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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 색채의 마술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미술품 전시회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샤갈전을 꼽는다. 두 차례 모두 국내 전시 사상 최대 관객 동원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관람했다. 2004년 전시회는 무려 70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블록버스터 전시의 시초가 됐는데, 2011년 전시회도 이에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다. 전시 내용도 어디서 그 많은 작품을 가져왔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로 풍요로웠다. 세계 30여 개 미술관과 개인이 소장한 16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으니 엄청난 규모였다.
하지만 작품 소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두 차례 모두 ‘색채의 마술사 샤갈’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안내 책자만이 아니라 개별 작품에 대한 소개도 온통 색채와 관련한 설명으로 가득했다. 기껏해야 화가의 생애를 나열하거나 혹은 ‘사랑을 노래한 색채회화의 대가’라는 소개와 함께 부인과의 사랑을 설명하는 정도가 추가됐다. 색채라는 형식만 있을 뿐 작품이 시대적 상황과 어떻게 맞물렸고 어떤 시대정신을 반영했는지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그 결과 전시 작품을 다 감상한 후에 대부분의 관객에게 ‘정말 화려한 색채를 구사한 화가구나’라는, 지극히 단순한 인상만 남았다.
물론 색채가 샤갈을 특징짓는 중요 요소임은 분명하다. 피카소도 “마티스와 더불어 20세기 가장 뛰어난 색채화가”로 표현할 정도로 현란한 색을 구사했다. 대표작 중의 하나인 〈에펠탑의 신혼부부〉만 봐도 그러하다. 시각을 부드럽게 자극하는 파스텔 톤의 하늘색과 녹색을 바탕으로 빨강, 노랑, 파랑 등 강렬한 원색을 적재적소에 배합하여 감상자를 색채의 향연으로 안내한다. 야수파의 강렬한 색채감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빨강, 파랑, 노랑 등 어찌 보면 생뚱맞게 보일만한 원색이 굳이 ‘녹아 있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자연스럽게 겹치면서 배어 나온다. 서정적 화풍과 화려한 색채 구사로 ‘색채의 시인’이라는 평을 듣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색채는 그림의 한 형식일 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색채로만 감상을 유도하는 것은 작품을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림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두 가지 측면에서 언어의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화가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의 삶과 정신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여 표출한다. 그러므로 감상을 형식적, 기능적 측면으로 제한하면 작품의 생명력을 제대로 흡수할 수 없다. 감상에는 시각적 자극을 넘어서 작품과의 대화 과정이 필요하다.
작품과의 대화를 위한 필수 요소는 상상력이다. 상상력을 통해 그림에 주어진 몇 가지 정보를 서로 연결하고, 시대 상황과 작가의 내면, 나아가서는 현재 우리 삶과 맞닿은 지점을 발견해낼 때 사고의 지평이 비약적으로 확대된다. 상상력은 인문학에서도 사고의 지평을 확장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일상의 사소한 현상이나 사건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배후에 있는 심리적, 사회경제적 연관성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동원한 심화, 확대 과정이 필수다.
그러면 상상력 전개를 위한 첫 발자국을 어떻게 내딛어야 할까? 모든 상상력은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상상력은 관성을 넘어서는 곳에서 시작한다. 관성이란 시각과 청각 등 감각에 주어진 그대로 순응하는 경향,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무조건 수용하는 경향으로 이어지고 통념을 형성한다. 상상력은 굳어진 통념을 깨는 도전이다. ‘왜’라는 질문은 수동적 수용을 넘어설 수 있는 의문을 의미한다. 미술 작품이든 사회 현상이든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할 때 상상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제 다시 샤갈로 돌아가자. 샤갈의 작품을 보고 어떻게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색채의 마술사’라는 규정에 적용할 수 있을까? ‘왜 색을 잘 칠할까?’라는 질문이 성립할 수 있는가? 오히려 ‘색채의 마술사’라는 소개는 작품을 통해 상상력을 펼칠 질문 가능성을 봉쇄하는 역할을 한다. 색을 현란하게 구사하는 화가이니,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라는 지시에 머문다. 관객에게는 개별 작품을 보면서 얼마나 다양하고 화려하게 색을 구사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일만 남는다. 이런 식의 감상으로는 흥미가 점차 따분함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전시회 동선을 따라 중간 정도에 이르면 이제 그게 그것 같고 작품 앞을 지나가는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게 된다.
