 구슬(花形玉), 4면체·6면체 등의 각형(角形) 구슬, 마름모꼴 구슬, 피라미드형 구슬 등이 있다.

대롱구슬의 모양도 다양하여 각주형(角柱形), 원통형, 배부분이 볼록하게 나온 형 등이 있다. 또한 몇 개의 구슬이 연이어 붙은 구슬(連珠玉)이나 가는 대롱을 코일형으로 감아 만든 구슬도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에 서아시아가 기원인 잠자리눈 모양 구슬, 천연보석의 줄무늬를 본따 만든 연리문구슬과 금박구슬, 여러 가지 문양을 상감(象嵌)한 모자이크 무늬 구슬 등이 특징적이다. 특히 삼국시대 사람들은 귀고리·팔찌·반지·금관 등의 금속장식에 푸른색이나 녹색의 유리 소옥(小玉)을 감입(嵌入)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높이기도 했고, 보검(寶劍)이나 요패(腰牌), 마구(馬具)장식에까지도 유리제품을 활용함으로써 유리공예를 통한 한국인의 창의성을 맘껏 발휘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또한 각종 금제장신구에 감입된 유리구슬과 금제허리띠에 매달린 유리로 된 곡옥이나 유리병 모양의 드리개, 말장식인 운주(雲珠)와 행엽(杏葉)에도 얇은 유리판을 금속판에 결합하여 붙임으로써 뛰어난 유리공예기술과 유리를 애용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형태와 장식기법을 갖는 유리구슬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감색(紺色)·청색·녹색과 이외에도 노란색·적색·주황색·갈색 등의 구현은 현대에도 쉽지 않은 색상표현기술로서 고대인들이 어떻게 제조할 수 있었는지 그 재료의 구입과 제작기법의 도입에 따른 기술과 문화유입의 경로를 밝힐 수 있는 중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이를 통해 유리구슬제조의 중심지였고 서방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인도를 위시한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교역 가능성도 높이 시사하고 있어서 다른 지역과의 비교고찰이 더욱 필요함을 제시해주고 있다. 한편 유리용기류의 유입과 제작이 시작된 것은 약 4세기경부터로 경주 제98호 고분(황남대총 남분·북분), 천마총, 금관총, 금령총 등에서 발견된 고분출토 유리용기는 특히 유명하다. 대부분 경주의 고신라지역 고분에서만 집중적으로 발견된 이 유리용기류들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잔[杯碗] 형태로서 받침[臺]이 달린 고배(高杯)와 대접 형태도 있다.

이 그릇들의 색깔과 제작기법, 장식기법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4~5세기경 만들어진 후기 로마 유리에 속하는 것으로서 고대 서양문물과의 접촉을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유리용기의 성형과 장식을 보면 환상(環狀) 구연부나 대의 처리, 트레일링 장식, 점문(點紋)장식기법 등의 요소가 고대 유리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 사산계 유리에서는 커팅과 환문(環紋)장식이 돋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유리제 사리병이 많이 만들어졌고, 더욱이 일상적으로 쓰였던 유리잔이나 주전자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는 통일신라 및 고려 초기에 유리용기가 귀중품으로서 상류층에서 애용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마도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소형잔, 병, 표주박형이나 합(盒) 형태의 유리그릇 등이 다수 만들어졌고, 팔찌나 반지와 같은 소형 고리, 허리띠 장식으로 쓰인 듯한 소형 유리판들도 옥제품의 대용으로서 고려 이후에 적지 않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고대 유리용기에서 고분출토 용기류 이외에 탑에서 발견된 유리사리병이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불자(佛者)에게 있어서 지고(至高)의 신앙대상이었던 석탑에 안치하는 사리병의 재료가 유리였음은 유리가 얼마나 귀하고 사랑받는 존재였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초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유리사리병은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현재 발견지가 확실한 것만도 25개를 넘고 있어 중국에서보다도 더욱 활발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남한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면서도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영역이 가장 많으므로 고신라 이래로 경주지역이 유리제작의 중심지였던 것 같다. 이들 유리사리병은 간단한 유리불기로 제작된 소형의 초록색 유리병인데, 그 형태는 대개 둥근 몸체에 가는 목이 달려 있다. 목이 짧은 것도 있으며, 둥근 유리나 금속 또는 나무마개가 있다.

송림사 전탑출토의 사리병과 익산 왕궁리 석탑출토 사리병은 한국적인 자태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사리병인데 그 투명하고 짙은 초록색 유리의 아름다움과 유연한 조형미는 고려자기를 연상시킨다.

한국 근대유리는 1900년대에 들어와 유리제조에 대한 인식이 새로이 생기면서 술병제작을 시작으로 생산에 들어갔으며, 1902년 이용익이 국립유리제조소를 설립하면서 러시아 기술자의 원조를 받아 유리를 제조했다.

1939년에 세워진 동양유리업주식회사는 자동식 병유리공장이었으며, 1957년에 설립된 한국유리에서는 건축용 판유리가 생산되었고, 크리스털 유리를 가공·생산하는 두산유리가 설립되는 등 현재 전국에는 150여 개의 유리업체가 생산에 종사하고 있다. 한편 예술의 한 분야로서의 유리공예가 1980년대를 전후하여 전문 유리공예가에 의해 소개되면서 한국 현대유리예술의 장을 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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