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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멸의 여인
루이 15세의 연인

퐁파두르 부인

마담 퐁파두르, Madame de Pompadour

루이 15세의 연인

요약 테이블
출생 1721년 12월 29일
사망 1764년 04월 15일
본명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Jeanne-Antoinette Poisson)
국적 프랑스

퐁파두르 부인(Madame de Pompadour)의 이름은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Jeanne-Antoinette Poisson)으로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재정 전문가였던 프랑수아 푸아송(François Poisson)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재정 스캔들로 인해서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국외로 피신했으며 대자본가인 '투르네엥의 노르망(Le Normant de Tournehem)'이 그녀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평생 그녀의 실제 아버지가 프랑수아가 아니라 노르망이라는 의혹을 받아야 했다.

노르망이 그녀의 어머니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했으나, 그가 어린 잔느 앙투아네트에게 퍼부은 엄청난 교육비는 확실히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노르망은 과학, 문학,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최고의 선생들만 초빙해서 그녀를 교육시켰는데, 그중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와 배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퐁파두르는 후일 어린 시절의 일화 하나를 밝힌 적이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상당히 미신에 집착했는데, 그녀가 아홉 살 때 그녀를 데리고 유명한 점성술사를 찾았다고 한다. 이때 점성술사로부터 "이 작은 아이가 후일 국왕의 마음을 지배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이후 잔느 앙투아네트는 '레네트(Reinette)'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왕후'를 의미하는 단어 '렌느(Reine)'에 '작다'라는 의미를 가진 어미 '-ette'를 붙인 것으로 '어린 왕후'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레네트는 열아홉 살에 노르망의 조카와 결혼을 했다. 노르망은 이 부부에게 엄청난 결혼 선물을 했는데, 그중에는 왕실 사냥터와 가까운 파리 근교의 에티올(Etiolles)에 있는 예쁜 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 부부는 첫 아이를 1년 만에 잃은 것을 제외한다면 행복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하고 3년 후에는 후일 '팡팡(Fanfan)'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루이 15세의 귀여움을 받다가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게 될 딸 알렉산드린느-잔느(Alexandrine-Jeanne)가 태어났다.

레네트는 파리의 사교계에 들어서면서 에티올의 집에 살롱각주1) 을 열었는데, 유명한 문인과 예술가들이 그녀의 살롱에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 Marie Arouet)라는 중년의 극작가도 끼어 있었다. 이 사람의 필명이 그 유명한 '볼테르(Voltaire)'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네트는 파리 사교계의 명사가 되었으며, 그녀의 이름은 국왕 루이 15세의 귀에도 들어갔다.

퐁파두르 부인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레네트의 운명이 바뀐 순간은 갑자기 다가왔다. 그녀는 황태자 도팽(Daupin Louis)과 스페인의 왕녀 마리아 테레지아(Infanta Maria Teresa)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베르사유에서 열린 가장무도회에 초대되었다. 이 무도회에서 국왕 루이는 참석자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나무로 가장을 했으며, 똑같은 분장을 하고 동시에 입장한 사람이 루이를 포함해서 모두 여덟 명이었다. 마침 레네트는 수렵의 여신 아르테미스로 꾸미고 있었다. 그녀가 여덟 그루의 나무 중에서 국왕을 식별해내자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루이의 연인이자 코티잔이었던 샤토루 공작의 미망인 마리 안느(Marie-Anne de Mailly-Nesle, Duchess de Châteauroux)가 갑자기 죽은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때로 루이는 아주 힘들어 하고 있었다. 레네트는 이날 이후 국왕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 명단에 끼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베르사유 궁에 머물게 되었다. 루이는 그녀에게 퐁파두르의 영지와 함께 후작부인(Marquise)의 작위를 내렸다. 그녀가 궁정에 머물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갖춰 준 것이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세 살 때 일이었다.

