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미술관 옆
인문학 2

젊음과 늙음에 대하여

티치아노 ‘인간의 세 시기’와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젊음의 찬가, 노년의 애가

화가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이나 사회 등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이나 조건 등을 작업 대상으로 삼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삶을 직접 작품에 투영하는 예도 적지 않다. 특히 렘브란트, 고야를 비롯해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들은 젊은 시절에서 죽음을 앞둔 모습까지 자신을 파노라마처럼 캔버스 위에 쭉 펼쳐놓는다. 젊은 시절의 자화상은 패기 넘치는 모습으로 가득하지만 노년의 자화상은 하나같이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드물게는 젊음과 늙음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작품도 있다.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인 티치아노의 〈인간의 세 시기〉가 그러하다.

인간의 세 시기

티치아노, 1513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림을 보면 인간의 삶을 어린 시절, 청년 시절, 노년 시절로 나누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다루었다. 오른편에 있는 유년기의 아이들은 배경의 피어나는 싹이나 잠자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은 모든 것이 미숙하고 출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왼편의 청년기는 울창한 숲, 역동적 신체, 피리가 상징하는 활기로 가득 찬 인생의 황금기다. 청년기는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때다. 화가는 사랑하는 청춘남녀를 전면에 크게 부각함으로써 활력이 넘치는 삶을 찬양한다. 신화나 역사적 인물이 아닌 현세의 인간을 나체를 통해 표현하는 과감함도 보인다. 남성은 몸 전체가 거의 드러나 있으며, 여성도 살짝 풀어헤친 어깨와 가슴을 통해 육체적 사랑을 암시한다. 이에 비해 뒤편에 있는 노년기의 인간은 죽은 고목이나 구부정한 허리, 양손의 해골이 상징하듯이 모든 것을 잃고 죽을 날만을 기다린다. 신학에 의하면 죽음은 신에게 다가서는 길목일 테지만 인간적 관점에서만 보면 죽어가는 나무처럼 피하고만 싶은 순간에 불과하다.

르네상스는 신 중심의 중세사회에서 벗어나 현실의 인간에 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확장한 시기였고, 특히 청년기의 건강한 정신과 신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천국에서의 종교적 행복이 아니라 현재 생활의 적극적 영위를 주장한, 르네상스기의 대표적 철학자 몽테뉴(Montaigne)도 《수상록》에서 젊음을 찬양하고 늙음을 안타까워한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아름다운 인간 행동 중에서, 그것이 무슨 종류이든, 옛 시대나 오늘날에나 대부분은 30세 이후보다 그 전에 이루어진 것을 더 많이 헤아릴 수 있다. ··· 나로서는 이 나이부터는 내 정신이나 육체는 불어나기보다 줄었고 전진했다기보다 후퇴했다고 확신한다.”

젊음에 대한 집착과 늙음에 대한 원망은 현대사회에서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인간의 육체 자체를 상품화하는 경향이 대량 소비를 위한 판매 전략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젊음의 찬가는 극단화된다. 영원한 젊음에 대한 집착을 대표하는 인물이 진시황일 것이다. 그는 기원전 3세기에 불로초를 찾기 위해 서불을 비롯해 동남동녀 500명을 동방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집트의 미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시도였다. 이제 사람들은 영원한 삶이 불가능하다는 상식쯤은 갖고 있어서 더 이상 이러한 미련은 없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려는 욕망이 꿈틀댄다.

육체의 상품화와 맞물리면서 젊음을 상업화하려는 시도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난다. 외모를 통해 젊음을 갈구한다. 한국만 봐도 이른바 ‘S라인’ 시장이 끝을 모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44사이즈’ 열풍으로 다이어트 산업의 폭발적 확대가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젊음이라는 코드는 산업과 비즈니스의 확고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배가 불뚝 나온 ‘D라인’을 가진 사람은 무언가 죄를 지은 기분으로 눈치를 봐야 하는 지경이다. 젊음이 사회를 살아가는 필수적 경쟁력이 되어 의식과 행동을 지배한다.

