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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독일 남동부, 알프스 산맥 북쪽 기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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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12,930,751명 (2022년 추계) |
면적 | 70,550.19㎦ |
언어 | 독일어 |
대륙 | 유럽 |
국가 | 독일 |
요약 독일에서 가장 큰 주. 독일의 남동부 전체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의 바이에른 지방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주민은 켈트족이다. 20세기말에 주 총생산의 절반 이상이 공산품과 수공예품으로 이루어졌고, 1946년 제정된 헌법하의 자유주로서 민주적 의회제도를 갖추고 있다.
독일의 남동부 전체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와 헤센 주, 동쪽은 체크, 남쪽과 남동쪽은 오스트리아와 접한다. 주도는 뮌헨이다.
역사
현재의 바이에른 지방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주민은 켈트족이다(로마사). 그들은 기원전 마지막 10년 동안 북쪽의 튜턴족과 남쪽의 로마인들 사이에서 압박을 받았다.
로마인들은 이 지방을 정복해 남부지역을 라에티아와 노리쿰으로 나누었고, 북쪽 경계를 따라 요새들을 건설해 튜턴족의 남침을 막았다. 아우크스부르크·켐프텐·레겐스부르크·파사우 등의 번영하는 로마 식민지들이 남부에서 생겨났다.
5세기에 로마인들은 거듭되는 게르만족의 침공에 압도되었다. 결국 이곳에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게르만족이 들어와 남아 있던 켈트족·로마인들과 뒤섞여 정착했다. 이곳 지명의 어원이 된 부족은 바이오바리(바이에른)족으로, 그들은 488~520년 사이에 남부에 정착했고, 555경~788년 프랑크족의 아길롤핑 공작가의 통치를 받았다.
7~8세기에 이곳은 성 보니파티우스, 성 코르비니언, 성 엠머람, 성 루퍼트 등과 같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수도사들에 의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788년 카를 대제는 아길롤핑가(家)의 마지막 공작인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이 지역을 카롤링거 제국에 합병했다.
817년 카롤링거 제국의 분할 후 바이에른 공작령은 경건왕 루트비히의 차지가 되었고, 이어 그의 아들로 동(東)프랑크의 왕위에 오른 게르만 왕 루트비히의 소유령이 되었다.
바이에른은 10세기에 공작령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18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이곳을 팔츠 백작인 비텔스바흐가의 오토에게 증여했다. 이것이 1918년까지 이곳에서 계속된 비텔스바흐 왕조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현재의 바이에른 남동부 지방만을 비텔스바흐가가 소유했고, 나머지는 수많은 제국도시, 수도원 보유지, 가문 소유지들로 조각나 있었다.
14~15세기에 비텔스바흐가 공작들의 세력은 계속되는 왕조 싸움으로 약화되었고, 14세기말에는 이 가문의 여러 파가 바이에른을 3개의 공작령으로 분할했다.
1506년 바이에른-뮌헨의 현명공 알베르트 4세 공작(1467~1508 재위)이 장자상속원칙을 세움으로써 영토의 통합이 시작되었다. 또한 알베르트는 뮌헨을 그의 공작령 수도로 삼았다. 1545년 알베르트의 아들 빌헬름 4세(1508~50 재위)는 마침내 이곳을 하나의 공작령으로 재통합할 수 있었다.
빌헬름 4세는 종교개혁을 반대했고, 그의 후계자인 알베르트 5세(1550~79 재위) 밑에서 바이에른은 엄격한 로마 가톨릭령이 되었다. 30년전쟁(1618~48) 때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가의 편에서 싸웠고, 그의 지도력으로 영토가 넓어지고 그 자신은 선제후가 되는 특권을 얻었다. 18세기에 들어와 바이에른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왕위계승전쟁들로 인해 줄곧 유린되었다. 1777년 바이에른의 지배권은 팔츠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바이에른과 팔츠는 통합되었다. 바이에른 계승전쟁(1778~79)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의 대부분 지방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며 합병하려는 오스트리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790년대에 바이에른은 제1·2차 반프랑스 연합에 가담했으나 프랑스 혁명군(1796), 오스트리아(1799), 다시 프랑스(1800)에 잇따라 점령당하는 고통을 겪었다(프랑스사). 다음해에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어 오스트리아를 희생시키며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거의 현재의 경계대로 영토를 얻었다.
이 조약은 바이에른 공작령을 왕국 수준으로 격상시켰고, 통치자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왕 막시밀리안 1세가 되었다. 바이에른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직전에 나폴레옹을 버렸고, 1815년에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게르만 동맹에 가담했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진영을 바꿈으로써 바이에른은 빈 회의(1814~15) 후에도 이미 취득한 영토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이어 3번째로 큰 독일 국가가 되었다.
