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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2

결혼은 사랑의 결실인가

호가스 ‘결혼 계약’과 헤겔 ‘법철학’

결혼에 대한 기대와 실망

흔히 연애를 시작했다고 하면 남자 친구들은 “그 여자 예뻐?”라고 묻고 여자 친구들은 “그 사람 뭐해?”라고 묻는다고 한다.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 없는 슬픈 진실이 담겨 있다. 남성이 여성의 외모를 중시하고, 여성이 남성의 재력을 기준으로 결혼할 상대를 고르는 현상은 이제 거의 상식에 속한다. 미래에 결혼할 상대의 직업을 묻는 말에서 압도적으로 다수 여성이 고수익이 보장되는 전문직 종사자나 안정성이 보장되는 공무원을 선호한다. 최근 성행하는 결혼정보회사에서는 의사, 변리사 등 고연봉 회원을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들을 회비 없이 가입시키고 많은 여성을 만나게 해서 이른바 ‘물이 좋은’ 회사라는 인상을 주려 한다. 여성은 외모, 남성은 경제력을 기준으로 연결해야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근대 경험론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 베이컨은 《에세이》에서 부에 대한 집착이 왜곡된 결혼과 연결되었을 때는 극단적 악덕을 만들어낸다고 지적한다. 부를 중심으로 가족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기 때문에 공익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아내와 자식이 있는 사람은 운명에 담보를 맡기고 있는 셈이다. ··· 확실히 가장 훌륭한 일로 사회에 가장 큰 가치가 되는 것은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들한테서 나오고 있다. 그들은 사회와 결혼해서 사회에 애정과 재산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 부와 결혼이 결합해 추악한 악덕을 양산하는 일이 많았기에 베이컨은 더욱 신랄한 비판을 퍼부은 것 같다.

호가스의 〈결혼 계약〉은 이와 관련된 세태를 보여준다. 〈유행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연작 중 하나로 신랑과 신부 가족이 결혼을 위한 사전 계약서를 쓰려고 모인 광경이다. 당시 영국 상류사회에서 부와 명예의 맞교환을 전제로 빈번하게 일어났던 정략결혼을 다뤘다. 연작의 첫 장면으로 결혼 계약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오른편 백작이 신랑 아버지고, 맞은편에서 안경을 꺼내 들고 계약서를 확인하는 사람이 부유한 상인인 신부 아버지다. 신부 아버지는 막대한 돈으로 결혼을 성사시켜 신분 상승을 꾀한다. 백작은 왼손에 가문의 족보를 들고 자랑하지만, 붕대를 감은 한쪽 발과 목발이 상징하듯이 사실은 사치로 몰락한 귀족에 불과하다. 아들을 정략결혼시켜 돈을 마련해 창밖으로 보이는 저택을 완성하려 한다. 왼편에는 결혼 당사자인 신랑과 신부가 있다. 화려한 복장의 신랑은 신부에게 등을 돌린 채 거울을 바라보기에 바쁘고 신부는 손수건을 꼬며 앉아서 둘 사이에 아무런 애정이 없음을 보여준다.

벽면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바로크 고전양식 그림들이 걸려 있고 가구는 화려한 로코코풍이다. 호가스는 바로크나 로코코 양식의 회화와 장식을 귀족의 추잡하고 천박한 사치 풍조의 하나로 본 것 같다. 귀족과 신흥 부자의 방탕한 생활을 비판함과 동시에, 영국 귀족의 미술 취향을 조롱하고 싶었던 듯하다. 신랑과 신부 앞에는 처량한 모습의 강아지 두 마리가 앉아 있다. 사슬로 서로 매여 사랑 없이 돈과 지위로 구속된 신랑과 신부의 처지를 간접 표현한다. 신부의 관심은 이미 빈약해 보이는 신랑보다는 옆에서 수작을 부리는 훤칠하게 잘 생긴 변호사에게 쏠려 있다. 이 그림은 연작의 첫 작품으로 이후 장면은 당연히 신부 머리 위에 걸린 메두사 그림이 상징하는 그대로 불행으로 치닫는다.

