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미술관 옆
인문학 2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할 것인가

로트레크 ‘침대 위에서의 키스’와 푸코 ‘성의 역사’

뜨거운 감자, 동성애

문학이나 음악 등 다른 예술 영역과 마찬가지로 미술에서도 사랑은 중요 주제였다. 물론 기나긴 중세 동안 세속적 사랑의 표현 자체가 금기 대상이기는 했다. 하지만 강요된 침묵의 틈을 비집고 먼저 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이 성을 통해 중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철저한 종교적 엄숙주의 위에 유지되던 중세체제는 자유로운 성적 표현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술에서도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을 선두로 적극적 신체 묘사를 통해 인간의 성과 자유의지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중세의 장막을 걷어낸 르네상스는 그리스 · 로마 문화의 부활을 의미했으나 뒤이어 맹위를 떨친 종교개혁이 다시 무덤 속에 넣고 돌로 막아놓은 게 있었으니 바로 동성애였다.

로트레크의 〈침대 위에서의 키스〉는 동성애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그림이다. 두 여성이 침대에서 키스를 나눈다. 키스하는 동안 팔을 둘러 서로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모습이 상당히 친숙한 관계임을 보여준다. 눈을 지그시 감고 서로의 느낌을 달콤하게 음미하는 듯하다. 로트레크는 레즈비언의 사랑을 담은 열한 점의 그림을 제작했는데 이 그림은 그 가운데 하나다. 당시 몽마르트르 주변의 작은 바를 비롯한 카페와 사창가에서는 여성끼리의 사랑이 일상적이었다. 사랑을 나누다 얽혀 침대에서 잠을 자는 여성을 보며 “최고다. 다른 어느 것도 이처럼 명료하지 않다.”라고 할 정도로 로트레크는 여성 동성애를 애정이 담긴 눈길로 화폭에 담았다.

침대 위에서의 키스

로트레크, 1892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로트레크만큼 사창가 여성을 많이 그린 화가는 없을 것이다. 그녀들을 대상으로 50여 점의 유화와 수백 점의 소묘를 남겼으니 말이다. 그는 19세기 말,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13년 동안 환락가 풍경에 탐닉했다. 그 결과 ‘퇴폐 화가’라는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사창가 광경을 담은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물랭가의 살롱〉은 무료한 듯 다리를 말아 쥐고 문 쪽을 응시하는 여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가슴과 어깨를 드러낸 여성들이 소파에 기대어 손님이 찾아올 시간을 기다리는 그림이다.

실제로 그는 사창가에 살다시피 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두 다리의 성장이 멈추어 키가 152센티미터에서 더 자라지 않았다. 신체적 아픔은 그가 화가의 길을 걷게 된 동기이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아.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도 난 결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거야.”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는 외모 때문에 20대 중반까지 동정을 지켜야 했다. 돈 없이는 어떤 여자와도 몸을 섞을 수 없었기에 일찍부터 사창가를 드나들었다. 불구인 처지라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되는 홍등가가 오히려 안식의 장소였다. 고흐의 ‘화대’를 대신 치러주면서 함께 매춘업소를 다니기도 했다. 사창가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사창가 여인들 역시 그에게 의지하곤 했다. 그는 아예 몽마르트르의 사창가로 거처를 옮겼다. 글을 잘 모르는 그녀들을 위해 편지를 대필해주거나 신세타령을 들어주고, 술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그녀들의 생일에는 꽃다발이나 과자 등의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녀들 또한 아틀리에에 자주 놀러 왔다. 파리의 물랭루주와 밤의 세계는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매춘 여성과 무용수, 가수 등의 화려한 화장이나 웃음 뒤에 가려진 슬픔과 고달픈 인생은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제공했다. 그래서 사창가를 담은 그림 속에 화려한 색과 함께 어둡고 칙칙한 색이 자주 등장한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아직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매우 심한 편이어서 동성애를 그림으로 담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동성애 장면을 거리낌 없이 화폭에 담아낸 로트레크의 그림은 당시 격한 도덕적 비난을 받곤 했다. 그림이 전시되면 혹시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 때문에 항상 파리 경찰이 전시장을 지켰다고 한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20세기 중반을 넘어서 조금씩 동성애에 대한 인식 변화가 나타나고 21세기에 들어설 무렵에야 부분적으로 몇몇 나라에서 제도적 수용이 이루어진다. 2000년에 네덜란드가 동성 커플의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했고, 이어서 벨기에, 캐나다, 스페인 등이 뒤를 따랐다. 미국은 하와이, 버몬트, 매사추세츠 등 몇몇 주가 동성 결혼을 허용한다. 또한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웨덴 등은 이성 커플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동성 간의 결합을 인정한다. 프랑스는 1999년에 동성 간의 결합을 공인하는 시민연대협약을 통과시켰는데 이성 또는 동성 커플이 동거계약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3년 이상 동거한 사실을 인정받으면 사회보장, 납세, 유산상속, 재산증여 등에서 보통 부부와 똑같은 권리를 누린다.

