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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멸의 여인

마틸다

마틸다 카노사, Matilde

그리스도 토스카나의 여전사

요약 테이블
출생 1046년
사망 1115년
국적 이탈리아

중세 유럽에는 경건한 신앙심과 불굴의 투지로 무장하고 광기와 공포가 지배하는 전장을 누빈 여인들이 있었다. 잉글랜드가 바이킹의 한 계열인 데인족의 침입을 받았을 때 색슨족을 구한 알프레드 대왕의 딸 에텔플레다(Ethelfleda, Lady of the Mercians), 14세기 중반 잉글랜드의 대군으로부터 스코틀랜드를 구해낸 던바 백작부인 아그네스(Countess Agnes Dunbar)와 같은 사람들이 그러한 전사들이다.

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역시 프랑스의 잔 다르크일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녀가 누리는 명성에 비해서 그녀가 실질적으로 올린 군사적인 성과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혜성처럼 역사에 등장해서 비극적으로 퇴장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그녀가 활약한 기간은 왕궁에서 허송세월한 여러 달의 기간까지 모두 포함하더라도 고작 1년 3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그녀는 1429년 4월 29일부터 5월 8일까지 9일 동안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있는 잉글랜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잉글랜드군이 포위를 풀고 퇴각하게 만들었으며, 이 승리로 '오를레앙의 처녀(La Pucelle d' Orléan)'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6월 9일에서 19일까지 로어 계곡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냈으며 그녀 덕분에 왕위를 차지하게 된 샤를 7세(Charles Ⅶ)의 대관식을 위해 6월 29일에서 7월 17일까지 랭스 대성당까지 행군한 것이 그녀가 성취했던 승리의 전부였다.

잔 다르크가 프랑스군에 끼친 엄청난 영향력은 뛰어난 전략이나 전장에서의 리더십이 아니라 종교적인 신념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녀의 죽음이 순교의 성격을 띠자 여러 해 동안 이어진 패전으로 무력한 패배주의에 빠져 있던 프랑스인들을 크게 자극했던 것이다. 전쟁 자체는 잔 다르크가 죽은 후에도 이십 년 넘게 계속되었으나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전쟁의 주도권은 프랑스인들에게 넘어갔다.

프랑스인들은 잔 다르크가 실제로 신의 뜻을 실천하다 부당하게 순교한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잉글랜드 사람들은 이와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서 〈헨리 6세〉에 등장하는 잔 다르크는 천사장 미카엘이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대악마 루시퍼로부터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은 인물이었다. 신학적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서 '성인'의 명칭을 부여하는 데 매우 까다로운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녀에 대한 시성을 아주 오랫동안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1905년 프랑스가 제정한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법령(Concernant la Séparation des Église et de l' État)〉에 의해 프랑스 교회의 소유권이 바티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후 프랑스의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그녀에 대한 미화 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성인으로 추앙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으며, 교황청에 의해서 정식으로 시성된 시기는 성인의 의미 자체가 많이 퇴색된 1920년의 일이었다.

여전사 마틸다

중세 시대의 인물 중에서 그리스도의 여전사를 단 한 사람만 선정한다면, 잔 다르크보다 더욱 적합한 후보자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대백작녀 마틸다(Matilde, la Gran Contessa della Tuscany)가 그 주인공으로, 잔 다르크보다 3세기 반 정도 앞선 1054년 태어나 오랜 기간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을 위해서 군사적으로 맹활약했던 대단한 여전사였다.

나의 사촌누이여, 그대가 나를 위해 변호를 해 주오.
성하께 나의 용서를 구해 주시오.
오! 나의 용감한 사촌누이여,
그분께 가서 나에게 다시 한 번 축복을 내려 주시도록 해 주오.
나는 그대에게 간절히 청하고 있소.

