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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2

역사는 자유인가, 필연인가

메소니에 ‘바리케이드’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자유인가, 필연인가?

메소니에의 〈1848년 바리케이드〉는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 가운데 1848년 노동자 봉기 현장을 주제로 삼았다. 당시 정부군과 파리 노동자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파리 동부의 주요 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저항했다. 하지만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정부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돌로 쌓아올린 바리케이드는 파괴되고 대규모 학살이 이어졌다. 1만여 명의 노동자가 살해당했고 동부지역 골목은 며칠 동안 시체로 뒤덮였다.

그림은 어느 작은 골목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노동자들의 주검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길가의 보도블록을 빼서 만든 바리케이드가 무너져 있고 그 뒤로 10여 구의 시신이 나뒹군다. 맨 앞의 남성은 바리케이드 위에서 저항하다 일격을 당했는지 머리를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다. 왼편 남성 가슴에는 총상 때문에 생긴 출혈 흔적이 아직도 선명하다. 중앙으로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다 죽었는지 아직 입을 벌리고 있는 시신이 보인다. 골목을 따라 뒤편으로 다닥다닥 이어진 집조차 학살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는 듯 검붉은 핏빛으로 묘사되어 있다. 화가는 몇몇 시신을 흰색과 푸른색 셔츠, 붉은색 바지를 입는 모습으로 그려서 프랑스 국기의 이미지를 넣었다. 당시 국민 방위군 장교였던 메소니에는 파리 시청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시청 주변 골목에서 목격한 대량 학살 장면에 충격을 받아서 이 그림을 제작한 것 같다.

1848년 바리케이드

메소니에, 1850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혁명 가운데 1848년 혁명, 특히 6월 노동자 봉기는 1789년 혁명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띤다. 1789년 혁명은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노동자가 결합하여 절대왕정에 저항하는 전형적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혁명 후 시민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상당히 호전되었지만 노동자의 삶은 여전히 비참했다. 1830년 혁명을 거치면서 권력을 잡은 루이 필립은 초기에 출판의 자유, 철도 개설, 초등 교육 무상화 정책 시행으로 적지 않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시민왕’이라 불릴 만큼 노골적으로 시민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 계급의 요구는 묵살했다.

먼저 노동자의 경제적 불만이 날이 갈수록 쌓여갔다. 당시 파리에는 산업혁명의 진전과 함께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가 폭넓게 빈곤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하루 13~15시간이나 지독하게 일하는데도 최소한의 생계유지도 어려울 만큼 저임금을 받으며 빈민가에서 힘들게 생활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제 위기가 심화되어 실업은 확대되는데 물가는 천정부지로 올라가면서 정부에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지만 루이 필립은 무시로 일관했다. 또한 정치적 불만도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두 차례의 혁명이 있었지만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는 여전히 열악한 상황이었다. 재산을 기준으로 선거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노동자는 여전히 자신의 이해를 대변할 대표자에게 투표할 권리가 없었다. 당시 전체 인구 3500만 명 가운데 선거권자는 고작 30만 명에 불과했다. 지속적으로 선거법 개정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일방적으로 묵살하고 억압했다.