한국에서는 법으로 동성 간의 결합을 금지하지는 않지만 아직 이성 부부가 누리는 정도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특정 영역에서는 심각한 차별을 받는다. 특히 몇 년 전 캐나다 정부가 동성애로 학대를 당할까 봐 병역을 거부한 한국인을 난민으로 인정한 사건은 한국사회에서 동성애자의 열악한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캐나다 이민 · 난민심사위원회는 “한국에서 심각한 차별을 겪지는 않았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 복무 도중에 육체적 학대를 받을 두려움 그리고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이 그가 군 복무를 이행하지 않고 모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난민 지위를 요청하게 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한국군에서 동성애는 정신적 질병이자 공식적 혐오 대상으로 간주한다.”라며 “동성애자가 성적 지향 탓에 전역한다면 구직과 학업 등 공적 생활에 진입할 기회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와도 상당 부분 일치하는 내용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성적소수자 인권 기초현황조사 자료를 보면 2004년 군에 입대한 A씨는 논산훈련소에서 상담을 받던 중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했으나 비밀이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주위의 소문에 괴로워하다 국군정신병원에 입원했고 군의관에게 전역을 부탁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성행위를 하는 동영상을 찍어오라.”는 것이었다. 이를 거부하자 다시 부대로 복귀해야 했고 이후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다.

B씨는 이등병 시절 선임병이 자신에게 온 편지를 뜯어 읽어버리는 바람에 원치 않게 커밍아웃 당했다. 이후 국군 창동병원 정신과 병동에 한 달 넘게 격리됐으며, 처음 3일간은 독방에 격리되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약을 먹고 에이즈 검사까지 받았으며, 아무런 동의 절차 없이 부모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통보돼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C씨는 내무생활 중 소심하다, 조용하다는 등의 이유로 시달리다 추궁 끝에 커밍아웃했고 반강제로 입원 조치 됐다. 병원에서는 상담 도중 심한 구타와 성관계에 대한 노골적 질문, 농담 등에 시달렸고 자대에 복귀해서도 감시받는 처지가 됐다. 또 다른 동성애자들은 군 생활 내내 목욕과 취침 시 다른 병사와 격리됐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군대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자에 대한 노골적 차별에는 군형법 92조의 계간 및 기타 추행 조항 문제가 상당 부분 연관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계간 및 기타 추행을 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처벌조항이다. 인권위 보고서는 ‘계간’이라는 단어의 사용 자체가 군 형법에서 동성 간 성행위를 변태로 규정한다는 의미이며, 강제와 합의를 똑같은 관점으로 본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지적한다. 병영 내에서 이성 간 합의에 따른 성관계는 처벌하지 않는 데에 비해 동성 간 성관계에서는 합의에 따른 것까지 성폭력으로 간주하여 처벌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에 해당한다. 한국사회에서 군대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성적 소수자들이 근거 없는 비난을 당하거나 혐오 대상이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동성애에 얽힌 이야기들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가 이성애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동성애가 제자 부모의 동의 아래 이루어질 정도였다.

그리스 · 로마 신화에서도 아폴론과 히아킨토스 이야기로 동성애와 관련된 내용을 접할 수 있다. 히아킨토스는 그리스 남부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소년으로 운동에도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를 포함하여 많은 남성 신이 이 미소년을 사랑했는데 결국 강력한 힘을 가진 아폴론의 차지가 된다. 아폴론은 소중한 어린 연인을 한시도 떼어놓지 않았다. 사냥하러 다닐 때 소년에게 사냥개를 몰게 하고 운동하거나 소풍을 갈 때도 항상 함께 했다. 어느 날 둘은 들판의 각각 서쪽과 동쪽에 서서 원반던지기 내기를 한다. 아폴론이 힘껏 던진 원반이 높이 날아올라서 구름 위까지 솟구쳤다. 구름 위에서 둘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던 제피로스는 원반에 서풍을 강하게 불어넣었다. 강한 바람에 날린 원반은 히아킨토스를 후려쳤고 소년은 풀밭에 쓰러져 죽고 만다. 아폴론이 그를 부여안은 채 부르짖는 동안 히아킨토스의 피로 붉게 물든 풀이 한 송이 눈부신 꽃을 피운다. 이 꽃이 히아신스다.