결혼 계약

호가스, 1743~1745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결혼》에는 결혼에 대한 상반된 두 관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대화가 나온다. 대화의 한쪽 주인공인 부인은 결혼의 진지함과 신성함에 대해 강조한다. 그녀는 애정이 없는 결합은 결혼이 아니고, “오직 사랑만이 결혼을 성스럽게 하고 진정한 결혼은 오직 사랑으로 성스러워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결혼과 연결되는 진정한 사랑은 “남자건 여자건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선호함”을 뜻한다. 상대편 신사가 “얼마 동안이나 선호하는 겁니까? 한 달? 두 시간? 아니면 30분요?”라며 빈정거리자, 부인은 “오랫동안이죠. 때로는 평생 동안이고요.”라고 답한다. 순간에 해당하는 육체적 사랑을 넘어서 “이상의 일치나 정신적 동질성에 바탕을 둔 사랑”을 통해 영원에 도달할 수 있다. 이처럼 결혼은 진정한 사랑에 기초함으로써 윤리나 의무의 성질을 가져야 한다.

신사는 부인의 결혼은 소설에나 있지 인생에는 없는 공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한 남자를 다른 사람보다 선호한다는 게 1년 정도도 지극히 드물고 흔히 몇 달이면 끝나죠. 때로는 몇 주일 또는 며칠, 몇 시간이면 끝나고 맙니다.” 부인이 몇 달 몇 해가 아니라 평생 지속되는 사랑이 인간에게는 있지 않으냐고 하자, 신사는 “아니오, 없습니다. 설사 한 남자가 어떤 잘난 여자를 평생 선호한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는 아마도 틀림없이 다른 남자를 선호하게 될 겁니다. 세상에 그런 일은 항상 있었고 또 지금도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진정한 마음으로 평생 사랑하는 경우는 완두콩 깍지 속에 훌륭한 완두콩 두 알이 나란히 들어 있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반드시 권태가 찾아오기 때문에 평생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하나의 양초가 평생 탄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부인이 주장하는 이상의 일치나 정신적 동질성에 바탕을 둔 사랑이라면 함께 잘 이유가 없다면서 “오늘날 결혼은 사기극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단언한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결혼에 성교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따라서 혼외정사나 강간이 생겨난다. 부부는 자기들이 일부일처제를 지킨다고 사람들을 속이지만, 실제로는 일부다처 또는 일처다부로 산다. “부부가 평생 함께 살겠다는 외적 의무를 받아들인 지 두 달도 안 되어 서로 미워하고 이혼을 원하면서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서 알코올 중독이나 권총 자살 또는 독살 같은 살인을 유발하는 끔찍한 지옥이 생겨나게 됩니다.”

헤겔의 《법철학》

호가스의 그림은 결혼에 대한 신사의 견해가 현실에서 훨씬 더 일반적으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결혼 계약을 한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서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이 각자의 길을 간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조차 거의 없다. 신랑은 외도와 향락에 정신이 팔려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신부 역시 무료한 시간을 대신할 재밋거리를 찾기에 바쁘다.

〈결혼 직후〉는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각자의 쾌락을 좇는 부부의 생활을 하나의 그림 안에 집약해놓았다. 아침을 시작하는 부부의 무관심한 시선에서 서로 별도의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피곤함에 절은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앉은 신랑부터 살펴보자. 술에 취해 만사가 귀찮은 모습이다. 식사 시간임에도 외출용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은 밤새 밖에 있다가 아침에야 귀가했음을 보여준다. 밤새 무엇을 했는지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나 강아지가 냄새를 맡는 주머니 속 여성 모자로 짐작할 수 있다.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레이스 달린 모자는 정부와 함께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목의 종기와 붕대는 사창가를 제집 드나들듯 다니던 남자가 성병 치료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부도 밤을 지새워서 피곤한지 기지개를 켠다. 그녀가 밤에 한 일은 주변에 널브러진 물건들이 알려준다. 바닥에 흩어진 카드, 내팽개쳐진 악기와 악보, 넘어진 의자 등을 고려할 때 밤새 많은 사람과 요란스럽게 카드놀이를 즐겼을 것이다. 방을 나서는 집사의 손에는 지급되지 않은 청구서 더미가 있다. 매일 밤 이어지는 향락에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종한 생활에 정신이 팔린 부부에게 질려버린 모습이다.