막시밀리안의 계속된 치세중 1818~19년에는 바이에른 최초의 헌법과 의회가 발족했다.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1825~48 재위) 아래에서 지방자치제와 다른 개혁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모험가인 롤라 몬테즈와 열애에 빠져 왕위를 지킬 수 없게 되자 루트비히는 결국 1848년 퇴위했다. 1850년 루트비히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1848~64 재위)는 작센·하노버·뷔르템베르크 등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적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항하는 제3세력으로서 독일 내에 중간 크기의 나라들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바이에른은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다.
바이에른은 그후 프로이센에 반대해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다.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2세(1864~68 재위)는 바이에른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령으로 합치자는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거절하고,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그러나 프로이센 측의 조속한 승리와 바이에른에 대한 그들의 온건한 정책으로 바이에른은 1870년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전쟁 때에는 프로이센 편이 되었으며, 그후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주도하에 독일 제국을 수립할 때 도움을 주었다.
1871년 제정된 독일 헌법하에서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의 다른 어떤 구성국보다도 큰 독자성을 얻었다. 외교활동, 군사행정, 우편·전신 업무, 철도 등에서 자치권을 보유했다. 그런데 루트비히 2세는 정신불안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특히 노이슈반슈타인에 성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그의 과도한 건설사업들은 바이에른의 국고를 바닥냈다.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정신이상자로 공포되었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오토에게 넘어갔지만 오토 역시 정신에 이상이 있었다. 오토의 삼촌 루이트폴트가 같은 해에 섭정이 되었고, 1912년 루이트폴트가 죽자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가 왕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독립 사회주의자인 쿠르트 아이스너가 비텔스바흐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이에른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919년 아이스너는 암살되었고, 잇따른 혼란 속에서 혁명위원회들이 '적색 테러'를 자행하고 단명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구성했다.
이 공화국은 1919년 5월 독일의 육군부대들과 민방위대들이 뮌헨을 탈환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백색 테러'를 가하면서 끝장이 났다. 1919년 8월에 통과된 새로운 바이에른 헌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전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한 주가 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정국은 여전히 혼란한 상태였고, 1920, 1921년에는 우익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운동이 뮌헨에서 시작되었고, 1923년에는 히틀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 그곳에서 반란을 꾀했으나 실패했다. 1933년 나치 당원들이 권력을 잡자 독일의 모든 주들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이던 바이에른이 나치즘의 요새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바이에른은 미국 점령지역의 일부가 되었고, 팔츠는 분리되어 새로 창설된 라인란트팔츠 주에 편입되었다.
1948년의 서독 기본법(헌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연방공화국의 한 주가 되었다.
자연환경
바이에른은 높은 고원과 중간 크기의 산들로 이루어진 지방이다. 북서부에는 나무가 무성한 슈페사르트 사암 구릉지대가 있고, 북부에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작은 산과 높은 고원들이 있다. 북서부에는 마인 강이 흐르며, 이 강은 라인 강과 합류한다.
남동부는 슈바벤과 프랑켄 지방의 성층지형으로부터, 프랑켄 지방 레드니츠 강 유역의 패각석회암과 적색 이회토로 이루어진 구릉지대, 도나우 강(이 강은 바이에른을 남북으로 갈라놓음)을 따라 뻗어 있는 프랑켄 산맥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들에 이르기까지 지형이 다양하다.
체크와 인접한 이 주의 동쪽 끝에는 보헤미아 삼림지대가 있고, 북부에는 프랑켄 삼림지대가 있다. 도나우 강 남쪽에는 주도 뮌헨이 자리잡은 고원이 있으며, 고원 너머에는 바이에른알프스가 있다.
이 알프스 산맥의 바이에른 지맥은 수목이 무성한 수백m 높이의 고지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너머에는 서쪽의 알고이어알프스와 동쪽의 베르히테스가덴알프스 등 가파른 능선과 높은 고원들이 있다. 이 고지대는 독일 베터슈타인 산맥에 있는 해발 2,962m의 추크슈피체 봉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기후는 마인 강 하류 골짜기처럼 몇 군데 예외는 있지만 유럽 중부의 황량한 대륙성기후에 속한다.
주민
남동부에는 옛 바이에른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남서부에는 바이에른과 슈바벤계의 주민들, 북부에는 프랑크족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아직도 여러 전통적 차이점을 각 지역 마을에서 볼 수 있다. 프랑크족은 대규모의 집촌(集村)들을 건설하고 좁은 지대에 농장터를 잡았다. 가옥은 사암과 목재를 뼈대로 사용해 지었다. 일부 지역에는 포장된 마룻바닥이 있는 연립주택들이 있다.
