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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2

문명의 충돌인가

들라크루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십자군 전쟁과 문명의 충돌

들라크루아의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은 중세에 벌어진 십자군 전쟁을 재연한 그림이다. 중앙에 말을 탄 십자군 장교들이 위풍당당하게 성을 누빈다. 뒤편으로 펼쳐진 콘스탄티노플 시가지 여기저기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서 아직도 전투 중임을 알 수 있다. 전면과 좌우로는 성안에 있던 노인, 여성, 어린이들이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을 짓거나 가족을 잃은 슬픔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바닥에는 약탈을 상징하듯 집 안에 있어야 할 물건이 나뒹군다.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들라크루아, 1840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회교도에게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11세기부터 13세기 말에 걸쳐 교회가 주도한 수차례의 원정 전쟁을 말한다. 예루살렘은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곳,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문 곳이었다. 오랜 기간 예루살렘을 지배한 이슬람인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지만, 셀주크 튀르크족이 지배하면서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금지했다. 이에 동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위급한 상황을 전해 들은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공의회를 개최하여 예수의 무덤을 되찾고 동방 그리스도인을 구출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자고 호소하여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이 시작되었다. 그는 성지 해방전쟁을 성전이라고 명명하고 종군하는 군사에게 신의 구원을 약속했다. 그 후 교황의 호소를 전하기 위해 각지에 사람을 파견했다.

정규 십자군은 1096년 여름부터 4개 부대로 나뉘어 출발, 육지와 바다를 지나 이듬해 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했다.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5만 명의 군대였는데, 당시로써는 매우 큰 규모였다. 십자군의 첫 번째 목표는 니케아였다. 당시 튀르크 술탄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1097년 십자군은 니케아를 함락했다. 십자군의 다음 공격 목표는 안티오크였다. 한여름의 행군이어서 많은 병사와 말이 희생됐다. 안티오크는 황폐한 땅이어서 식량과 물이 거의 없었다. 이슬람 군대는 십자군 포위 공격에 대항하느라 7개월이 넘도록 성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십자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장기간 공방전을 치르며 아사 직전이었다. 내부 반역자가 십자군의 돌파를 도운 후에 도시는 겨우 함락되었다.

그러나 성을 점령한 직후, 이번에는 십자군이 이슬람 군대의 포위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이미 식량은 바닥났기 때문에 성 밖으로 나가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 성안에서 예수를 찔렀던 창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찌른 로마 병사 이름에서 유래된 ‘롱기누스의 창’에는 신비한 힘을 있어 이 창을 손에 넣은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믿음이 팽배했다. 이 소식은 십자군의 사기를 북돋는 역할을 했고 예상외의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거듭된 승리로 기세가 오른 십자군은 1099년 6월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공격을 퍼부은 끝에, 마침내 성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제2차 원정(1147~1149)은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에데사가 함락되면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차례 전투에서 십자군이 패배를 거듭하며 실패로 끝났다. 제3차 원정(1189~1192)은 프리드리히 황제가 직접 지휘한 정예 군대가 계속 승전고를 울렸지만 황제가 불의의 사고로 죽어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중단됐다.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했지만 술탄과 화해하여 기독교인의 예루살렘 순례를 허용받았다. 제4차 원정(1202~1204)에서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라틴제국을 수립한다. 이 때문에 서로마와 동로마의 분열이 격화됐다. 제5차 원정(1217~1221)은 동유럽 신흥 기독교 국가의 군사력으로 십자군을 편성하여 이집트 일부 지역을 공격하는 정도에 그쳤다. 제6차 원정(1228~1229)은 4차 원정 불참으로 파문당한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개인적 원정이었다. 뒤이어 제7차 원정(1248~1254)과 8차 원정(1270)이 있었지만 성지 정복 전초전으로 치른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완패당하는 등 실패로 끝남으로써 십자군 전쟁은 막을 내렸다.