부인과의 사랑을 둘러싼 내용도 마찬가지다. ‘왜 부인을 사랑했을까?’라는 질문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부인에 대한 사랑이 작품에 유별나게 많이 담겨 있기는 하다. 샤갈은 “나는 그저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하늘의 푸른 공기와 사랑과 꽃이 그녀와 함께 흘러들어왔다. 온통 흰색으로 혹은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늘 그림을 따라다니며 나의 예술의 위대한 중심 이미지가 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부인이 예술적 정서에 미친 영향을 직접 강조한다. 〈에펠탑의 신혼부부〉만 해도 첫사랑이던 벨라와 결혼한 지 25년이 된 해에 그린 작품이다. 신혼부부의 모습을 통해 부인과의 사랑을 순수하던 처음으로 묘사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색채 소개가 도달한 지점과 마찬가지로, 관객에게는 다시 ‘아, 샤갈은 부인을 참 사랑했구나.’라는 인상만 남는다.
이제 ‘왜’라는 질문이 가능한 방식으로 〈에펠탑의 신혼부부〉를 다시 보자. 신혼부부 옆에 왜 닭이 있는 걸까? 왜 닭을 사람만 한 크기로 확대했을까? 생뚱맞게 나무 위에 염소는 왜 그려놓았을까? 〈나와 마을〉, 〈고독〉, 〈전쟁〉, 〈러시아와 암소〉 등 다른 작품에서도 소, 말, 닭 등 가축이 자주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거의 같은 크기로 그려진 경우가 많다. 왜 그는 동물을, 그것도 비정상적으로 확대한 가축을 주요 소재로 선택했을까? 또한 샤갈의 그림에는 공중에서 우주 유영을 하듯이 떠 있는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에펠탑의 신혼부부〉에서도 신랑의 발은 공중에 떠 있다. 또한 샤갈전 안내 그림이기도 한 〈도시 위에서〉를 비롯하여 〈산책〉, 〈탄생일〉 등에서도 사람이 하늘에 떠 있거나 날아다닌다. 왜 화가는 현실을 무시하고 사람을 공중에 올려놓았을까?
사람과 동물의 수평적 교감
동물에 대한 질문에 나름대로 답을 찾는 방식으로 상상력을 확장해보자. 사실 내가 샤갈을 좋아하는 이유는 ‘색채의 마술사’이기 때문이 아니다. 샤갈의 그림에서 색채보다는 그만의 독특한 소재에 관심을 기울인다. 색은 꼭 샤갈이 아니더라도 자연의 빛을 찾았던 인상파 이후로 많은 화가의 탐구 대상이었다.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흐조차 실제 그림은 얼마나 화려한 색으로 가득한가.
샤갈 그림에는 어느 화가에게서도 볼 수 없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바로 그림에 묘사된 동물의 위상이다. 〈에펠탑의 신혼부부〉에서 닭은 마치 신랑, 신부와 함께 그림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주인공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닭의 눈은 때 묻지 않은 아이의 맑은 눈 같다. 또 다른 대표작인 〈나와 마을〉에서는 동물과 사람의 얼굴이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둘 다 살짝 웃는 표정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눈동자를 보면 사람과 동물이 무언가 교감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소젖을 짜는 아낙네와 소도 마치 가족처럼 푸근한 느낌이다. 샤갈에게 동물은 사람의 하위 파트너가 아니다. 그림을 장식하기 위한 소품이 아니라 당당한 주체다. 황소, 암소, 염소, 당나귀, 말, 닭, 물고기 등이 사람과 교감한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오랜 기간 서양미술에서 동물은 인물을 두드러지게 혹은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나마 17세기 이전의 회화에서 동물을 비롯하여 자연은 거의 배제되거나 매우 부분적 수단으로만 다루었다. 중세 회화에서는 아예 생략되거나 등장하더라도 성경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단순한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중세보다 사정이 나아졌지만 근본적 한계를 지녔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인간의 신체였지 자연은 아니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동물과 자연이 독자적 의미를 가지며 회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냥의 대상이거나, 운송수단의 일부, 아니면 장식품의 일종이었다. 언제나 사람이 주인공이고 동물은 대상의 의미를 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화가이자 아카데미 회원이던 데포르트(Desportes)는 17세기 서양 회화에서 동물을 가장 많이 다룬 화가라 할만하다. 그의 작품에서 동물은 사냥 대상이거나 사냥개처럼 사냥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사냥복을 입은 자화상〉에서 볼 수 있듯이 사냥감을 배치한 동물화나 정물화를 자주 그렸다. 화가는 사냥으로 포획한 꿩 서너 마리와 토끼를 발아래 모아둔 채 만족스러운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사냥에 공을 세운 사냥개들이 대견스러운지 몸을 쓰다듬어주고 있다. 당시에 로코코 미술의 한 경향으로서, 귀족의 최고 여가 생활이던 사냥 장면 묘사가 유행했다. 그는 동물을 정교하게 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얼마나 꼼꼼하게 관찰했는지 꿩의 깃털에 나타나는 미세한 색의 변화까지도 반영해서 윤기까지 느껴질 정도다. 또한 사냥개의 잔 근육 하나까지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다.
