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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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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갈등과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시대의 역사.

개요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는 30인 참주가 아테네를 다스렸지만 이들의 과두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BC 403년경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었고 아테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전반적으로 재고하게 되었다. 법전의 재편찬으로 말미암아 민회가 법률을 제정하기는 더욱 어려워졌고, 법률을 통과시키는 기능은 선서를 거친 특별 배심원단이 맡았다. 아테네 정부의 이런 개편은 효율성과 전문성을 지향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멀어졌다. BC 4세기의 아테네가 BC 5세기 때보다 덜 민주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테네의 모든 사회계층은 제국시대에 누렸던 이익을 드러내놓고 그리워했다.

스파르타에 대한 적개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이것은 제국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코린트 전쟁(BC 395~386)의 원인이 되었다. 코린트 전쟁에서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얻고 보이오티아·코린트·아르고스와 힘을 합쳐 스파르타와 싸웠다. 스파르타는 이 전쟁에서 결국 승리했지만 그것은 페르시아가 도중에 편을 바꿔 스파르타를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가 손을 잡으면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이미 입증되었던 것이었다.

코린트 전쟁(Corinthian War)

스파르타의 강압적인 지배에 불만을 품은 아테네·코린토스·아르고스가 동맹하여 맞선 전쟁

ⓒ F. Mitchel / wikipedia | Public Domain

이 승리에 뒤이은 BC 386년의 안탈키다스 평화조약(또는 왕의 평화조약)은 아시아가 페르시아 왕의 영토라는 것을 명확히 규정했다.

아시아 지역을 제외한 그리스의 도시와 섬들은 자치권을 갖게 되었지만 스파르타가 그리스 도시들을 계속 공격했기 때문에 이 자치권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결국 BC 382년 스파르타가 테베의 아크로폴리스인 카드메아에 수비대를 주둔시키자, 그에 대한 반감이 전반적으로 급격히 드높아져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지도적 지위를 잃어버렸다.

BC 378년에 발족한 제2차 아테네 동맹은 스파르타를 주요 적국으로 규정했고 테베는 아테네의 주요 동맹국이 되었다.

재건된 아테네 해군이 낙소스 전투(BC 376)에서 스파르타를 물리친 뒤 새로운 도시들이 동맹에 가담했고 아테네는 해양에서 주도권을 쥐었다.

그리스 역사의 초점은 이제 스파르타에서 아테네와 테베 사이의 갈등으로 바뀌었다. 두 강대국은 테살리아마케도니아를 중요하게 여겼다. 아테네가 암피폴리스에 대한 해묵은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BC 368년에 암피폴리스로 군대를 보내자 테베는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로 군대를 파견했다.

평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실패했고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려던 테베의 소망은 그에 뒤이은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무참히 꺾였다.

필리포스2세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기원전 359~336년 암살당할 때까지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이었다.

ⓒ wikipedia | Public Domain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의 죽음(BC 360)은 한 시대의 종말과 시작을 뜻했다.

이 새로운 시대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대였다. 필리포스 2세는 BC 359년 권력을 잡은 뒤, 좀더 엄격한 군사훈련을 도입하고 용병을 고용함으로써 마케도니아 군대를 개편했으며, 일리리아인(人)을 비롯한 북방의 적들을 패배시켰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여자들과 잇따라 정략결혼을 했다. 그중 몇몇은 공식적인 결혼이었지만 BC 357년에 결혼한 올림피아스만이 그의 공식 왕비였으며 그녀는 결혼 이듬해에 알렉산드로스(훗날의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를 낳았다.

전략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인 테살리아를 BC 358년 예비 방문했던 필리포스는 암피폴리스에 집중 공격을 퍼부을 준비를 갖춘 뒤 BC 357년에 암피폴리스를 포위 공격해 점령했다. 이어서 그는 피드나와 광산 도시인 크레니데스를 점령하고 크레니데스의 이름을 필리피로 바꾸었다(BC 356). 필리포스는 또한 그의 재빠른 진출에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주위의 민족 집단과 동맹을 맺었다.