결국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 노동자들이 도시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전투태세에 돌입함으로써 2월 혁명이 일어났다.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수상 기조가 사임했지만 노동자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2월 24일 루이 필립이 런던으로 망명하면서 혁명은 성공의 길로 가는 듯했다. 하지만 부르주아지 계급은 여전히 제한 없는 선거권 부여에 인색했다. 그들은 1789년 이후 성장하는 노동자의 힘을 두려워했다. 절대왕정을 몰아내고 시민계급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혁명 초기에 노동자와 연대했지만 혁명이 성공하여 권력의 중심이 된 상황에서 노동자 세력은 이제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2월 혁명으로 노동자와 사회주의 세력은 혁명의 성공을 이끌었지만 4월 선거가 실시되면서 황당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선거 결과 노동자 이해를 대변하는 사회주의 세력이 극소수 의석에 머물러야 했다. 의회 선거에서 좌파인 사회주의자들은 800개의 의석 중에 단지 80개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중도파라 할 수 있는 공화주의자들은 600개의 의석을 차지하여 압도적 다수를 형성했다.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주도 세력인데도 의회 내 극소수에 머물러야 하는 기막힌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파리 노동자들은 완전한 선거권과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6월 봉기를 일으켰다. 다시 파리 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정부군에 저항했다. 혁명의 성격이 부르주아지 세력에 저항한 노동자 주체의 계급혁명으로 전환한 것이다. 공화파 중심의 정부는 봉기를 진압하면서 1만여 명 이상을 처형하고 추방했다. 메소니에의 〈1848년 바리케이드〉는 바로 이 과정에서 발생한 학살을 생생하게 담아낸 것이다.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벌어진 환희와 분노 그리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여러 사건이 왜 일어난 것일까? 더 나아가서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회변동은 왜 일어난 것일까? 이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다양한 관점이 충돌한다. 가장 대조적 입장은 역사에서의 자유와 필연을 둘러싼 논란일 것이다. 자유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은 인간의 정신, 자유의지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필연을 중시하는 관점은 주관적 정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패턴이 작용한다고 이해한다. 흔히 자유는 우연, 필연은 법칙과 연결된다. 역사에 있어서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역사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 어느 특정한 개인들이 만드는 것이므로 항상 새로울 수밖에 없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필연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의지나 역할과는 무관하게, 오히려 개인을 강제하면서 작용하는 역사의 법칙이 사회변동을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완전한 자유, 완전한 필연보다는 두 요인 가운데 무엇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지의 문제로 귀착된다. 적어도 역사적 사건이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역사가이자 문명비평가 토인비(Toynbee)는 《역사와 세계와 인류》 중 〈역사에서의 자유와 법칙〉 부분에서 “가장 계략적이며 가장 변명하기 어려운 유형화의 죄를 범하지 않는 역사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다. ··· 어느 정도까지 물적 성질의 패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역사가가 지금 살아 있는 역사가 중에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역사를 우연한 사건의 연속으로 접근해서는 기본적 역사 이해나 서술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연적 요소가 일방적이고 지배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 생활의 전부가 실제로는 결정되어 있는데, 다만 사물을 결정하는 모든 법칙을 지능이 때때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역사적 사고의 경우에는 패턴을 사용해서 사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필요와 패턴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 함께 나타난다. 인간의 불안정성은 자유와 필연과의 중간 한계선이 우리 내부 어디엔가 있어서 언제나 조금씩 진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유를 중심으로 필연의 수용

역사에서 자유와 필연을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려 시도한 대표적 사상가로는 헤겔을 들 수 있다. 이전의 사상가들이 자유를 주로 인간에 대한 이해나 인식의 측면에서 논의했다면, 헤겔은 자유를 역사적 범주로 파악했다. 《역사철학강의》에서 자유는 역사의 필연성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어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자유 또는 실재적 자유의 법칙은 우연적 의지의 극복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우연적 의지는 보통 형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 존재가 그 자체로서 이성적이라면 주관적 통찰은 이 이성과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서 주관적 자유에 본질적 의미가 부여된다.” 역사는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직접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 어떤 필연도 내포하지 않는 자유, 자유가 전혀 없는 단순한 필연은 추상적 규정이며 따라서 옳지 않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구체적이고 자신 속에서 영속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자유는 동시에 필연적이다.

하지만 헤겔이 보기에 자유와 필연의 변증법적 관계는 정신을 원동력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다분히 주관적 성격이 강하다. “세계사란 변전해 마지않는 역사의 무대 위에서 연출되는 정신의 전개과정이다.” 그는 자유와 필연의 모순을 ‘이성의 간계’라는 논리를 통해 해결한다. 세계사는 개념의 전개고, 세계정신의 자기실현이라는 사변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모든 것은 생성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데,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그를 생성하게 하는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의 시발점에 역사발전의 절대적 이념으로서 정신이 존재한다. 정신은 생동하는 세계의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실현한다.

여기에서 ‘주관이 자기를 인식하는 내면적 원리’로서의 자유가 핵심 역할을 한다. 절대정신은 자유를 근간으로 해야만 성립한다. 정신의 발전에 따라 자유는 점점 자신을 의식한다. 역사 변화에서 굳건히 변치 않는 원칙은 개인적 자유가 보편적 자유의지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다.’ 프랑스혁명을 비롯하여 인류 역사의 분기점 역할을 한 혁명 대부분은 억압된 상태에서 인간의 자유가 강력한 충동의지에 따라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역사에서 주관적 정신을, 또한 그 내에서도 자유를 일차적 동인으로 이해한 것이다.