서양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동물은 단연 말이다. 많은 화가가 전쟁 속에 있는 인간의 역동적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말을 선택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다비드의 〈베르나르 산을 넘는 나폴레옹〉이 대표적이다. 예전에 초 · 중등학교 참고서나 책받침, 공책 겉장에 단골로 실렸던 그림이다. 교과서 내용을 ‘완전 정복’해주겠다는 참고서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아서 자주 사용되지 않았나 싶다. 당당한 나폴레옹을 꾸미기에 더없이 훌륭한 수단이 힘차게 도약하는 말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독일이 자랑하는 화가 뒤러의 판화 〈기사〉에도 효과적 소품으로 말이 등장한다. 그 밖에도 마차를 끄는 말의 모습도 자주 보인다. 영국 풍경화의 새 장을 연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가 대표적인 경우다. 혹은 농촌을 담은 그림에서 쟁기질을 하는 소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기독교 계통의 종교화에서는 단연 목자의 말에 순종하는 양 떼의 모습이 단골이었다.
대부분 서양화에서 동물이 인간의 이용 대상으로만 등장한 것은 〈창세기〉에서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다스려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표현일 수도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자연은 인간에게 정복 대상일 뿐이라는 서양 사상의 뿌리 깊은 인식이 그림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리라.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과 동물의 수평적 교감을 담아냈던 샤갈은 서양 회화의 전통에서 볼 때 하나의 이단아일 수 있다. 샤갈이 그것을 의식했는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싱어의 《실천윤리학》
그동안 인류는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려고 애를 써왔다. 이성을 가진 존재,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과 동물의 질적 차이를 규명하려 노력했다. 자연스럽게 정신을 인간적 특징으로 육체를 동물적 특징으로 분류하고, 이성의 저수지인 정신은 고귀한 것, 육체는 욕망에 이끌리는 저열한 무엇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정신노동은 고귀한 것, 육체노동은 천한 것이라는 인식을 만들기도 했다.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을 분리하고 성적 만족을 천한 것으로 여기게 했다.
