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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2

전인적 인간을 위하여

콜비츠 ‘퇴근하는 노동자들’과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기계의 시간에 지배당하는 사람들

‘가난하고 상처받은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콜비츠는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을 대상으로 작품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과 삶을 같이한 화가다. 빈민촌 무료 진료소에서 의료 활동을 하던 남편과 함께 북부 베를린 빈민 거주 지역에 살면서 직접 체험한 민중의 삶을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북부 베를린은 당시 가난과 고된 노동으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넘쳐났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구제받을 길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일말의 책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노동자와 빈민의 빈곤과 병마가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자각 위에서 그림이 현실을 고발하고 변화시키는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는 시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며 미술 작품이 어떤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라고 생각했다. 초심을 그대로 유지하며 평생을 고난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직조공의 봉기〉 연작, 〈농민전쟁〉 연작 등 현실 참여적 작품 활동을 했다.

동판화, 목판화, 석판화 등 주로 판화 작업에 몰두했는데, 이는 자신의 재능과도 연관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장을 찍어내는 판화야말로 가난한 민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작업 방식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은 채색을 통해 그려낸 매우 드문 작품이다. 귀가하려고 철도역으로 향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담았는데 주변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늦은 시간임을 알 수 있다. 철도역 출구 현관 불빛을 등 뒤로 받으면서 노동자들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다. 얼굴을 가린 그늘이 매일 반복되는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지친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대신하는 듯하다. 빠져나올 수 없는 노동과 빈곤의 긴 터널을 상징하듯 바닥으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다음 날 새벽이면 공장으로 가기 위해 다시 어둠을 뚫고 철도역 현관으로 꾸역꾸역 들어가는 노동자의 뒷모습이 보일 것이다.

퇴근하는 노동자들

콜비츠, 1897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세기 유럽 노동자들은 하늘의 별을 보며 출근했다가 다시 별빛을 받으며 퇴근해야 하는 장시간 노동이 일상이었다. 당시 노동시간은 성인 노동자는 물론 어린아이까지도 보통 14~16시간이었다. 심한 경우에는 20~30시간을 잠도 못 자고 연속해서 일해야만 했다. 장시간 일한 탓에 피로와 각종 질병에 시달려서 당시 노동자들은 40세가 넘으면 이미 노인 취급을 받을 정도로 평균 수명이 낮았다. 장시간 노동은 육체적 질병만이 아니라 정신적 불구를 양산한다. 너무 긴 노동시간 때문에 일과 잠깐의 수면 시간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초래한다. 교육 기회를 잃고 생각할 시간조차 갖지 못해 정신도 황폐해진다. 인간이 시간의 주체가 아니라 대량 생산을 위해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시간에 종속된 대상으로 전락한다. 말 그대로 기계적 시간에 지배당하는 초라한 존재일 뿐이다. 장시간 노동 문제는 육체와 정신 모두를 무너뜨리고 인간을 한낱 기계의 부속품으로 변질시킨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장시간 노동에 제동을 건 결정적 사건은 메이데이의 기원이 된 미국 노동자들의 1886년 5월 1일 총파업이었다. 1888년에 뒤이어 1890년의 메이데이 총파업에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하여 비로소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해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면 한국은 장시간 노동 분야에서 OECD 국가 가운데 10년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기록만 하더라도 한국 노동자의 연간 노동시간이 평균 2100시간을 넘는다. 1700시간대인 OECD 평균 연간 노동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 결과 19세기까지 미국과 유럽 노동자가 겪은 각종 육체적, 정신적 문제가 21세기에 이른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서 여러 방면에 걸쳐 나타났다.

