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카롤링거 왕조

다른 표기 언어 Carolingian dynasty

요약 750~887년에 서유럽을 통치한 프랑크 왕조.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

ⓒ Tilo Brandis/wikipedia | Public Domain

이 명칭은 가장 유명한 샤를마뉴(카를) 대제를 비롯해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샤를(카를)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것에 기인한다. 이 가문은 아우스트라시아 프랑크 왕국의 세습직인 궁재직으로 권력을 잡았다.

679년 궁재가 된 헤르스탈의 피핀 2세 때에는 유명무실한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을 단순한 명목상의 왕으로 전락시켰다. 사실 687년 피핀 2세는 네우스트리아의 경쟁자 에브로인을 물리치고 프랑크 왕국 전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714년 그가 죽었을 때, 그에게는 합법적인 상속자 아들 6명과 서자인 카를 마르텔이 있었다. 725년 카를 마르텔은 프랑크족의 통치자로 부상했다. 737년까지 그는 허울 좋은 메로빙거 왕조의 통치권을 그대로 존속시켰으나, 테오도리히 4세가 죽은 뒤에는 왕위를 공석으로 놓아두었다.

741년 카를 마르텔이 죽자, 그의 아들인 단신왕 피핀 3세와 카를만은 그들끼리 왕국을 나누어 가졌다. 747년 카를만의 퇴위로 피핀 3세는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위치는 매우 확고하여 750년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교황 자카리아의 후원을 받아 프랑크 귀족 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 주교에게 도유받았다.

768년 피핀이 죽자 왕국은 다시 분할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카를만이 죽자, 샤를마뉴 대제로 알려진 카를 1세의 손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그는 사실상 갈리아 전역과 독일 및 이탈리아를 정복해 프랑크족의 세력을 넓혔으며, 보헤미아인·아바르인·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 등 동유럽의 여러 민족을 속국민으로 만들었다. 그는 교황과 동맹을 맺었으며, 774년에는 중부 이탈리아에 교황령을 만들었다. 800년 크리스마스 날, 교황 레오 3세가 참석한 가운데 그는 부활한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샤를마뉴가 서유럽에 가져다준 통일은 죽은 왕의 아들들이 왕국을 나누어 가진다는 고대 프랑크족의 관습에 희생되고 말았다.

840년 샤를마뉴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며 계승자인 경건왕 루트비히가 죽은 뒤 그의 아들 3형제는 계승권을 겨루었다. 843년 베르됭 조약에서 그들은 제국을 3개의 왕국으로 나누는 데 합의했다. 서쪽의 서프랑크(프랑스)는 대머리왕 샤를에게, 동쪽의 동프랑크(독일)는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이탈리아 지방과 로마를 포함한 중프랑크는 로타르에게 돌아갔다. 그중 로타르는 황제의 칭호를 물려받았다.

노르만족·색슨족과 같은 신흥세력의 부상과 함께 바로 제국이 3국으로 나뉘자,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는 점점 약해져갔다. 황제 칭호는 855년 로타르에게서 그의 아들 루트비히 2세에게, 875년에는 루트비히 2세에게서 그의 숙부 대머리왕 카를에게, 그리고 877년 카를의 사망으로 제위가 비어 있던 기간이 끝난 881년에는 루트비히의 막내아들인 비만왕 카를 3세에게로 넘어갔다. 893(898)~923년과 936~987년에 한때 프랑스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왕들이 권력을 잡긴 했지만, 887년 카를 3세가 폐위될 무렵에는 카롤링거 왕조의 세력이 거의 와해되고 말았다.→ 프랑스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세계사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백과사전


[Daum백과] 카롤링거 왕조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