날씬한 몸매, 주름 없는 피부가 젊음 시장의 대표적 상품이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하루에도 여러 번, 일주일에 몇 킬로그램을 책임 감량해주겠다는 플래카드를 봐야 한다. 만약 안 빠지면 전액 환불해준단다. 의류 매장에 가면 마네킹에나 맞을 것 같은 슬림 사이즈의 옷들이 보는 사람을 기죽게 한다. 보톡스 수술이나 눈 밑 주름 수술은 이제 일상 의료 행위에 속한다. 심지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인조차 이마에 깊게 팬 주름 탓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을 가리기 위하여 주사를 맞거나 주름살 제거 수술을 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대한적집사자 혈액관리본부의 발표로는 최근 헌혈지원자 중 거의 절반 가까이가 부적격자라고 한다. 과도한 다이어트로 혈액 영양이 불균형 상태이기 때문이란다. 다이어트 열풍으로 젊은 여성들 사이에 골다공증이 심각하다. 한 대형병원에서 조사한 결과 20대 여성의 골다공증, 골감소증 비율이 5년 전보다 2.5배 증가했다. 20대 여성 10명 중 3명 이상이 골감소증이나 골다공증 환자였다. 건강을 희생해서라도 젊음을 추구하려는 집착이 만들어낸 현대인의 질병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의 육체를 상품화하였다. 하지만 과거에는 육체를 둘러싼 물건의 상품화 성격이 강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전면화된 20세기에 들어서 인간의 육체를 치장하는 온갖 물건이 주요 상품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예를 들어 옷이나 신발 혹은 가방, 액세서리, 화장품 등이 육체 상품화의 주요 소재였다. 하지만 이제는 배와 다리, 심지어 턱과 주름살에 이르기까지 아예 인간의 몸 자체를 상품화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젊음과 늙음을 분리하고 젊음을 행복에, 늙음을 불행이나 심지어 저주에 연결하는 경향은 아주 오래전부터 서양 사고방식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는 청년 전사의 강인한 육체를 찬양하고 또 찬양한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나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보면 “통치자의 눈부신 사지는”, “엄청난 체력과 체격”, “어깨로부터 튼튼한 사지 위에”, “그의 팔은 큰일을 해낼 수 있을 만큼 강했고, 이 강력한 신의 다리는 지칠 줄 몰랐다.”처럼 젊은 육체의 강한 힘에 주목하는 표현이 가득하다. 제우스나 아폴론 조각이 청년의 몸을 통해 영광을 표현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당시 그리스인은 완전한 인간을 육체와 정신의 조화에서 찾았다. 기원전 776년부터 실시되어 4년마다 열린 올림피아는 육체와 정신의 단련은 물론, 전체 그리스의 단합과 통일이라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올림피아에서 격투나 달리기에 열중하는 생동감 넘치는 육체는 정신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표식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그리스인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면서 《수사학》에서 젊음과 늙음을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노인, 즉 전성기를 지난 사람의 성격은 젊은이의 성격과 정반대다. 그들은 여러 해를 살았고, 사는 동안 속은 적도 많고 실수도 많이 저질렀으며,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면 만사가 뒤죽박죽 별로 만족스럽지 않다. 그 결과 노인은 확신이 없으며 모든 일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한다. ··· 노인은 냉소적이다. 모든 일의 가장 나쁜 점만을 본다. 게다가 노인의 인생 경험은 남들을 믿지 못하게 하고, 남을 못 믿으니 의심이 많다. 따라서 열렬히 사랑하지도 심하게 증오하지도 않으며, 편견이 이끄는 대로 언젠가는 증오할 것처럼 사랑하며 언젠가는 사랑할 것처럼 증오한다. 노인은 인생살이 앞에 무릎을 꿇었기에 속이 좁고, 욕망은 그저 살아남게 하는 것보다 더 고매하거나 더 비범한 것을 겨냥하는 법이 없다. 노인은 돈이 얼마나 벌기 어렵고 써버리기 쉬운지를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돈에 관한 한 인색하다. 노인은 겁쟁이고 늘 미리 걱정하며 산다. 혈기왕성한 젊은이와는 달리 그들의 기질은 차디차다. 노년이 비겁함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니, 두려움으로 차갑게 얼어 있다. 노인은 삶을 사랑한다. 모든 욕망의 대상이란 갖고 있지 않은 것이기 마련이고,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을 갈구하는바, 노인은 살날이 얼마 안 남았기에, 삶을 더욱 사랑한다.