성지 회복이라는 거창한 명분과 달리 십자군 원정은 실질적으로 현실 권위를 더욱 확고하게 세우려던 교회, 영토 확장 이익을 추구한 영주, 시장 개척을 희망한 도시 상인의 의도가 맞물린 침략, 약탈 전쟁이었다. 이에 따라 원래 목적인 성지 탈환은 뒷전이고 노획과 약탈이 우선이었다. 심지어 제4차 원정에서는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제국을 건설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십자군의 약탈과 학살은 이미 제1차 십자군 원정 초기부터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교황이 성전을 호소하자 기사 중심의 십자군 편성 전에 이른바 민중 십자군이 먼저 조직된다. 특히 은둔 수도사인 피터가 추종자들을 모아 먼저 민병대 성격의 십자군을 조직한다. 십자군에 참가하여 전사하면 순교자가 된다는 교황의 선언은 열성적 신자를 원정군에 참여시키는 좋은 무기였다. 많은 농민과 일반 신도가 가담했으며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전쟁이기에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만 있었을 뿐 지휘 체계나 훈련도 없이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충분한 계획과 준비도 없이 교황이 나눠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가운을 걸치고 먼저 출발했다.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삽화가 도레(Doré)의동판화 〈십자군에게 설교하는 은자 피터〉는 민중 십자군을 모집하는 은자 피터의 모습을 담았다. 수도복 차림의 피터가 한 손에 십자가를 들고 주변에 빼곡하게 모인 사람들을 상대로 열렬하게 성전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심지어 앞에는 어린아이조차 방패를 들고 십자군에 참여하려는 듯 피터를 향해 걸어간다.

십자군에게 설교하는 은자 피터

도레, 1877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민중 십자군이 지나가는 곳곳에서 약탈이 줄을 이었다. 당시 유럽은 거의 기근 상태였는데, 식량 등 보급품에 대한 대책도 없이 출발한 민중 십자군은 동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헝가리, 불가리아 등에서 대대적으로 약탈을 벌인다. 발칸 지역을 지나 콘스탄티노플로 가면서 마을을 마음대로 약탈하고 도시를 불태우며 주민을 학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성전을 빌미로 한 십자군 원정은 종교적 광란을 부채질했고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한 유대인에 대한 증오로 이어져서 극심한 박해와 학살이 자행됐다. 하지만 정작 전투가 벌어지자 부실한 준비에 전쟁 경험도 없는 민중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 인근의 니케아를 점령하러 갔다가 오히려 이슬람 군대의 몇 차례 공격에 맥없이 쓰러져 전멸당하고 피터만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기사단 중심의 정규 십자군은 더욱 노골적이고 대대적으로 약탈과 학살에 나선다. 안티오크와 예루살렘에서 부녀자와 유아와 노인까지 무차별 참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도레의 〈십자군의 안티오크 학살〉은 당시 안티오크 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민간인 학살 장면이다. 성안에 진입한 십자군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슬람인을 성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린다. 난간을 붙잡고 버티는 이들은 칼로 찌른다. 한 여인은 갓난아이를 안은 채 성벽에 매달려 있다.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십자군의 날 선 창이다. 건물 밖에서도 무차별적 도륙이 진행 중이다. 워낙 생생하게 묘사해서 마치 비명이 진동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십자군의 안티오크 학살

도레, 1877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대규모 학살에 관해 당시 이슬람 역사가 이븐 알 아시르(Ibn al-Atir)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성지 주민은 그들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 프랑크인은 일주일 동안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알 아크사 사원에서 7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 그들 중에는 고향을 떠나와 인근에 살던 이슬람 종교 지도자, 학자, 신자들이 있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많은 이들이 죽었다. 프랑크인은 유대인을 교회당에 몰아놓고 산 채로 태워 죽였다. 그들은 또한 성스런 유적과 아브라함의 무덤을 파괴했다.”라고 했다.

