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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시대에 들어서 중동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유리구슬 같은 장식품을 계기로 유리공예가 시작되었는데, 이 초기 유리기술은 외부와의 교역을 통해 습득한 것이었으며,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자체 내 개발을 통하여 독특한 유리제조기술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와 한대(漢代)에는 중국인들이 애호하는 옥(玉)을 대신하여 유리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현존하는 한대의 유리벽, 양저우[楊州]에서 출토된 유리 의편, 창사[長沙]에서 출토된 유리제 검과 검식, 허베이 성[河北省]에 있는 유승의 묘(BC 113)에서 출토된 유리제 이배, 다양한 유리구슬과 유리 이당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유물들은 당시 옥의 대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납유리 성분을 사용하여 옥과 비슷한 색과 질감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중국의 고대 유리가 서양의 소다유리와는 다른 고유한 특징을 지니게 되는 이유이다. 특히 전국시대와 한대의 유리제품은 납과 함께 바륨도 함유되어 있어서 더욱 주목된다.
서방으로부터는 잠자리눈 모양구슬(청령옥) 같은 장식품이 수입되었고, 남방의 해로와 오아시스 사막을 통해서는 로마 유리그릇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제품들이 전해졌다. 이른바 서역과의 교역에 의해 서양의 유리그릇이 한대 이후 남북조시대를 거쳐 당대에까지 단속적으로 유입되었으며, 송대에도 적지 않은 이슬람 유리제품이 발견되고 있다.
진대 이후 위축되었던 중국의 자체 유리생산은 수·당대에 이르러서 다시 중국산 재료의 유리제품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주로 탑(塔)에서 발견되는 사리병과 유리그릇은 납을 많이 함유한 납유리였으며, 수대 이후에는 유리불기 기법이 사용되었다. 명·청대에는 기명 위주로 유리제작이 이루어졌으며, 유리의 성분도 다양해졌다.
특히 명대말 청대초에 유리공예의 부흥이 일어났으며, 1680년 궁정용 유리 어기를 제작하는 유리청이 설립되어 이를 중심으로 유리공예가 급속히 발전했다. 건륭연간에는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이러한 청대의 유리를 일명 '건륭유리'라고 부른다. 또한 대외용 하사품으로도 쓰여 훌륭한 제품들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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