이 대화는 우리가 세계사에서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이름으로 배우는 역사적인 장면의 클라이맥스이다. 맨발로 얼어붙은 땅 위에 꿇어앉아 간절히 애원하고 있는 사람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후보인 하인리히 4세이고, 그의 청원을 듣고 있는 사람은 그의 육촌 누나인 토스카나 대백작녀 마틸다이다. 때는 1077년 정월의 어느 날이며, 장소는 마틸다의 근거지인 카노사 성의 정문이다.

사람에 따라 천하고 빈곤한 환경이 아니라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고귀하고 부유한 환경이 평생을 지고 가야 할 커다란 짐이 되는 아이러니한 경우가 있다. 평생 동안 신성로마 제국 전체를 상대로 혼자 외롭게 투쟁해야 했던 대백작녀 마틸다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마틸다는 북부 이탈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토스카나 후작 보니파체 3세(Boniface III, Margrave of Tuscany)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이 일가에 연이어 닥친 불운과 시련 때문에 유일한 상속자로 남게 되었다.

6세기 북부 유럽에서 남하해서 북부 이탈리아에 정착해 이탈리아 왕국을 세웠던 게르만족의 일파를 롬바르드인(Lombards)이라고 한다. 보니파체 후작은 이들의 영주로, 밀라노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롬바르디아와 에밀리아, 양대 주의 거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사나운 워로드(warlord)각주1) 였다. 마틸다의 어머니는 북로렌 공작 프레데리크 2세(Ferederick II, Duke of Upper Lorraine)의 둘째 딸인 베아트리체(Beatrice)였으며,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사촌 누이였다.

베아트리체는 보니파체 후작의 두 번째 부인이었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보니파체의 첫 번째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슬하에 자식도 두지 못했다. 보니파체와 베아트리체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첫 번째가 어머니의 이름을 딴 베아트리체, 그 다음이 외아들 프레데릭, 막내가 마틸다이다.각주2) 그녀의 이름은 외조모인 슈바비아(Swabia) 대공녀로부터 딴 것이다. 마틸다는 부계로부터는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물려받고, 모계로부터는 뛰어난 두뇌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마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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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의 나이가 여섯 살이었을 때부터 집안에 불행이 연이어 닥치기 시작했다. 최초의 사건은 보니파체 후작이 암살당한 일이었다. 보니파체는 당시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랑켄(Franken) 왕조의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 암살 음모에 대해서 당시에도 상당한 논란이 제기되었지만, 하인리히는 혐의를 부인했으며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당대 최고의 전사가 암살로 생을 마감한 일은 이 집안에 드리워진 비극의 시작이었다. 보니파체가 죽고 나서 바로 다음해에는 맏딸 베아트리체가 병으로 죽었다.

보니파체가 남긴 영지는 북부 이탈리아를 동서로 나누는 아펜니노 산맥의 양쪽에 넓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부유한 도시들이 여러 개 포함되어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자신과 어린 프레데릭의 능력만으로는 탐욕스러운 워로드들로부터 넓은 영지뿐 아니라 가족들의 안전까지도 지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강력한 보호자가 필요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재혼을 통해서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다.

베아트리체는 황제와는 다른 쪽으로 사촌형제 사이인 남로렌 공작 고드프리 3세(Godfrey III, Duke of Lower Lorraine)가 때마침 상처하자 그와 재혼했다. 고드프리는 '턱수염(the Bearded)'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사나운 전사였다. 이 결혼과 동시에 나이 어린 마틸다는 고드프리의 아들인 고드프리 4세(Godfrey IV)와 약혼한 사이가 되었다. 이를테면 이중 안전장치였다. 작은 고드프리는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곱사등이(the Hunchback)'라는 별명으로 아버지와 구분된다.

턱수염 고드프리와 베아트리체의 결혼은 마틸다에게 또 다른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의 결혼은 급작스러운 것이기는 했어도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9세(Leo IX)의 주례로 이루어진 정식결혼이었다. 그러나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3세는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이 결혼에 대해 몹시 분노했다. 고드프리는 황제 자리를 놓고 하인리히와 경쟁하던 숙적이었다. 그는 원래 북로렌 공작이었지만 하인리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독일에서 축출되어 토스카나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다.