이슬람 역사가에 의한 기록만이 아니라 당시 제1차 십자군 원정대 일원이던 작가가 쓴 《게스타 프랑코룸》이라는 책의 내용도 다음과 같이 끔찍한 학살을 증언한다. “도시 대부분은 거의 시체로 가득 찼으므로 썩는 악취 때문에 지휘관들은 사라센인의 시체를 전부 도시 밖으로 던져버리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라센인이 성문 앞으로 시체를 끌고 와 집채만 하게 쌓아올렸다. 이전에는 누구도 이교도를 그렇게 학살한 광경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시신이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린 화장대에서 불태워졌으므로 신을 제외하고는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헤아릴 수 없었다.” 역사가들은 폭이 채 800미터도 되지 않은 예루살렘에서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흔히 십자군 전쟁을 지중해 양편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표적 문명충돌로 꼽는다. 물론 그 이전에도 두 지역의 대규모 전쟁은 있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제국 사이에 몇 차례에 걸친 전쟁이 있었다. 이 역시 문명충돌의 하나로 이해하지만, 전 유럽이 동원되어 무려 8차례에 걸친 원정 전쟁이 벌어졌고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대립을 고려할 때 십자군 전쟁을 문명충돌의 전형적 양상으로 거론하곤 한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최근에 벌어진 미국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역시 현대판 문명충돌로 꼽힌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과 서유럽 열강을 상대로 되풀이된 이슬람 세력의 테러와 이에 대한 보복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1948년 이스라엘의 성립 이후, 30년간 네 차례에 걸쳐 아랍국가와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중동전쟁도 사실상 이스라엘을 지원한 기독교 중심의 서구열강과 중동 이슬람 국가 사이의 전쟁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부시 대통령은 “이슬람교는 가짜 종교”,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제2의 십자군 전쟁”이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미 그 이전에 레이건 대통령도 “악의 리비아와 선의 이스라엘의 갈등이 이미 구약에 예언돼 있었다.”고 말한 뒤 리비아에 무자비한 폭격을 지시했다. 기독교 중심의 미국이나 서구를 절대적 선으로, 이슬람이 지배하는 아랍을 절대적 악으로 규정하면서 사실상 현대판 십자군 전쟁을 전개하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사이의 충돌이라는 분석과 규정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다.

서구와 아랍 사이의 충돌은 미술에서도 나타난다. 미술 작품이 종교 극단주의 선전수단으로 사용되면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수와 마호메트 묘사 갈등은 먼저 마호메트 풍자 만평이 도화선 역할을 했다. 심지에 불이 붙은 폭탄 모양의 터번을 쓴 마호메트 그림이 덴마크 최대 일간지인 《윌란스 포스텐》에 실렸다. 터번에는 이슬람 종교의 핵심 문구인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도이다.’라는 아랍어가 적혀 있다. 마호메트를 자살폭탄 테러범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이슬람교와 이슬람교도 전체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슬람권은 당연히 강력하게 반발했고 유럽 신문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내걸며 7개국 12개 매체에 확대 게재했다. 뒤이어 유럽에서 충돌과 폭력 사태가 뒤를 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페인의 한 전시장에 미국의 대형 장거리 미사일인 피닉스 미사일을 든 예수 그림이 걸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 굵직굵직한 전쟁을 일으켰던 미국과 예수를 일체화하여 사랑과 평화의 예수가 아닌 전쟁의 화신으로서의 예수를 묘사했다. 그리고 뉴욕의 어느 전시회에서는 오사마 빈 라덴의 얼굴을 닮은 예수 그림이 걸려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예수의 머리가 아래를 향한 이 그림에는 이슬람 전사를 의미하는 ‘무자헤딘’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기도 했다. 당연히 기독교인의 반발이 뒤를 이었다.

