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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2

역사란 무엇인가

토네 ‘단두대의 승리’와 카 ‘역사란 무엇인가’

프랑스대혁명과 공포정치

토네의 〈단두대의 승리〉는 프랑스대혁명 당시의 공포정치를 소재로 하고 있다. 지옥을 배경으로 단두대 처형을 묘사함으로써 공포정치를 풍자적으로 비판했다. 화면 전체가 붉은 색조여서 피의 살육이 자행되는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중앙의 단두대에서는 이미 처형이 집행 중이다. 사형집행인이 양손에 잘린 머리를 들어 올리고 뒤편으로 새로운 죄수가 끌려나오고 있어서 쉴 새 없이 머리를 자르는 중임을 알 수 있다. 잘린 머리가 얼마나 많은지 단두대 아래로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광장에서는 공포정치의 상징인 로베스피에르와 마라가 가마를 타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들어선다. 주변으로는 자코뱅의 상징인 붉은 모자를 쓴 단원들이 칼과 창을 들고 행군한다. 단두대만이 아니라 자코뱅 단원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대대적 살육이 벌어진다. 여성이든 노인이든 가릴 것 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지옥의 괴물들조차 놀라서 달아날 정도로 잔혹하다.

단두대의 승리

토네, 1795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단두대는 프랑스대혁명과 뒤이은 공포정치 시대의 상징처럼 되었다. 기요틴이라 불리는 단두대는 외형상 흉측하지만 원래는 인도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스대혁명 이전에는 사형 집행 방식이 참수였는데 단번에 목이 잘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 끔찍한 장면이 연출되고는 했다. 특히 참수에도 신분 차이가 있어서, 귀족은 날카로운 칼로 단번에 참수당했지만 평민은 무딘 칼로 여러 차례 맞으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프랑스 의사이자 정치가였던 기요탱 박사는 이 같은 문제를 개선하고자 “죄인의 신분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고통 없이 처형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모든 사형수를 기계로 처형하라고 요구하며 2.3미터 높이의 구조물에 40킬로그램의 무거운 칼날을 매달아 순식간에 목이 잘려나가는 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후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혁명 광장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와 사치 향락에 젖어 적자 부인으로 불렸던 왕비 앙투아네트를 비롯하여 1794년까지 4만여 명이 단두대로 목숨을 잃었다. 이 중에서도 공포정치 시기에 집중적으로 처형이 이루어진다. 1793년 국경지대 프랑스군이 각 전선에서 후퇴하고 도시 식량난도 심각해지는 등 정세가 악화하자 국내 왕당파나 온건한 공화파인 지롱드파는 활개를 펴고 활동을 전개한다.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을 중심으로 한 강경 혁명 세력인 자코뱅파는 위기 극복의 하나로 혁명재판소의 강화, 통제경제 시행과 함께 1793년 가을부터 다음 해에 걸쳐 왕당파와 지롱드파 명사 등 1만 명 정도를 단두대로 처형하였다.

특히 혁명파의 핵심 인물인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중에 민중과 더 밀접하게 접촉하던 마라의 암살을 계기로 다시 대내외적으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공포정치는 더욱 확대되었다. 마라는 의학도였으나 절대왕정을 비판하는 저술을 하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혁명을 인민의 입장에서 감시하면서 민중의 정치 참여를 고취했다. 1792년 민중봉기 시기에는 파리코뮌을 지도하면서 지롱드파에 대항했다. 일체의 특권 계급을 일소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 중심의 정치체제 수립을 주장했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공포정치를 주도했는데, 신문을 통해 반혁명 분자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을 옹호했고, 그가 지목하는 사람들은 형장에서 목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1793년에 자코뱅파의 공포정치에 반발하는 지롱드파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당해 프랑스 전체가 들썩이게 된다.

코르데는 고향 마을에서 자행된 살육 현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마라를 없애는 것이 학살을 끝내고 프랑스를 살리는 길이라 확신하고 파리로 향한다. 파리에 도착하자 가게에서 15센티미터 가량의 날이 선 요리용 칼을 사고 호텔방에서 ‘프랑스인의 피로 살찌는 야만스러운 짐승’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연설문을 작성했다. 드레스 안에 세례 증명서와 연설문을 넣어 현장에서 죽게 되더라도 자신의 신분과 취지가 알려지도록 했다.