브로크(Broc)의 〈히아킨토스의 죽음〉에서 원반을 머리에 맞은 히아킨토스는 이미 숨을 멈춘 듯 온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다. 자신을 상징하는 화살을 멘 아폴론이 쓰러져가는 연인을 팔과 다리를 이용해 부축한다. 비통에 잠긴 표정으로 끌어안지만 소년의 몸은 이미 통나무처럼 맥없이 쓰러진다. 화가는 아폴론과 히아킨토스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차림으로 그려 둘의 사랑과 슬픔을 더 애틋하게 전하려고 한 듯하다. 발아래로 원반이 나뒹굴고 풀밭에서는 작은 꽃이 피어났다. 아폴론은 이 꽃을 보며 “아아, 슬프다! 너의 넋이로구나.”라고 외쳤다고 한다.

히아킨토스의 죽음

브로크, 1801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 · 로마 신화에서 아폴론과 히아킨토스가 남성 간의 사랑을 상징한다면 제우스가 여신 아르테미스로 변해 칼리스토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여성 간의 사랑을 상징한다. 요정 칼리스토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시녀였다. 아르테미스 여신이 남성과 접촉을 금지했기 때문에 칼리스토는 순결한 처녀로 살기로 맹세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제우스가 숲에서 휴식을 취하는 칼리스토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다. 남자를 피하는 칼리스토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제우스는 계책을 세운다. 제우스는 아르테미스로 변신해 칼리스토를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 시간이 흐르고 숲에서 칼리스토와 목욕을 하다 칼리스토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아르테미스 여신은 분노하며 칼리스토를 곰으로 만들어버린다. 제우스는 칼리스토와 뱃속의 아기를 밤하늘의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로 만들어준다.

신화만이 아니라 실제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사랑을 천박한 생식수단으로 치부했고 미소년과의 애정이 이상적 사랑이라 여겼다. 동성애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던 시대에는 일반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모습의 청년 알키비아데스를 사랑한 동성애자였다. 부인과 자식이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양성애자였다. 이들은 동성애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 형태의 사랑으로 여겼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움과 사랑을 정의하는데, 그 대상은 남성이었다. 플라톤은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며 동성애를 예찬하기도 했다. 플라톤의 이름을 따온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 흔히 우리가 정신적 사랑으로 불러온 이 말의 정체는 사실은 동성애였던 것이다.

《향연》에서 파우사니아스는 세속의 사랑과 천상의 사랑을 구분한다. 세속의 아프로디테에 속하는 에로스는 그야말로 세속적이고 제멋대로 활동한다. 저속한 사람이 느끼는 사랑으로서 먼저 소년을 사랑하고 또 소년에 못지않게 여자를 사랑한다. 성적인 것에 관해서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영혼보다 육체를 사랑하며,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우둔한 사람을 택한다.

그렇지만 천상의 아프로디테에 속하는 에로스는 이와 대조적이다. 이 여신은 순수하게 남성만의 후손이며 상당히 연장자이기 때문에 젊은이의 성적 무절제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이 에로스의 기운을 받은 사람은 남성에게 향한다. “소년을 사랑함에 있어서 이 순수하고 소박한 에로스로 활동하는 사람을 식별할 수 있지요. 그들은 소년이 철이 들 때까지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철이 들기 시작해야 사랑하게 되는데, 소년의 뺨에 수염이 나기 시작할 즈음이지요. 이때쯤부터 소년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일생을 통하여 항상 그와 함께 있으며, 또 함께 생활할 각오를 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는 어린 소년을 아직 철들지 않을 때에 얻었다가, 그다음에 속이고 조롱하고 나중에는 다른 소년에게 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

《향연》에서 동성애의 기원과 정당성을 설명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도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원초적 상태의 인간에게는 세 가지 성이 있었다. 즉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이 둘을 다 가진 남여성이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의 몸, 하나의 머리에 같은 얼굴이 앞뒤로 달려 있었다. 따라서 귀가 네 개고, 팔과 다리도 각각 넷이고, 앞뒤로 두 개의 성기가 있었다. 남성은 두 개의 성기가 모두 남성의 것이고 여성은 모두 여성의 것이었으나, 제3의 성을 가진 사람은 남성과 여성 성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좌우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으며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였고, 야심은 대단했다. 그러다가 결국 인간은 신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다. 제우스와 신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회의를 열었다. 제우스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나는 모든 사람을 두 동강이로 쪼개려 하오. 이렇게 하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요. 즉 그들은 지금보다 약하게 될 것이고, 또 그 수가 늘 테니 우리에게 더 유리하게 될 거란 말이오.”