결혼 직후

호가스, 1743~1745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 늙은 백작은 사망하고 이제 신랑 신부는 정식 백작 부부가 되었다. 〈몸단장〉은 백작 부부가 된 이후에도 제 버릇 개 못 주고 사치와 향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생활을 담아냈다. 그림은 부인의 방에서 매일 아침에 벌어지는 광경이다. 부인이 아침 몸단장을 하는 중이다. 부인은 화려한 옷을 입었고, 뒤에서 전속 미용사가 머리를 만진다. 왼쪽으로는 아침 기분을 돋우려는 듯 악사의 연주에 맞춰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 신부를 둘러싼 방문객이 오늘은 어떻게 즐거운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낼까 궁리하는 듯하다.

이 그림에서 눈여겨볼 점은 결혼 계약 때 옆에서 신부에게 수작을 부리던 잘생긴 변호가 다시 등장하는 대목이다. 번지르르한 차림의 변호사가 부인에게 어떤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그림은 가면무도회 장면이고 손에는 초대권을 들고 있어서, 가면을 쓰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으니 마음껏 즐길 수 있다고 유혹하는 듯하다. 왼쪽 벽 위에 변호사의 초상화가 버젓이 걸려 있어서 이미 상당히 깊은 관계고 남편은 부인의 방에 얼씬도 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유혹을 상징하는 코레조와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어서 부인이 이제 카드놀이로는 성에 안 차고, 남편과 마찬가지로 본격적으로 다른 남자와 쾌락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게 해준다.

몸단장

호가스, 1743~1745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톨스토이 소설에 나오는 부인의 결혼에 관한 입장을 가장 잘 제시하는 고전으로는 독일 고전철학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헤겔의 《법철학》 중 사랑과 결혼, 가족에 관한 내용을 꼽을 수 있다.

가족은 정신의 직접적 실체성으로서 사랑이라는 감정상의 통일을 기초로 성립된다. 여기에 요구되는 마음가짐은 가족이라는 완전무결한 본질의 일체성 속에 스스로의 개성이 스며들어 있음을 자각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서가 아닌 그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데 있다. ··· 결혼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인륜적 관계다. 그러나 특히 대개의 자연법에서 결혼은 단지 육체적인 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자연적인 그대로만 고찰되었을 뿐이다. ··· 결혼이란 법으로 뒷받침된 인륜적 사랑이라고 하겠으니, 이로써 결혼의 일시적이고 변덕스럽고 단지 주관적인 면이 불식된다. ··· 결혼의 인륜적 의미는 결혼에 의한 통일을 실체적 목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즉 사랑과 신뢰 속에서 개인 생활을 전적으로 공유하는 데에 있다. 그러한 마음가짐과 현실 속의 자연적 충동은 만족되고 나면 곧바로 사라져버리다시피 하는 일개 자연의 요소와 같은 것이 되면서 동시에 실체적인 것으로서의 권리에 어울리는 정신의 기반이 우연히 발동하는 정열이나 일시적 호감의 정도를 넘어서는, 그 자체가 해소 불가능한 기반으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 가족을 하나의 인격으로 보고 가족 성원을 우유적(偶有的) 존재로 하여금 그들 인격성을 동일화하는 것이 인륜적 정신이다.

