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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라니
마니카리카(Manikarnikka), Rani출생 | 18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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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8년 |
본명 | 마하라자 락크쉬미바이(Maharaja Lakshmi Bai) |
국적 | 인도 |
82년이나 지속되었던 빅토리아 여왕 통치기의 대영제국은 확장기 시대의 로마 제국과 여러모로 닮아 있다.
인도인들이 간단하게 '라니(Rani/Ranee)'라고 부르는 마하라자 락크쉬미바이(Maharaja Lakshmi Bai)라는 여인은 1828년에 갠지스 강을 끼고 있는 성스러운 도시 바라나시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어릴 적 이름은 마니카리카(Manikarnikka)였다. 그녀는 긴 이름 대신 애칭인 '마누(Manu)'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마누는 태어날 때부터 한 왕국의 여왕이 될 운명이었다. 그녀는 브라만 계급에 속했고, 그녀의 아버지 탐베이(Moropant Tambey)는 북인도를 지배하던 대제국 마라타(Maratha)의 통치자 바지 라오 2세(Baji Rao II)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제국에 속한 수많은 제후국 중의 하나로 출가하는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탐베이는 그녀를 바지 라오의 왕궁에서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그 교육과목 중에는 유사시를 대비한 승마, 격투, 검술, 사격과 같은 과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인도인들에게 전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녀의 어릴 적에 관한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상당히 과장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다만 이러한 일화들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실은, 어린 나이의 그녀는 얌전하고 모범적인 힌두 소녀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는 것이다. 남자아이처럼 억세고 활기 넘치는 개구쟁이에다 힌두교의 전통에 따라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갖가지 사회적인 제약을 아예 무시하는 타입이었다고 한다.
마누가 열네 살 때 그녀의 아버지 탐베이는 그녀를 데리고 마하타의 제후국 중 하나인 잔시로 여행을 했다. 북부 인도 정중앙의 전략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는 잔시는 단단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와도 같은 도시이다. 당시 그곳의 젊은 군주인해서인 라자(Raja)각주1) 강가다 라오(Gangad har Rao Newalkar)가 바로 마누의 남편이 될 사람이었다. 1842년 강가다 라오와 마누는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 여자는 이름을 바꾸는 힌두교의 관습에 따라 그녀는 공식적인 이름을 락크쉬미바이로 바꾸었다. 행운과 번영을 가져다 주는 여신의 이름이었다. '라니'는 일종의 애칭으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부터 10년 정도가 라니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강가다 라오는 통치보다 연극에 더 열중하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었고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라니는 스물세 살이 되었을 때 첫 아들을 얻었다.
행복하기만 할 것 같던 라니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시점은 이 시기였다. 장차 잔시를 통치해야 할 라자의 후계자는 태어난 지 넉 달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불행은 어느 날 갑자기, 그리고 겹쳐서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가다 라오가 중병에 걸렸다. 그러자 라자의 후계자에 대한 문제가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잔시가 영국의 영토로 편입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당시의 인도 총독은 인도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인물인 달하우지 백작(James Andrew Broun-Ramsay, 1st Marquess of Dalhousie, General Governor of India and Governor of Bengal)각주2) 이었다. 달하우지 이전까지 인도에 대한 영국의 정책은 어디까지나 지역 영주들을 통한 간접지배가 원칙이었으며, 영토 자체보다는 경제적인 이득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독실한 신앙심과 지나친 열성으로 무장한 이 스코틀랜드인은 총독으로 부임하던 첫 해부터 북서부의 시크교도들과 전쟁을 벌여 펀자브 지방을 강제로 합병했던 인물이다.
후일 역사는 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달하우지는 궁극적으로 인도와 대영제국 두 나라의 상황을 크게 악화시킨 인물이다. 인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개인적인 공명심과 영토 확장의 야심으로 여러 번의 잔혹한 전쟁을 일으켰으며, 인도의 전통과 문화를 무시하고 영국의 전통을 강요했다. 그는 다양한 문화로 사분오열되어 혼란스럽기까지 했던 인도인들에게 '인도인'이라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깨닫게 한 인물이다.
그는 대영제국에게도 인도에 대한 것만큼이나 심각한 해를 끼쳤다. 이 시대에 영국이 세계적으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근본 요인 중 하나는 인도라는 거대한 자원공급지와 시장을 통해서 들어오는 막대한 수익이었다. 달하우지는 이러한 지역을 확장한다고 생각했겠지만, 통치력이라는 것도 다른 힘과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인도를 들어오는 수입보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이 훨씬 더 큰 곳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대영제국이 식민지 인도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끈 데에는 누구보다도 '잔시의 라니'가 기여한 바가 컸다.