그래서 본래의 몸이 갈라졌을 때, 그 반쪽은 각각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고 다시 한 몸이 되려고 했다. 남여성이라 불린 성을 가진 사람을 쪼개서 생긴 남자는 모두 여자를 좋아한다. 간부(姦夫)는 대개 이 성에서 나온다. 또 사내에게 미친 모든 여자와 간부도 여기서 나온다. 옛날에 여자였던 사람을 쪼개서 나온 여자들은 남자에 관한 관심이 별로 없고, 오히려 여자에게 마음이 끌린다. 여자끼리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남자를 쪼개서 나온 사람은 남자를 찾아 얻으려 하며, 아직 소년일 때에는 어른 남자를 좋아하여, 그들과 함께 눕고 끌어안기를 좋아하지요. 이런 소년은 자연히 본성상 가장 용감한 자인 까닭에, 청소년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자이지요. ··· 그들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게 하는 것은 파렴치가 아니요, 오히려 대담함과 용기와 사내다운 힘이에요. 이런 것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닮은 사람을 환영하게 하는 겁니다.” 남성 간의 사랑이 우월하다는 유력한 증거로 오직 이런 사람만이 장성해서 정치생활을 감당해나갈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들은 어른이 되면 소년을 사랑하면서도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을 본성상 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이 아니라 다만 법률과 관습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도록 강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저희끼리 함께 살 수만 있어도 만족한다.

동성애와 관련된 기록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림문자나 상형문자, 선사시대의 미술에서도 동성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의 유명한 도공 브리세이스(Briseis)의 항아리 그림 〈키스〉는 성인 남성과 소년의 키스 장면을 담아, 당시 그리스 남성의 동성애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성인 남성이 소년의 어깨를 한쪽 팔로 두르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지며 입을 맞춘다. 소년은 이 남성과 눈길을 맞추며 밝은 표정으로 응한다. 키나 복장을 볼 때 파우사니아스의 말대로 아주 어린 아이는 아니고 이제 10대 중반을 넘어서는 청소년인 듯하다. 당시 저작이나 그림에 비슷한 내용이 자주 나오는 것으로 봐서 소년을 상대로 한 남성 사이의 동성애가 꽤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동성애는 교육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하기에 소년의 교육 담당자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닌, 모범이 되는 나이 많은 사람이 가장 바람직했다. 선생이 사랑하는 청년을 선택하는데 선생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소년은 사랑받는 사람이 된다. 육체 접촉은 주로 상체를 만지거나 키스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키스

브리세이스, 480년 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동성애가 파우사니아스나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지는 않은 듯하다. 소크라테스의 동성애 상대였던 청년 알키비아데스는 《향연》에서 다음과 같이 둘의 관계를 설명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눈을 가졌으며, 늘 아름다운 소년에게 정신이 팔려 다른 모든 것은 알지 못하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 나는 그날 밤을 소크라테스와 함께 잤습니다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버지나 형과 함께 잔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 나는 이 세상에서 만나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조차 안 했던, 지혜와 극기의 사람을 사실 만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동성애는 더욱 정신적 교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름다움이나 사랑은 진리의 틀 안에서 의미가 있고 추구할만하다. 아무리 아름답고 달콤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진실과 진리가 빠졌다면 값진 게 아니었다.

교회가 개인의 정신과 현실 정치를 지배하는 중세가 되자 동성애는 적대적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된다. 〈레위기〉에서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마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라거나 〈로마서〉에서 “남자들도 여인과 함께하는 순리를 버리고 서로를 향하여 음욕이 타올라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릇된 행위에 상당하는 응보를 받았느니라.”라는 구절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동성애를 용서받지 못할 죄악으로 규정한다. 중세 영국에서는 남성 동성애자를 교회법에 따라 생매장하거나 산채로 화장까지 할 수 있었다.

중세 초기 교회의 대표적 교부로서 기독교 교리를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도 《고백록》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사랑의 원칙, 즉 참다운 우정의 한계를 지키지 않고 육체의 허황된 정욕과 물거품 같은 젊음의 환락에 사로잡혀 어두운 안갯속에 휩싸였던 자신의 과거 죄악 가운데 하나로 동성애에 빠졌던 경험을 고백한다.

