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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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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11. 11. 28, 뮌헨
사망 1864. 3. 10, 뮌헨
국적 독일, 바이에른

요약 바이에른의 왕(1848~64 재위).

바이에른의 주도로 약소국가연맹을 결성해 독일에서 '제3세력'을 구축하고자 했으나 강국인 프로이센·오스트리아·독일 의회가 반대해 실패했다.

루트비히 1세와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테레지아 사이의 맏아들이며 괴팅겐과 베를린에서 줄곧 교육받았다. 평생동안 학자·예술가들을 곁에 두고 지적 탐구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유명한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가 있다.

부친이 퇴위한 뒤(1848. 3) 독일 전역에 혁명의 열기가 일던 시기에 왕위를 계승했다. 독일 연방에서 보수 강대국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견제세력을 만들기 위해 약소국가들의 삼각동맹을 제의했으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뿐만 아니라 통일 독일을 위해 노력하던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까지도 이에 반대했다.

바이에른은 팔츠의 반란을 진압할 때 프로이센의 도움을 받았지만(1849), 프로이센과 연합하는 것은 원치 않았으며 루트비히 폰 데르 프포르텐이 총리가 되면서(1849) 친(親)오스트리아 정책을 취했다.

막시밀리안은 즉위하자 정치문제는 되도록 각료들에게 맡기고 내각책임제와 언론자유 정책을 도입함으로써 바이에른을 자유화하는 데 힘썼다. 저명한 학자들을 바이에른의 수도로 초청해 뮌헨을 독일의 지성과 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에 과학·기술·역사 분과를 설치해 연구·조사 작업을 시작했다.

학자 친구들과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로부터 가끔 정책에 관한 자문을 받기도 했다. 1860년대초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작령을 둘러싼 뿌리 깊은 분규가 덴마크와 프로이센 사이에 다시 일어났을 때 아우구스텐부르크의 세습제후 프리드리히를 강력히 지원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의 호전적인 태도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독일 국가들이 무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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