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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갈망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전시된 수많은 회화와 조각을 제대로 다 보기는 어렵다. 관객들도 무려 38만 점에 이른다는 작품 하나하나를 눈여겨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에 스쳐 지나가듯이 감상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평소에 지면을 통해 자주 접한 유명한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꼼꼼하게 보는 정도다. 그리스 조각인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나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 이른바 명작으로 불리는 작품 앞은 항상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린다. 그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스치듯이 지나가는 발길을 멈추게 하는 조각 중의 하나가 카노바의 〈에로스와 프시케〉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주위는 거대한 규모와 날개를 퍼덕이는 여신의 역동적 모습이 뿜어내는 기운에 휩싸여 경이로운 표정을 짓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그에 비해 〈에로스와 프시케〉 주위에 모인 사람의 눈길은 편안하고 부드럽다. 에로스와 프시케에 얽힌 신화를 굳이 모르더라도 조각 자체가 미소년과 미소녀의 아름다운 사랑을 더할 나위 없이 예쁘게 묘사해놓았기 때문이다. 에로스가 날아와 누워 있는 프시케에게 키스하려는 장면이다. 한 손으로는 여인의 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봉긋 솟은 가슴을 부드럽게 껴안았다. 프시케는 두 손으로 에로스의 머리를 부여잡고 달콤한 키스를 기다린다. 매끈하게 다듬은 대리석의 질감이 두 연인의 사랑을 더 아름답게 전해준다.
에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이다. 에로스의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로마 신화에서는 에로스를 큐피드 혹은 아모르라고도 부른다. 남성과 여성을 결합해 새로운 세대를 낳게 하는 사랑의 신이다. 에로스의 황금 화살을 맞은 자는 격렬한 사랑을 느끼고, 납으로 된 화살을 맞은 자는 사랑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프시케와의 사랑 이야기는 에로스에 얽힌 신화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사람들이 프시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느라 아름다움의 상징이던 아프로디테 제단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졌다. 불멸의 신에게 바쳐야 할 경의가 인간을 향하자 아프로디테는 몹시 화가 났다. 그녀는 “아테나와 헤라보다 내가 훨씬 더 아름답다고 판정이 났지만, 이제 그 영예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구나. 내 명예에 도전한 저 계집애로 하여금 분수에 넘치는 아름다움을 후회하도록 해 주리라.”라며 아들 에로스를 불러 프시케에게 벌을 주려 한다. 프시케의 가슴속에 미천한 자에 대한 연정을 불어넣어 평생 불행한 삶을 살도록 하라는 지시였다.
에로스는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잠자는 프시케의 입술 위에 쓴물 두어 방울을 떨어뜨리고 옆구리에 화살 끝을 댔다. 그 순간 프시케가 잠에서 깨자 에로스는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화살에 상처를 입고 그녀에 대한 뜨거운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이후 프시케는 “미래의 남편이 산꼭대기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신도 인간도 뜻을 거스를 수 없는 괴물이다.”라는 아폴론의 신탁을 듣고 운명에 순종하여 산으로 보내달라고 아버지에게 청한다.
프시케가 숲으로 들어가자 아주 큰 궁전이 있었다.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가자 어디선가 “보이는 모든 것이 여왕님의 것”이라며 궁전에서 편하게 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이후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프시케는 남편을 보지 못했다. 에로스가 깊은 밤에 찾아왔다가 날이 밝기 전에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보여달라고 간청했으나 에로스는 “그대에게 진정 바라는 것은 사랑이오. 나는 신으로서의 숭배보다 같은 인간으로 사랑받기를 바라오.”라며 설득했다. 하지만 프시케는 언니들의 권유로 자고 있는 남편을 확인하다 들키고, 에로스는 자신에 대한 의심에 실망하여 그녀 곁을 떠나버린다. 프시케는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방방곡곡으로 헤매며 남편을 찾아다녔다.