BC 353년경에는 필리포스가 전보다 훨씬 넓어진 마케도니아의 지배자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

테베가 포키스를 공격해 제3차 신성전쟁(神聖戰爭:BC 355~346)이 일어났을 때 필리포스는 그리스에 개입하게 되었다.

테베는 델포이를 설득해 포키스에게 신성한 땅을 경작했다는 이유로 무거운 벌금을 물리게했다. 이것은 상대편을 직접 건드리지 않는 기술적인 공격으로, 테베는 포키스가 벌금을 내지 못하면 포키스와 전쟁을 벌여 배상금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일은 테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포키스인들은 BC 356년 신전 금고를 장악했고 유능한 용병을 대규모로 모집했으며 결국 테베군은 포키스군을 무찌르지 못했다. 포키스의 위협이 더욱 커지자 라리사 시(市)는 필리포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나타난 결과는 완전히 예상을 뒤엎었다. 포키스가 필리포스에게 이겼기 때문이다. 용수철 포(砲)라는 '비밀병기'를 가진 포키스가 필리포스를 이긴 것이다. 이것은 필리포스가 야전(野戰)에서 맛본 유일한 패배였다.

그러나 이듬해(BC 352)에 벌어진 크로코스 벌판 전투에서는 필리포스가 이겨 테살리아를 점령하고 그 지역의 항구와 부(富) 및 강력한 기병대를 손에 넣었다.

이 기병대는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원정 초기에 벌인 대규모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근위 기병대를 증강하는 데 이용되었다.

테살리아 남부는 BC 480년에 스파르타군이 페르시아군에 대패한 곳인 좁은 산길 테르모필레가 이미 실증했듯이 그리스 본토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그러나 테르모필레를 면밀히 조사해 보려던 필리포스의 시도는 아테네의 완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필리포스가 헤라이움테이코스라는 곳을 포위하자 아네테는 BC 351년 9월 소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그 직전에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와 마케도니아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유명한 〈필리포스 탄핵 Philippika〉 제1편을 연설했다. 그는 또한 필리포스에 대한 아테네의 반격이 언제나 너무 약하고 너무 늦다고 비난했다.

칼키디키 동맹의 중심 도시 올린토스는 아테네의 지원을 받았지만 BC 348년 결국 필리포스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이 도시 주민들은 대부분 노예로 팔렸다.

그리스에서는 전쟁에 진 도시의 주민을 노예로 파는 것을 이론적으로 허용했지만, 올린토스 주민에 대한 이런 처사는 그리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제 아테네는 문간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암피폴리스와 올린토스를 잃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필리포스와 싸워 봤자 헛수고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필리포스는 얼마간 평화조약을 맺을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지만 결국 신성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포키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포키스군 지휘관은 뜻밖에도 아테네군과 스파르타군이 테르모필레를 점령하는 것을 거부했고 아테네는 결국 악명높은 필로크라테스 화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많은 것을 양보했는데 무엇보다도 암피폴리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정식으로 포기해야 했고 필리포스와 평화조약만이 아니라 동맹까지도 맺어야 했다. 이것은 일부 자료가 주장하고 있듯이 필리포스가 BC 346년에 이미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는가 하는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무렵 아테네에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하는 집단이 있었으며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려면 필리포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는 끊임없이 평화를 깨뜨리는 필리포스를 믿을 수 없다면서 BC 344년에는 아테네인들을 설득해 필리포스가 제안한 평화조약 재협상을 거부하게 했다.

이 무렵에는 과중한 군대생활이 주는 긴장이 필리포스의 외모에 벌써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는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었고 당시 30대 중반이었지만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던 듯하다(1983년 마케도니아의 베르기나에서 발견된 두개골에는 화살에 맞아 다친 흔적이 눈 위에 남아 있었는데, 이 두개골을 법의학적으로 복원해 본 결과 필리포스 왕의 실제 두개골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졌음). 하지만 이런 상처를 입었어도 그는 여전히 활동적이었다. BC 344년 테살리아를 옛날처럼 4개의 관구로 개편했으며 BC 340년에는 그리스 도시 페린토스를 공격했다.