막 성년으로 접어들 즈음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던 아주 절친한 동갑내기 친구에게 사랑을 느낀다. “이미 이 친구는 마음속에서 나와 더불어 헤매기 시작했고 나의 영혼은 그 친구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감미로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연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연인을 잃은 슬픔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은 어두워지고 눈에 비치는 모든 것에서 오직 죽음만을 보았다. “나는 곳곳에서 그 친구의 그림자를 찾아보려 했으나 이미 세상을 하직했기에 눈에 뜨일 리 없었습니다. 그와 만났던 모든 장소도 싫어졌습니다. 그 장소는 우리가 만날 시간이 되면 ‘보세요! 그가 오고 있어요.’ 하고 말해주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신의 사랑이 아니라 다른 동성애 상대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려 한 죄를 고백한다. 그들과 어울려 희롱하고 달콤한 소설책을 나누어 읽으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유쾌하게 지냈던 과거를 반성한다.

르네상스는 인간 이성과 함께 육체와 연관된 감정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중세에 대한 반발은 그리스 · 로마 문화에 대한 향수를 동반하면서 나타났다. 르네상스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예술가 중에 동성애자가 유난히 많았던 것도 그리스 시대의 성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중에 동성애자로 알려진 인물이 꽤 많았다. 다빈치는 24세 때 17세 소년에게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견책을 받았다. 르네상스에 접어들어서야 아주 조금 틈이 생기는 듯하다가 캘빈의 청교도 종교개혁이 유럽을 휩쓸면서 동성애는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다시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종교개혁이 르네상스의 부활 목록에서 동성애를 제외한 것이다. 르네상스 역시 기독교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수도 있다.

19세기에 도달해서야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동성애가 미술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쿠르베(Courbet)와 로트레크의 시도가 대표적이다. 사실주의 미술을 상징하는 화가 쿠르베의 〈잠자는 여인들〉은 본격적으로 동성애 주제를 다룬 그림이다. 흐트러진 침대 위를 풍만한 두 여성이 가득 채웠다. 팔과 다리가 서로 엉킨 채 두 여성이 곤하게 잔다. 자세히 보면 얼굴에 홍조가 뚜렷이 남았음을 알 수 있는데 사랑의 흔적인 듯하다. 한 여인이 다른 여인의 얼굴에 꽃잎을 떨어뜨려 잠을 깨우는 〈잠 깨움〉이라는 쿠르베의 다른 그림도 다분히 동성애를 표현했다.

잠자는 여인들

쿠르베, 1866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인 쿠르베 때에 와서 동성애가 본격적으로 표현됐다는 것은 흥미롭게 생각해볼 대목이다. 확실히 쿠르베는 사실주의의 아버지답다. 어느 교회에 걸릴 작품에 천사를 그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변하였다고 한다. “나는 천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어야 그릴 것 아닌가.” 쿠르베는 “나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공화주의자이지만 무엇보다 리얼리스트다.”라는 말로 자신의 태도를 표현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쿠르베는 이상적 미를 추구하거나 혹은 상상 속의 주제에 탐닉한 앵그르나 들라크루아 같은 화가와 큰 차이가 있다. 그림을 이상이나 상상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 현실에서 찾았다. 소재와 표현 방식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 시대의 사회적 과제까지 포함하는 사실주의 정신을 추구했다.

이즈음 문학가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동성애 현상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프랑스 천재 시인으로 통하는 랭보는 시인 베를렌과 연인 관계를 맺는다. 만남을 희망하는 랭보의 편지에 베를렌은 “위대한 영혼이여, 어서 오시오. 나는 당신을 원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이다!”라는 말로 화답한다. 1871년 베를렌의 초청으로 파리에 간 랭보는 이때 베를렌과 연인 사이가 되었고 막 신혼이던 베를렌은 아내까지 버리고 랭보와 동거에 들어간다. 랭보와 아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베를렌은 랭보와 다투다 격분하여 총을 쏘아서 상처를 입힌다. 이 사건으로 베를렌은 감옥에 가고 랭보는 고향으로 돌아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지옥에서의 한 철》을 발표한다.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를 공식 선언한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둔 그는 소개로 만난 영국 귀족 더글러스 경과 비극적 사랑에 빠진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더글러스 경의 아버지가 오스카 와일드를 비난하자, 분노하여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다. 하지만 반대 심문 과정에서 동성애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체포당하고 구금과 중노동 2년형을 선고받는다. 이때 오스카 와일드와 관계를 맺은 수많은 영국 귀족, 왕족이 정체성이 폭로될까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오스카 와일드는 수감기간 동안 파산하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야 하는 가난한 삶과 질병에 시달리는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19세기까지 미술에서 동성애가 화가 개인의 조심스러운 시도였다면 20세기에 들어서자 개인적 표현을 넘어서 하나의 저항문화 성격을 띠게 된다. 19세기 미술에서는 동성애를 다루더라도 주로 여성들의 사랑에 머무르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20세기에 접어들자 남성 동성애도 적극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을 거쳐 20세기로 접어들면서 토마스 이킨스의 〈레슬링〉, 데이비드 호크니의 〈샤워하는 두 남자〉 등 남성 동성애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그림들이 나타난다. 20세기 중반을 넘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경계 없는 노골적 묘사가 뒤를 잇는다.