예를 들어 한국은 각종 돌연사 항목에서 여러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교통사고 사망률이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이고, 세계 전체로 봐도 꾸준히 5~6위를 유지한다.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10위 안에 들었는데, 1위에서 5위까지가 러시아, 슬로바키아, 폴란드, 터키, 헝가리임을 고려할 때 심각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40대 남성 사망률이 세계 1위라는 사실은 이제 대부분 언론을 통해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할 정도다. 40대 여성 사망률의 3배이니 그 심각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산업재해 사망률도 만만치가 않아서 기획재정부의 국가경쟁력보고서에 의하면 OECD 국가 중에서 2위이고 평균적으로 선진국의 두 배가 훨씬 넘는다. 심지어 자살 사망률도 OECD 국가 중 1위다.

왜 한국에서는 이렇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생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졸지에 죽어나가는 사람이 많을까? 그것도 각종 항목에서 세계 기록을 보유하면서까지 말이다. 왜 40대 한국 남성들이 맥없이 쓰러져야 할까? 그 대부분이 과로사라는 걸 모를 사람은 거의 없다. 당연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을 일하고 노동 강도는 날이 갈수록 강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산업재해 사망률이나 교통사고 사망률은 또 왜 그리 높을까? 한국 사람이 워낙 체질적으로 부주의해서? 사망에 이르는 산업재해의 상당 부분이 추락이나 기계에 몸이 끼어서 발생한다.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심한 교통사고는 졸음운전이나 음주운전 혹은 과속운전이 주요 원인이다. 그러면 한국인은 원래 술과 속도감에 미쳐 있거나 발을 잘 헛디디는 사람들인가? 늦은 시간까지 연장 업무를 하고 그나마 짧은 시간에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술이니 음주운전이 많고, 또한 시간을 다투는 생활을 강제 받으니 과속 습관이 생기는 게 아닌가? 잔업과 야근에 시달려 피곤해서 졸다가 기계에 끼거나 추락하는 게 아닌가? 장시간 노동과 높아만 가는 노동 강도가 유일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상당한 연관성이 있음은 분명하다.

한국 노동자의 연간 노동시간이 평균 2100시간을 넘는다고 하지만 이조차 실제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다 반영한 것이 아니다. 법으로 정해진 노동시간과 1주일에 최대 12시간까지 허용된 연장근로 시간을 합산한 수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일요일과 국경일 등 휴일 노동은 연장근로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더 긴 시간 노동을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실제로 현대자동차에서는 노동자 1명당 1년 평균 노동시간이 2500시간에 가깝다고 한다. 교묘하게 숨겨진 노동시간까지 합하면 아마도 OECD 국가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서 장시간 노동 1위 기록이 나온다고 한들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당연히 여가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여가활동조사를 보면 한국 국민은 평일 평균 4시간, 휴일 7시간의 여가 시간을 보낸다. 15세 이상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했기 때문에 전업주부, 노인 등까지를 전부 포함하고 있어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좁혔을 때 실제로는 여가 시간이 터무니없이 적어진다. 절대적 여가 시간만큼 어떤 여가를 즐기는지도 문제다. TV와 음주가 여가 시간을 가장 많이 잠식하고 있다. 하루 평균 3시간이 넘게 TV를 시청하고, 음주 횟수가 일주일에 평균 2회 정도여서 평균 여가의 대부분을 TV와 술로 보낸다. 집에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은 TV 시청이고, 사람을 만나서 가장 많이 하는 활동이 음주인 것이다.

노동자만이 아니다. 여가 시간이 거의 없기는 학생도 마찬가지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사교육을 포함하여 하루 평균 학습 시간이 중학생은 9시간 4분, 고등학생은 10시간 47분에 이른다. 그 결과 여가 시간은 대폭 쪼그라든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조사에 의하면 평일 중학생의 평균 여가 시간은 241.2분, 고등학생은 195.2분에 불과하다. 이제 막 성장기에 들어선 초등학생은 더 심각하다. 평일 초등학생의 평균 여가 시간은 195.6분으로 고등학생과 비슷하다. 이 수치조차도 ‘평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교육을 충분히 시킬 수 없는 저소득층 자녀를 빼놓고 생각하면 절반 이상의 학생은 평균을 훨씬 초과하는 학습에 시달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한 상당수 고교에서 0교시부터 밤 10시에 끝나는 야간자율학습으로 하루 14~15시간 중노동 학습을 하는 실정을 고려하면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듯 OECD 1위인 한국 노동자의 평균 노동시간보다 더 긴 ‘학습노동’에 시달린다. 콜비츠의 〈퇴근하는 노동자들〉에 나오는, 극단적 장시간 노동으로 파김치가 되어 귀가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곧 한국 학생의 현실이기도 하다.