이러한 갈등과 충돌을 근거로 인류 역사의 큰 흐름과 변화 요인이 문명의 충돌이라고 강조하는 이론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 가운데 헌팅턴(Huntington)의 문명충돌론이 가장 유명하다. 하버드대 교수이자 정치학자인 헌팅턴은 21세기 세계정세는 평화적 협조체제가 아니라 문명 간 갈등이 증폭하는 형태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문명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한다. 《문명의 충돌》에서 서구에 대한 비서구의 도전이라는 측면에 주목하면서 문명충돌의 양상과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국민국가의 활동은 권력과 부의 추구로 규정하지만, 한편으로는 문화선호 · 동질성 · 이질성 따위로 규정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국가군은 냉전 시대의 세 블록이 아니라 세계의 일곱 내지 여덟 개에 이르는 주요 문명이다. 비서구 사회, 특히 동아시아는 경제력을 키우면서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아가고 있다. 힘과 자신감이 축적되면서 비서구 사회는 점차 자신의 문화적 가치를 주장하고 서구에 의해 강요된 가치를 거부하고 있다. ··· 토착화 과정은 세계 전역의 종교 부활에서, 특히 경제와 인구의 활력이 낳은 아시아와 이슬람의 문화적 부활에서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 종교 부활을 자극하는 요소로는 근대화에 따른 심리적 · 정서적 · 사회적 충격 외에도 서구의 퇴조와 냉전의 종식을 들 수 있다. ··· 이념의 자리에 종교가 들어앉았다. 종교적 민족주의는 세속적 민족주의를 밀어내고 있다. ··· 비서구 종교의 부활은 비서구 사회에서 반서구주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강력한 예증이다. 그러한 부활은 근대화의 부정이 아니라 서구의 부정, 서구와 결부된 세속적이고 상대주의적이며 타락한 문화의 부정이다. ··· 냉전 종식은 분쟁을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 문화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정체성,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는 문명을 형성하게 될 상이한 문화에서 유래한 집단들 사이의 새로운 갈등 양상을 낳았다.

헌팅턴은 1980년대 말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냉전체제는 역사의 뒤로 사라졌다고 진단한다. 탈냉전 시대에는 이념, 정치, 경제가 아니라 문화가 중요 기준이 된다. 사람들은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국민 등 가장 포괄적 차원에서는 문명이라고 하는 문화적 집단에 자신을 귀속시킨다. 문명은 가장 광범위한 문화적 동질성으로 개인은 강력한 귀속감을 느낀다. 문명 단위를 중심으로 오늘날 세계를 바라보면, 적게는 7~8개, 크게는 서구 문명, 중화 문명, 이슬람 문명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지난 수백 년간 서구 문명의 영향력이 아무리 강화되었다 해도 보편 문명의 지위를 차지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먼저 근대 이래로 탄탄대로를 걷던 서구의 눈부신 발전이 이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는 점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팝문화나 맥버거, 소비재의 세계 확산이 서구 문명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유의 문화적 가치를 보유한 동아시아 중화 문명은 근대화를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서구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으로 등장했다. 중동에서도 젊은이들이 청바지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랩 음악을 듣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지만 바로 그들이 메카를 향해 기도하고 의기투합하여 미국 항공기를 폭파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특히 그는 최근 확대되는 이슬람 원리주의 부상을 심각하게 여긴다. 원리주의의 전 세계적 부상은 서구적 사회 · 정치제도, 세속주의, 과학 지향적 문화의 급속한 유입 등에 대한 반작용이다. 20세기에 도입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그 지역의 상황과 조건에 맞게 변형되고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동구 사회주의 국가가 무너지면서 이념적 진공이 생겼다. 그 틈을 뚫고 서구 문명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으면서 종교 근본주의가 강화됐다는 것이다. 이슬람 원리주의는 문명충돌을 가장 설득력 있게 논증하는 근거이며 이슬람 세력은 탈냉전 시대의 평화를 해치는 제1의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헌팅턴이 보기에 현재 세계 정치는 근대화의 자극을 받으면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비슷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국가끼리 뭉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이념과 강대국 중심으로 정의되던 제휴 관계가 문화와 문명으로 정의되는 제휴 관계로 바뀌고 있다. 정치적 경계선이 문화적 경계선 곧 민족적, 종교적, 문명적 경계선과 일치해가는 추세다. 요컨대 서구의 쇠퇴, 다른 한편으로 아시아와 이슬람의 부상은 새로운 국제관계 질서와 윤리를 요구한다. 냉전 시대의 블록을 대신하여 문화적 결속이 등장하였으며 문명과 문명의 단층선이 세계정치에서 주요 분쟁선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서구가 비서구 지역을 정복하고 계몽하려던 태도를 여전히 고수한다면 세계는 갈등과 충돌을 피해 갈 수 없으며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상황이 빚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문명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한가?