역사가 정신의 자기 전개과정이고, 개인적 자유가 보편적 자유의지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라면 개인의 역할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개인이 각기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의식과 행위가 변화의 출발이다. 이성은 실질적인 인간 의식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개인 행위를 매개로 해야만 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가 스스로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필연적, 보편적 목적과 연결됨으로써 역사적 행위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적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고, 그 가운데서도 개인의 자유와 보편적 자유를 체득한 영웅이 핵심 역할을 한다. 자유의 역할을 강조하는 관점은 필연적으로 역사는 영웅이 만드는 것이라는 관점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같은 역사적 사건을 다루더라도 자유를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현장의 다수 민중보다는 극소수 지식인이나 혁명 지도자를 부각하는 경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필리포토(Philippoteaux)의 〈1848년, 적색기를 거부하는 라마르틴〉은 1848년 프랑스혁명을 다루면서도 자유의지를 실현하려던 혁명 지도자의 영웅적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라마르틴은 마라를 암살한 코르데에게 ‘암살의 천사’라는 칭호를 준 프랑스 낭만파 시인이자 1848년 혁명 직후 임시정부에서 중심 역할을 한 정치가다. 2월 혁명 직후 부르주아지 세력은 혁명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려는 노동자를 극도로 경계했다. 시민계급을 물리적으로 보호할 군대가 재건되는 동안 분노로 가득 찬 노동자를 달랠 능란한 조정자가 필요했다. 라마르틴은 중도파인 공화주의자이면서도 좌파에 대해 어느 정도 포용력을 갖고 있어서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2월 24일 임시 공화정부를 공포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공포 다음 날 파리 시청 광장에 모여든 수많은 노동자는 1789년 혁명 이후 이미 몇 차례 노동자에게 보인 기만 때문에 부르주아지 중심의 공화정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청 광장에 집결하여 새로운 권력으로 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 공화정을 수립할 것과 그동안 혁명을 대표하던 삼색기 대신에 사회주의혁명을 상징하는 적색기 사용을 요구했다. 시민계급을 대표하는 정치인 대부분이 성난 노동자 앞에 나서기를 주저할 때 라마르틴은 위협적 태도의 군중 앞에 나서서 적색기를 든 사회주의 세력을 비판하고 국가의 통일을 위해 삼색기를 계속 사용하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1848년, 적색기를 거부하는 라마르틴

필리포토, 18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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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시청 앞에서 분노한 군중과 대치하는 라마르틴의 당당한 모습을 담았다. 시청 광장을 에워싼 군중 중앙에 라마르틴이 있다. 좌측으로 며칠간 전개된 전투의 흥분을 그대로 간직한 노동자들이 거칠게 자신의 요구를 외친다. 여성 노동자가 적색기를 치켜들었고, 노동자들은 새로운 혁명정부의 상징으로 사용하자고 요구하는 중이다. 대열 곳곳에는 왕궁에서 가져온 금과 은으로 만든 온갖 귀중품이 쌓여 있어서 평등 분배를 주장하는 노동자의 이해를 보여준다. 오른편으로는 삼색기와 공화정 유지를 지지하는 시민계급과 정치인들이 맞선다. 라마르틴은 의자를 단상 삼아 노동자 군중을 상대로 연설하는 중이다. 꼿꼿한 자세로 오른손을 들어 노동자의 요구를 거부하는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는 듯하다.

토인비도 〈역사에서의 자유와 법칙〉에서 필연성과 패턴이 작용하지 않는 자유 영역의 근거로 개인의 천재적, 영웅적 자질을 강조한다. “인간생활 안에 이제까지 없었던 창조활동을 낳는 여러 요소가 여기에 해당한다. ··· 첫째는 한 사람의 인격이 행하는 명확한 판단에 의한 의지행위 분야다. ··· 둘째는 인격과 인격 사이의 상호 접촉 분야다. 이 상호 접촉 안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창조라는 그 무엇인가가 발생한다. ··· 셋째는 어느 단일한 인격의 잠재의식이 그 층에서 분출해 나오는 시적 활동이라든가 예언자적 통찰력이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이에 비해 역사의 필연성을 더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소수 영웅의 역할보다는 다수 민중의 힘을 강조한다.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한 유물사관은 필연을 중심으로 자유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가 보기에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차적 원동력은 물질적 힘이다. 정신이 실천성을 획득하여 물질적 힘의 하나로 작용할 수는 있다. 철학은 세계 변화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또한 세계 변화는 철학을 통해 무기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필연이 자유에 우선하는 일차적인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이 된다.”라고 단언한다. 철학이 비판의 무기로서 역할을 한다고 해서 현실을 지배하는 물질적 힘 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사회에 대한 정치, 경제적 지배력이라는 물질적 힘은 그에 대립하는 직접적 힘으로 극복될 수 있다.