아프로디테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겸손과 순종으로 용서를 빌라는, 대지와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의 충고를 받아들여 신전을 찾아간다.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상처를 받아 병에 걸린 에로스 때문에 더 화가 난 아프로디테는 프시케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과제를 준다. 뒤죽박죽 섞어놓은 밀, 보리, 완두, 편두 등의 곡식을 종류별로 분리하는 일을 받지만 에로스의 명령을 받은 개미들의 도움으로 일을 끝낸다. 아프로디테는 프시케를 죽이기 위해 사나운 숫양 무리에 있는 금빛 양의 털을 가져오게 시켰지만 강의 신 도움으로 다시 무사히 과제를 해결한다. 마지막으로 프시케의 목숨을 확실히 거두기 위해 죽음의 세계를 다녀오는 심부름을 시키지만 에로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다. 에로스는 제우스 앞으로 날아가 애원했고 제우스는 아프로디테를 설득하여 두 연인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해주었다. 둘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는데, ‘쾌락’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에로스는 육체로 표현되는 본능적 사람을, 프시케는 마음을 담은 사랑을 상징한다. 신화는 에로스와 프시케의 결합을 통해 완전한 사랑에 이른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사랑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서로 완벽한 일치에 이르는 행복한 과정이다. 그래서 아득한 먼 옛날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끊임없이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사랑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 여긴다. 그래서 《탈무드》는 사랑보다 강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한다. “세상에는 강한 것이 열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돌이다. 그러나 돌은 쇠로 깨지고, 쇠는 불에 녹는다. 그러나 불은 물에 꺼지고, 물은 구름 속으로 흡수되며, 구름은 바람에 날아가버린다. 그런데 바람은 사람을 날려버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람은 공포에 위축되나, 그 공포는 술을 마시면 사라진다. 술은 잠을 자는 동안 깨는데, 잠은 죽음만큼 강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죽음조차도 사랑보다는 강하지 못하다.”
사랑과 갈등 그리고 이별
누구나 완전한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사랑에 대한 부푼 기대만큼이나 큰 실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사랑의 기쁨보다는 아픔이 더 일반적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회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프롬(Fromm)은 《사랑의 기술》에서 “현대인은 사랑을 갈망하고 행복한 사랑 이야기, 불행한 사랑 이야기를 펼쳐놓는 무수한 영화를 구경하고 사랑을 노래한 시시한 수백 가지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 하지만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한다. 비록 슬픈 지적이지만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경과를 더할 나위 없이 잘 설명했다.
실제로 대부분은 사랑하면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리고 몇 번의 이별을 겪는다. 첫사랑과 결혼에 이르는 경우가 거의 없음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그나마 최종적으로 결혼에 이른 상대방과 자신이 꿈꾸던 사랑을 누린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10~20대를 지나면서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을 꿈꾸는 것은 무지개처럼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끊임없는 감정싸움으로 뒤범벅된 갈등 과정을 거치면서 형식적 관계 유지에 머물거나 심한 경우 사랑 자체를 불신하는 일도 많다. 갈등과 위기의 원인도 여러 가지다. 대단히 중대한 문제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사소한 감정이나 필요 이상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에로스와 프시케에 얽힌 이야기에도 몇 차례 심각한 갈등과 위기가 나타난다.