필리포스는 더 큰 적이며 더 욕심나는 목표물인 아테네를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필리포스는 BC 339년말경에 그리스의 테베에 사신을 보내 아테네만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를 위협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보이오티아의 카이로네아에 진을 치고 전투를 벌였다(BC 338. 8). 이때 필리포스는 거짓으로 후퇴했다고 암시하면서 그리스의 완전한 패배는 알렉산드로스 때 이루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전투는 필리포스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의 패배는 이후 BC 2세기 로마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그리스 세계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했다. 아테네는 너그러운 대접을 받았으며 포로들은 몸값을 내지 않고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스에서 필리포스의 정치적 기반은 코린트 동맹(BC 337)으로 확립되었다. 이 동맹은 자유와 자치권을 보장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이 바탕에 깔려 있었고 재산권과 토지재분배를 강조했다. 사실 필리포스의 새로운 동맹에는 민주주의·군주제도·과두정치 등 다양한 정치체제가 철저히 뒤섞여 있었다.

이것은 BC 4세기 전체에 걸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서는 이런 해결을 환영하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의 일부 군인들은 아테네와 동맹을 맺느니보다는 아테네를 약탈하는 쪽을 원한 것 같다. 필리포스가 암살당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인 BC 336년으로, 암살 동기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Alexander III Magnus)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이자, 그리스 북부 왕국 마케도니아의 26대 군주

ⓒ Brandmeister~commonswiki / wikipedia | Public Domain

사태 변화에 대한 알렉산드로스의 대응은 놀라우리만큼 신속하고 냉혹했다.

그는 고위직에 있던 두 용의자를 즉시 처형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왕위계승 정당성에 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으므로 그는 실제로 경쟁자들을 많이 제거하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단순히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조(朝)를 타도하는 데 이바지한 외부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아케메네스조의 후계자이자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민주주의를 선언하고 법률을 회복시켰으며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이 바치던 공물을 면제해 주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면서 내세운 목적인 BC 480년에 페르시아가 저지른 불손한 행위를 앙갚음한다는 것을 얼마나 진지하게 여겼는가를 보여준다. 알렉산드로스가 아나톨리아 지방을 지나가면서 호의적으로 다룬 곳들은 대부분 이오니아 반란이나 페르시아 전쟁 때 눈에 띄게 페르시아에 대항했던 곳이었다.

BC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도나우 강을 건너 트리발리인과 일리리아인을 전격 공격함으로써 정복 활동을 시작했다.

테베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일리리아에서 죽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소문을 믿고 봉기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1주일 만에 테살리아에, 닷새 뒤에는 보이오티아에 도착해 테베를 무참히 파괴했다.

왕위에 오른 직후 알렉산드로스는 코린트 동맹의 투표에서 페르시아 원정군 지휘관으로 선출되었고 BC 334년 봄에 출발했다. 이 아시아 정벌은 아들이 아버지의 원대한 계획을 이어받아 일으킨 사건이다. 필리포스는 BC 4세기초 쿠낙사 전투 때부터 아시아 원정을 계획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가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창설한 군대와 경제적 번영 및 인적 자원을 아시아 원정에 이용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자마자 아시아 땅에 창을 던지면서 자신은 아시아 전역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선포했다.

트로이에서 그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아킬레스와 아이아스의 무덤을 참배함으로써 자신을 서사적이고 호메로스적인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단호하게 표현했다.

이제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할 가능성은 BC 346년보다 훨씬 높았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BC 337년에 죽었고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그보다 훨씬 허약한 다리우스 3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라니코스 강에서 페르시아군의 일부와 마주쳐 대낮에 공격을 시작했다.