나아가 사람과 동물의 질적 구별과 ‘인간=주체, 자연=대상’이라는 인식은 자연을 착취의 대상쯤으로 여겨 동물이 속한 영역인 자연을 정복하고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이용’을 넘어서 무차별 파괴로 이어졌다. 어쨌든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차이라면 동물 내에도 있다. 지능으로 보나 뭐로 보나 원숭이와 지렁이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사람과 99% 유사한 유전자를 갖고 있으며 형태, 생리, 심리학적으로도 가까운 원숭이와 인간의 차이가 원숭이와 지렁이의 차이보다 정말 큰 것일까? 하지만 인류는 원숭이와 지렁이를 다 동물로 분류하고 인간은 동물 전체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수평적 교감을 실현한 샤갈을 생각하면 ‘실천윤리학’이라는 철학적인 새 지평을 연 싱어(Singer)가 떠오른다. 그는 주요 저서인 《실천윤리학》에서 도구나 언어의 사용을 근거로 인간과 동물의 질적 차이를 주장하는 기존의 전통적 관점에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는 사실은 서구 문명의 역사 속에서 의심을 받지 않았다. 이러한 가정의 기초가 훼손된 것은, 우리가 동물로부터 발생했다는 것을 다윈이 발견함에 따라, 하느님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불멸의 영혼을 넣어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야기의 신빙성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동물의 차이가 종류의 차이라기보다는 정도의 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할 기준을 찾아 나섰다. 지금까지 이러한 경계선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예를 들어서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주장되곤 했다. 그러나 갈라파고스 섬의 딱따구리는 나무의 틈 속에서 벌레를 파내기 위해서 선인장 가시를 사용하고 있음이 관찰되었다. 다음으로 다른 동물들이 도구를 사용한다고 해도, 인간만이 유일하게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구달은 탄자니아의 정글에 사는 침팬지가 나뭇잎을 씹어 물을 적실 스펀지를 만들고, 벌레를 잡을 도구를 만들기 위해 가지에서 잎을 훑는 것을 발견했다. 또 언어의 사용이 인간과 동물의 경계라고 주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침팬지와 고릴라와 오랑우탄은 귀머거리의 수신호인 미국식 수화를 배웠으며, 고래와 돌고래는 그들 나름의 복잡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피터 싱어는 실증적 사례를 통해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특히 침팬지는 아주 빈번하게 도구를 사용한다. 침팬지는 나뭇가지를 꺾어 잔가지와 잎을 떼어내고 가지만으로 나무 속의 개미집을 쑤셔 개미를 잡는다.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꿀을 찍어 먹기도 한다. 혹은 단단한 나무 열매를 쪼개기 위해 돌 위에 열매를 올려놓고 다른 돌로 깨뜨려 알맹이를 먹거나 나뭇잎을 이용해 진흙 바닥에 깔개로 쓰기도 한다. 수달도 조개껍데기를 깨기 위해 돌을 사용한다.
또한 동물은 도구 사용을 넘어서 도구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있다. 탄자니아 침팬지가 나뭇잎을 씹어 물을 적실 스펀지를 만드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나뭇잎을 자근자근 씹어서 뭉친 후에 물에 넣으면 스펀지처럼 일정 시간 동안 그 안에 물이 담겨서 멀리 있는 자식에게 물을 가져다줄 수 있다. 물을 갖고 이동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매우 단순하고 저열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어쨌든 동물도 일정하게 도구를 만들어낼 능력을 지녔음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수많은 사례를 볼 때 도구 사용에 관한 인간의 독점권은 인정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언어 문제도 마찬가지다. 흔히 언어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이해되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인간은 자연이 언어라는 선물을 부여한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만이 지니는 언어 능력으로 자연 발생적인 단순 집단을 넘어서 인위적 사회조직을 형성해나가는 정치적 동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피터 싱어는 언어 또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예를 들어 고래와 돌고래의 언어는 물이라는 조건 속에서 음파를 이용한 효과적 언어체계다. 나는 모양이나 속도를 통해 동료와 의사소통하는 벌의 고유한 의사전달체계 역시 인간과 다른 방식의 언어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개와 앵무새의 사례 역시 참조할만하다. 동물도 상호 의사소통할 능력을 갖췄음은 이제 거의 상식에 속한다.
결국 도구 사용 능력이나 언어 사용 능력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질적 차이가 아닌 양적 차이, 즉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단지 동물은 초보 단계에 머물고 있고 인간은 고도로 복잡한 단계로까지 확장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만의 고유성을 근거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규정하고,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할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서구 문명의 발상은 설득력이 없다는 비판이다. 피터 싱어는 인간과 동물의 질적 차이를 근거로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인간과 자연의 분리에서 현대문명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지금이라도 시급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동물에게도 윤리가 적용되어야 하는가?