먼저 에로스의 오만과 프시케의 의심이 충돌한다. 처음에 자신의 모습을 프시케에게 보여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믿으라고만 하는 에로스의 태도는 극도의 오만에 해당한다. 철저히 남성 중심적 태도로 여성에게 무조건적 추종을 강제한다. 당연히 프시케는 점차 화려한 궁전도 훌륭한 감옥에 불과한 것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황홀하기만 하던 마음도 의심으로 변한다. 언니들은 동생이 자기보다 월등하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샘이 나서 이간질한다. 남편이 잠들면 등잔을 켜고 그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 괴물이면 주저하지 말고 예리한 칼로 머리를 자르라고 한다. 프시케는 처음에는 개의치 않으려 했으나 점차 흔들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주치(Zucchi)의 〈에로스와 프시케〉는 언니들의 충동질을 실행에 옮기는 장면을 담았다. 에로스가 깊이 잠들었을 때 살짝 일어나 등잔불을 켜 들고 남편을 비춰 본다. 한 손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움켜쥐었다. 칼을 든 팔이나 내디딘 한쪽 발의 자세로 봐서 여차하면 사정없이 찌를 기세다. 탁자 위에는 에로스를 상징하는 활이 있고, 프시케가 화살을 밟고 있어서 둘의 사랑이 곧 위기에 처할 것임을 암시한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등잔에서 기름 한 방물이 에로스의 어깨 위로 떨어진다. 금빛 곱슬머리에 어깨에는 봄꽃처럼 부드러운 날개를 단 에로스가 곤한 잠에 빠져 있다가 뜨거운 기름방울 때문에 놀라 막 잠에서 깨는 중이다. 에로스는 “어리석은 프시케여, 이것이 내 사랑에 대한 보답이란 말이냐. 어머니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아내로 맞았는데, 그대는 나를 괴물로 여기고 머리를 베려 했단 말이냐. ··· 사랑과 의심이 어찌 함께할 수 있겠는가?”라며 날개를 펴고 창밖으로 날아가고 이별이 찾아온다.
또 한 번의 위기는 아프로디테의 시험 과정에서 찾아온다. 아프로디테는 프시케가 신들의 도움을 받아 과제를 해결하자 약이 바짝 올라 아예 죽음의 세계에 찾아가 아름다움을 채워둔 황금 상자를 찾아오라고 시킨다. 죽음의 세계는 죽어야 갈 수 있어서 이제는 어찌할 수 없이 세상을 하직해야만 했다. 하지만 다시 신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황금 상자를 전달받는다. 단 상자를 열거나 그 안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이승으로 돌아온 프시케는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어째서 신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내가 이것을 좀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이걸 조금 내 얼굴에 발라서 사랑하는 남편의 눈에 좀 더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면서 황금 상자를 연다.
워터하우스의 〈황금 상자를 여는 프시케〉는 아름다움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금기를 어기는 장면이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프시케가 숲 속에서 몰래 상자를 연다. 까치발로 앉은 모습, 상자를 조금만 여는 모습이 호기심 가득한 그녀의 심리를 잘 반영한다. 화가는 한쪽 어깨와 가슴 일부분을 살짝 드러내서 눈부신 아름다움을 전하려는 것 같다. 기대와는 달리 상자 안에는 아름다움은 하나도 없고 죽음의 잠만 가득 들어 있었다. 상자 속에 갇혀 있던 죽음의 잠은 뚜껑이 열리자 일시에 몰려나와 프시케를 덮쳐, 느끼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시체로 만들어버렸다. 애타게 갈구하던 사랑이 다시 이루어지기 직전에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영영 이별을 고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에로스는 죽음의 잠을 다시 상자 안에 가둔 후, “그대는 예전처럼 몹쓸 호기심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구나.”라며 질책한다.