헌팅턴의 관점에 대해 그동안 여러 측면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가운데는 문명충돌론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며 문명공존을 주장하는 관점도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인 뮐러(Müller)는 《문명의 공존》에서 헌팅턴의 관점이 적대적, 이분법적 사고를 강조하면서 문명 간 갈등을 더욱 부각하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탈냉전 시대에 서구는 훨씬 안전해졌지만, 일상적 삶은 더 안전해지지 않았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이 틈새를 《문명의 충돌》이 파고들었다.”고 한다. 인간은 경계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변혁, 위기, 곤경의 시기에 불안이 증가하고 경계가 중요해지면서 낯선 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한다. 문명충돌론은 세계정세에 대한 객관적 분석보다는 불안한 시기에 사람들이 갖게 되는 심리를 파고든 논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문명 간 차이점을 강조하며 경계를 긋는 헌팅턴식 ‘편 가르기’는 간편하고 이해하기 쉬울 뿐”이다.

이슬람을 위험 세력으로 지목하는 논리도 강하게 비판한다. “이슬람 문명은 다른 어떤 종교와 비교해도 육로 경계가 현격히 길다. 헌팅턴은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 즉 육로 경계를 사이에 둔 국가들은 갈등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확인해줄 뿐 새로운 사실이 없다.” 지리적, 사회적 조건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을 과도하게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또한 “헌팅턴 교수는 중국과 북한이 이슬람 국가에 무기를 판매한다는 이유로 ‘이슬람 · 유교 동맹’에 우려를 표하는데 이는 미국의 무기 판매를 간과한 것”이다. 인류가 전쟁과 평화 중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이슬람 원리주의나 중국의 도전이 아니고 서구의 문제에 달렸다. 서구가 그동안의 행태처럼 이슬람 세력을 포함한 비서구 세력을 억압하고 강제한다면 갈등과 폭력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대립이 아닌 대화가 필요하다. “인류에게 절실하고 유용한 것은 여러 문명의 공통점과 공감대를 찾는 대화와 협력”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느 정도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진단한다. “여러 사회가 자립적으로 서로 연결해 나가고 있다. CNN 방송과 인터넷, 초국적 비정부기구들은 이런 발전을 가장 잘 보여준다. ··· 지구화의 발전이 내보이는 계기는 상이한 문명권 사회 간에 공통점이 줄어들기보다는 확산되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문명공존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흔히 거론하는 것이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 건축을 대표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건립했으나 소실되었다가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다시 건립되었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전면부만 보더라도 사람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느껴진다. 중간에 기둥을 받치지 않고 올린 중앙 돔은 높이가 55.6미터이고 지름이 33미터에 이른다. 지금은 많이 쇠락한 모습이지만, 원래는 눈부실 정도로 화려했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기에는 중앙에 황금으로 덮여 찬란하게 빛나는 황제의 문이 있었고 금으로 된 천장 모자이크와 제기 등으로 치장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오래됐으며 세계 교회 중 네 번째로 크다.