헤겔이 보기에 사랑이란 한마디로 나와 타자의 일체성 인식이다. 이때 자신은 홀로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상대방과 하나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사랑은 아직 감정의 통일이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진정한 통일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성에 기초한 법의 영역으로 발전해야 하는데, 그 형식이 바로 결혼이다. 결혼을 통해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갖는 불안정성을 극복한다. 그러므로 결혼을 단지 성적 관계로만 고찰하거나 사랑의 다른 표현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적 관계나 사랑이 자연적 충동을 만족하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기 때문에 순전히 우연에 노출되었다면, 결혼은 통일을 목적으로 정신이 작용하여 충동을 억제해 동일성과 안정성을 강화한다. 물론 결혼은 사랑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의 요소를 완전히 벗어던질 수는 없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자연스러운 계기에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지속적인 정신적 유대가 서로 결합됨으로써 한층 발전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충동을 넘어 정신적 유대가 지속하고 통일로 승화한다는 의미에서 결혼은 인륜적 요소다. 헤겔에 의하면 결혼은 인륜적 의무다. 그만큼 결혼은 필연에 속하고,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비윤리적 행위를 하는 셈이다.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의 문제로 머물지도 않는다. 결혼의 선택과 결혼 제도 유지를 윤리적 의무로 승화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유대감, 신뢰, 친밀성 등의 자산은 형성되기 어렵다. 결혼이야말로 공동체 윤리에 기초한 절대 원리의 하나이기에 결혼의 회피나 부정은 공동체, 나아가서는 국가의 통일성을 훼손한다. 결혼을 통해 형성된 가족은 하나의 독립적 인격으로서의 자격을 지닌다. 개별 인간이 만약 그 사람이 없어도 지장이 없는 우연한 존재라면 결혼을 통해 각자의 인격을 동일하게 하는 정신적 계기가 결합하여 지속성을 얻어 필연적 존재로 바뀐다. 그러므로 법은 엄격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두어 감정적 충동과 갈등에 의해 결혼관계가 깨질 가능성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

결혼과 가족, 그 억압에 대하여

결혼을 정신적 통일이자 윤리의 적극적 실현으로 규정하는 헤겔의 관점과 달리 현실은 갈등으로 가득하다. 어떤 면에서는 사랑보다도 더 충동과 욕망으로 가득하다. 특히 부에 대한 집착이나 신분 상승, 생활 안정 수단과 연결되면서 결혼관계의 파탄은 가능성을 넘어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익숙한 현상이 되었다. 적어도 결혼이 ‘어떠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어떠한가’의 문제로 접근할 때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호가스의 주인공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백작의 죽음〉은 이들 부부에게 닥친 파국을 그렸다. 〈몸단장〉에서 변호사가 부인에게 제안한 시나리오대로 이들은 뜨거운 밀회를 위해 가면무도회에 참석한다. 가면으로 편리하게 신분을 가리고 두 사람은 그림의 배경인 밀회 장소로 들어간다. 하지만 아내의 부정을 눈치챈 백작은 이들을 미행하다가 현장을 급습한다. 백작과 변호사는 결투를 벌이고, 백작은 큰 상처를 입어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림은 가슴에 칼을 맞은 백작이 피를 흘리며 막 쓰러지려는 장면이다. 오른편으로 요란스러운 결투에 급히 달려온 주인과 경찰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고 변호사는 급하게 창문으로 도망치는 중이다. 변호사와 부인이 속옷 차림이고 맨발인 데다가 침대가 어지러운 것으로 봐서 막 뜨거운 정사를 벌이려던 찰나에 백작이 들이닥친 듯하다. 부인은 무릎을 꿇고 상처를 입어 휘청거리는 남편에게 용서를 구한다. 바닥에는 가면무도회에서 썼던 두 개의 가면이 나뒹군다. 벽에는 창녀로 보이는 여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액자 옆으로 그려진 벽화는 〈솔로몬의 심판〉 내용을 담았는데 이들 부부에게 닥친 비극적 심판을 암시한다.