장시간 노동, 입시나 취업을 위한 장시간 학습에 시달리니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거나 불구가 되기 십상이다. 정신적 충족을 객관적 자료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독서 시간이다. 2011년 교보문고가 20∼59세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 달 고작 평균 1.3권의 책을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처세와 관련된 책이 상당 부분이어서 마음의 양식과는 거리가 멀다. 독서와 가장 가까우리라 예상하는 대학생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통계청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의하면 대학생은 여가 시간에 인터넷, 텔레비전, 휴대폰, 게임, 영화 등 영상 · 정보매체 이용에 67%를 할애하지만 독서는 고작 4%에 그친다. 교재를 제외한 일반도서 독서량도 한 달 평균 1권 정도에 머물러 직장인 평균치와 별로 다르지 않다.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공공도서관을 이용하는 대학생은 10명 중 4명에 불과하고, 그나마 ‘학습’ 목적이 과반수다.

전문성과 분업의 늪에 빠진 현대인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는 사회 현실에서 많은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직업으로 전문직을 선호한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한국인 직업의식과 직업윤리 실태 조사에서 희망 직업경로 질문에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하며 전문가가 되는 길’(25.6%)과 ‘여러 직장 경험 후 전문가가 되는 길’(25.4%)을 꼽은 응답이 많았다. 구인 · 구직 포털 사이트 알바몬이 전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장래 배우자 직업을 조사했는데, 여학생이 선호하는 배우자 직업 1위가 전문직 종사자였다. 전문직을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안정적 수익 보장이다.

국세청 자료에 의하면 최근 인기 전문직으로 부상하고 있는 변리사는 연간 약 6억 원 정도를 벌어들여 가장 높은 소득을 올렸다. 전년 대비 수입 증가율에서도 평가사, 법무사, 의료업자, 건축사, 회계사 등 대표적 전문직 종사자는 10% 이상을 기록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면서 전문직 종사자의 수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의 고용 통계를 보면 전체 10개 직업군 가운데 의사, 변호사, 약사, 교사 등이 속한 ‘전문가’는 최근 5년간 28.9%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체 취업자 수가 5.7% 증가한 것과 견줘보면 전문가 수의 증가 속도가 매우 빨랐음을 알 수 있다.

법조인,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는 안정적 수익을 보장받기는 하겠지만 해당 분야에 제한된 지식과 처세로 말미암아 편협한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협소한 직업적 이익에 갇혀서 사회와 인간 전체를 조망하기보다는, 즉 지식인으로서의 보편적 역할보다는 전문 기술자로서 배타적 행태를 보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도미에(Daumier)의 〈대화하는 세 변호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선호하는 법조인을 담았다. 권위를 풍기는 검은 가운을 입은 변호사 세 명이 법원 건물에서 대화를 나눈다. 세 명 모두 대화하는 중에도 상체를 뒤로 젖혀 권위를 뽐내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특히 오른편 변호사는 눈으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한 표정까지 살아난다. 도미에는 항상 바쁜 듯이 행동하며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과시하는 판사와 변호사 등 법조인의 허위에 찬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에서 변호사들은 우쭐함과 수다스러움과 직업적 냉소주의로 충만하다. 그는 평소에도 법조계 사람들을 경멸했는데 판사, 변호사, 검찰관 등이 거만한 자세로 세상 형편을 쥐락펴락했기 때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성장기에 법률 집행관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비정한 세계를 일찍부터 체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화하는 세 변호사