옛 바이에른과 슈바벤 지역에는 촌도 있고 가촌도 있는데, 대부분의 가옥에 목제 마루가 있다. 훨씬 더 뚜렷한 차이점은 도시에서 볼 수 있다. 슈바벤 지역과 특히 프랑크족이 살던 지역에서는 종교인과 세속 지주들이 수많은 작은 도시들을 건설했으며, 이 도시들 중 대부분은 규모가 작아 난쟁이 도시라고 불렸다. 이 중세 소도시들은 방벽 안에 꽉 들어차게 건설되었으며, 교회·공공건물·주택 등은 사치스럽게 장식되었다.
로텐부르크·뇌르틀링겐·딩켈스뷜·뉘른베르크·레겐스부르크 일부 지역 등에 남아 있는 이러한 건물들은 관광객들에게 한결같은 즐거움거리가 되고 있다. 주민의 대부분이 아직도 이들 소도시에서 살고 있는 반면, 인구의 1/5 정도는 인구 10만 내지 그 이상 되는 도시들에 거주한다. 뮌헨은 독일에서 베를린 다음으로 큰 도시로서 이 주 최대도시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수많은 독일인 피난민들이 수세기 동안 살아온 수데티 지방과 동유럽으로부터 쇄도하여 20세기말에는 주 인구의 상당수가 피난민들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초에는 산업지역에서 남부 유럽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을 상당수 받아들였다. 전쟁 후 신교도들의 쇄도로 종교인구의 구성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20세기말에는 주민 대다수가 로마 가톨릭교도들이고 뮌헨-프라이징·아우크스부르크·레겐스부르크·파사우·밤베르크·아이히슈테트·뷔르츠부르크 등에 주교관구가 있다. 다음으로 뮌헨·아우크스부르크·레겐스부르크·뉘른베르크·바이로이트·안스바흐 등에 중심을 둔 복음 루터파 교도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1882년 이후로 대부분의 노동력을 차지하던 농업인구의 비율은 점차 줄어들어, 20세기말에는 1/5이 채 안 되었다. 공업과 서비스 부문이 가장 많은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경제
20세기말에 주 총생산의 절반 이상이 공산품과 수공예품으로 이루어졌다. 무역·수송·서비스 부분은 절반에 조금 못미치고, 농업과 임업은 1/10 미만이었다. 농장들은 대형화되고 노동력을 덜 쓰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작물을 전문화하여 특정시장을 위해 생산하며, 대부분의 농장들은 가족이 경영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주 정부가 공업유치를 위해 노력한 결과, 바이에른은 독일의 다른 주들보다 높은 공업성장률을 기록했다.
20세기말에 주요공업은 전자·기계·화학·섬유·자동차·의류·식품 등의 공업이었는데, 어느 하나도 단연 우위를 차지할 수 없을 정도로 공업화를 위한 노력의 폭이 넓었다. 바이에른알프스에서 특히 중요한 관광무역을 제외한 무역과 상업은 독일의 나머지 주와 비슷한 상태이다. 수십만 개의 호텔 룸이 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알프스 산맥 지대에 있다. 1835년 부설하기 시작한 바이에른의 철도망은 19세기 후반에 크게 확충되었다. 모든 간선철도는 전철화되었거나 디젤엔진을 사용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수로는 밤베르크까지 배가 다닐 수 있는 마인 강이다. 도나우 강에서는 배들이 멀리 상류 켈하임까지 운항한다. 뮌헨과 뉘른베르크에 주요공항이 있다.
정치
1946년 제정된 헌법하의 자유주로서, 바이에른은 민주적 의회제도를 갖추고 있다. 유권자들은 4년마다 직접선거로 하원의원을 뽑는다. 하원인 란트타크(Landtag)는 총리와 각료들을 선출한다. 경제·사회·문화·종교 단체의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상원도 있다. 1957년 이래 바이에른에서는 기독교사회당(CSU)이 제1당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다른 주요정당으로는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이 있다. 대학교는 뮌헨에 2개가 있고 에를랑겐뉘른베르크·뷔르츠부르크·레겐스부르크·바이로이트·파사우·아우크스부르크 등에 1개씩 있다. 모든 대도시에는 수많은 오케스트라·박물관·미술관·극장이 있고, 뮌헨에만 3개의 주립극장이 있다. 도서관들도 훌륭한데 특히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주립도서관이 유명하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하는 바이에른라디오는 뮌헨에 본부가 있으며, 공영으로 주가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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