피터 싱어가 “의식적 존재 너머에도 가치가 있는가?”를 화두로 삼고 의식적 존재, 즉 인간을 넘어서 동물 영역으로까지 윤리를 확장시키는 문제를 고민한 것도 결국 인간과 자연의 절대적 구별이 가져온 파괴적 결과에 대한 반성적, 실천적 모색의 일환이다. 동물도 윤리의 대상일 수 있느냐는 논쟁점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종류의 존재가 도덕적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오직 인간뿐인가, 아니면 동물도 가능한가, 우리는 동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그들은 도덕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동물의 고통은 인간의 고통과 동일시되어야 하는가 등 여러 가지 고민을 포함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는가에 따라 동물로의 윤리 적용 확대에 대해 상반된 결론에 도달한다. 당연히 인간과 동물이 질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면 도덕은 두 대상을 동일하게 다루라고 요구한다. 반대로 인간과 동물이 질적 차이를 강조하면 동물은 다른 적용을 받는다. 인간만이 도덕적 존재라는 결론에 기초하여 당연히 동물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전통적으로 서양 철학은 윤리를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존재에게 한정해왔다. 칸트(Kant)가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자연의 사물은 모두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 오로지 이성적 존재자만이 법칙의 표상에 따라, 다시 말해 원리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 내지는 의지가 있다.”면서 윤리의 원칙을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로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라고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인간만이 이성에 근거한 자유의지로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유일한 윤리적 주체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동물은 외부 자극에 따라 본능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인간만이 스스로 정한 목적과 판단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이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만 윤리는 성립한다는 주장이다.
말을 어렵게 하는 철학자여서 무슨 소리인지 한 번에 다가오지 않을 수 있으니, 윤리에 대한 칸트의 관점을 좀 더 쉽게 이해해보자. 예를 들어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이 침대나 소파에 오줌을 쌌을 때, 우리는 강아지를 앞에 데려다놓고 “아무 데나 오줌을 싸는 너의 행동은 비도덕적이야”라며 윤리적 훈계를 하지는 않는다. 또한 가을이면 사람들이 다 보는 데도 공중을 날아다니며 교미를 하는 잠자리에게 성도덕을 문란케 한다며 비난하지도 않는다. 동물은 이성과 자유의지에 근거하여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행동과 저러한 행동을 구별하여 이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에만 윤리적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피터 싱어는 동물을 윤리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발상을 비판한다. 대부분의 서양 철학자는 합리적인 인간만 윤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합리적 사고 능력이 모자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은 도덕적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는가를 묻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극심한 정신지체처럼 동물보다 더 심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과 밀접하게 관계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이성과 합리성 여부가 윤리의 적용 기준이라면 이들에게 비윤리적으로 행동해도 된다는 모순에 빠진다. 즉 이성과 합리성을 기준으로 윤리 원칙을 세우려는 시도 자체가 설득력이 없다. 정신적 장애인에게 인간적 대우가 당연한 것처럼 그와 비슷한 수준의 자의식을 가진 다른 동물도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존중을 받아야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윤리적 요구를 실천에 옮기는 운동을 동물해방운동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갖는 편향적 사고를 전환함으로써 동물 또한 도덕적 고려 대상임을 분명히 하고 동물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자는 것이다.
레건(Regan)과 같은 학자는 동물의 권리 차원에서 보다 근본적 문제 제기를 한다. 권리는 윤리적 사고나 행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 자체에서 생긴다.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은 본래적 가치를 갖는 모든 존재다. 본래적 가치란 개체가 고유의 선함이나 다른 존재에 대한 유용성과는 독립적으로 지닌, 말 그대로 타고난 가치이며 권리란 본래적 가치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가 말한 바로는 바위, 강, 나무, 빙하 등은 몰라도 최소한 한 살 이상의 정신연령을 가진 포유류는 모두 본래적 가치를 지니고 태어난 존재다. 이 가치는 스스로 삶의 주체임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갖는 특별한 권리다. 즉 동물이 스스로 윤리법칙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해서 그들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 자체로서 본래적 가치를 지닌 모든 동물을 도덕적으로 존중해야 할 의무를 인간은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당장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먹는 일체의 육식은 비도덕적 행위에 해당하므로 중단해야 하는가? 동물에게 윤리를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을 던져왔다. 밀레(Millet)의 〈돼지의 죽음〉은 육식을 위해 거치는 과정을 담았다. 동네잔치에 쓰려는지 여러 사람이 돼지를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돼지 입에 밧줄을 묶고 있는 힘껏 당기지만 수월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한 여인이 돼지가 좋아하는 먹이를 주며 유혹하지만, 이미 자신의 앞에 놓인 운명을 예감한 돼지는 필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친다. 오른편 탁자 위에는 날이 선 한 자루의 칼이 번득이며 다음 절차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이들은 돼지를 잡는 광경이 무서운지 담벼락으로 멀찍이 떨어져 겁먹은 표정으로 서 있다. 동생은 그래도 무서운지 언니의 등 뒤에 숨어 있다.