죽음을 앞둔 강가다 라오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달하우지 백작이 만든 '권리 소멸의 원칙(Doctrine of Lapse)'이라는 정책이었다. 달하우지는 '인도의 라자들이 직접적인 상속자나 후계자를 세우지 못할 경우 그 라자가 통치하던 지역은 영국 동인도 회사에 귀속된다'라는 정책을 세웠다. 어처구니없는 우격다짐이지만, 어쨌거나 달하우지는 이 원칙을 내세워 그가 총독으로 부임한 첫 해에 이미 사타라 지역을 병합해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에 편입시킨 전력이 있었다.
라자 강가다 라오는 친척 중에서 다모다 라오(Damodar Rao)라는 다섯 살짜리 소년을 골라 입양했다. 힌두교와 마하타 제국의 전통에 따른 적법한 절차였다. 강가다 라오가 죽자 라니는 어린 다모다 라오를 대신해서 잔시를 통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달하우지는 이 지역의 병합을 선언했다. 라니는 그에게 두 번이나 청원을 냈지만, 첫 번째는 거절되었고 두 번째 청원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그녀의 영국인 법률고문 존 랑(John Lang)은 달하우지가 아니라 본국에 청원을 내라고 충고했다. 이 청원 역시 1854년에 최종적으로 기각되었지만, 논의 과정에서 달하우지의 위험한 정책 자체가 비판을 받았다.
이에 달하우지는 그녀에게 아주 치졸한 방식으로 보복했다. 그는 강가다 라오가 그녀에게 남긴 보석과 재산을 '국가 재산'이라는 명목으로 몰수하면서 연간 6만 루피의 연금을 제안했다. 물론 연금은 잔시의 부담으로 지급되고, 지급 이전에 강가다 라오가 동인도 회사에 지고 있던 부채를 먼저 청산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나는 나의 잔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그녀는 이렇게 소리쳤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영국에 대한 인도의 초기 저항운동을 이끌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탄티아 토페(Tantia Tope)각주3) 와 접촉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 시기에 이미 영국인들의 통치로부터 잔시를 독립시키려는 생각이 확고했으며, 탄티아 토페에게는 "잔시를 '자유 인도의 실례'로 만들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영국 정부와 인도의 총독부는 모든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특히 잔시라는 작은 지역과 그곳의 라니는 별로 중요하게 고려할 사안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라니 본인도 사태가 급격하게 바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857년, 전 인도를 뒤흔들게 될 폭력 사태가 잔시에서 발생했다.
인도 역사에서 '세포이(sepoy)의 반란'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세포이는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단어의 의미만 보자면 '보병(infantry)'이라는 뜻으로, 기병인 '소와르(sowar)'에 상대되는 말이다. 세포이는 영국군이나 동인도 회사가 보유한 군대에서 보병으로 복무하는 현지 인도인들을 의미했다. 1857년 5월 10일 미루트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동인도 회사의 군대에서 세포이들이 하극상의 폭동 사태를 일으켰을 때, 이것이 제1차 인도 독립전쟁으로 번질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폭동은 한 달 만에 북부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대부분의 부대로 번졌으며, 잔시에서는 큰 비극이 발생했다. 폭동을 일으킨 일단의 세포이들이 잔시의 요새를 포위했다. 잔시에 있던 수백 명의 영국인과 유럽인 중 대부분이 민간인들이었고, 그중에서도 여자와 아이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포이들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고, 항복이 받아들여져 무장을 해제하고 잔시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세포이들이 돌격했다. 유럽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학살되었고, 생존자는 이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극소수였다.
이 학살자들이 떠날 때 라니는 그들에게 3만 5천 루피와 말 다섯 마리, 코끼리 두 마리를 내 주었다. 그녀는 6월 14일 사가르에 있던 고문관 어크스카인(Erkskine) 대령에게 편지를 보내 사건의 진상을 설명했다. 그녀는 '신앙심이 결여된 잔인하고 폭력적인' 폭도들을 비난하고 영국인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했다. 그녀는 충분한 병력과 무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에게 위협을 받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돈과 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라니는 생존한 영국 관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잔시의 행정을 맡고 있다고 밝혔다.