당시 마라는 심한 피부병 때문에 유황을 넣은 욕조 안에 들어가 옆에 나무 상자를 두고 집필을 하거나 업무를 보는 시간이 많았다. 코르데는 마라의 집을 찾아가 중대한 정보가 있다면서 면회를 요청했다. 욕조에 있던 마라는 코르데가 들여보내 달라고 식구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를 듣고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녀는 시위를 벌인 지롱드 당원들의 이름을 댔고, 마라가 받아 적는 순간 품에서 칼을 꺼내 가슴 깊이 꽂았다가 빼내고는 바닥에 던져버렸다. 칼은 폐를 관통했고 마라는 즉사했다. 그녀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재판에서 마라를 죽여 무엇을 얻으려 했느냐는 질문에 “평화, 그것뿐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비드, 혁명의 순교자 마라를 그리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25세 가냘픈 시골 처녀에게 살해당한 마라의 최후를 그렸다. 다비드는 자코뱅 당원으로서 프랑스혁명에 참여하고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하는 투표를 하기도 했다. 다비드는 혁명파 예술가로서 혁명 선전물을 제작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기념 메달을 만들었고 각 지방에 오벨리스크를 세웠으며 국민 축제와 정부가 주최하는 희생자들의 장엄한 장례식을 기획하기도 했다.

다비드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에도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을 정도로 마라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살해당한 다음 날 비보가 다비드에게 전달되었다. 당 지도부는 다비드에게 마라를 추모하는 공개 장례 행렬에 쓰일 그림을 그리도록 권했다. 그들은 “마라를 우리에게 그대로 돌려달라”고 주문했다. 시간을 다투는 긴급한 일이었기에 암살당한 다음 날부터 이 작품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다비드의 말에 비추어보면 다분히 당시 혁명의 분위기를 고취하려는 목적이었다. “시민 여러분, 사람들은 나의 작품에서 그들의 친우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나에게 ‘다비드, 붓을 들어 마라의 원수를 갚으시오. 죽음으로 변모된 마라의 얼굴을 보고 원수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되도록 하시오’라고 권고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마라의 죽음

다비드, 1793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림은 욕조에서 업무를 보던 그대로 살해당한 마라의 모습을 담았다. 하반신을 욕조에 담근 상태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해 절명한 순간이다. 숨이 끊어진 몸은 욕조에 기대어 늘어졌고, 바닥으로 툭 떨어진 손에는 아직도 펜이 쥐어져 있다. 왼손에 들린 피로 얼룩진 편지는 코르데가 면담을 요청하며 쓴 소개장이다. 편지에는 “저는 크나큰 불행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를 만나주시는 자비를 베풀어주시리라 믿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가슴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선명하다. 상처에서 흐른 피가 욕조 물을 붉게 물들였다. 바닥에는 암살에 사용된 칼이 핏자국을 머금은 채 나뒹굴고 있다.

그런데 머리를 갸우뚱하게 하는 것이 마라의 표정이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시체의 모습이 아니다. 어딘지 편안해 보이기조차 한 표정이다. 코르데가 느닷없이 식칼로 가슴을 찔렀기에 당연히 공포와 고통 속에서 죽었을 텐데도 마치 잠을 자는 듯하다. 마라를 순교자로 표현하려던 다비드와 자코뱅당의 의도가 이런 표정을 만들어냈으리라. 창에 찔린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표정이 마치 세상에 더할 것 없이 편안하게 묘사된 것과 같은 이유다. 캔버스를 반으로 구분하고 윗부분 전체를 어두운 배경으로 처리하여 비장한 순교의 순간을 전달한다.

다비드의 의도대로 이 그림은 ‘혁명의 피에타’라고 불릴 정도로 프랑스혁명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1793년 10월 15일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국민의회에 넘겨주었다. 자코뱅파를 중심으로 한 국민의회는 복제품을 만들어 향불 연기가 피어오르는 교회 제단 위에 전시함으로써 마라의 죽음을 중단 없는 혁명의 메시지로 삼으려 했다. 심지어 복제품을 십자가나 왕의 초상화 대신 관청 사무실에 걸게 할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얼마 후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다비드의 체포와 함께 그림은 국민의회 회의장에서 제거되었다. 그림과 함께 혁명의 상징으로 보관 중이던 마라의 심장도 화장되어 몽마르트르의 하수도에 그 재가 뿌려졌다고 한다.

