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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멸의 여인

마르그리트

Marguerite

나바르

요약 테이블
출생 1492년 04월 11일
사망 1549년 12월 21일
본명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Marguerite de Navarre)
국적 프랑스
대표작 〈사랑 낚시꾼의 거울(Miroir de l'Ame Pércheresse)〉, 《헵타메론(L'Heptaméron)》

초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단순히 라틴어로 쓰인 로마의 고전들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움직임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 참여했던 지식인들이 이 고전들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야만적인 시대'이자 '암흑시대'라고 공격하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휴머니즘(Humanism)'이 태동했다. 피렌체에서 시작한 이 새로운 사조는 점차 로마와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르네상스가 당시 유럽의 양대 강대국인 스페인과 프랑스로 퍼져나간 데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영향이 컸다.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서부 지역은 12세기 초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전 유럽에 명성을 날렸던 대공녀 마틸다(Gran Contessa Matilda)가 자신의 영지를 모두 교황에게 상속하고 죽는 바람에 실질적으로는 주인이 없는 땅이 되었다.

이 덕분에 피렌체와 루카가 속해 있는 이 지역은 르네상스가 싹틀 수 있는 기름진 토양이 되었지만, 동시에 이탈리아 반도 한가운데 교황령이 자리 잡음으로써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작령, 시칠리아 왕국, 베네치아 동맹, 피렌체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등 수십 개로 나누어진 이탈리아 반도는 하나의 강력한 왕국으로 통일될 조건을 가질 수 없었으며, 반도 전체가 야심만만한 강력한 제후들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유럽사에서 이탈리아 대전쟁(Great Italian War)이라고 부르는 국제전은 프랑스의 샤를 8세가 1494년에 2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나폴리 왕국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어 반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주로 이탈리아의 주도권을 놓고 스페인과 프랑스가 전력을 다해 벌인 대결이었지만, 여기에 교황령, 신성로마 제국, 잉글랜드, 그리고 후기에는 모든 유럽 국가와 오스만 튀르크 제국까지 개입하면서 대단히 혼란스러운 시기가 지속되었다.

이탈리아 전쟁 이전에도 르네상스는 이미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던 새로운 사조였으며, 전쟁을 계기로 더욱 확산되었다. 전쟁은 종군했던 하층 귀족들과 하위 성직자, 그리고 일반인들이 이 새로운 예술적, 문학적 사조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은 새로운 예술 경향과 함께 본국으로 귀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전 유럽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던 것이다.

나바르의 마르그리트(Marguerite d'Navarre)는 발루아 왕가의 대표적인 르네상스 군주인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이다. 그녀는 20세기 초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인 사무엘 푸트먼(Samuel Putman)각주1) 에 의해서 역사상 '최초의 현대여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세기 프랑스의 역사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슐레(Jules Michelet)는 그녀에게 '프랑스 르네상스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붙였다.

마르그리트의 어머니 루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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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는 1492년생으로 발루아 왕가에서 왕위 계승자 중 두 번째 서열에 있었던 앙굴렘 백작 샤를(Charles d'Orléans, Comte d'Angouléme) 의 맏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샤를과 마찬가지로 발루아 왕가의 혈통인 사보이 가문 출신의 루이즈(Louise de Savoie)이다. 루이즈는 정치적인 감각과 수완이 뛰어나고 결단력과 의지도 남달라서 당시 유럽 왕가의 여인들 중에서 최고의 여걸로 꼽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열한 살의 나이에 샤를과 결혼해서 열다섯 살에 마르그리트를 낳고, 2년 후에 후일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게 될 프랑수아를 낳은 후 열아홉 살에 과부가 되었다.

자기 자신과 어린 남매의 안전을 염려한 루이즈는 이 작은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파리의 왕궁으로 이사했다. 당시 프랑스 국왕은 죽은 남편 샤를의 사촌형제인 샤를 7세(Charles VII)였다. 샤를 7세는 '국민의 아버지(Le Pere du Peuple)'라는 호칭을 얻은 사람으로, 17년의 재위기간 동안 프랑스의 법률체제를 정비하고 재정 개혁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부과되는 세율을 낮추는 동시에 국가 세수를 증대시키는 마법을 부린 유능한 군주였다.