도미에, 1862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간행된 《변호사 조크》에는 편협한 직업적 속성 때문에 발생하는 변호사의 저열하고 음흉스러운 모습이 유머 형식으로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상어가 변호사를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직업적 예의”다. 변호사는 소송의 승리만이 직업적 목적이어서 상대방을 상어처럼 물어뜯기만 하므로 상어가 동료인 변호사에게 직업적 예의를 갖춘다는 유머다. “구급차를 뒤쫓지 않는 변호사는?”에는 “은퇴한 변호사”라는 답이 뒤따른다. 무엇이든 소송을 벌이게 해야 수익이 생기는 변호사의 속성상 남의 불행이 곧 자신의 행복이다. 어떤 사고든 뒤쫓아가서 소송을 제기하도록 유도하는 습성을 꼬집은 이야기다.

또한 “사법개혁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변호사에게 필요한 것은?”이라는 질문에 “클로로포름”이 답으로 나온 점도 의미심장하다. 클로로포름은 신경마비 작용 때문에 마취제로 사용하는 화학물질이다. 법조인의 부당한 이익추구 개선 움직임을 결사적으로 저지시키려는 퇴행적 행태를 고발하고 있다. 한국에서 맹위를 떨치는, 판사나 검사 출신 변호사에게 일정 기간 재판에서 유리한 판결을 보장해줌으로써 금전적 이익을 챙겨주는 ‘전관예우 관행’의 개혁에 항상 집단 반발로 대응하는 법조인의 추악한 결탁이야말로 대표적 사례다.

공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블루칼라 노동자, 깔끔한 사무실에서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 아니면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전문직 종사자 등 분야와 직종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 현대인은 특정 분야로 분업화된 체제 속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한국의 직장인은 세분된 분업체제와 장시간 노동이라는 두 개의 장벽에 동시에 갇혀 있다. 설사 유럽처럼 연장근로를 금지하고 주 5일 근무제와 8시간 노동제를 철저히 지켜서 야만적 장시간 노동을 어느 정도 완화하는 조건이라 하더라도 전문 영역으로 분업화된 체제 속에서 마치 기계 부품처럼 불구가 된 삶을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분업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매우 상반된 관점이 대립한다. 자본주의체제에서 장밋빛 미래를 발견하려는 사상가들은 분업 효과를 찬양하고 또 찬양한다. 자본주의 경제학의 기초를 세운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분업의 성격과 효과를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노동생산력의 매우 큰 향상과 숙련, 기교, 판단 대부분은 분업의 결과였던 것 같다. ··· 최하층 국민에게까지 전반적인 생활을 풍요할 수 있게 한 것은 분업 덕택으로 각종 생산물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 수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분업은 원래 그것이 낳는 일반적 풍요를 예상해 의도한 인간 지혜의 결과는 아니다. 분업은 그와 같은 폭넓은 효용을 예상하지 못한 인간성의 어떤 성향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긴 결과다.”

그는 분업이 노동생산력을 향상해 인류 전체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선사했다고 한다. 분업은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함으로써 노동자 각자의 기교 향상과 작업에서의 시간 절약을 낳았다. 작업을 단순화하여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의 일을 감당케 하는 기계 발명을 촉진했다. 그 결과 동일한 수의 사람이 수행할 수 있는 작업량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그런데 분업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분업하면 더 많은 물건을 더 빨리 생산하리라는 의식적 예상의 결과물이 아니다. 분업은 인간성의 어떤 성향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인간 본성의 산물이다. 분업 추구가 인상 본성에 속하는 이상, 만약 분업에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면 본성을 거스르는 위험한 발상이 되어버린다.

