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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은 본격적인 민족이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산발적으로 로마 영토에 침투하여 로마군의 용병으로 정착하거나 로마인과 교역하면서 상호 평화적으로 교류했다.
그러나 훈족의 압박으로 동고트족이 동쪽에서 이동한 것을 시작으로 거의 전 민족을 아우르는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서고트족은 남서갈리아에, 부르군트족은 남동갈리아에 각각 왕국을 건설했다(부르고뉴). 그중 프랑크족은 클로비스에 의해서 통일되어 라인 강 상류와 중류, 마인 강 좌안에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이러한 민족이동의 와중에 서로마 제국은 476년 붕괴되었다.
이후 중요한 역사적 발전을 이루게 되는 프랑크족은 네덜란드 남부의 잘리어족과 중부 라인란트 중류지대의 리푸아리족을 결합한 부족연맹체이며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는 이를 기초로 세워졌다.
메로빙거 왕조의 창건자인 클로비스 왕은 다른 게르만족과는 달리 가톨릭교로 개종했고 교회의 도움으로 이교도를 교화한다는 명목으로 주변 부족을 정복하여 그 통치하에 종속시켰다. 독일 중부의 튀링겐족과 남부의 바이에른족 또한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 들어갔지만 북부의 프리지아족과 작센족은 그들 고유의 정치·사회조직을 유지하고 이교적인 교리에 의존하여 프랑크의 지배에 완강히 대항했다.
8세기 전반에 메로빙거 왕조는 피핀에 의해 카롤링거 왕조로 바뀌었다.
피핀은 아우스트라시아 출신으로서 민스 강에서 라인 강 중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와 귀족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왕국을 건설했다. 이 왕국은 작센을 제외한 라인 강 오른편의 여러 부족장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정치적 통합에 앞서 브리튼 출신의 보니파키우스의 정력적인 선교활동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왕 샤를마뉴 대제(800∼814, 피핀의 아들)는 작센족 토벌을 단행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장기간에 걸친 살육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작센족은 내부적 분열로 점차 프랑크의 지배에 복속되었다.
샤를마뉴의 끊임없는 정복전쟁으로 오늘날의 네덜란드·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대부분을 포괄하는 대제국이 형성되었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로마인을 계승하여 게르만인이 세운 제국이라는 역사적 성격을 지니며 앞으로 이 지역에 형성될 여러 국가에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러나 샤를마뉴 대제의 갑작스러운 죽음(814)으로 제국은 베르됭조약(843)에 의해 세 왕국으로 분할되고 샤를마뉴 대제의 손자 루트비히 2세(804∼876)가 오늘날 독일의 거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루트비히 2세의 오랜 통치는 독일인에게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9세기말 데인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동프랑크 왕국은 해체되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집권체제가 무너지기는 했으나 동프랑크 내의 5개의 중요 부족집단인 바이에른·프랑켄·슈바벤·로렌·작센 등의 지방세력은 교회에 의해 봉건적 주종관계로 결속되고 결집했으며 지방제후들은 거의 독립적인 지배자나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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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게르만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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