샤를 7세의 슬하에는 〈살리카 법(Lex Salica)〉각주2) 에 명시된 '남성' 후계자가 없었으며 두 명의 딸 클로드(Claude)와 르네(Renee)만이 있었다. 따라서 샤를 7세의 왕궁에서 차기 왕위 계승자인 프랑수아는 왕가 사람들의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받았으며, 후일 국왕의 큰딸 클로드와 결혼해서 프랑스 국왕으로 나라를 다스릴 운명으로 결정되었다. 루이즈 자신도 발루아 왕가에 큰 공헌을 했다.

루이즈는 백년 전쟁 중에 잦은 침략을 받아 거의 유명무실해진 오베르뉴 공작령(Duchy d'Auvergne)각주3) 을 회복해서 발루아 왕가에 귀속시켰는데, 이는 발루아 왕가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르봉 공작(Duke de Bourbon)과 치열한 투쟁을 벌여서 이룬 결과였다. 이 투쟁 중에 보여 준 그녀의 강인한 의지와 뛰어난 정치력은 찬탄의 대상이었으며 이를 통해서 유럽 왕가의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 최고의 인물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루이즈는 어린 마르그리트와 프랑수아를 르네상스의 기준에 따라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그 시대에 이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예술과 문학은 유럽의 왕궁들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질인 휴머니즘을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루이즈가 바로 그 소수에 속했다. 여기에는 그녀의 고해성사를 담당했던 누메(Cristoforo Nu mai)각주4) 라는 이탈리아 출신 사제의 영향이 컸다.

마르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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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는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로 시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어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탈리아와 독일어, 스페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고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을 당시의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 아닌 원문 그대로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고대의 명망 있는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휴머니즘의 정신에 눈을 뜨고 있었다.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아주 드물게 신비한 자주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마르그리트는 샤를 7세의 왕궁에서 보석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십 대 초반에 첫사랑에 눈을 떴다. 상대는 샤를 7세의 외종질인 가스통 공작(Gaston de Foix, Duc de Nemours)으로, 마르그리트보다 세 살 위의 용감하고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샤를 7세의 정치적인 선택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비록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눈을 뜬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도 정략결혼은 가문 간의 결속을 다지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며, 여성들, 특히 왕가나 귀족 가문의 여성들은 여전히 정치적인 거래에 대한 유력한 지급수단이었던 것이다. 샤를 7세와 마르그리트의 어머니 루이즈는 둘 다 발루아 왕가에 속하는 이 멋진 커플의 사랑을 이루어 주는 것보다는 페르쉐, 아르마냑, 페장삭, 로데즈 등 광대한 지역의 영주를 겸하고 있던 알랑송 공작 샤를(Charle IV, Duc d'Alençon)의 변함없는 충성을 확보하는 일이 프랑스의 번영을 위해서는 더욱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발루아 왕가의 입장에서 카페 왕조의 근원지인 아르마냑 백작령을 확보하는 일은 왕가의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였다. 국왕 샤를 7세는 마르그리트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녀와 알랑송 공작 샤를을 결혼시키고, 그녀의 동생 프랑수아는 열 살에 불과한 자신의 딸 클로드와 결혼시켜 다음 세대를 위한 후계구도를 완성했다.

마르그리트와 프랑수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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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랑송 공작은 국왕에게 충성스럽고 심성이 선량한 사람이었으며 마르그리트에게 무척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이 결혼은 근본적으로 잘 조화될 수 없는 남녀의 결합이었다. 마르그리트는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이미 총명함과 뛰어난 지성으로 이름을 날린 데 반해서 알랑송 공작 샤를은 정치적인 감각이라고는 전혀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 아둔함으로 인해서 멍청이로 취급당하던 사람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그리트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녀의 첫사랑이자 아마도 생애의 유일한 사랑이었을 가스통 공작이 이탈리아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던 것이다.각주5)

마르그리트는 사랑하지도 않고 공유할 것도 별로 없는 남편 샤를 공작보다는 그녀의 남동생 프랑수아와 훨씬 더 친밀한 사이였지만, 몇 년 동안은 얌전하게 남편의 곁을 지켰다. 1515년 프랑수아가 스물한 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자 그녀의 파리 체류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프랑수아는 그가 태어난 해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을 계속 이어가야 했으며, 마르그리트의 남편 샤를은 충직하게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 모험심에 가득 찬 프랑스 국왕의 곁을 지켰다.