사회학을 주요 학문으로 자리 잡게 한 뒤르켐(Durkheim)은 《사회분업론》에서 아담 스미스와는 다른 측면에서 분업이 인류 문명에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설명한다. “분업은 생산력과 노동자의 능력을 결합하므로 사회의 지적, 물질적 발전의 필요조건이다. 분업은 문명의 원천이다. ··· 분업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분화된 기능의 산출 증가가 아니라 연대에 제공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분업의 경제적 효용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업은 경제적 이익을 훨씬 초월하며, 그 자체로서 사회적, 도덕적 질서의 확립에 기여한다. ··· 왜냐하면 질서, 조화와 사회적 연대에의 요구는 일반적으로 도덕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분업이 생산력 증가를 통해 물질문명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분업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다른 데서 나타난다. 분업을 통해 개인의 상호 유대가 형성된다. 분업 없이는 개인은 독자적이다. 예를 들어 만약 분업이 없었다면 각 부족이나 가족은 자급자족 생활을 계속하며 서로 간의 고립 상태를 유지했을 것이다. 분업이 진전되면 각자는 타 집단의 생산물과 교환하고 일상적 유대가 형성된다. 분업을 통해서 개인은 개별적으로 발달하는 대신에 노력을 결합한다. 그런데 사회적 유대는 그 자체로 도덕적이기 때문에 분업은 도덕에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분업에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면 도덕을 부정하는 위험한 발상이 되어버린다.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분업이 생산력 발전의 중요 계기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사회적으로 분업이 확대되면서 자급자족적 생활을 해체하고 개인과 집단 사이에 체계적 연결망 구축을 자극한다는 점도 수긍할만하다. 하지만 그들은 효율성에 감탄한 나머지 분업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전인적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18~19세기 유럽 산업 분야에서 나타난 분업의 비약적 확대와 동시에 분업이 초래한 폐해가 집중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Marx)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분업의 폐해를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분업은, 인간이 자연 성장적 사회에 사는 한, 따라서 특수이해와 공동이해 간 분열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활동이 자유의지에 의한 분할이 아니라 자연 성장적으로 분할되어 있는 한, 인간의 활동은 인간에 대해 대립하는 낯선 힘, 인간에게 지배되지 않고 인간을 굴복시키는 힘으로 전화한다는 사실에 대한 최초의 실례를 제공한다. 즉 노동이 배분되기 시작하자마자, 모든 개인은 그들에게 강요되는, 벗어날 수 없는 특정한 배타적 활동 영역을 갖게 된다. 그는 한 사람의 사냥꾼이거나 한 사람의 어부, 목동, 비평가일 뿐이며, 생계 수단을 잃지 않으려면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

먼저 사회 이해와 개인 이해 사이에 틈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생산력 발전이나 사회의 부 증가가 곧바로 개인 이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분업으로 국가의 부는 증가하지만 노동자를 비롯하여 사회 구성원 상당수는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이럴 때 분업의 성과는 극소수의 일부 계급에게 국한되고 나머지가 그 폐해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한다. 또한 분업이 과연 본성이나 도덕에 해당할 만큼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인가도 문제다. 예를 들어 분업의 고도화를 상징하는 포드시스템, 즉 컨베이어 벨트로 만들어진 생산 라인에서 분업화된 단순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작업이 과연 노동자의 자발적 의사로 도입되었는가? 노동자로서는 포드시스템이 강제하는 노동 강도 강화가 달가울 리 없다.

