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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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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바이에른 지방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주민은 켈트족이다(로마사). 그들은 기원전 마지막 10년 동안 북쪽의 튜턴족과 남쪽의 로마인들 사이에서 압박을 받았다.

로마인들은 이 지방을 정복해 남부지역을 라에티아와 노리쿰으로 나누었고, 북쪽 경계를 따라 요새들을 건설해 튜턴족의 남침을 막았다. 아우크스부르크·켐프텐·레겐스부르크·파사우 등의 번영하는 로마 식민지들이 남부에서 생겨났다.

5세기에 로마인들은 거듭되는 게르만족의 침공에 압도되었다. 결국 이곳에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게르만족이 들어와 남아 있던 켈트족·로마인들과 뒤섞여 정착했다. 이곳 지명의 어원이 된 부족은 바이오바리(바이에른)족으로, 그들은 488~520년 사이에 남부에 정착했고, 555경~788년 프랑크족의 아길롤핑 공작가의 통치를 받았다.

7~8세기에 이곳은 성 보니파티우스, 성 코르비니언, 성 엠머람, 성 루퍼트 등과 같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수도사들에 의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788년 카를 대제는 아길롤핑가(家)의 마지막 공작인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키고 이 지역을 카롤링거 제국에 합병했다.

817년 카롤링거 제국의 분할 후 바이에른 공작령은 경건왕 루트비히의 차지가 되었고, 이어 그의 아들로 동(東)프랑크의 왕위에 오른 게르만 왕 루트비히의 소유령이 되었다.

바이에른은 10세기에 공작령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18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이곳을 팔츠 백작인 비텔스바흐가의 오토에게 증여했다. 이것이 1918년까지 이곳에서 계속된 비텔스바흐 왕조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현재의 바이에른 남동부 지방만을 비텔스바흐가가 소유했고, 나머지는 수많은 제국도시, 수도원 보유지, 가문 소유지들로 조각나 있었다.

14~15세기에 비텔스바흐가 공작들의 세력은 계속되는 왕조 싸움으로 약화되었고, 14세기말에는 이 가문의 여러 파가 바이에른을 3개의 공작령으로 분할했다.

1506년 바이에른-뮌헨의 현명공 알베르트 4세 공작(1467~1508 재위)이 장자상속원칙을 세움으로써 영토의 통합이 시작되었다. 또한 알베르트는 뮌헨을 그의 공작령 수도로 삼았다. 1545년 알베르트의 아들 빌헬름 4세(1508~50 재위)는 마침내 이곳을 하나의 공작령으로 재통합할 수 있었다.

빌헬름 4세는 종교개혁을 반대했고, 그의 후계자인 알베르트 5세(1550~79 재위) 밑에서 바이에른은 엄격한 로마 가톨릭령이 되었다. 30년전쟁(1618~48) 때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가의 편에서 싸웠고, 그의 지도력으로 영토가 넓어지고 그 자신은 선제후가 되는 특권을 얻었다. 18세기에 들어와 바이에른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왕위계승전쟁들로 인해 줄곧 유린되었다. 1777년 바이에른의 지배권은 팔츠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바이에른과 팔츠는 통합되었다. 바이에른 계승전쟁(1778~79)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의 대부분 지방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며 합병하려는 오스트리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790년대에 바이에른은 제1·2차 반프랑스 연합에 가담했으나 프랑스 혁명군(1796), 오스트리아(1799), 다시 프랑스(1800)에 잇따라 점령당하는 고통을 겪었다(프랑스사). 다음해에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어 오스트리아를 희생시키며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거의 현재의 경계대로 영토를 얻었다.

이 조약은 바이에른 공작령을 왕국 수준으로 격상시켰고, 통치자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왕 막시밀리안 1세가 되었다. 바이에른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직전에 나폴레옹을 버렸고, 1815년에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게르만 동맹에 가담했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진영을 바꿈으로써 바이에른은 빈 회의(1814~15) 후에도 이미 취득한 영토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이어 3번째로 큰 독일 국가가 되었다.

막시밀리안의 계속된 치세중 1818~19년에는 바이에른 최초의 헌법과 의회가 발족했다.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1825~48 재위) 아래에서 지방자치제와 다른 개혁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모험가인 롤라 몬테즈와 열애에 빠져 왕위를 지킬 수 없게 되자 루트비히는 결국 1848년 퇴위했다. 1850년 루트비히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1848~64 재위)는 작센·하노버·뷔르템베르크 등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적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항하는 제3세력으로서 독일 내에 중간 크기의 나라들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바이에른은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다.

바이에른은 그후 프로이센에 반대해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다.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2세(1864~68 재위)는 바이에른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령으로 합치자는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거절하고,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그러나 프로이센 측의 조속한 승리와 바이에른에 대한 그들의 온건한 정책으로 바이에른은 1870년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전쟁 때에는 프로이센 편이 되었으며, 그후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주도하에 독일 제국을 수립할 때 도움을 주었다.

1871년 제정된 독일 헌법하에서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의 다른 어떤 구성국보다도 큰 독자성을 얻었다. 외교활동, 군사행정, 우편·전신 업무, 철도 등에서 자치권을 보유했다. 그런데 루트비히 2세는 정신불안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특히 노이슈반슈타인에 성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그의 과도한 건설사업들은 바이에른의 국고를 바닥냈다.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정신이상자로 공포되었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오토에게 넘어갔지만 오토 역시 정신에 이상이 있었다. 오토의 삼촌 루이트폴트가 같은 해에 섭정이 되었고, 1912년 루이트폴트가 죽자 그의 아들 루트비히 3세가 왕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독립 사회주의자인 쿠르트 아이스너가 비텔스바흐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이에른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919년 아이스너는 암살되었고, 잇따른 혼란 속에서 혁명위원회들이 '적색 테러'를 자행하고 단명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구성했다.

이 공화국은 1919년 5월 독일의 육군부대들과 민방위대들이 뮌헨을 탈환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백색 테러'를 가하면서 끝장이 났다. 1919년 8월에 통과된 새로운 바이에른 헌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전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한 주가 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정국은 여전히 혼란한 상태였고, 1920, 1921년에는 우익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운동이 뮌헨에서 시작되었고, 1923년에는 히틀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 그곳에서 반란을 꾀했으나 실패했다. 1933년 나치 당원들이 권력을 잡자 독일의 모든 주들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이던 바이에른이 나치즘의 요새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바이에른은 미국 점령지역의 일부가 되었고, 팔츠는 분리되어 새로 창설된 라인란트팔츠 주에 편입되었다.

1948년의 서독 기본법(헌법)에 따라 바이에른은 연방공화국의 한 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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