페르시아군은 맞은편 강둑에 한 줄로 길게 늘어섰는데, 이것은 당당해 보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승리는 전쟁의 신에게 바치는 우렁찬 함성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BC 334년 중반에 알렉산드로스는 방어 태세가 완벽한 할리카르나소스 시(市)를 공격했으나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진지한 저항에 부닥쳤다. 이 도시는 천연의 요새일 뿐 아니라 인공적인 방어 시설도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방에 주둔하는 페르시아군 사령부로 선정된 도시 6였다.

전투는 치열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진영에 전령을 보내 성벽 앞에서 죽은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도시를 점령한 뒤, 원주민인 아다 공주를 사트라프(총독)에 재임명했다. 아다 공주가 알렉산드로스를 양아들로 입양했다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훌륭한 정치적 책략으로 여겨지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공주의 이런 책략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할리카르나소스 정복 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 동쪽으로 진격해 마침내 고대 프리기아 왕국의 수도이며 아나톨리아 반도의 내륙에 있는 고르디움에 도착했다.

여기서 유명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사건이 일어났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고대에 전차를 고정시킬 때 사용했던 이 복잡한 매듭을 푸는 사람이야말로 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 옛날부터 내려온 예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매듭을 푸는 대신 칼로 잘라 문제 자체를 없애버림으로써 문제를 풀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칼로 잘랐다고 하는 전설 속의 매듭으로 '대담한 방법을 써야만 풀 수 있는 문제라는 뜻'의 속담으로 쓰인다.

ⓒ Jean-Simon Berthélemy/ wikipedia | Public Domain

알렉산드로스는 페니키아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했고 결국 이집트에 이르렀다.

당시 이집트는 종주국(宗主國) 페르시아에 큰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마케도니아에 항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 머물던 때 2가지 중요한 일을 이룩했다. 하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건설이고 또 하나는 이집트 서부 사막지방 시와에 있던 암몬 신(神)의 신탁소를 찾아간 일이다. 그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니키아를 가로질러 BC 331년 10월 가우가멜라(니네베와 아르벨라 사이)의 탁트인 벌판에서 다리우스를 격파해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다리우스는 간신히 도망쳤지만 1년 뒤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 자신의 측근에게 살해당했다.

이무렵 알렉산드로스는 프로스키네시스(proskyne-sis)를 포함한 페르시아 궁정의식들을 그리스에 도입하려고 애썼다. 프로스키네시스는 이슬람교도들의 기도 자세와 비슷한 자세로 통치자 앞에 납작 엎드려 경의를 표하는 페르시아 특유의 의식이다.

이 정책은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하려는 알렉산드로스의 전반적인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런 부복(俯伏)은 대다수의 그리스인들에게는 너무 지나친 일로 여겨졌다. 통치자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을 숭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BC 327년 인도 공격을 목표로 삼았지만 BC 326년에야 겨우 인더스 강 유역에 도착했다(→ 인더스 문명). 대규모로 벌어진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 왕 포로스(포루스)를 물리쳤는데 이것은 그가 코끼리를 앞세운 군대와 맞섰던 최초의 주요 전투였다.

알렉산드로스가 동쪽으로 얼마나 멀리까지 진격했는지는 지금도 후세인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문제이지만 그의 군대의 호기심과 인내력은 이제 바닥이 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말년에 보여준 행동과 계획은 과대망상증 환자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신격화하라고 요구했으며, 친구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그를 위해 엄청난 화장용 장작더미를 마련했고(이 장례식은 끝내 마무리되지 못했음), 아라비아를 배로 일주하고 정복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모든 행동과 계획은 문서에 충분히 입증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과음으로 병에 걸려 BC 323년 6월 10일 초저녁 바빌론에서 세상을 떠났다.

BC 4세기의 그리스 문명

여러 가지 점에서 BC 4세기는 그리스 역사가 가장 잘 기록된 시대이다.