콜비츠의 〈봉기〉는 억압적 현실을 지양하려는 피지배 계급의 물질적 힘을 보여준다. 〈직조공 봉기〉 연작 중 하나인데, 무장한 직조공의 봉기 장면이다. 저마다 낫이나 도끼, 꼬챙이 등 무기가 될만한 것을 들고 행진한다. 굶주림에 피골이 상접한 모습의 직조공이 절규하는 표정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뒤편으로는 봉기 때문에 불타는 성이 보인다. 대열 선두에 선 사람이 추어올린 깃발 아래로 봉기를 상징하는 여신을 그려 넣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현실에서 전개되는 노동자의 직접적, 물리적 저항이야말로 억압된 현실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론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자연 발생적이고 무계획적 봉기는 한계가 분명하다. 손에 든 무기와 함께 이론의 무기를 지녀야만 세계가 변화한다.

봉기

콜비츠, 18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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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방식을 규정하는 물질적 생활을 역사 변화의 일차적 동인으로 규정한다. 인간 의식이 그들의 존재 방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된 문제의식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의지에서 독립되어 있는 필연적 관계, 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서며 사회적 의식형태가 조응하는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기존의 생산관계 혹은 이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인 소유관계와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 발전에 있어서 족쇄로 변한다. 그때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혹은 급속히 변혁된다. ··· 자신을 무엇이라고 여기는가에 따라 한 개인을 판단하지 않듯이, 변혁의 시기를 당시의 의식으로 판단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으로부터,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로부터 설명해야 한다. 한 사회구성체는 그것이 충분히 포용하고 있는 생산력 모두가 발전하기 전에는 결코 몰락하지 않으며, 더 발전한 새로운 생산관계는 물질적 존재 조건이 낡은 사회 자체의 태내에서 부화되기 전에는 결코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물질적 생산력에 일차적으로 주목한다. 생산력 발전에서 생산수단은 핵심 역할을 한다. 생산수단이란 물질적 부를 창출하는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사용하고 결합한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이란 생산에 투여되는 공장이나 기계, 원료 등인데, 주로 자본의 형태를 취한다. 생산력은 이러한 생산수단에 실제로 생산을 하는 사람, 즉 노동력이 결합한 개념이다. 인류 역사를 보면 생산력의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생산관계가 형성된다. 생산관계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를 둘러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 노예제 사회에서는 일체의 생산수단을 소유한 노예와 생산수단에서 배제된 노예가 생산관계의 중심이 된다. 마찬가지로 봉건제 사회에서는 영주와 농노, 자본제 사회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기본적 생산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경제적 토대 위에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방식으로 법률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들어선다. 사회를 헤겔처럼 절대정신 실현이 아니라 경제적 토대에 기반을 두고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결합한 하나의 사회구성체로 파악한다. 간단히 말해 이데올로기적 형태라 부르는 일체의 정신적 영역은 경제적 토대에 의해 기본적으로 규정되는 관계다. 그러므로 의식보다 물질적 존재 조건이 우선한다.