백작의 죽음

호가스, 1743~1745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백작의 죽음〉에 이어 호가스는 〈백작부인의 죽음〉이라는 작품으로 연작을 마무리한다. 남편이 결투에서 입은 상처로 죽고, 변호사는 살인죄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부인은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죽은 부인 옆에는 홀로 남은 아이가 나오는데, 검은 고약을 붙이고 있어서 부모의 성병이 전염되어 얼마 살지 못할 처지임을 알 수 있다. 신부 아버지는 슬퍼하는 중에도 죽은 딸의 손에서 반지를 빼고 있다. 결혼 당시에 신랑에게 준 지참금을 돌려받을 길이 없자 보석이 박힌 비싼 반지라도 챙겨야겠다는 심보다. 결국 결혼의 양 당사자인 백작과 부인은 황천길로 가고, 신부 아버지도 신분 상승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것으로 유행 결혼은 끝을 맺는다.

일부일처제 결혼을 통해 각자의 인격을 통일하고, 정신과 정신의 결합으로 지속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헤겔의 기대와 달리 현실에서는 서로 다른 연인에게서 만족을 구하려는 욕구가 반복된다. 그런데 호가스의 〈유행 결혼〉에서도 보이듯이 남자의 외도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여성은 단죄 대상이 된다. 엥겔스(Engels)는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에서 현실의 결혼은 사실상 군혼 생활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사실상 남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실질적으로 변함없이 군혼 생활을 하고 있다. 여자의 경우에는 범죄가 되고 법률적, 사회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일도 남자의 경우에는 명예스러운 일로 간주하며, 최악의 상황에도 기꺼이 용인되는 사소한 도덕적 오점으로 간주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을 상품화하는 공공연한 매춘이 크게 확대되면서 결혼이 남녀 사이의 정신적, 육체적 동일성의 획득이라는 논리는 더욱 설득력을 잃는다고 한다.

매춘이나 외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현실의 결혼은 평등에 기초하여 동일성을 지향하는 과정이 아니다. 흔히 부부를 신뢰와 정으로 끈끈하게 묶인 동반자 관계로 정의하지만 실제로는 지독하게 불평등하고 일방적이다. 입센(Ibsen)의 《인형의 집》은 가족제도 속에서 부부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자신이 그저 인형 같은 장난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노라는 당당히 독립을 선언한 후 가출하려 한다. 남편인 헬머가 ‘남편이나 아이들에 대한 가장 신성한 의무’를 들먹이자 그녀는 ‘자신에 대한 의무’를 주장한다. “이제는 그런 것을 믿지 않겠어요. 무엇보다도 먼저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아뇨, 그렇게 되려고 한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요. 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옳다고 말하겠지요. 책에도 그렇게 씌어 있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건, 책에 무엇이 씌어 있건 그런 건 이미 제게는 아무런 표준도 되지 않아요. 저 혼자서 잘 생각하고 일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어요.”

세상의 규범과 교육은 여성에게 가정에서의 보조적 역할과 순종을 미덕으로 강조한다. 가족 내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큰 차이가 없다. 흔히 부모와 자식 간의 화목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연상하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잔인성은 육체적인 것에서부터 정신적 고문, 무관심, 단순한 소유욕 및 사디즘에까지 걸쳐 있으며,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대부분이라기보다 진정으로 사랑을 베푸는 경우가 오히려 예외임을 믿어야만 한다.”라고 지적한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시인의 한 사람인 소포클레스(Sophocles)의 비극 《안티고네》는 부모의 권위가 자식에게 얼마나 잔인한 억압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의 명령을 어기고 전투에서 죽은 동생을 매장한다. 안티고네가 체포된 후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은 아버지에게 자비를 간청한다. 하지만 크레온은 단호하게 말한다. “모든 일에 아비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 이것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사람은 그 가정에서 순종하는 자식들이 커가는 것을 보고자 기원하고 있다. 결코 향락에 이끌려 계집 하나 때문에 분별을 잃어서는 안 된다. 온 나라 안에서 그 계집 하나만이 터놓고 내 명령을 어기다가 잡혔으니, 나는 내 자신을 국민들에게 거짓말쟁이로 만들기는 싫다. 그년을 죽이고 말겠다.”