2005년에는 마크 체임벌린이라는 미국 화가가 배트맨을 동성애자로 묘사한 그림을 전시해 뉴욕 화랑가를 떠들썩하게 했다. 맨해튼의 어느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배트맨과 로빈의 사랑을 담은 수채화로 가득했다. 작품 속에서 배트맨은 상체를 드러낸 요염한 자세로 로빈과 입맞춤을 한다. 혹은 쿠르베의 〈잠자는 여인들〉처럼 로빈과 함께 포개어 누워 있기도 한다. 배트맨에 대한 판권을 소유한 DC 코믹스는 이 전시에 격분했다. 슈퍼맨과 함께 남성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배트맨을 동성애자로 묘사한 행위에 분노한 것이었다. DC 코믹스는 소송으로 위협하며 갤러리 측에 작품 철거를 요구했고 갤러리는 결국 압력에 굴복해 문제의 작품을 철거했다.

이 ‘배트맨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미국에 두드러졌던 ‘강하고 남성적인 미국문화 만들기’를 허물어뜨리는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은 전후에 슈퍼맨과 배트맨 등을 앞세워 대내외적으로 패권 국가로서의 ‘강한 미국’ 이미지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일본이 〈아톰〉이라는 만화를 통해 작지만 강한 일본을 부각하려 했다면 미국은 거대하고 강력한 미국의 이미지를 문화, 예술 영역에서 그대로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니 ‘동성애자 배트맨’은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직 한국 미술에서 동성애는 낯선 주제이다. 성을 소재로 한 작품은 최근 들어서 부쩍 늘어났지만 동성애를 다룬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드물다. 이는 동성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지난 10여 년 사이에 동성애 논의가 음지에서 양지로 빠르게 나왔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미술 영역에서는 여전히 암묵적 금기 카르텔이 형성된 느낌이다.

푸코의 《성의 역사》

그동안 동성애 원인을 밝히려는 연구 및 주장이 이어졌다. 한편으로 19세기를 경계로 과학 발달과 함께 동성애를 호르몬 부조화나 성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 등 생물학적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를 기점으로 하여 동성애를 성 심리의 발달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의 결과로 보는 정신분석학적 시도도 있었다. 그런데 동성애 원인을 설명하려는 의학적, 심리학적 시도의 상당 부분은 동성애를 정상적 사고나 행위와는 구분되는, 무언가 비정상적 영역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았다.

사회적, 철학적 측면에서 동성애를 다룬 대표적 인물로 20세기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푸코(Foucault)를 들 수 있다. 그의 저작 가운데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 《자기 배려》, 《쾌락의 활용》 등, 성 문제를 역사적으로 다룬 시리즈는 성 정체성에 대한 현대적 이해의 시초이자 전형이었다.

푸코는 커밍아웃하지 않았지만 동성애자였다. 이미 고등사범학교에 다닐 때 동성애 경향을 보이고, 수업시간에 자살을 기도하는 등 물의를 일으키면서 아버지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의사에게 동성에 대한 성적 관심을 털어놓았지만 당시만 해도 정신과 의사들은 동성애를 심각한 질병으로 취급했기에 우울증은 치료될 수 없었다. 그는 이후 주위 사람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공연하게 밝혔지만 커밍아웃하지는 않았으며 조용히 게이운동에 동참했다.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에 게이공동체를 방문하고, 남자 공중목욕탕에서 번성하던 난교에 마음이 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생애의 상당 부분을 자신에게 내재된 동성애와 가학, 피학, 변태성욕의 영향을 받았고 이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푸코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와 금지는 고작 200~300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성의 역사》에서 유럽이 부르주아 사회로 바뀌면서 성은 은밀하게 유폐되고 동성애를 노골적으로 억압했다고 지적한다.