비어르츠(Weerts)의 〈마라의 죽음〉도 기본적으로 다비드와 비슷한 관점에서 그려진 작품에 속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다비드는 마라를 영웅화하는 방식으로 혁명의 대의를 전달했다면 비어르츠는 혁명을 교란하려는 지롱드파의 암살에 분노하는 민중을 통해 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했다는 데 있다.

마라의 죽음

비어르츠, 1880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림을 보면 마라는 죽음조차도 의연하게 맞이한 영웅의 풍모가 아니다. 불의의 죽음에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간 정치가의 모습이다. 한 손으로는 칼로 찔린 가슴을, 다른 한 손으로는 욕조를 감싼 천을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모습 그대로다. 코르데에게서도 단호한 여전사의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다. 벽에 달라붙어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놀란 눈과 벌어진 입은 두려움에 가득 찬 감정 상태를 보여준다. 그림의 주인공은 혁명 지도자를 잃은 분노에 이글거리는 민중이다. 자코뱅파 상징인 붉은 모자를 쓴 남성은 코르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여인이 바로 살인자!’라고 외치는 듯하다. 맨 앞의 여인은 혁명 지도자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억누를 수 없는 듯 격앙된 표정으로 의자를 집어 코르데에게 던지려 한다.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도 하나같이 경악할 사태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고함을 지른다.

마라와 함께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죽음이 ‘당통의 죽음’이다. 마라가 강경파라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당통은 혁명파 내에서 온건하다는 이유로 혁명 동지였던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처형된다. 자코뱅당의 우익을 형성하여 좌파와 대립한 그는 혁명적 독재와 공포정치의 완화를 요구하고 경제 통제에도 반대했다.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통한 혁명의 지속을 요구했다면 당통은 질서 회복을 통한 국민 궁핍의 해결을 요구했다. 물론 당통의 호화롭고 향락에 빠진 생활도 대중적 분노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혁명의 진행 방향에 대한 대립이 만들어낸 죽음이다.

마라와 당통의 죽음을 보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혁명이란 본래 이렇게 양극단 사이에서 줄을 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을까? 혁명은 공포를 자양분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마라와 당통을 18~19세기 현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현실이 20세기에도 되풀이하여 나타났었다. 소련에서 불던 스탈린의 숙청 피바람, 중국 문화혁명의 공포와 야만성 등도 그중 하나다.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3분의 1이 죽어도 혁명은 해야 한다.”고 했던가.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섬뜩하기는 하지만 분명 진리의 일부를 담고 있다. 이성과 이성이 만나기보다는 힘과 힘이 충돌하는 현장이니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비교적 평화적으로 사회 변화에 이르는 길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우선 선택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 공포로 성취되고 유지해야만 하는 그러한 종류의 혁명이라면 그 피의 대가가 너무 커서 혁명의 취지가 방식에 의해 퇴색해버리지 않을까?

보드리, 프랑스를 구한 지사 코르데를 그리다

보드리(Baudry)의 〈마라를 죽인 코르데〉는 마라의 암살이라는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전혀 다른 메시지를 던져준다. 먼저 그림의 주인공이 코르데다. 이미 제목 자체에서 코르데가 중심인물임을 알 수 있다. 마라는 욕조에 가려 간신히 머리 일부와 욕조 밖으로 덩그러니 나온 팔만 보인다. 칼을 여전히 가슴에 꽂혀 있다.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졌고 욕조를 부여잡은 왼손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한 사내의 느낌을 전한다. 다비드의 그림과 달리 펜과 종이는 가슴에 칼을 맞는 순간 집어 던졌는지 욕조 아래 흩뜨려져 있다. 코르데가 앉았을 의자가 넘어져 있어서 그녀가 순식간에 거사를 치렀음을 암시한다.