    • 1이스탄불 소피아 성당 537년경
    • 2소피아 성당 내부

소피아 성당이 문명공존의 상징물이 된 것은 이 지역의 지배자가 기독교 세력에서 이슬람 세력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두 문명의 요소가 파괴되지 않고 공존하기 때문이다. 비잔틴 제국을 점령한 직후 튀르크는 파괴와 약탈을 금했다. 당시 술탄 마호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자마자 곧바로 소피아 성당으로 말을 몰아 성당의 파괴를 일절 금했다고 한다. 이는 포교 명목으로 점령하는 곳마다 무차별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기독교 군대와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심지어 십자군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 같은 기독교 제국임에도 서로마와는 다른 방식의 성화를 무참히 파괴한 경우와 극히 대조적이다.

이슬람은 서구 기독교의 상징이던 소피아 성당을 ‘같은 하느님을 모신 성전’이라며 보존을 명했다. 이후 성당은 이슬람 교회인 모스크로 사용됐다. 또한 지배하에 들어온 이교도에게는 종교와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배려했다.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에게 주어진 불이익이라고는 세금을 더 내는 정도였고 그나마 비잔틴제국 시절보다 가벼웠기에 환영받을 만한 일이었다.

외관만 하더라도 비잔틴 양식 성당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이슬람을 상징하는 높은 첨탑을 외부에 네 군데 세웠을 뿐이다. 그리고 성당 안에 메카를 향하는 경배 장소를 추가했다. 성당 내부는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로 제작된 성화를 회칠로 덮고 부분적으로 이슬람 문양을 덧입히거나 코란 문구를 적은 정도였다. 이는 성상과 성화를 우상숭배로 여기던 이슬람 전통에 따른 것이다. 1935년 이슬람 사원을 박물관으로 고치면서 벽면 회칠을 벗겨내자 500년간 잠자고 있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된 수많은 성화가 거의 손상되지 않은 본래 모습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서 지금은 벽면과 천장에 그려진 예수와 제자, 성모자상 등 기독교 성화와 이슬람 코란 문구가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소피아 성당은 문명 공존의 상징으로 여긴다.