프랑수아가 프랑스군이 점령한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 머무는 동안 파리에서의 정치적인 결정은 대부분 루이즈 태후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마르그리트 역시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 특히 외교 문제에 관해서 그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종종 고대 로마 시대에서 공화정체제를 종식시키고 옥타비아누스가 첫 번째 황제로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매케나스(Gaius Cilnius Maecenas)각주6) 와 비교되곤 했다.

국왕이 된 프랑수아 1세는 그의 전 세대가 시작한 이탈리아 전쟁을 계속 수행해야만 하는 입장이었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의 상대는 최전성기에 도달해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였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역은 오스트리아를 넘어 주변의 헝가리, 보헤미아, 네덜란드, 남부 독일의 여러 지역에 이르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신세계 개척을 통해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해 있던 스페인과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의 여러 왕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군사적인 면에 국한하자면,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병력과 무장이 우세한 스페인군을 상대로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다. 프랑수아 자신도 즉위 첫해인 1515년에 카를 5세가 고용한 스위스 용병들을 격파하고 밀라노를 장악했다. 그렇지만 스페인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군사적인 패배를 당하더라도 우수한 용병들을 고용해서 즉각적으로 전력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프랑스는 외교 역량을 총동원하여 카를 5세에 대항해서 교황,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잉글랜드와 함께 군사동맹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각주7) 그렇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힘겨운 전쟁을 지속하던 프랑스는 1525년에 파비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는 포로가 되었으며 수많은 프랑스의 귀족들이 전사했던 것이다. 마르그리트의 남편 샤를 공작도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후에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프랑스는 다음해에 스페인과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도권을 인정해야만 했다. 1529년에는 캉브레 조약(Treaty of Cambrai)각주8) 을 체결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북부 프로방스 지역의 권리를 인정하는 대신 카를 5세 측에 가담했다 사망한 부르봉 공작의 권리를 소멸시켜 남부 프로방스 지역을 프랑스가 확보하는 조건으로 합의하고 이탈리아 전선에서 철수했다.

프랑수아 1세의 통치가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문화적으로는 프랑스를 유럽의 최정상에 올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대량의 예술품을 구입해서 프랑스로 수송했을 뿐 아니라 아예 르네상스의 대가들을 파리로 초청했는데, 이들 중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도 포함되어 있었다.각주9) 세계 최고의 박물관 중 하나인 루브르의 컬렉션은 바로 이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절 프랑스 르네상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마르그리트가 파리에 세운 그녀의 살롱이었다. 이곳에서 라블레(François Rabelais), 마로(Clément Marot), 롱사르(Pierre de Ronsard)와 같이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활동했으며, 프랑스 인문주의의 산실이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던 프랑스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개혁 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 역시 그녀의 살롱이었다.

마르그리트는 마르틴 루터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지만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생적인 종교 개혁가로, 얀 후스(Jan Hus)각주10) 와 마찬가지로 시대를 앞선 선각자였다고 할 수 있다. 마르그리트는 종교 개혁론자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으며, 그녀 자신이 가톨릭 사제들과 신교도들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죽고 난 다음 세대 유럽의 역사는 그녀가 몹시 사랑했던 세 명의 여인들에 의해서 거센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특히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각주11) 혹은 '가톨릭 전쟁'이라고 하는 여섯 차례의 참혹한 내전을 겪게 되는데, 내전의 두 주역인 나바르 왕국의 잔느(Jeanne d'Albert de Navarre)와 '검은 황후' 카트린느 드 메디치(Caterine de Madici)는 모두 그녀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마르그리트의 유일한 혈육인 잔느는 다른 개혁주의자들의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어머니와는 달리 칼뱅의 가르침을 무조건 따르는 철저한 위그노였으며 프랑스 신교도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잔느의 상대역인 카트린느 왕후는 마르그리트의 조카며느리이다. 그녀가 열다섯 살에 피렌체로부터 시집왔을 때부터 마르그리트는 외톨이였던 카트린느를 철저하게 보호했던 후견인이었다. 훗날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 앤 불린(Anne Boleyn)도 마르그리트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녀는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파리에 와서 프랑수아의 왕궁에서 성장했는데, 국적은 달랐어도 마르그리트의 직계 제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며, 영국 성공회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은 실질적으로 앤 불린에 의해서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각주12)

마르그리트는 파비아 전투로 인해 첫 남편을 잃고 2년 후 삼십 대 중반의 나이로 나바르의 왕 앙리(Henry II of Navarre)와 재혼했다. 지성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철저한 전사였던 앙리는 그녀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고 전 남편 샤를과 마찬가지로 공유할만한 점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그와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녀의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사실이었다. 마르그리트 역시 첫 남편보다는 훨씬 더 다정하게 그를 대했다.