그림에서 어두운 배경을 등지고 있어서 비장한 느낌을 주는 인물은 오히려 살인자인 코르데다. 당대의 정세를 쥐고 흔들던 거물을 암살한 직후지만 표정은 침착하고 결연하다. 조금의 흐트러짐이나 두려운 기색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오히려 민중을 위한 사명감을 풍긴다. 마치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안도하는 표정이다. 당당하게 문 쪽을 응시하는 눈과 꽉 다문 입은 자코뱅 단원에게 곧 체포되더라도 프랑스를 살육과 혼란에 빠트린 범죄자를 응징했기에 자신은 정당하다는 의연한 태도를 계속 유지할 듯한 기세를 전한다. 또한 벽에 걸린 대형 프랑스 지도를 배경으로 서 있어서 프랑스를 구한 지사이자 자유의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마라를 죽인 코르데

보드리, 18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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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대혁명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자코뱅파의 혁명노선에 부정적 시각이던 사람들은 코르데를 영웅화하는 작업을 한다. 마라를 ‘인간이 아니라 프랑스인을 모조리 잡아먹으려 하는 야수 같은 사내’로 규정한 코르데의 판단과 행동을 정의로운 그 무엇으로 규정한다. 그녀가 어려서부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파리에서 탈출한 지롱드파 의원이 참여하는 살롱에 출입하면서 애국지사로서의 풍모를 키웠음을 강조한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정치가인 라마르틴은 코르데를 ‘암살의 천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혁명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그날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그녀가 보여준 의연한 모습을 부각한다. 처형 당일 사형집행인이 팔을 뒤로 묶으려 하자 그녀는 “마라를 죽인 후 매우 난폭하게 묶여 손에 상처가 생겼어요. 그렇게 되지 않게 장갑을 껴도 될까요?”라고 물었는데, 집행인이 “괜찮아, 난 전혀 아프지 않게 묶을 수 있어.”라고 대답하자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포승줄을 받았다고 한다. 처형장으로 향하는 호송 차량에 함께 탄 사형집행인은 회고록에 “그녀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더욱 강하게 매료되었다. 분명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어떻게 저렇게 사랑스럽게 의연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라고 적었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자 사형집행인 중 한 명이 그녀의 목을 들고 뺨을 때렸는데 구경꾼이 이 행위에 분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민중에 의한 근본적 체제 변화로서의 혁명에 부정적인 자유주의자들은 그동안 마라는 암살당해 마땅한 압제자로, 코르데의 행동을 자유 수호를 위한 거룩한 결단으로 규정했다. 한국의 대표적 자유주의자 고종석도 《여자들》에서 “살육, 광기, 공포, 분노의 소용돌이 속에서 프랑스혁명의 우두머리에 비수를 꽂다.”라며 코르데를 추켜세운다. 공포정치가 지속할 경우 프랑스가 혁명파와 반혁명파 사이의 잔혹한 내전에 휩싸이게 되리라는 것이 그녀 생각이었다면서 암살 행위를 정당화한다. “다시 말해 ‘반혁명분자 사냥 캠페인’이 공화국을 궁극적으로 분열시키리라 판단한 것이다. 지롱드파 지지자였던 코르데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냈다. 과격파 지도자 마라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남자와의 아무런 공모 없이 혁명의 그릇된 지도자를 살해한 코르데는 또 다른 혁명, 여성해방혁명의 선구자로도 볼 수 있다고 규정한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에서 안중근, 김구, 윤봉길이 그러했듯이 테러의 방식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녀는 압제자에 맞선 해방 전사요 자유의 투사라고 단언한다.

뭉크, 정사 후의 살인 현장을 그리다

같은 소재를 그린 뭉크의 〈마라의 죽음〉은 앞의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광경을 보여준다. 사건 현장은 욕조가 아닌 침대다. 거기에다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상태다. 침대보 위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오른편 탁자 위에는 두 사람이 먹던 과일이며 음식이 아직 남아 있다. 누가 보더라도 한바탕 정사의 시간이 흐른 뒤에 벌어진 살인 사건이다.

뭉크의 그림에 나오는 마라의 모습에서도 순교자에 가까운 영웅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보면 치정에 얽힌 살해 장면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역사적 흔적이나 냄새는 그림 어디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비드나 보드리의 그림에 있던 펜과 서류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오직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몸뚱이가 부각되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 어떠한 표정도 읽어내기 어렵다. 특히 코르데는 당당함이나 두려움 등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뒤로 커다랗게 늘어진 짙은 그림자가 전반적으로 살인 현장의 격정이나 비장함보다는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가로와 세로를 가로지르는 화가의 거친 붓질은 일체의 숭고함과 경건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는 시도로 느껴진다.