문명공존 필요성 자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인정한다. 문제는 문명공존을 가로막는, 그러한 의미에서 문명 간 갈등을 부추기는 문명공존의 적을 분명히 하고 이를 제거하거나 완화해나가는 일이다. 문명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부정하고 특정 사회의 보편적, 절대적 가치를 획일적으로 강제하려는 모든 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대표적으로 제국주의, 인종주의, 종교 근본주의 등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제국주의는 문명공존의 가장 큰 적이다. 이슬람 세력의 테러 공격이 미국에 집중된 것은 갈등이 문명 간 횡적인 충돌이 아니라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을 그 표적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즉 서구와 이슬람의 충돌이 문화적 정체성이나 종교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목적보다는 세계를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탈냉전 세계화 시대에도 여전히 세계는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의 민족국가와 같은 정치적 행위자 혹은 초국적 자본과 같은 경제적 행위자에 의해 좌우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선진국이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고 중동 내 친미정권과 이를 지탱하는 소수 세력에게 일정하게 부와 권력을 나누어줄 뿐, 이슬람 민중 대부분 빈곤 상태에 빠진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문명충돌론이 주장하는 문화나 문명보다는 여전히 정치와 경제가 더 핵심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십자군 전쟁도 겉으로는 종교적 갈등이 두드러졌지만 내적으로 시장 개척을 희망한 이탈리아 도시 상인의 의도와 영토 확장 이익을 추구한 영주의 욕구가 핵심 요인으로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인종주의가 결합하면서 지역 간 충돌이 심화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문명공존의 길은 일차적으로 제국주의라는 인류 공통의 적을 견제하여 제거하거나 최소한 약화시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제국주의가 문명공존을 저해하는 주범이라면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종교 근본주의는 사태를 악화시키는 종범에 해당한다. 종교 근본주의의 밑바닥에는 앞에서 보았듯이 추악한 제국주의적 이해와 이에 대한 왜곡된 방식의 저항이 깔렸다. “이슬람교는 가짜 종교”,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제2의 십자군 전쟁”이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부시 대통령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기에 ‘9 · 11 테러’처럼 민간인이 대규모로 희생되더라도 성전을 완수해야 한다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대응하는 쌍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미국과 이슬람 저항 세력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종교 근본주의가 맹렬히 확대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종교 근본주의의 확대, 강화가 초래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활동해본 외국 성직자는 근본주의의 영향을 쉽게 받을 수 있다. 전 세계에 퍼지는 근본주의의 독은 종교 본연의 가치를 모독하는 한편, 집단 히스테리 분위기를 조작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대한 미국의 침략과 학살을 더 수월하게 하고 있다. ···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받는 기독교인은, 무엇보다 근본주의의 반민주적, 퇴영적, 어용적 실체를 파헤쳐 일상의 신앙에서부터 근본주의적 요소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국도 종교 근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한국을 미국보다도 더 기독교 근본주의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우려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종교가 노골적인 정치 도구로 쓰이는 것이 미국이나 유럽 혹은 중동의 현상만은 아니다.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봉헌사를 비롯하여 ‘고소영’ 내각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특정 교회 인사가 정부 주요 요직에 포진하고 근본주의적 선교를 경쟁적으로 펼치기도 한다. 정태복 교수는 ‘종교와 정치의 긴장과 타협’이라는 글에서 최근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 사회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미국을 신의 축복을 받은 나라로 간주하고 반미적 행태를 악으로 규정하며 미국이 표방하는 경제정책, 경제 패권주의적 행태를 무조건 승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면서 근본주의적 성향의 강화를 비판한다.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이데올로기 편향은 이미 여러 차례 행동으로 드러났다. 특히 미국에 대한 일방적 지지는 도를 넘어 거의 찬양에 가까울 정도다. 미군 범죄나 일방적 통상 압력 등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저항이 확대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10만여 명을 동원한 친미 ‘구국금식기도회’가 열리곤 한다. 이러한 집회에서는 ‘우리는 미국을 사랑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곳곳에서 펄럭이고 심지어 여기저기서 성조기를 흔드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목 놓아 외친다.

이들에게 종교적 관용과 공존의 시각을 바라는 것은 헛된 기대일까? 기독교 탄생 2000년을 맞아 기독교가 과거 인류에 끼친 각종 해악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한 로마 교황청의 중대 발표를 보면서 나름대로는 종교의 개방성과 자기 정화에 대한 기대를 했다. ‘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부제를 단 이 문건은 피로 얼룩진 십자군 원정, 중세의 각종 가혹한 형벌, 선교를 가장한 신대륙 원주민 말살, 교회의 유대인 학살 방조 등 가톨릭의 역사적 치부에 해당하는 잘못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하지만 최근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종교 근본주의 부흥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린다.

항상 억압받는 자의 편이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 최근의 미국과 중동 사이의 충돌과 전쟁을 보면 어떤 상념에 빠질까?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으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이어진 레바논을 본다면 과연 예수는 어느 쪽에 채찍을 휘두르면서 쫓아낼까? 전 세계에 전쟁을 수출하는 대규모 군수산업체와 무기 상인을 예수는 어떻게 대할까? 너무너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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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년)
19세기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로 강렬한 색채와 명암의 대비를 표현하면서 신고전주의 회화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풍부한 재능과 환경 덕분에 회화 작품뿐만 아니라 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예술론이나 일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미술관 옆 인문학 2
미술관 옆 인문학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관 옆 인문학 2: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만나다》는 인간의 본성에서 문명의 충돌까지 삶과 죽음에서 사랑과 욕망까지, 성찰의 인문학, 상상의 인문학을 물으며 인문학..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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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문명의 충돌인가미술관 옆 인문학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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