남편과는 공식적으로 이혼한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은 이때부터 퐁파두르 후작부인(Marquise de Pompadour)으로 불렸다. 영리한 그녀는 쉽게 궁정의 예식을 배웠고 그보다 더 쉽게 궁정의 음모술과 처세술을 배웠다. 베르사유에 들어갈 때부터 그녀에게는 적이 매우 많았다. 왕궁은 귀족들의 성역으로 간주되던 곳인데 평민 부르주아 출신인 그녀는 아주 이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리슐리외 공작(Duc de Richelieu)을 위시한 대영주들, 아르겐송 후작(Marquis d'Argenson)과 아르겐송 백작(Comte d'Argenson) 형제, 모레파 백작(Comte de Maurepas)과 같은 국왕의 측근 관료들이 그녀와 대립했다. 이들은 마담 퐁파두르에 관한 온갖 추잡한 내용을 과장하거나 창작해서 저널 형태로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러한 형태의 저널들은 대중의 저속한 관음증을 만족시키면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만큼 왕조 자체의 기반을 파먹는 것이었다. 또한 현대 사회라면 인터넷을 통해서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하겠지만 당시의 퐁파두르 부인에게는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었다.

해군성 장관인 모레파 백작과의 충돌은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모레파 백작은 열일곱 살의 나이에 황실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래 무려 31년 동안이나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국왕의 가장 친한 친구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마담 퐁파두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성만큼이나 격정적인 사람이어서, 국왕과 모레파 백작 두 사람이 일하는 중이라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즉시 끼어들었다. 그 누구도 국왕과 모레파 사이에 이런 식으로 개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퐁파두르에 대한 백작의 증오심은 극에 달했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도 있으나,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이 너무 치졸했다. 그는 그녀의 원래의 성을 가지고 '푸아소네이드(Poissonnade)'라는 단어를 만들어 그녀를 조롱하곤 했는데 굳이 해석하자면 '생선 스튜'라는 뜻이다. 그 정도는 약과였다. 그가 퐁파두르가 백선에 걸렸다고 비방한 4행시가 투쟁의 클라이맥스였다.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심한 말이 오갔고, 퐁파두르는 갑작스럽게 열병에 걸린 다음 유산을 했다. 모레파는 해임과 동시에 멀찌감치 유배되었다.

퐁파두르는 서서히 은밀하게 프랑스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1755년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인 카우니츠 백작 벤젤 안톤(Wenzel Anton, Graf Kaunitz)의 방문을 받았다. 오스트리아는 바로 얼마 전에 마무리된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와 교전한 국가였고, 카우니츠 백작은 천재적인 외교관으로 소문난 사람이라 국왕 루이는 아예 만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그렇지만 카우니츠와 퐁파두르가 만나고 약 1년 후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제1차 베르사유 협약을 체결하면서 동맹 관계에 들어갔다. 세계사에서 '외교혁명(Diplomatic Revolution)'이라고 불리는 대변동의 서막이었다.

당시 유럽은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동맹을 맺은 상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 관계가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 대 프로이센-영국 동맹으로 뒤바뀐 것이다. 이 외교혁명은 결국 1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국제전인 7년 전쟁으로 번졌다. 전쟁의 결과 프랑스는 캐나다의 프랑스령과 아메리카의 식민지 대부분을 잃었으며 인도에서도 밀려났다. 그녀의 시대와 그 이후에 퐁파두르가 프랑스인들로부터 가장 크게 비난받는 이유가 바로 이 외교혁명과 7년 전쟁이다.

국제 전쟁, 실질적인 국가 재정의 파산, 연인에 대한 국내의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루이는 변함없이 퐁파두르를 사랑했다.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여자들이 미모와 잠자리에서의 섹스 테크닉만 가지고 남자로부터 오랜 기간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퐁파두르는 두 번의 유산을 경험한 다음에는 루이나 그 어떤 남자하고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그 일은 다른 코티잔들의 몫이었다.

퐁파두르의 매력은 다른 곳에 있었다. 볼테르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바르게 자랐고, 활기 넘치고, 선량하고, 매력적이며, 다재다능했다.

그녀는 베르사유 안에 작은 극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루이를 위해 연극을 공연했다. 그녀가 연출을 맡고 중요한 배역도 맡았는데, 이러한 연극들은 언제나 루이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한편 퐁파두르는 왕궁에 들어오기 이전 살롱을 열었을 때부터 줄곧 작가들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는 작가들을 싫어했다. 퐁파두르는 루이에게 작가들을 후원하라고 여러 번 권유했지만, 그때마다 루이는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지원하기에는 그들의 숫자가 너무 많지 않소?"