마라의 죽음

뭉크, 1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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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에 따른 현격한 차이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다. 다비드는 역사의 현장에서 같은 자리에 서 있던 자신의 정치의식을 표현했다. 보드리는 다비드와는 반대편에서 역사에 대한 정치의식을 표출했다. 하지만 뭉크의 그림은 역사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욕망이나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다. 먼저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로서 뭉크는 마라와 코르데를 통해 인간의 주관적이고 내적인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려는 것 같다. 뭉크의 작품 대부분은 분노, 불안, 공포, 환희 등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본원적 감정과 욕망을 담아낸다.

〈마라의 죽음〉에서도 정치적 배경이나 주장보다는 욕조에서 벌거벗은 몸을 드러낸 채, 방 안에 아무도 남겨두지 않은 채, 아름다운 여인을 욕조 곁으로 다가오도록 한 마라의 욕구를 드러내려던 것 같다. 뭉크는 같은 주제로 두 편의 연작을 그렸는데, 모두 침대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의도적 설정인 듯하다. 정치적 목적이나 시대적 배경보다는 죽은 남자와 목숨을 빼앗은 여자 사이의 내밀한 심리 추적에만 관심을 두었다.

다음으로 뭉크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이 반영된 그림이기도 하다. 뭉크는 집착이 강한 라르센이라는 여자를 만난다. 몇 차례 다른 여성에게서 버림받은 뭉크로서는 사랑과 결혼 요구가 마음을 짓누르는 부담일 뿐이었다. 가정을 이루어 구속받기를 거부한 뭉크는 결혼을 원치 않았다. 뭉크는 집요하게 결혼을 요구하는 그녀를 피했다. 그녀는 권총을 꺼내 들고 자기와 결혼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권총을 빼앗으려고 하는 와중에 권총이 발사되어 뭉크의 왼쪽 가운뎃손가락을 관통했다. 1902년 서른아홉 살 때 일어난 이 사건 때문에 여자에 대한 뭉크의 혐오감은 더욱 강해졌다.

뭉크의 〈마라의 죽음〉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을 정도로 극심한 여성에 대한 거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마라를 살해한 여인은 조금의 당황함이나 거리낌도 없는 당당한 모습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식의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한다. 뭉크는 아마 코르데를 라르센으로, 침대에 피를 흘리며 죽은 마라를 자신으로 여긴 것 같다. 이 작품 외에도 뭉크가 〈아담과 이브〉, 〈삼손과 델릴라〉 등 여자에게 배반당하는 남자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 것도 개인적 경험과 감정의 표출이라 생각할 수 있다. 동일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작가의 의식이나 경험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나타난 공포정치에 대한 이해는 각 개인이나 집단의 정치적 이해나 학문적 입장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마라의 죽음을 소재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술 작품도 그 연장선에 서 있다. 사실 ‘공포정치’라는 표현 자체만 하더라도 다분히 편향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국가 건설과 유지 과정에서 대대적 살육이나 폭력을 통한 공포를 동반하지 않았던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만약 ‘공포정치’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면 대부분 정치와 통치 행위에 적용해야 할 정도다. 그런데 특정 시기의 어떠한 정치 행위에 대해 이 용어를 대명사처럼 사용하는 것은 이미 상당히 주관적 해석이다.