노인은 전성기를 지난 사람이다. 신체의 노쇠는 정신의 노쇠를 가져오기 때문에, 노인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까다롭고 소심하고 의심이 많고 수다스럽고 비관적이다. 모든 욕망의 대상이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갈구하는 것인데, 노인은 삶이 얼마 안 남았으므로 성격이 확신이 없으며 미적거리고 냉소적이다. 또한 속이 좁고 인색하며 비겁하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최대의 욕망인 노인의 성격은 고매한 무엇보다는 부정적 집착과 의심이 지배한다. 이렇듯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악덕을 노인에게 다 갖다 붙여놓았다.

중세 이후 서양의 사고와 행위 방식에 절대적 영향을 준 기독교도 젊음과 늙음을 분리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원래 아담과 이브에게 신이 약속한 것은 영원한 삶이었다. 하지만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어서 신에게서 받게 되는 대표적 형벌이 늙음이다. 노년이란 죄의 대가로 주어진 신의 처벌로서 개인적 비극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노인은 늙고 병들고 죽음을 기다릴 뿐인 무익하고 불행한 존재일 뿐이다.

〈전도서〉에는 “세상에서 내가 수고하여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뒤에 올 사람에게 물려줄 일을 생각하면, 억울하기 그지없다. 뒤에 올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내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지혜를 다해서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물려주어서 맡겨야 한다니, 이 수고도 헛되다.”라며 늙어가는 현실을 한탄하는 내용이 나온다. 자기가 이룬 성과를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는 일에 대해 억울함과 실망을 느끼며 그 수고의 헛됨을 토로한다. 자기가 이루어놓은 일의 성과를 온전히, 영원히 자기의 것으로 남겨놓고 싶은 욕망과 죽음을 맞이하면서 자기의 손에서 사라져버려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비통함을 느끼는 장면이다.

중세사회에서 노인, 특히 더 이상 아이를 낳을 능력이 없는 여성 노인은 더욱 극심한 혐오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중세 초기 살인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던 시절, 노파는 몸값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14~15세기 서구 종교예술에서는 늙은 여자를 악의 현신으로 다루었으며, 16~17세기의 마녀재판에서도 젊은 여자보다는 노파가 마녀 취급당하는 일이 더 흔했다.

왕성한 활력이 가득한 청년의 육체에 관한 관심은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적 특징이다. 중세 화가들이 인체에 대한 부정과 혐오라는 인식 내에서 작업했다면 르네상스 화가들은 인체의 아름다움, 특히 청년기에 도달한 육체의 탄탄한 근육을 묘사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청년의 몸을 통해 신을 형상화한 그리스 · 로마의 조각으로부터 인체의 역동적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다. 당시에 인간의 벗은 몸을 미켈란젤로만큼 아름답게 창조한 르네상스인은 없을 것이다. 그 결정판이 유명한 조각상 〈다비드〉와 천장 벽화인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등이다.