그가 보기에 역사 변화는 생산력 발전을 출발점으로 한다. 생산력은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하려고 한다. 이에 비해 생산관계는 고정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배계급은 현재의 생산관계와 그 법률적 표현인 소유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무조건 일치하기 때문이다. 노예나 봉건영주, 자본가는 당시의 생산관계와 소유관계가 자신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보장하므로 이를 고정하려는 것이 당연하다.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을 보장하기는커녕 가로막는 족쇄로 변하는 순간 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프랑스혁명 등 시민혁명을 전후한 시기를 예로 들어보자. 봉건사회는 영주가 지배하는 고립된 장원체제를 기반으로 농노계급의 소농 중심 농업에 소규모 수공업이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점차 소규모 수공업을 넘어서 공장제 수공업이 확대되고 산업혁명과 함께 대공장 중심의 공업이 생산력 발전의 원동력으로 부상하면서 기존의 생산관계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대공장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노동력을 팔 수 있는 노동자가 필요한데, 토지에 속박된 농노 중심의 생산관계가 이를 가로막는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기존의 생산관계를 뒤흔드는 혁명 흐름이 형성되고 이를 위해서도 기존의 생산관계를 지탱하는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 전체를 뒤바꾸려는 혁명의 불길이 솟아오르게 된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주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은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발달,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산에 기초하여 발전한다. 개인적 성격을 띠던 과거의 생산을 사회적인 것으로 전환했다. 과거의 생산은 주로 자신과 자기 가족의 소비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은 개인의 소비가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현대자동차 노동자가 자기가 탈 차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삼성전자 노동자가 자기가 만든 TV를 집에 가져가서 보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이렇게 자기를 위한 생산은 사회 전체를 위한 생산으로 전환된다. 자본주의와 함께 본격화된 생산의 사회화,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의 사회화는 여러 과정을 거쳐 확대된다. 상품 생산 발전이 작은 경제 단위의 세분된 상태를 파괴하고 조그만 지방 시장을 거대한 국민 시장, 뒤이어 세계 시장으로 결합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사회적 성격을 띠면서 비약적으로 생산력이 발전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개인 소유에 기초한다. 생산수단은 자본가 계급이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노동자는 일체의 생산수단으로부터 배제되어 오직 자신의 노동력만을 판매해야 하는 처지다. 생산이 사회적이면 소유도 사회적이어야 정상인데, 이 두 가지가 상반된 성격을 갖게 됨으로써 불가피하게 충돌이 일어난다. 생산양식은 이미 본질적으로 사적 성격을 지양했는데도 현실에서는 사적 소유형태에 예속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개인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 점점 더 극심해지다가 결국 혁명으로 폭발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혁명은 이러한 갈등을 끝내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방법은 두 가지일 텐데, 하나는 생산과 노동을 다시 개인적인 것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의 후퇴에 해당한다. 생산의 사회화는 생산력 발전, 물질적 풍요와 맞물려 있는데, 이를 뒤로 돌려놓으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바보 같은 짓이 된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소유를 사회화하여 생산과 소유의 성격을 일치시키는 것으로 이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를 의미한다. 개인적 소유는 개인 소비를 위한 화폐나 소비물자의 소유를 말한다. 사적 소유의 폐지는 이러한 종류의 개인적 소유를 없애는 것이 아니므로 각 가정의 가전제품이나 생활 도구, 임금으로 받아서 저축해놓은 돈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갈등에서 시작하여 법적, 정치적 영역의 변동에 이르는 변화를 주장한다는 점 때문에 역사에서 필연의 작용을 중시한다. 엥겔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역사상의 사건도 대체로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우연이 그 작용을 제멋대로 하는 것처럼 보일 경우에도 우연은 언제나 내적으로 감추어진 어떤 법칙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여기서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법칙을 발견하는 일이다.” 모든 사회 변화와 정치 변혁의 궁극적 원인을 머릿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정의에 대한 인식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생산방식과 교환방식의 변화에서 찾아야 하며 이를 철학이 아니라 그 시대의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역사에서 자유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엥겔스는 ‘블로흐에 보낸 유물사관에 관한 편지’에서 자유의 역할, 필연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경제적 요인이 유일한 결정요인이라는 듯이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앞서 명제를 무의미하고 추상적인, 망발된 말로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경제적 상태는 토대다. 상부구조의 여러 요소, 즉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관의 발전 등이 역사적 투쟁 경과에 작용을 미치는데, 대부분 주로 투쟁 형태를 결정한다.” 다양한 요소가 서로 영향을 미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 변화에 대한 이해가 간단한 1차 방정식을 푸는 것보다도 훨씬 쉬운 일이 되어버린다.