부부 관계에서 나타나는 억압, 자식에 대한 억압의 꼭짓점에는 남성이 자리 잡고 있다. 엄마의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강제도 남성 권력의 굴절된 모습이다. 가정에서 여성이 일방적으로 강요받는 육아와 가사 때문에 잃어버린 자신을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해서 회복하려는 모습인 것이다. 이렇듯 가부장제가 가정에 존재하는 각종 억압의 뿌리 역할을 한다. 그만큼 부권제적 억압은 가족 구성원 모두를 왜곡시킨다. 《안티고네》의 결말도 마찬가지다. 크레온이 나중에 결심을 바꾸어 안티고네를 풀어주고 장례도 치러줄 것을 명령하지만 이미 안티고네는 자살한 후였다. 안티고네의 자살을 확인한 하이몬은 아버지에게 칼을 들고 달려들다가 빗나간 칼에 자신이 찔려 죽는다. 또한 아들과 아들 약혼자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아내마저 자살한다.

결혼의 파행적 모습과 가족 내의 억압이 상당 부분 경제적 문제가 원인이라는 엥겔스의 지적은 경청할만하다. “일부일처제가 생겨난 것은 비교적 거대한 부가 한 남자의 수중에 집적된 결과이며, 또한 부를 바로 그 남자의 자식에게 상속시키려는 욕구의 결과였다. 이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여자의 일부일처제였지 남자의 일부일처제가 아니었다. ··· 사적 소유가 공동 소유를 압도하게 되고 상속에 관한 관심이 나타나면서 부권제와 일부일처제가 지배하게 되자, 결혼은 확실히 경제적 고려에 좌우되게 되었다.”

전업주부로 생활하는 여성 가운데 청소년 시절부터 꿈이 육아와 가사였던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대부분은 나름대로 꿈을 키우며 공부하거나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한 남자의 아내, 엄마의 자격으로 한정된 틀 안에 갇힌다. 남편이나 아이에 대한 봉사를 가장 신성한 의무로 여겨야 한다. 어느덧 자기 이름은 사라지고 누구 아내라든가 누구 엄마로 불린다. 여성이 강제된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여러 가지 장애물이 기다린다. 혼자 사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물론이고 이미 10여 년이 넘게 육아와 가사에 전념했기에 직장에서 요구하는 전문 능력을 잃은 지 오래여서 경제적 독립이 불투명하다. 특히 경제적 자립이 어려워 막막해하며 이래저래 남편을 중심으로 한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경제적 예속이 현실의 인격적 예속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남성이 축적된 부와 사회적 권력으로 여성의 몸을 사는 일이 사라지고, 또한 여성이 경제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자에게 몸을 맡겨야 하는 현실이 바뀔 때 진정한 사랑으로 이어진 결혼과 가족 관계가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경제적 조건이 변해도 곧바로 가정에서 여성에게 강제하는 모든 부당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여성이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을 발휘하는 맞벌이 부부라고 해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부당한 대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수천 년에 걸쳐 가부장제 틀 속에서 형성된 온갖 사회적 규범과 문화가 함께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 변화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자립이 인격적 자립의 소중한 출발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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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년)
영국 화가로 초기에는 초상화 작업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얻었고 새로운 시도로 교훈적 주제의 작품을 제작했다. 비판적 시각으로 당시 시대상을 풍자했는데, 변화가 풍부한 전개와 생생한 표현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매춘부의 편력〉, 〈탕아의 편력〉, 〈유행 결혼〉, 〈서서크의 시장〉 등이 있고 《미의 분석》이라는 미학책을 쓰기도 했다.

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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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인문학 2
미술관 옆 인문학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관 옆 인문학 2: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만나다》는 인간의 본성에서 문명의 충돌까지 삶과 죽음에서 사랑과 욕망까지, 성찰의 인문학, 상상의 인문학을 물으며 인문학..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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