〈아담의 창조〉는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의 일부다. 그는 성당 안에 틀어박혀 4년 동안의 고통스럽고 힘든 작업을 통해 이 대작을 완성했다. 아기 천사들을 거느린 채 하늘에서 한쪽 팔에 이브를 끼고 나타난 하느님이 다른 쪽 팔을 뻗어 땅 위의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이다. 아담은 생명의 기운을 느끼는 듯 반쯤 몸을 세우고 힘겹게 손가락을 쳐들고 있다. 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라는, 생명 창조의 신비로움을 담은 창세기 내용에 기초한 그림이다.

아담의 창조

미켈란젤로, 1510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도 젊음과 늙음에 대한 전통적 편견이 진하게 배어 있다. 이미 아담을 어린 아기가 아닌 청년의 몸으로 창조했다는 성서의 발상 자체가 젊음에 대한 선호를 보여주지만, 나아가서 인체 묘사에서도 한층 더 심화된 방식으로 편견이 나타난다. 아담의 몸을 보면 청년의 터질 것 같은 근육과 단단한 골격의 힘이 풍겨 나온다. 심지어 노년의 모습으로 표현된 신조차 젊은 남성의 탄탄한 육체 그대로를 통해 드러낸다. 이 그림만이 아니라 〈천지창조〉에 묘사된 수많은 예언자와 천사 등을 어리든 노인이든 나이와 상관없이 청년의 몸으로 그렸다. 〈최후의 심판〉도 마찬가지여서 중앙에서 세상을 심판하는 예수는 근육질이 풍성한 보디빌더로 느껴질 정도다. 청년의 건강한 몸을 통해 구현할 수 있는 온갖 역동적 동작이 성당의 벽과 천장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인체가 뿜어내는 열기와 긴장감에 할 말을 잃을 정도다.

젊음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내는 추악함

그래서인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늙음을 피하려고 한다. 정작 젊을 때는 늙음에 대해 거의 아무런 생각이 없다. 늙음은 항상 대부분의 사람에게 눈앞에 찾아오고 나서야 현실이 된다. 그렇게 불현듯 찾아온 악마에 대해 탄식을 한다. 무언가를 부당하게 빼앗긴 듯 억울한 표정을 짓고서 말이다. 고려의 학자인 우탁(禹倬)은 〈한 손에 막대를 잡고〉라는 시조에 얹어서 늙음을 탄식하는 노래를 읊었다. 막대기와 가시로 늙음을 거부하려 했더니 그놈의 늙음이 지름길로 찾아오더란다.

한 손에 막대를 쥐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는구나.

고야의 〈늙은 여자들의 시간〉은 늙음의 거부와 젊음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보여준다. 이미 나이가 들 대로 들어 삶과 죽음의 경계 지점에 있을 것 같은 노파가 화려한 신부 옷차림을 하고 머리와 귀, 손가락 등 온몸에 보석으로 치렁치렁 치장하고 있다. 눈 주위의 붉은 테는 온통 욕망으로 가득 찬 내면을 보여준다. 왼편에서는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어 해골 같은 모습을 한 시녀가 거울을 비춰주고 있다. 거울 뒷면에는 ‘어떻습니까?’라고 쓰여 있다. 거울을 보던 노파가 만족한 웃음을 보인다. 뒤편에는 금방이라도 여인을 낚아채서 염라대왕 앞으로 데려갈 듯이 죽음의 사자가 도사리고 있어서 노파는 거의 죽음이 임박한 상태인 듯하다. 하지만 노파는 죽음의 그림자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자태에 황홀해한다.

늙은 여자들의 시간

고야, 1810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노파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낄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으리라. 반대로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 실감할 것 같다. 왜 추악해 보일까?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닌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가? 문제는 캔버스에 비친 모습이 욕망을 넘어서, 보는 사람을 진저리치게 할 정도로 집요한 집착의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것도 이미 어쩔 수 없는 세월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허망한 집착 말이다.