분명히 역사에는 수많은 우연 요소가 작용한다. 그러므로 자연발전과 사회발전은 다르다. 자연에서는 맹목적, 무의식적 행위자들이 서로 작용하며 이 상호작용으로부터 일반법칙이 작용한다. 변화가 의식적으로 정해진 목표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 역사에서는 행위자가 모두 의식을 갖고, 의도나 열정을 가지고 행위하며 특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따라서 의식적 목적, 의도된 목표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철학은 현실의 힘에 저항하는 피지배 계급의 정신적 무기로서 세계 변화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물질적 힘으로 전환될 수 있다. 철학이 현실의 힘 관계를 지양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듯이 마찬가지로 저항하는 계급은 철학의 실현을 통해 자신의 억압 상태를 지양할 수 있다.

그가 강조하려는 바는 다양한 요소가 복잡하게 상호작용 하지만 역사적 과정이 내적 일반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변경시킬 수는 없다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모든 우연을 통하여 경제운동이 필연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관철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필연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경제상태가 원인이어서 오직 이것만이 능동적이고, 다른 모든 상태는 수동적 작용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언제나 자기를 관철하는 경제적 필연성의 기초 위에서의 상호작용한다는 주장이다.

몇 가지 과도할 수 있는 해석만 유의한다면 헤겔보다는 마르크스의 관점이 역사적 현실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마르크스 역사관의 핵심은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토대와 법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관계를 통해 역사 변화에 적용한다.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부분적, 일시적으로 다른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의식과 존재에 대한 타당한 설정이 아닐까?

당장 우리 현실만 봐도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측면이 강하다. 예를 들어 중요 선거가 있을 때면 이른바 강남 3구라고 부르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등 부유한 지역에서 부유층의 이해를 철저하게 대변하는 정당에 일방적으로 표가 쏠린다. 또한 전반적으로 기업가들이 현재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생산관계에 조금이라도 지장을 줄 수 있는 견해나 움직임에 대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적어도 민주적으로 조직된 노동단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유구조의 변화를 희망하는 점을 봐도 그러하다. 근대와 현대사회에 결정적 영향을 준 유럽의 시민혁명 전개과정도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국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과정인가, 아니면 직접 사회 변화를 이끌어나가는 아래로부터의 과정인가의 차이는 있지만, 새로운 생산력 발전을 상징하는 부르주아지 세력이 과거의 낡은 봉건적 생산관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의식과 존재, 경제적 요인의 영향에 대한 과도한 해석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국가라는 몇 가지 요소만 갖고 기계적으로 현실의 모든 역사 변화를 꿰맞추려는 시도는 곤란하다. 엥겔스도 지적했듯이 역사 변화에 대한 이해가 간단한 1차 방정식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과 존재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곤 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는 상당수의 여성이 여성의식보다는 남성 중심의 의식에 물든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노동자이면서도 상당수가 노동자의식보다는 오히려 기업가의 이해에 더 가까운 사고방식을 가지기도 한다.

사회적 존재가 자동으로 개인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개를 통해 방해받고 굴절되는 경우가 오히려 더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데, 예를 들어 우리의 경우만 봐도 수십 년간 한국 정치를 좌우해온 지역감정, 전쟁 경험과 분단에 기초한 반공이데올로기, 더 많은 소비가 더 많은 행복을 보장한다는 식으로 조장된 소비이데올로기, 왜곡된 신분 상승 의식 등 다양한 요인이 존재와 의식의 사이를 어지럽힌다. 이를 간과하거나 소홀히 할 때 현실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서는 열정을 갖고 사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역사적 실천에 나서지만 성급하고 과도한 일반화 때문에 오히려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로 전락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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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에르네스트 메소니에(Ernest Meissonier, 1815~1891년)
프랑스 리옹 출신. 거의 독학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초기에는 책 일러스트 작업을 많이 했고 점차 역사적 사건을 그린 풍속화가로 명성을 쌓았다. 1834년 살롱에 데뷔했고 많은 전쟁화를 남겼는데, 특히 나폴레옹을 회고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1814년〉, 〈1848년 바리케이드〉 등이 있다.

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미술관 옆 인문학 2
미술관 옆 인문학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관 옆 인문학 2: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만나다》는 인간의 본성에서 문명의 충돌까지 삶과 죽음에서 사랑과 욕망까지, 성찰의 인문학, 상상의 인문학을 물으며 인문학..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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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역사는 자유인가, 필연인가미술관 옆 인문학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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