산업 현장의 고도화된 분업체계는 대부분 자본에 의한 일방적 강제일 뿐이다. 그 결과 개인은 전인적 다양성을 잃은 채 특정 분야의 직업이나 작업 형태를 반복해야 하는, 마치 기계 부품처럼 단순하고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하찮은 존재로 전락한다. 노동자는 작업에 필요한 기능만 평생 반복하고, 법조계 종사자는 법전 조항 안에 갇혀 살고, 의사는 신체와 장기를 들여다보는 일에만 매달리고, 지식인은 활자화된 텍스트나 분필 가루 안에서 제한되고 획일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도미에의 〈공원에서 책 읽는 사람〉처럼 삶을 음미하고 사색하는 시간은 사치이거나 한가한 짓으로 전락한다. 한 남성이 시원한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다양한 색채와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실루엣과 단조로운 색조로 표현했다. 공원의 나무와 벤치, 독서에 빠진 사람이 마치 원래 거기에 그런 모습으로 항상 있던 것처럼 하나가 된 느낌이다. 그만큼 독서가 매일 일상에서 접하는 친근한 일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분업화된 전문성을 최고의 가치로 강조하는 사회에서 어지간해서는 하루에 단 한 시간도 독서에 할애할 시간이 없다. 자기 전문 영역에 필요한 기능, 그것도 하루가 다르게 고도화되는 기능을 습득하기도 바쁜 처지에 일상적으로 공원을 산책하다가 느긋한 기분으로 독서를 즐기는 광경은 낯설기만 하다.

공원에서 책 읽는 사람

도미에, 18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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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뱃놀이〉 같은 여가 시간도 거의 낭비처럼 다가오기 십상이다. 두 남녀가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여인은 편안한 자세로 팔을 조각배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다. 남성도 바쁠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듯 노에 한쪽 팔을 걸쳐놓고 한낮의 여가를 즐기고 있다. 마네를 비롯하여 19세기 파리의 인상파 화가들은 센 강변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의 모습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 직장 일에 치여 사는 우리로서는 한량의 놀음이거나 그저 일 년에 한두 번 휴가 때나 누릴 수 있는 호사처럼 보일 뿐이다.

뱃놀이

마네, 18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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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업이 만들어내는 생산력 발전과 물질적 풍요라는 성과를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해서 대부분의 인간이 전인성을 잃고 특정 영역에 제한된 부품으로 전락하는 문제를 필요악으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실천적 철학자로 유명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분업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서를 노동시간 단축과 여가 시간 확대를 통해 제시한다.

현대 기술은 여가를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주었다.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사회는 기술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 만일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나고 실업도 없을 것이다. ···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평생 동안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박탈을 겪어야 할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다만 우매한 금욕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과도한 노동을 주장케 할 뿐이다.

농경 중심의 전통사회에서 제사만 담당하는 사제나 전쟁만 담당하는 직업군인 등으로의 분업은 농민의 남은 생산물을 거둠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대신 생산자들은 조금의 여가도 없이 일만 해야 했다. 상식적으로 불공평한 분업을 생산자들이 순순히 받아들였을 리는 없고 당연히 일정한 단계에서 물리적 강제를 통해 유지되었다. 처음에는 강제만이 있었지만 지배 집단은 곧 더 손쉬우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낸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농부의 본분이라는 윤리’를 만들어내고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면 편하게 일을 시킬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여가를 즐기는 베짱이에게는 비극이, 끊임없이 열심히 일하는 개미에게는 행복이 기다린다는 근로의 도덕이 모두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수직적으로 강제된 분업은 불변의 자연 원리처럼 강한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현대 과학기술은 생산력의 비약적 증가로 노동자도 충분히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기계 발달과 테일러주의, 포드주의에 의한 생산 공정 합리화까지 계산하면 생산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했다.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해도 인류에게 충분한 재화를 공급할 만큼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 발전에도 8시간 노동제를 유지함으로써 실업이 확대된다. 그래서 생산력이 엄청나게 발전했는데도 현대사회에서 ‘근로의 도덕’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지적한다.