프랑스대혁명기의 공포정치만이 아니라 대부분 역사적 사건이 비슷한 운명을 겪는다. 역사학 분야에서 끊이지 않는 핵심 논쟁이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해석의 문제임은 이미 잘 알려졌다. 1830년대에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 역사가 랑케가 주관적, 도덕적 가치판단을 개입시킨 역사 서술을 비판하면서 역사가의 임무는 단지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 이래 상당기간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역사 서술이 지배적 역사관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곧이어 역사에 있어서 객관적 사실이라는 설정이 얼마나 허구적인지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면서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에 비중을 두는 역사관이 대립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카(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서 대안적 방향을 제시한다.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열렬히 주장한 실증주의자들은 사실 숭배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우선 사실을 확인하고, 사실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라고 말했다. 영국에서 이러한 역사관은 로크로부터 러셀에 이르기까지 영국철학의 지배적 경향이었던 경험주의 전통과 완전히 일치했다. ··· 오늘날 저널리스트들은 사실의 선택과 배열이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효과적 방법임을 알고 있다. 흔히 사실은 스스로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진실이 아니다.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에만 이야기한다.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주고 서열이나 차례를 정하는 것은 역사가다. ··· 콜링우드가 보기에 ‘모든 역사는 사유의 역사’며, ‘역사란 사유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가 그 사유를 자신의 정신 속에 재현하는 것’이다. ··· 그는 역사를 사실의 단순 편찬으로 간주하는 견해에 반대한 나머지 위험스럽게도 역사를 두뇌에서 직조된 것으로 보는 입장에 다가섰고, 따라서 객관적인 역사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다.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지속적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관점은 경험주의 인식론에 기초한 역사 서술을 강조한다. 경험주의 인식론은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분리를 전제한다. 역사적 사실은 감각적 인상과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관찰자에게 부딪혀 들어오며 또한 그의 의식과는 독립해 있다. 역사가가 사실을 수용하는 과정은 수동적이어서, 자료를 수용하고 그것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정리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견해다.

하지만 주관적 해석을 중시하는 측면에서 보기에 역사적 사실은 너무 빈약하거나 혹은 사실 자체가 이미 주관적 해석이 개입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먼저 사실 자체의 빈약함을 살펴보면 오래된 과거로 갈수록 기록은 빈 부분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고대사는 알량한 유물이나 몇 가지 문서만으로 그 오랜 기간의 역사를 서술해야만 하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 역사가의 상상력 없이는 기본적 체계조차 잡기 어려울 정도다. 또한 흔히 사료라고 불리는 역사적 사실은 특정 관점이 개입된 경우가 많다. 문서화된 형태로 남아 있는 기록은 대부분 당시 지배계급의 관점을 상당히 담기 마련이어서 심지어 왜곡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사실은 스스로 역사를 구성할 수 없기에 사실 숭배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고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요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카는 주관적 해석을 중시하는 태도는 곧잘 또 다른 편향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비판한다. 특히 만일 역사가가 어떠한 사실 배후에 있던 사유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사실은 역사가에게는 의미 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콜링우드의 견해를 비판한다. 이러한 견해대로 가면 사실에 대한 주관적 해석은 무한하므로 특정 역사적 사실에서 끌어낸 어떠한 의미가 다른 의미보다 더 올바르지 않다는 극단적 상대론에 빠진다. 카는 어떤 산이 보는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다른 형상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 산은 객관적으로 전혀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무한한 형상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해석이 사실 확정의 필수라고 해서 그리고 현존하는 어떠한 해석도 완전히 객관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 해석이나 저 해석이나 매한가지이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객관적 해석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 필수적이기 때문에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 상호작용 과정이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어려운 항해를 해야 하는 역사가의 곤경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다. 인간은 환경에 완전히 매몰되거나 예속되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적이거나 환경의 무조건적 지배자일 수도 없다.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은 서로 주고받는 평등한 관계여서, 사실의 잠정적 선택과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 해석에서 출발한다. 연구 과정에서 사실과 해석은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보완해나간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며 사실은 과거에 속한다는 점에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결론이 어찌 보면 허무해 보인다.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을 상호작용이라는 말로 안이하게 뭉뚱그려놓은 느낌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어느 것이 중심이고 우선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둘 다 중요하다”는 맥 빠지는 답을 접한 느낌이 들기 십상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고민이기는 하다. 역사 서술에서 사실 숭배의 한계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흔히 승자의 역사라는 말을 상식처럼 사용할 정도로 사실을 담았다는 사료 자체가 지배 세력에 의해 왜곡됐을 가능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가에 의한 해석의 당위성이나 다양성을 웬만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인정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인정이 곧바로 어떠한 해석이 다른 해석보다 정당하거나 타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상대성 논리로 바로 치달아버릴 가능성이 생긴다. 만약 같은 역사 사건에 대한 모든 해석을 다 인정한다면 역사를 통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공통의 교훈을 이끌어내려는 노력은 허망한 시도로 전락한다. 역사에 대한 고민이나 논의가 학문으로서의 자격을 잃고 그저 입담을 자랑하는 수다의 장으로 변질할 수도 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 벌어진 사실을 모아놓은 잡동사니 창고가 아닐뿐더러 다른 한편으로 자기 구미에 맞게 지식을 자랑하거나 변명하는 웅변장도 아니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는 역설적이게도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모색이다. 의사가 환자 개인과 가족의 병력을 알아야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듯이, 인류 역사에 대한 이해도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진단과 처방의 필수 전제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감을 통해 획득한 공통의 역사적 교훈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역사는 미로 속에서 제 역할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결론이 나름의 의미가 있다.