신화에서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다시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이 이어졌지만 현실에서는 이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고, 모든 허물을 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대체로 일정 시일이 지나면 시들해지곤 한다. 에로스와 프시케 사이에 있었던, 자기만족만을 구하는 오만과 일방적 요구, 서로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 등이 자란다. 점차 아주 사소한 문제로도 다툼이 생기고, 갈등이 반복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수많은 연인이 이 과정에서 이별로 끝을 맺는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통과해 결혼에 이른 사람도 안심할 수 없다. 권태기야 이제 당연한 과정이 되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이혼율도 그렇지만, 설사 한평생을 함께 산다 해도 과연 사랑으로 산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죽하면 사랑이 아니라 정으로 산다는 말이 상식처럼 되었을까! 그래서 사랑처럼 엄청난 기대로 시작했다가 실패로 끝나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프롬의 지적이 단순한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
프롬의 《사랑의 기술》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사랑에 뒤따르는 기대와 실패의 반복을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요즘 유행하듯이 주말에도 피곤해서 잠만 자느라 연애 세포가 말라버린 건어물처럼 아예 사랑을 외면하고 살아야 하는가? 하지만 아무리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사랑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는,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는 즐거운 감정인가? ··· 대부분 현대인은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는다. ···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이듯이 사랑도 기술임을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배우고 싶다면 음악, 미술, 건축, 의학, 공학의 기술을 배울 때 거쳐야 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기술을 배울 때 반드시 거치는 단계는 무엇인가? 편의상 기술 습득 과정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론 습득, 둘째는 실천 습득이다. 만일 의학 기술을 배우려면, 먼저 신체와 여러 질병에 대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론적 지식을 모두 배웠다 하더라도 아직은 의학 기술에 숙달하지는 못한다. 상당한 실무를 거친 다음에야 의학 기술에 숙달하게 되고 마침내 이론적 지식의 결과와 실천 기술이 합치된다. 곧 직관이 모든 기술 숙달의 본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의 습득 이외에도 기술 숙달에 필수적인 세 번째 요인이 있다. 곧 기술 숙달이 궁극적 관심사로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음악에도, 의학에도, 건축에도 그리고 사랑에도 해당된다. 우리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랑의 경우 명백히 실패했는데도 왜 사랑의 기술을 거의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도 아마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기술이라고 한다. 다른 기술처럼 배워야 하고, 이를 위한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만일 다른 활동이라면 사람들은 열심히 실패 원인을 가려내고 개선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말로 실패 확률이 높으면 이 활동을 포기할 것이다. 사랑의 경우, 포기는 불가능하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실패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랑을 뿌리 깊게 갈망하는데도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곧 성공, 위신, 돈, 권력을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은 특별한 배움과 분석 과정 없이 그저 때가 되면 찾아오고 누구나 다 기회가 되면 잘할 수 있는 감정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감정이 있는 한 언제든지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워터하우스의 〈장미의 영혼〉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사랑은 우연히 찾아오는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담벼락을 타고 연분홍 장미가 줄지어 피었다. 향기에 이끌렸는지 한 여인이 넝쿨장미 한 송이에 코를 댄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얼굴을 꽃에 바짝 밀착해서 향기와 꽃잎의 부드러운 느낌에 빠져 있다. 흔히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에 순간적으로 이끌리듯이 사랑도 한순간에 우연히 찾아오는 느낌과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할 준비는 다 되어 있고, 다만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언제가 사랑의 행운이 찾아오면 행복하게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프롬은 그렇게 사랑을 느낌과 감정으로 가볍게 생각해서 반복되는 실패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사랑은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사고와 행위의 영역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성의 영역이다. 주어진 상황과 관계를 분석하고 그에 적합하도록 행동 계획과 실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에 대해 언제나 배울 준비를 해야 한다. 감정에서 벗어나 합리적 판단의 영역으로 들어서야 불안정성과 실패의 위기를 극복하고 안정적 사랑을 누릴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사랑을 막연한 감정으로 치부하는 오류와 함께 사랑을 소유 감정으로 이해하는 태도도 실패의 지름길이다.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로서의 사랑과 존재로서의 사랑을 구분한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사랑은 하나의 사물, 즉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여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는 사물은 없다. ··· 사랑은 상대방과 자신의 생명력을 증대시키고 소생시키는 과정이다. ··· 소유 양식에서 사랑이 경험될 때 사랑하는 대상을 제한, 감금, 통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목을 조르고 질식시키며 죽이는 행위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오용하고 있다.”
현실에서 서로의 생명력을 증대시키는 사랑은 예외에 속할 정도로 드물다. 상대방에 대한 집착이나 상호 의존을 사랑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물론 처음부터 소유 감정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 구애 기간에는 아직 상대방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상태이기에 서로의 매력에 흥미를 느끼고 취향을 충분히 존중해주려 한다. 서로 자극하고 마음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낌없이 주려 한다. 소유 감정보다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을 맞추어나간다. 하지만 어느 정도 관계가 깊어지고 자신감과 확신이 생기자마자 상대방을 자신의 틀 안에 꿰맞추려 한다. 단순히 자기만을 바라봐야 한다는 요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향이나 생활 습관까지도 맞추어주길 원한다. 존재에 대한 존중보다는 소유 감정이 점점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배려에서 집착으로 변질한다.