지배 세력은 개미와 베짱이의 중간에 해당하는 곤충이나 동물도 있다는 걸 도무지 생각지 않는다. 쉴 틈 없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모두 다 날건달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 그는 이제 노예의 도덕을 거부하고 게을러지자고, 여가를 누리는 데 필요한 만큼의 일을 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생산력이 보장하는 한도 내에서 노동을 최소화하고 여가를 최대한 늘리자는 것이다. 즉 분업의 폐해를 분업의 부정이 아니라 분업에 의한 생산력 발전을 근거로 하되, 생산력의 성과를 노동시간 단축으로 전환해 여가를 확대함으로써 대부분의 인간이 전인성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분업과 여가, 전인성 실현에 대한 러셀의 생각은 마르크스와도 상당히 맞닿아 있다. 마르크스도 생산력 발전이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으로 연결되도록 사회체제를 변혁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임금, 가격, 이윤》에서 거듭 강조한다. “시간은 인간 발전의 공간이다. 자유시간이 없으며, 생애 전체를 수면, 식사처럼 순전히 신체적 필요 때문에 중단되는 시간을 빼고 자본가를 위한 노동에 흡수당하는 사람은 짐 나르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다. 그는 몸이 망가지고 정신이 황폐해진, 다른 사람의 부를 생산하기 위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이 일상 시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건에서 인간 발전은 불가능하다.

노동자가 짐승이나 기계 부품에 불과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첫 단추는 노동시간 단축과 여가 확대다. 그러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전망하듯이 분업의 족쇄에서 벗어나 전인적 인간의 실현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 활동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함으로써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분업을 통해 사회활동을 고정하는 체제, 생산력 발전을 지배와 통제 강화로 사용하는 체제를 구조적으로 변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경제학과는 다른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주시해야 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부 호르크하이머(Horkheimer)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지배가 만들어낸 노동 분업을 철학은 결코 못 본 체할 수 없다. 철학은 그러한 노동 분업이 빠져나갈 수 없는 현대인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에만 관심을 보인다.”라고 한 단언은 분업의 고도화로 질주하는 현실에서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근본 고민을 담고 있다. 인문학은 사회구조가 행사하는 막강한 힘의 마수에 최면당하지 않고 사회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그 힘을 추적하고 정체를 밝히는 일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한다. 인문학이 인간 사유에 관여하는 한, 일차적으로 근로의 도덕이 어떻게 정신을 불구로 만드는지를 규명하고 끊임없이 돌파구를 찾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진정으로 노동이 고통이 아니라 활력과 기쁨이 되고, 인류의 육체적, 정신적 퇴화를 방지하여 지적 발전과 사교와 사회적 활동의 가능성을 보장하려면 노동시간 단축을 핵심적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

하루 4시간까지는 아니라도, 이미 7시간 노동이 정착된 프랑스에서 논의되는 6시간 노동만 실현돼도 더 이상 노동이 일상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일 수 있지 않을까? 7시간 노동을 하는 영국만 해도 아침 9시 출근에 오후 4시 퇴근이지만, 그중에는 점심시간이 1시간, 티타임이 오전에 30분, 오후에 60분 정도가 배정되어 있어서 티타임만 좀 조정해도 얼마든지 6시간 노동을 실시할 수 있는 조건이다. 주 5일 노동에 오후 3시까지 일하고 퇴근한다면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다양한 재능을 계발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그리고 여가의 현명한 이용 방법을 사회가 교육을 통해 제공한다면 정말 하루하루의 삶이 기대와 기쁨과 활력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생활을 위한 노동을 하면서도 음악가, 미술가, 문학가 등의 예술가나 여행가로서 살아가는 것, 직장인이면서 정치인이나 시민단체 활동가로 살아가는 것이 과학기술과 생산력이 이토록 눈부시게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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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년)
1867년 독일 출생.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과 가난에 고통받는 독일 민중의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 현대 민중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직조공의 봉기〉,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 등이 있다.

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미술관 옆 인문학 2
미술관 옆 인문학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관 옆 인문학 2: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만나다》는 인간의 본성에서 문명의 충돌까지 삶과 죽음에서 사랑과 욕망까지, 성찰의 인문학, 상상의 인문학을 물으며 인문학..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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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전인적 인간을 위하여미술관 옆 인문학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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