부부 중심의 가족이 성을 몰수한다. 그리고 성을 진지한 생식기능으로 완전히 흡수해버린다. 합법적이고 생식력 있는 부부가 지배자처럼 군림한다. 부부는 비밀의 원칙을 확보함으로써 본보기로 강요되고 규범을 강조하며 진실을 보유할 뿐 아니라 말할 권리를 갖는다. ··· 섹스가 그토록 엄격하게 억압당하는 것은 섹스가 전반적, 집약적 노동력의 동원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 자체로부터 설명의 원칙이 점점 뚜렷이 드러난다. 노동력이 조직적으로 착취되는 시대에 노동력의 재생산을 허용하는 최소한으로 한정된 쾌락 이외의 다른 쾌락 때문에 노동력이 허비되는 것을 용인할 수 있었을까? ··· 결혼의 규범 파괴나 야릇한 쾌락의 추구는 어쨌든 단죄되어 마땅한 것이었다. 단지 중대성에 의해서만 구분될 뿐인 심각한 죄악 목록에는 외도, 간통, 미성년자 유괴, 정신적 또는 육체적 근친상간뿐만 아니라 남색 또는 여성의 동성애가 포함되었다. 재판소는 부정이나 부모가 동의하지 않은 결혼 또는 수간만큼이나 동성애도 정죄할 수 있었다. ··· 섹스를 대상으로 하는 금지는 기본적으로 사법적 성질의 것이었다. 금지의 근거가 되곤 한 ‘자연’ 역시 일종의 법이었다. 오랫동안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는 범죄자나 우범자였는데, 그 이유는 양성을 구별하고 양성의 결합을 규정하는 법칙이 이들의 존재 자체에 의해 혼란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푸코가 보기에 부부를 중심으로 한 섹스 이외의 성에 대해서는 침묵이 요구된다. 특히 동성애는 마치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존재해서도 안 되며, 행동이건 말이건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여서도 안 된다. 생식기능에 맞지 않거나 생식기능에 의해 변형되지 않는 것은 더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이러한 강제는 부르주아 사회의 원리, 즉 생산성 향상 논리를 근간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구 증가를 굳건히 유지하고 노동력을 재생산하며 사회관계의 형태를 갱신하는 것, 요컨대 성을 경제적으로 유용하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게끔 정비하는 시도에 의해 좌우됐다. 생식의 엄밀한 질서에 종속되지 않는 성의 형태는 현실에서 몰아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다. 사회는 오직 부부 사이의 성행위만을 유아기에서 노년까지 성적 발달의 표준으로 규정했다. 생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동성애나 성적 도착은 정신병으로 취급하고 사법적으로 단죄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일부일처제를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 이외의 가족 형태나 성행위를 금지하여 획일화된 사회체제를 강제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국가기구만을 권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권력은 가족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발생한다. “생산기구, 가족, 제한된 집단, 제도 안에서 형성되고 작용하는 다양한 세력 관계는 사회체제 전체를 뚫고 지나가는 폭넓은 균열 효과에 대해 매체의 구실을 한다.” 그러므로 한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가 영속적, 반복적으로 자기 재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유동성과 다양성을 억눌러야 하는데, 가족 형태의 획일화도 이에 이바지한다. 이를 위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비정상으로 지목된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적 편견이나 금지가 뒤따른다.

《광기의 역사》에서 “아름다움은 추함을, 부는 빈곤을, 영광은 치욕을, 앎은 무지를 은폐한다.”라고 할 때 아름다움, 부유함, 지식은 정상이고 추함, 빈곤, 무지 등은 비정상으로 분류됨을 의미한다. 아름다움, 부, 지식도 결국 권력이다. 여기에 일부일처제도 권력의 하나로 포함된다. 이 권력들은 자신과 다른 것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억압한다.

부권제의 비극과 다양한 가족 형태의 인정

일부일처제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 즉 부권제를 유지하기 위해 획일화된 가족 형태를 강제하고, 동성애를 비롯한 일체의 다른 가족 형태나 성행위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면서 억압이 나타난다. 서양에서 부권제 사회를 상징하는 존재가 제우스이다.

앵그르의 〈제우스와 테티스〉는 절대적 권위의 존재로서 제우스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제우스는 아무도 자신에게 도전할 수 없다는 듯 권좌에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다. 제우스를 상징하는 독수리도 위협적이다. 헥토르와의 대결에 나선 아들 아킬레우스를 살리려고 무릎에 기대어 간청하는 테티스의 모습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모든 신과 인간은 제우스의 통제를 받는다. 그는 전능한 존재이고 심기를 거스른 신이나 인간을 벼락으로 처벌한다. 폭군이면서 광기 어린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제우스는 부인 헤라 외에도 수많은 연인과 정부를 거느린다. 또한 사회에 온갖 금기를 강제하면서도 자신은 금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온갖 욕망을 충족한다. 일부일처제라는 윤리를 여성에게 강제하며 남성 자신은 역사적으로 공창이나 사창을 통해 제한 없이 성을 누렸던 부권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존재다.