이 그림에서처럼 돼지의 죽음이 안쓰럽다고 하여 오랜 세월 인류에게 자연스럽게 형성된 육식을 반대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이다. 물론 동물해방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는 아예 육식 자체를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피터 싱어 역시 초기에는 육식을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육식 여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애완동물을 비롯하여 동물을 사랑하자는 막연한 주장이 아니다. 《동물 해방》에서 아파트나 부잣집의 따뜻한 방 안에서 아프리카 난민보다 훌륭한 식사를 하며 살아가는 애완동물이 주요 관심 대상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주요한 관심은 공장식 농장에서 오직 인간의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 생애를 고통 속에 살다가 삶을 마감하는 온갖 가축, 그리고 좁은 우리에서 실험 대상이 되어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살다가 고통 속에 죽어가는 실험실의 동물에 있다. 물론 한국에서처럼 평생을 굶주리며 제대로 움직여보지도 못하고 살아가다 보신탕집 뒤뜰에서 매를 맞으며 죽어가는 잡종견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가운데 특히 가축의 공장식 사육은 심각한 문제다. 축산업을 하는 대한민국 농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지금까지도 두려움에 떨게 한 구제역 참사도 공장식 사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정감사 보도자료를 보면 2010년에 발생한 구제역 때문에 소, 돼지 등 가축 약 350만 마리가 땅에 파묻혔다. 심지어 구제역 발병 대상 지역으로 지정된 농가에서 목숨이 붙은 소와 돼지가 떠밀리듯 구덩이에 파묻히기도 했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파묻힌 가축 중에 돼지가 소의 7배 이상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소는 개별 농가에서 소규모로 방목하며 키우는 경우가 많지만 돼지는 대부분 대규모 공장식으로 기른다. 구제역에 돼지가 취약한 현실은 공장식 사육과 아주 긴밀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공장식으로 사육되는 돼지는 지나치게 좁은 공간에서 학대당한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떨어져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전염병 문제와 별개로 공장식 사육 자체도 큰 문제다. 피터 싱어는 《죽음의 밥상》에서 공장식 사육의 비참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보통 닭장은 가로 약 1470미터, 세로 약 1.4미터 크기에 3만 마리 이상의 닭을 수용한다. 닭 한 마리당 평균 복사용지 한 장 크기의 공간을 준다. ··· 닭 도살 라인은 대체로 분당 90마리를 죽이는 속도로 움직이며, 최고 속도로 돌리면 1분에 120마리, 한 시간이면 7200마리 닭을 죽일 수 있다. ··· 식육용으로 기르는 돼지의 90퍼센트 이상이 콘크리트와 강철로 지은 좁아터진 축사 속에 갇혀 지낸다. 단 한 번도 바깥나들이를 못 하며, 풀밭을 발로 밟아보지 못한다. 심지어 밀짚 더미 위에서조차 잘 수 없다. ··· 현대식 농장의 젖소는 최대한의 우유를 생산하도록 개량된 종이며, 50년 전의 젖소보다 세 배 이상의 우유를 생산한다. ··· 자연적인 젖소의 수명이 대략 20년 정도인 데 비해, 농장 젖소는 보통 5세에서 7세 사이에 죽는다. 자연적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우유 생산에 몸이 오래 못 버티는 것이다.”