특히 결혼이라는 계약을 통해 각자에게 상대방의 육체, 감정 및 관심의 독점적 소유를 인정하게 되면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한다. 사랑은 그가 소유한 어떤 것, 즉 하나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더 이상 상대방의 환심을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점차 서로에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고 심지어 사랑한다는 표현조차 사라지기 시작한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권태가 찾아오고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그들은 실망하고 당혹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지 않으며 또 지금까지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어느 한 쪽 또는 양쪽 모두가 깨닫게 되면서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혹은 흔히 정으로 산다는 말을 많이 하듯이 사랑을 포기하고 사회적 편의와 관습, 상호 경제적 이해, 자식에 대한 공동 관심 등을 매개로 관계를 그럭저럭 유지하는 정도를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며 산다.
이때, 둘 사이에 사랑이 사라져버린 원인을 대개 상대방 탓으로 돌린다. 상대의 마음이 변해서 혹은 상대가 나에게 과도하게 요구하고 간섭해서 나타난 문제로 진단한다. 자신은 속았을 뿐이고 잘못 선택한 사랑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상대나 상황이 나타나면 이제는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새로운 기대는 대부분 새로운 실패로 귀결되곤 한다. 사랑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랑하지 않게끔 한 잘못임을 아무도 생각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이 상호 존재의 표현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에게 속하고 복종하기를 바라는 집착에 있었음을 성찰하지 않는다.
결국 프롬이 보기에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막연한 느낌이든, 아니면 상대방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든 기본적으로 감정 영역이 사랑을 지배하면서 실패의 서곡이 울린다. 완전하거나 영원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안정적이고 만족할만한 사랑을 꿈꾸고자 한다면 감정의 굴레에서 사랑을 구원해야 한다. 인간인지라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실패 경험을 분석하여 원인을 규명하고, 새로운 방향과 이를 실현할 구체적 방법을 모색하는 합리적 사고 과정을 거친다면 고질적인 실패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있다.
특히 소유 감정으로서의 사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더욱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 사람에 대한 소유 욕구는 사회의 경제적 소유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자리 잡으면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소유 의식이 형성되었고, 가장 철저하게 사적 소유를 신성화한 자본주의체제에서 소유 의식이 극에 달하면서 인간이 인간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도 사회구조에 대한 깊이 있는 이성적 성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롬의 주장에 여러 의문이 꼬리를 문다. 과연 사랑을 감정이 아닌 합리적 사고와 행위 영역으로 두는 것이 타당한가? 각자의 감정과 욕구에 충실한 사랑은 지양되어야 할 불장난에 불과한가? 맹목적 사랑이 실패를 경험한다고 해서 과연 경제 행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낭비에 해당하는가? 사랑의 실패조차도 아름다울 수는 없는가? 서로에 대한 소유 감정은 사랑하는 관계에 불가피하게 동반되는 자연스러운 욕구 아닌가? 소유 감정은 그 자체로 나쁜가? 사회구조가 바뀌면 사랑하는 사람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싶다는 감정도 사라질까?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을 구분할 수 있기는 한가? 다시 말해서 모두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사랑의 보편적 상태가 도대체 있기는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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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 1757~1822년)
이탈리아 신고전주의 조각의 대표자. 당시 바로크와 로코코에 대한 반발로 고전주의적 풍조가 일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 유적 발굴 성과를 토대로 고대 조각을 열심히 연구하고 모방했으며 나폴레옹 등 여러 명사, 귀족의 묘비와 초상을 고대 양식으로 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에로스와 프시케〉, 〈페르세우스〉, 〈두 명의 권투선수〉 등이 있다.
글
출처
《미술관 옆 인문학 2: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만나다》는 인간의 본성에서 문명의 충돌까지 삶과 죽음에서 사랑과 욕망까지, 성찰의 인문학, 상상의 인문학을 물으며 인문학..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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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사랑은 이성인가 – 미술관 옆 인문학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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