왜 나이 드는 것에 대한 심정이 탄식과 비통함, 실망으로 나타날까?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구는 탄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갖거나 유지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몸은 쉬지 않고 늙어가고 그 종점에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기다리는 상황, 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만들어내는 감정 상태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영원한 삶을 영위하고 싶은 욕망, 자기가 이룬 성과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은 욕망, 삶의 역동성과 활기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 꿈을 실현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세월과 늙어가는 육체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나이부터는 살날보다 산 날이 많아지고 결국 삶의 종착역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육체적 변화와 정신적 변화가 일치하지 않는 존재다.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과 충돌이 발생한다. 인간 욕망의 무한성과 인간 생명의 유한성 사이의 갈등이다. 하지만 갈등의 승자는 언제나 현실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인간도 생명의 유한성이라는 현실을 극복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무한한 욕망이 현실의 벽에 막혀서 생명의 유한성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 멈출 수 없는 속도 때문에 정신적 공황상태, 고통, 탄식을 경험하게 된다.

참으로 욕망은 무한한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특히 근대 경제학은 아예 욕망을 무한한 것으로 보고 어떻게 하면 이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에 기초하고 있다. 그 결과 현대사회는 무한한 욕망의 실현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대 소비사회는 욕망을 부채질하고 모두 충족될 수 있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유포한다. 누구든지 일확천금을 할 수 있다는 환상, 의료와 화장법의 도움을 받으면 언제나 젊음을 유지할 것 같은 환상에 젖어서 살아간다.

그에 비해 생명의 유한성을 현실적으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유 · 소년기나 청년기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심지어 장년기에도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서 대부분은 오늘을 내일의 행복을 위한 투자로 생각하며 개미처럼 산다. 행복을 계속 내일로 미루며 오늘의 수고에 몸을 던진다. 그 내일이 다시 내일이 되고, 다시 내일이 된다. 생명의 유한성을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행복을 내일로 미루는 것이야말로 미련한 짓일 텐데 말이다.

젊음과 늙음의 구분을 넘어 일신우일신하는 삶을!

무엇보다 먼저 젊음과 늙음을 마치 건널 수 없는 대립물로 규정하는 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서로 다른 세대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있다. 근대 경험론 철학의 새 장을 연 베이컨(Bacon)은 《에세이》에서 젊은이와 노인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젊은 사람은 유지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껴안으려 한다. 진정시킬 수 있는 것 이상을 휘저어놓는다. 수단이나 단계를 생각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내닫는다. 우연히 마주친 몇 가지 원리를 추구한다. 개선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미지의 불편을 초래한다. ··· 늙은 사람들은 너무 이의를 제기하고 의논이 길어지고 모험이 적으며 너무나 빨리 곧 후회하고 일을 끝까지 해내는 일이 적으며 적당한 성공에 만족한다.”

젊은이는 판단보다는 발상, 충고보다는 실행, 일정한 일보다 새로운 계획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진취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그 성급함으로 인해 처음부터 극단적 대책을 사용하여 모든 과오를 두 배로 만들고도, 그것을 인정하거나 물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의 특징만으로는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베이컨은 서로의 나이가 가진 장점이 각각의 결점을 교정할 수 있기 때문에 두 계층의 특징을 아울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성만능주의에 빠진 근대 철학을 비판하고 의지 중심의 생철학을 제시한 쇼펜하우어도 《사랑과 슬픔의 철학》에서 “청년 시대의 특징은 관찰이며 노년 시대는 사고가 중심이 된다. 따라서 전자는 시적인 시대며 후자는 철학적인 시대다.”라며 둘 사이의 상이한 경향을 설명한다. 발명과 창조는 청년의 특징이므로 실제로 수많은 공헌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청년은 인생을 입구에서 멀리 바라볼 뿐이어서 과오도 많다. 이에 비해 노인은 인생의 출구에서 체험을 통하여 한눈에 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사물을 판단하고 해명하며 진실과 뿌리를 캐내는 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시적 시대와 철학적 시대 모두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다.