정원의 퐁파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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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누군가는 왕실의 연대기를 써야 했고, 결국 볼테르가 베르사유 궁에 들어와 상주하면서 이 일을 했다. 그는 이 덕분에 전 시대의 프랑스 역사에 대한 그의 연구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며, 후일 그의 저술 작업에 대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루이와 퐁파두르는 문학 분야에서는 의견을 달리 했지만 건축이나 장식에 관한 취향은 공유했다. 그들은 작고 섬세한 것들을 좋아했다.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세우기보다 숲속에 작은 집을 짓고 화려하게 응접실을 장식하는 데 엄청난 비용을 투자했으며, 집 주변에 열대 식물이나 희귀한 화초를 심고 루이가 광적으로 좋아했던 가금류나 다른 희귀한 작은 동물들이 돌아다니게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금이 오래 가지 못할 작은 것들에 낭비되고 있다고 그들을 비난했다.

퐁파두르는 마흔세 살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죽었다. 그녀의 죽음으로 그녀의 적들은 안도했지만, 국왕은 절망했고 볼테르는 진심으로 그녀를 애도했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 나는 정말 슬프다. 나는 그녀에게 빚을 졌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애도한다. 걷기조차 힘든 이 늙은 글쟁이는 아직 살아 있는데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인생의 최전성기에 마흔의 나이로 죽다니.

그녀에 대한 비난은 대부분 어느 날 국왕의 측근으로 갑자기 끼어든 평민 출신의 여인에 대해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오만한 귀족들이 선동한 것이었고, 대중들은 그들의 선전술에 현혹되었다.

그녀가 외교혁명과 7년 전쟁의 단서를 제공했다는 것 또한 심각한 오류이다. 패전의 요인은 허약한 프랑스의 해군과 육군이었지 마담 퐁파두르가 아니었다.

후일 역사가들이 밝혀낸 당시의 외교사에 의하면 먼저 움직인 쪽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영국과 프로이센이었다. 더욱이 당시 프로이센의 왕은 '대왕'의 칭호를 듣는 야심가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였다. 그의 개성과 행적으로 판단하건대, 당시에 프랑스가 어떤 식으로 대응했든 궁극적으로 큰 전쟁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퐁파두르로 인해 루이 15세가 국고를 낭비했다는 비난은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 책임도 본질적으로는 루이의 몫이다. 그는 다른 부르봉 왕가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에 대해 무지했다. 여기에 얽힌 상당히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파리의 빈민가를 지나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고 루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베르사유에 돌아온 그는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80명이나 되는 왕궁의 정원사들을 해고했다. 그렇지만 그들과 그 가족들이 루이가 만났던 빈민들과 마찬가지로 굶주리게 됐다는 퐁파두르의 지적을 받고 다음날 전원 복직시켰다.

루이와 퐁파두르가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었던 정교하고 아기자기한 건축물과 장식예술을 로코코(Rococo) 양식이라고 부른다. 루이와 퐁파두르는 당시의 건축가, 조각가, 장식예술가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했으며, 이 양식은 두 사람 덕분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브르(Sèvres) 도자기도 그 시기에 퐁파두르의 후원으로 꽃을 피운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분명히 상당한 세금 부담을 짊어졌겠지만, 그 덕분에 그 후손들은 지금 앉아서 돈을 벌고 있다.

그녀의 잘못은 왕궁에서의 일을 왕궁의 방식대로 처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다. 원래 그곳은 얼굴을 보며 웃고 노닥거리다 상대가 돌아섰을 때를 노려서 등에다 칼을 꽂아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뻔히 보는 앞에서 사방으로 비수를 던져 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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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 집필자 소개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으며, 대우조선과 대우통신에서 홍보 및 광고 분야에서 일했다. 저술 및 번역, 출판기획 분야에 관심을 기울..펼쳐보기

출처

불멸의 여인들
불멸의 여인들 | 저자김후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를 개척한 위대한 여인들! 우연히 모든 조건이 맞아 힘들이지 않고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닌, 치열하게 투쟁하여 그 결과 권력과 명예를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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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퐁파두르 부인불멸의 여인들, 김후,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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