육식 자체를 비판하는 논리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기가 많이 있지만, 적어도 현재처럼 과도한 육류 소비와 이를 위한 공장식 사육의 일반화는 가축은 물론 인류를 위해서도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샤갈이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비판적 분석을 하고, 피터 싱어와 같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림을 그렸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농촌의 삶에 대한 강한 동경이 있었음은 그의 글이나 그림을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도시의 인간도 다루지만 상당수의 작품에 등장하는 꽃, 사람, 동물, 집 등은 농촌의 삶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의 철학이나 시대정신과 무관하게 농촌의 삶을 그리워하는 개인적 취향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섣부르다. 샤갈의 그림에서 자연에 대한 친화적 태도가 나타나고, 또한 그림 속 인물이 중력을 무시하고 우주 유영을 하듯 날아다니는 것은 당시 유럽 철학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였던 생(生)철학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베르그송의 생철학 영향을 깊이 받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마리탱과 가까운 관계였다. 이성으로 구축된 현대사회가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하며 통합적 휴머니즘을 강조한 그와 샤갈의 작품은 상당히 친근하게 느껴진다. 쇼펜하우어를 필두로 하여 니체, 베르그송 등으로 대표되는 생철학자들은 이성주의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근대 철학에서 비합리적 영역으로 치부되어 철학의 외부로 던져졌던 의지에 주목했다.
이들은 먼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삶은 합리적, 과학적 이성으로는 접근하기 어렵고, 오히려 이성에 의해 은폐된다는 공통 전제에서 출발한다. 생의 의의, 가치, 본질은 합리적 사고의 굴레에서 벗어나, 체험이나 직관에 연관된 의지에 기초할 때 파악 가능하며, 이를 통해 규명된 충실한 삶 속에서 인간의 궁극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샤갈이 이성의 산물로 만들어진 인공적 대상보다는 인간과 자연의 친근한 관계에 주목하고, 합리적 설정보다는 공중을 나는 사람처럼 비합리적 화면을 선호한 것에서 우리는 생철학의 문제의식과 맞닿은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엘뤼아르(Éluard)는 샤갈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샤갈의 작품을 보고 〈샤갈에게〉라는 시를 지었다. “당나귀 혹은 암소, 수탉 혹은 말이. 바이올린의 몸체를 통해 노래하는 남자는 노래하는 새가 되고, 그의 아내와 춤추는 경쾌한 댄서가 된다. ··· 금빛 초원과 푸른 하늘은 생명 가득한 이슬의 푸른 불빛으로 나뉘고 피는 반짝이고 심장은 고동친다. ··· ” 그의 그림 속에서 사람과 동물이 수평적으로 교감을 나누면서 자연과 일체화된 관계를 맺은 것을 시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샤갈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장자의 《장자》 중, 그 유명한 ‘나비의 꿈’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는 꿈에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날아다니니 어디로 보나 나비였다. ··· 꿈속에서 분명히 나는 나비였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사람으로서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나비인데 사람이라고 꿈을 꾸고 있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 인식의 확실성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만이 아니라 나비와 자신을 구별하지 않았던 장자의 자연에 대한 태도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장자는 ‘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개구리와 개미 또는 그보다 더 비천한 풀이나 기와 조각, 더 나아가서 오줌이나 똥에도 도가 깃들어 있다고 대답했다. 그만큼 인간과 자연의 만물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견지했다. 불교에서도 아무리 미천한 것에도 불성이 깃들었다고 보았다. 길을 걸을 때 지팡이로 땅을 먼저 짚어 작은 곤충이 혹시라도 발에 밟히지 않도록 배려하는 스님의 마음에도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태도가 밑바탕에 깔렸다.
샤갈의 작품을 다시 보자.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구별하려 하지 않았던 장자의 ‘나비의 꿈’을 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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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1887년 러시아 출생.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조국 러시아의 혁명, 나치의 유대인 박해 등을 피해 독일, 미국, 프랑스를 전전했다. 슬라브적인 환상과 유대인 특유의 신비성이 깃든 그의 작풍은 풍부한 색채와 공상적인 이미지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나와 마을〉, 〈탄생〉, 〈모델〉, 〈붓을 든 자회상〉 등이 있다.
글
출처
《미술관 옆 인문학 2: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만나다》는 인간의 본성에서 문명의 충돌까지 삶과 죽음에서 사랑과 욕망까지, 성찰의 인문학, 상상의 인문학을 물으며 인문학..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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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인간은 만물의 영장인가 – 미술관 옆 인문학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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