노년이 철학적 시대이기 위해서는 욕망의 무한성과 생명의 유한성 사이의 갈등을 현명하게 넘어서야 한다. 생명의 유한성은 거스를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 문제이니 이에 대한 의문은 무의미하다. 그러면 갈등의 또 다른 측면, 즉 욕망의 무한성은 어떠한가? 욕망은 정말 무한한 걸까? 욕망의 무한성을 전제로 삶을 설계하고, 끊임없이 이를 이루려고 몰두하는 과정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먼저 욕망의 무한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가능하다. 욕망의 유한성 인식, 또한 ‘나쁜 욕망’을 구별하여 유한한 생명과의 갈등을 조절하는 것이다. 갈등 조절을 통한 내면의 안정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전제조건이다. 인생을 고(苦)로 보고 그 원인을 무분별한 욕망 즉 갈애(渴愛)에서 찾는 불교의 접근도 이와 유사한 시각일 것이다.

나이가 드는 과정은 욕망을 조금씩 버려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물론 노인의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일체의 욕망 부정은 구도자에게는 가능하겠지만 인간 모두에게 요구하기는 어렵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보이듯이 큰 고기를 잡고 싶은 꿈과 욕망은 노인에게 적극적 삶의 활력을 부여해주기도 한다. 문제는 성찰 없는 욕망이다. 욕망의 무게를 그대로 유지한 채 살다가 세월의 한계를 확인하는 순간 절망이 찾아든다. 욕망의 무한성을 전제로 인간의 삶을 설계하고, 끊임없이 이를 이루려고 몰두하는 과정은 결국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에 정신적 고통과 공황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인생의 황금기인 청년기에서도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성찰적 자세가 요구된다. 준비를 통해 삶을 영위하듯 죽음도 준비가 필요하다. 욕망을 유한한 것으로 인식하고 허망한 욕망을 구별함으로써 유한한 생명과의 갈등을 조절해야 한다.

육체적 젊음이 곧 새로움은 아니다. 젊지만 지극히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경우를 수도 없이 확인할 수 있다. 유럽만 해도 노인이 된 ‘68세대’가 오히려 지금까지도 더 진취적이다. 미국도 사회적으로 개혁 움직임을 갖는 사람 중에 과거 스페인 내전에 공화파로 참전한 노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고 오히려 젊은 층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젊음이 새로움과 항상 같은 것이 아니듯 늙음과 낡음도 동일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도전하는 마음, 열린 태도이지, 신체적 변화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진실에 더 가깝다.

우리는 젊음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가짜 젊음이 아니라 진짜 젊음을 추구해야 한다. 날로 새로워지고 날로 도전하는 정신의 젊음 말이다. 머무르지 않으려고 하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마음가짐이 곧 젊음이다. 매일 새로워지기 위해서도 매일 집착과 욕망의 짐을 버려야 한다. 내면에 욕망과 집착의 무거운 짐을 쌓아놓은 사람은 매일 새로운 인생의 여행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1576년)
이탈리아의 화가로 고전 양식에서 탈피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 역할을 함으로써 17세기 루벤스, 렘브란트로 이어지는 길을 개척하였다. 안정적 구도와 꼼꼼한 세부 중심의 15세기 회화에서 활기 넘치는 혁신적 구성과 화려한 색채를 중시하는 16세기 회화로의 길을 열었다. 주요 작품으로 〈천상과 세속의 사랑〉, 〈성모승천〉, 〈개를 데리고 있는 입상〉 등이 있다.

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미술관 옆 인문학 2
미술관 옆 인문학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관 옆 인문학 2: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만나다》는 인간의 본성에서 문명의 충돌까지 삶과 죽음에서 사랑과 욕망까지, 성찰의 인문학, 상상의 인문학을 물으며 인문학..펼쳐보기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젊음과 늙음에 대하여미술관 옆 인문학 2, 박홍순, 서해문집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