제우스와 테티스

앵그르, 1811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제우스가 지배자는 아니었다. 그리스 문명의 뿌리인 미노아 문명에서는 모계제를 상징하는 여신이 최고신이었다. 그들은 가이아와 헤라와 같은 여신을 숭배했다. 하지만 더 일찍 부권제를 형성한 북방 부족이 침입하면서 제우스가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헤라는 제우스의 하위 파트너인 아내의 자리로 떨어진다. 그 이후 헤라는 세상일을 관장하기보다는 제우스에 대한 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린다. 그리스가 모계사회에서 가부장제 도시국가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가족 내에서 억압과 지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독일의 역사가이자 예술사가인 푹스(Fuchs)는 《풍속의 역사》에서 일부일처제는 “부가 남자의 수중에 집중되고 따라서 부를 그 남자의 자식들에게 상속해 타인의 자식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는 요구에서 발생했다.”라고 규정한다. 부권제에 기초한 일부일처제는 남성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쪽의 성이 다른 쪽을 억압하는, 즉 결혼에서 남자의 지배가 그 상대인 여자를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권사회에서 남성은 자유롭고 행복할까? 슬프게도 남성 역시 가부장제의 족쇄에서 신음하며 지내야 한다. 억압의 부메랑이 자신의 심장을 향한다. 경제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대부분 남성은 끊임없이 고된 노동을 해야 하고, 나머지 가족 구성원과의 수평적이고 친숙한 관계를 잃어버린 채 아버지라는 섬에 고립된다.

이미 부권제에 기초한 일부일처제 가족 형태는 위기를 맞이했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일찍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시도한 뒤 급증하기 시작한 계약결혼 가족이 전체 가정의 10%를 차지한다. 30세 이하 커플의 50%가 법적 관계없이 살고 있으며 전체 신생아의 36%가 혼인 외 출산이다. 서로 구속하는 공동생활을 거부하며 이웃에 거주하는 가족 형태인 별거가족(LAT족, Living Apart Together)도 갈수록 급증하는 추세다. 편부모 가족도 1700만에 달하는데 이는 아이가 있는 가구의 16%에 해당한다. 비공식 통계로 최대 1만 5000여 가구, 15만여 명이 일부다처제 가족인 것으로 파악된다. 독신자도 늘어서 프랑스 성인 6명 가운데 1명이 독신이다.

이미 가부장제를 특징으로 하는 일부일처제 가족이 지배적 가족 형태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워진 상황이다. 가족 형태의 다양화는 앞으로 대부분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날 전망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부장제 가족의 특징인 억압성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가부장제 가족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가족 형태의 공존을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개인의 취향 문제와는 별도로 사회적 차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요즘에는 사회적으로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데에 공감을 표시하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나는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가 되기 싫지만 다른 사람이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주는 것은 곤란하다.”라는 정도의 의사 표현을 이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로 한 발짝만 더 들어가면 대부분 고개를 가로젓는다. 예를 들어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기본적으로 인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동성가족, 트랜스젠더가족을 인정해야 하는가?’, 한 발 더 들어가서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부부가 입양을 신청했을 때 사회적으로 이를 허용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까지 가면 완강하게 부정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주로 아이가 성장 과정에서 받을 상처를 반대 이유로 거론한다. 부모야 자기 판단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면 되지만 아이들은 사회적 냉대와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그러한 논리대로라면 장애인 시설을 거부하는 시위가 일반적일 정도로 장애인 차별이 극심한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입양 신청도 인정하지 말아야 하는가? 마찬가지로 혼혈가족의 입양신청은?

결국 온전하게 성적 소수자의 자유로운 자기표현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다수 관념에 의해 제한당하는 상황은 아직 한국사회에서 여전한 것이 아닐까? 다시 우리는 사실주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관념으로 현실을 꿰맞추는 비극을 접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눈을 돌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특히 다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종류의 억압에 저항하고 타인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다양한 가족 형태의 인정이 단순히 성적 소수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푸코의 문제의식대로 사회 전체의 억압을 완화하고 자유로운 표현과 행위를 증대하는 아주 중요한 시도가 아닐까?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1901년)
프랑스 화가로 본래 허약한 데다 소년 시절에 사고로 양쪽 다리를 다쳐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다. 그는 서커스, 흥행장, 놀이터, 운동경기, 무용장, 초상화 등을 즐겨 그렸고, 또 공연 포스터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물랑 드 라 가레트〉, 〈이베지루벨〉, 〈키스〉 등이 있다.

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미술관 옆 인문학 2
미술관 옆 인문학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관 옆 인문학 2: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만나다》는 인간의 본성에서 문명의 충돌까지 삶과 죽음에서 사랑과 욕망까지, 성찰의 인문학, 상상의 인문학을 물으며 인문학..펼쳐보기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할 것인가미술관 옆 인문학 2, 박홍순, 서해문집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