남은 문제는 이와 같은 상호작용을 통한 다수의 공감 획득이 과연 가능한가의 문제다. 후설(Husserl)은 상호주관성이라는 설정을 통해 공감 가능성을 모색한다. 상호주관성은 각 주체의 주관적 해석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독립된 주관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주관에 공통적으로 성립되는 것, 즉 하나의 주관을 초월하여 다수의 주관에 공통적인 것을 향한 지향이 인간의 인식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서 상호주관성 혹은 공동주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연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지각 작용 속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다른 인간과 연계를 갖고 있다. ···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세계는 개별화된 인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에 대해서도 존재하며, 더욱이 단적으로 지각에 합당한 것을 공동체화함으로써 존재한다. 공동체화함에서는 서로 간의 정정을 통해 타당성 변화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 더 나아가 대체로 개별적인 점에 관해서 타당성의 상호주관적 일치가 표준으로서 뚜렷이 나타나고 그래서 타당한 것의 다양성 속에서 상호주관적 통일이 성립한다는 것, 게다가 상호주관적 불일치의 경우에도 상호 토의와 비판을 통해 일치가 성립되고 적어도 모든 사람에 대해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미 확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설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은 세계의 사물이나 현상을 존재하는 그대로가 아니라 주관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주관적 인식조차도 개별적으로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인간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누구나 다른 사람의 삶에 관여한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집단적 방식으로 인식한다. 공동체 속에서 서로의 경험과 지각이 연계된다. 특히 인식의 반성 작용을 통해 광범위한 보편적 공감을 획득한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필요하고 타당한 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인식의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주관을 가진 주체 사이의 공통분모가 형성된다.

확실히 인간은 경험과 경험을 통한 인식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나가는 능력이 있다. 개인의 반성에서 출발하든 아니면 상호 비판과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든 교감을 넘어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시대정신’이라는 표현과 내용을 수용하기도 한다. 시대정신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 다수가 공감하는 판단 기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상호주관성의 성과다. 예를 들어 추상적인 면이 다분하고 세부적으로는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의 옹호, 침략전쟁에 대한 반대와 평화의 지향, 민족의 독립성과 자주성 유지, 사회적 소수와 약자의 보호, 절대빈곤의 해결과 빈부격차의 완화 등은 상당한 공감을 형성한 시대정신에 속할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공포정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기준 형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당시 절대왕정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주변 국가의 침략, 왕당파의 반혁명 준동과 이에 지롱드파가 동조하거나 적어도 동요하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혁명의 성과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폭력 조치가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를 모든 혁명 과정에서 불가피한 현상으로 정당화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의식적으로 폭력을 조장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오래 걸리더라도 비교적 평화적으로 사회 변화에 이르는 길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우선 선택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 유일한 대안은 아니라 하더라도 공감의 확대 가능성에 어느 정도 희망의 자리를 마련해두는 성숙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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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니콜라 토네(Nicolas Antoine Taunay, 1755-1830년)
프랑스 화가로 풍경 묘사를 즐겼는데 빛의 효과를 이용하여 견고하게 구성된 풍경 속에 인물을 탁월하게 배치했다. 제1제정기에는 전쟁화 여러 점을 제작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 〈생베르나르 산을 통과하는 프랑스군〉, 〈겁탈〉, 〈단두대의 승리〉 등이 있다.

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미술관 옆 인문학 2
미술관 옆 인문학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관 옆 인문학 2: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만나다》는 인간의 본성에서 문명의 충돌까지 삶과 죽음에서 사랑과 욕망까지, 성찰의 인문학, 상상의 인문학을 물으며 인문학..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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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역사란 무엇인가미술관 옆 인문학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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