당시 나바르 왕국은 스페인의 침공을 받아 영토의 절반 정도를 빼앗긴 상태였다. 마르그리트는 나바르를 바닥부터 변화시켰다. 그녀는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들의 수상'이라고 칭하고, 경호원도 대동하지 않고 거리로 나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앙리는 마르그리트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찬성했다.

그녀가 자신의 남편 앙리를 움직여 만들어낸 각종 혁신적인 공공사업에는 당시의 통치자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평민들에 대한 일반 교육 시스템도 포함되어 있다. 수세기 후에나 유럽 각국에서 이를 모방해서 일반화될 사회적 모델이었다.

마르그리트는 인문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으며,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과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가지고 있던 개혁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바탕이 된 것은 자비심과 용기와 같은 천성적인 미덕이었다.

마르그리트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후원자였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프랑스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젊어서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했지만 중년이 넘을 때까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출판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31년 시집 〈사랑 낚시꾼의 거울(Miroir de l'Ame Pércheresse)〉이 최초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녀가 앙리와의 사이에 첫 딸 잔느를 낳고 이어서 서른여덟 살인 1530년에 어렵게 낳은 첫 아들 장을 바로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잃고 나서 쓴 책이었다.

소작농을 만나는 마르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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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그녀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녀의 신학적인 질문에 대해서 소르본 대학으로 대표되는 가톨릭 교회는 분노와 저주로 대응했다. 얼마 후 이 논쟁은 소르본 측의 공개사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동안 신성시되었던 종교문제에 대해 프랑스의 지성이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시대의 문제작이었다.

마르그리트의 작품 중에서 《헵타메론(L'Heptaméron)》은 프랑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문학작품 중 하나이다. '헵타메론'은 이 책의 원래 제목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카치오(Boccaccio)가 쓴 《데카메론(Décaméron)》에 영감을 받아 그것과 같은 구성으로 백 개의 짧은 이야기들을 모두 열 사람의 작가들이 열흘 동안 서술하는 형식으로 쓸 작정이었으나 일흔두 개의 이야기만을 완성한 후 책의 제목도 붙이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이 미완성인 채 출판되면서 붙여진 제목이 '헵타메론'각주13) 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의 주제 역시 신과 인간의 본질적인 관계에 관한 것으로 어리석은 신학적인 논쟁이나 우매한 신앙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바탕에 깔고 있다.

마르그리트는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앙리와 결혼하여 나바르 왕국에 살면서 20년 넘게 나바르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녀는 1549년 겨울 쉰일곱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기준으로는 그리 짧은 생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지성이 최전성기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대단히 아까운 손실이었다. 나바르 왕국의 왕좌는 그녀의 딸 잔느를 거쳐 후일 프랑스의 국왕이 되는 외손자 앙리 4세에게 이어졌다.

마르그리트는 워낙 독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에게 상반되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들은 그녀를 "자루에 집어넣어 센 강에 던져야 한다."라고 했지만,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Erasmus)각주14) 는 그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철학자에게 걸맞은 분별력, 정숙함, 절제, 경건함, 감히 범접하지 못할 강인한 영혼, 이 세상의 모든 덧없는 것들에 대한 경이로울 정도의 경멸 …… 성직자나 수도승에게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이러한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당신을 어찌 숭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에 대한 프랑스 지성인들의 찬사와 감사는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비록 자신과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의 견해를 존중하고, 그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적극적으로 그들을 보호했던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공헌으로 인해서 프랑스는 다음 세기에 이탈리아를 추월해서 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으며, 이러한 휴머니즘의 전통은 후일의 프랑스 백과전서파와 먼 후일 볼테르와 루소를 대표로 하는 계몽주의자들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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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 집필자 소개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으며, 대우조선과 대우통신에서 홍보 및 광고 분야에서 일했다. 저술 및 번역, 출판기획 분야에 관심을 기울..펼쳐보기

출처

불멸의 여인들
불멸의 여인들 | 저자김후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를 개척한 위대한 여인들! 우연히 모든 조건이 맞아 힘들이지 않고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닌, 치열하게 투쟁하여 그 결과 권력과 명예를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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