비문(碑文)은 BC 5세기보다 훨씬 흔해지고 아테네 이외의 다른 도시국가에서도 대량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데모스테네스의 연설문만 해도 60편이 넘으며 BC 4세기의 비극은 한 편도 없지만 BC 4세기초에 나온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과 BC 4세기말 작가 메난드로스의 희극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작품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의 산문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생활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플라톤이 저서에서 정체나 내란 상태에 빠질 염려가 없는 이상적인 도시국가를 규정하려고 애쓴 것을 보면, BC 4세기의 그리스 세계가 그만큼 불안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Politica〉은 당시 발전한 군주정과 동맹제도에 대한 인식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도시국가에 대한 그리스인의 사고 방식에 깔려 있는 이론적 개념을 검토하고 있다(→ 역사편찬).

인물을 중심으로 한 역사 기술은 BC 4세기 투키디데스가 처음으로 시작했다.

알키비아데스 같은 정력적인 인물은 완벽한 카리스마와 강한 개성으로 자신의 정책과 관계가 없는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투키디데스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사를 "알키비아데스가 한 일과 겪은 일"로 규정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투키디데스의 저술이 포함하고 있는 이런 측면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칼리스테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위업〉을 쓰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참모진에 가담했으며, 이 저술이 완성된 이후 역사는 알렉산드로스가 한 일과 겪은 일로 규정되었다.

이 시대의 역사가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군주정을 인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건축 분야에서 BC 4세기는 파르테논 같은 훌륭한 신전을 하나도 낳지 못했지만 군사적 건축물에서는 위대한 시대였다. 세력있는 개인들이 세운 마우솔레움 같은 건축물은 강력한 인물의 등장이 BC 4세기의 특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아테네 제국은 아테네만이 아니라 속국(屬國)에서도 많은 예술가와 건축가·조각가를 고용했다.

마우솔레움(Mausoleum)

페르시아 제국 카리아의 총독 마우솔로스를 위해 그리스의 할리카르나소스에 건축된 무덤기념물

ⓒ Claudio Elias / wikipedia | CC BY-SA 3.0

BC 404년에 제국이 무너지자 이들은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그들은 예술품·건축물·요새 등에 돈을 쓸 만큼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마우솔로스 같은 사트라프나 디오니시오스 같은 군사 통치자의 궁정을 찾아갔다. 부유한 마케도니아 궁정 역시 예술가들의 새 일터가 되었다.

개인이 다른 도시국가로 이주하거나 도시국가들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한 것은 BC 4세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아테네에서 이민을 끌어들이는 자석 역할을 한 것은 아테네의 항구 피레에프스였다. 인구가 밀집한 이곳에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살았다. 피레에프스의 고고학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비문은 페니키아 상인들이 이곳에서 활동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또다른 비문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을 세우도록 허락해달라는 키프로스 출신 상인들의 요구에 대한 아테네 민회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은 요구의 선례(先例)로 이집트 이민들이 세운 이시스 신전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이주와 페르시아 전쟁 때의 광범위한 원정 결과 그리스 전역에서는 외래 종교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아도니스 숭배였다.

그리스 문명의 전성기를 다룰 때는 그 전후에 있었던 문명과의 연속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연속성은 종교 분야에서 가장 뚜렷하다. 비교적 나중에 그리스에 도입되었다고 전해지는 몇몇 신들은 사실은 미케네의 토착신들이었다. 예컨대 아테네의 한 신화는 디오니소스가 비교적 후기인 BC 6세기에 엘레우테라이에서 아티카로 도입된 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선문자 B로 쓰인 BC 13세기의 점토판에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후세로 눈길을 돌리면 BC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대행진에 디오니소스 상(像)이 묘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바카이 Bakchai〉에서 디오니소스를 다소 냉정하고 '공식적인' 견지에서 묘사하고 있는데, 디오니소스는 성격상 사회적 분열을 일으킬 소지가 많은 신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로마인들은 BC 186년 유명한 포고령을 발표해 디오니소스 숭배를 규제했다.

디오니소스 신의 다양한 성격과 장수(長壽)는 알렉산드로스가 옥수스 강 양쪽까지 가져갔던 그리스 문명의 강한 점착력을 상징하지만, 이 문명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고대 문명의 특징뿐 아니라 선사시대 문명의 특징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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