어크스카인은 '다른 경로로 얻은 정보와도 일치된다'라는 코멘트와 함께 그녀의 편지를 중앙정부로 보냈으며, 7월 2일 그녀에게 답신을 보내어 다른 감독관이 도착할 때까지 징세와 치안을 포함해서 모든 행정업무를 수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잔시에서 군대를 모집해 자체의 방어를 강화했다. 그러자 수천 명의 자원자들이 몰려들었다. 이것은 영국군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혼란의 시기마다 으레 있었던 야심만만한 라자들의 공격을 대비한 것이었을 확률이 크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9월과 10월에 이웃한 제후국 다티아(Datia)와 오르크차(Orchha)의 라자들이 연달아 잔시를 공격했지만, 라니는 여유 있게 방어에 성공했다. 이 시기에는 한때 델리를 점령하고 무굴의 바하드르 샤 자파르(Bahadur Shah Zafar)를 힌두스탄(Hindustan)의 통치자로 옹립하면서 기세를 올렸던 세포이들이 델리를 빼앗기면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라니에 대한 영국의 태도가 달라졌다. 여기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잔시에서 부세무관으로 일하던 토튼(Thornton)이라는 자였다. 잔시의 학살을 라니가 지휘했다는 그의 증언과 함께 잔시 학살에서의 생존자인 머틀로우 부인(Mrs. Mutlow)의 증언이 증거로 제시되었다.각주4) 라니는 다음해 1월 1일 인도의 중부를 책임지고 있던 로버트 해밀턴(Robert Hamilton) 경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서신을 보내지만, 그의 힘으로도 사태를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이미 심적으로 라니를 유죄로 규정하고 있었고, 휴즈 로즈(High Rose) 경이 지휘하는 부대가 잔시를 향해 출발했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당시 잔시 학살에서 살아남았던 생존자 마틴(T. A. Martin)이라는 사람이 라니의 양자인 다모다 라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울컥한 심경을 토로했다.
가련한 당신의 어머니는 부당하고 잔인하게 취급되었습니다. 그 내막을 나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무력충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영국인들에게 잔시는 대단히 위험한 지역이 되어 있었다. 세포이들의 마지막 거점인 우드(Oudh)까지 점령된 그 시점에서 잔시는 그녀의 표현 그대로 유일한 '자유 인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해 3월 로즈가 지휘하는 대군은 잔시를 포위했다. 라니와 잔시 주민들은 2주 동안이나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끝내 함락되었다. 탄티아 토페는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대병력을 지휘해서 남하했으나 영국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막대한 희생자만 기록했다.
영국군은 8천 명 이상의 주민들을 학살함으로써 지난번의 사태를 앙갚음했다. 라니는 어린 다모다 라오를 등에 업고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그녀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두 여전사 만다르(Mandar)와 카쉬(Kashi)와 함께 잔시를 탈출했다. 그녀는 로즈의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북상하여 반란의 거점인 카플리에 도착해 탄티아 토페, 나나 사힙, 그리고 다른 저항운동의 지도자들과 합류했다. 그런데 로즈의 다음 목표가 바로 카플리였다.
카플리 전투에서 인도의 저항군은 다시 한 번 큰 패배를 당했다. 그렇지만 이 전투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사람은 라니였다. 그녀는 소수의 기마대를 지휘해서 기습적인 기마전을 전개하면서 줄기차게 영국군을 괴롭혔다.
"만약 전투의 지휘를 탄티아 토페가 맡지 않고 라니가 맡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 전투에 대한 로즈 경의 생각이었다.
이제 라니는 전 인도인들의 우상이 되었다. 인도 저항군뿐 아니라 영국군에 종군하고 있는 인도 출신 병사들 사이에서도 그녀를 숭배하는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 덕분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와해 위기의 저항군에게 마지막 희망이 생겼다. 괄리오르의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로즈의 부대에서 인도 출신 군인들이 이탈해 반란군에 합류한 것이다. 천하의 로즈도 별 수 없이 퇴각했다.
로즈는 석 달 후인 6월에 저항군 최후의 거점 괄리오르를 포위했다. 치열한 전투가 이틀째 계속되던 와중에 저항군 쪽에서 갑자기 휴전을 요청했다. 로즈는 휴전에 응했다. 이어서 라니의 전사소식이 영국군에게도 알려졌다. 정확한 상황이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제8 후사르(Hussars) 기병대와 백병전을 벌이다 등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항상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만다르와 카쉬도 함께 전사했다. 후사르 기병대는 로즈 휘하의 다른 부대원들로부터 비난과 원성을 들어야 했다. 저항군은 이틀 동안 통곡했다. 괄리오르 요새는 전투가 재개된 바로 그날 함락되었다.
왕좌는 흔들리고 충성은 침묵할 때
옛 인도는 새 젊음으로 활기를 되찾았네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유의 가치를 깨닫고
침입자를 내치겠다고 모두가 다짐했네
낡은 칼은 57년에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니
시바를 섬기는 분델의 음유시인이 말하기를
여기에 남자처럼 싸운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잔시의 여왕이라네.
식민지 시대 말기에 활약하던 인도의 여류시인 쿠마리(Subhadra Kumari Chauhan)가 쓴 〈잔시의 라니(Jhansi ki Rani)〉라는 시이다. 라니는 서른 번째 생일을 맞지 못하고 죽었지만, 인도 독립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녀의 이름이 들리는 곳마다 인도의 남자와 여자들이 속속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47년 독립 후에 인도 정부는 잔시와 괄리오르 두 곳에 라니의 동상을 세웠다. 말에 올라타 오른손으로 칼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이다.
부디카와 라니 두 사람 모두 침략자에 맞서 처절하게 저항한 영웅들이고 탐욕에 사로잡힌 정복자들에게 희생된 순수한 용기를 상징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는 것이 분명한데 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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