하인리히는 이탈리아로 남하해서 피렌체에 자신의 궁정을 열고 나서 그를 방문한 베아트리체를 투옥시켰다. 그리고는 토스카나 후작을 계승한 마틸다의 오빠 프레데릭에게 궁정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강단이 있었던 프레데릭은 하인리히의 소환을 무시했다. 며칠 후 프레데릭은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각주3) 사태가 이런 지경에 이르자 고드프리는 황제가 없는 독일로 치고 올라가 로렌 지방을 장악하면서 황제를 위협했다.

하인리히는 이탈리아를 떠나 독일로 귀환했으며, 베아트리체는 황제의 볼모신세가 되었다. 홀로 남겨진 마틸다는 이 기간에 토스카나 후작가문의 주성(主城)으로 높은 바위 언덕 위에 세워진 천혜의 요새 카노사와 토스카나 지역의 중심지인 루카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상속법에 의해 앞으로 넓은 영지를 다스려야 할 마틸다는 상당한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었다. 때문에 여덟 살 나이의 어린 소녀에게는 힘에 겨운 엄격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 사람의 워로드였다. 그녀에게는 야전에서 적들을 직접 상대하는데 필요한 전투기술을 습득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마틸다의 군사훈련을 담당한 교관은 '팔루다의 아루두이노(Arduino della Palude)'각주4) 라는 직업군인이었다. 가혹한 훈련으로 다져진 후일의 마틸다는 몸이 가는 편이기는 했어도 키가 상당히 크고 웬만한 남자보다도 강한 근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창으로 무장하고 싸우는 마상전투와 전투용 도끼나 칼을 들고 싸우는 보병 근접전 양쪽에 모두 능숙했다고 한다.

군사 훈련 외에 다른 부문에서의 교육도 철저하게 이루어진 듯하다. 그녀는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뿐 아니라 독일어,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그 시대의 다른 영주들과 구분되는 면이었다. 당시의 워로드들은 지식이나 교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아예 문맹인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지식이나 교양이 용기와 마이너스의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귀족 여인들도 남자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에서 수도사의 도움 없이 글을 읽거나 쓸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다.

13세 소녀의 출전

마틸다의 위기는 일 년 넘게 지속되다 턱수염 고드프리와 그의 동맹자인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Baudouin V, Count de Flandre)가 북부 독일에서 하인리히 황제를 압박해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해소되었다. 마틸다가 열 살이 되던 해에 하인리히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마틸다의 어머니 베아트리체가 고드프리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프랑켄 왕조의 후계자는 마틸다보다도 네 살이나 어린 하인리히 4세였다. 로렌 공작 고드프리는 신성로마 제국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교황 선출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교황의 자리가 공석이 되자 그의 친동생인 프레데릭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스테파노 9세로 즉위했다. 이때부터 마틸다의 집안은 바티칸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스테파노 9세는 1년여 만에 죽었으나 그를 계승해서 약 3년 동안 교황으로 재위한 니콜라오 2세는 피렌체의 대주교, 다시 그를 계승한 알렉산데르 2세는 루카의 대주교로 모두 토스카나 출신이었다.

이 시기에 교황청에 대한 토스카나 공작 겸 로렌 공작 고드프리의 영향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마틸다가 열세 살이던 1059년, 워로드로서의 공식적인 첫 출전이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전투는 아니었고 교황의 반대 세력들에 대해서 로마 방어에 대한 토스카나 공작의 능력과 의지를 과시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무력 시위이었다. 그녀는 의붓아버지 턱수염 고드프리, 의붓오빠이자 약혼자인 곱사등이 고드프리, 어머니 베아트리체, 그리고 토스카나의 병사들과 함께 로마로 행군했다.

2년 후인 1061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 대항해서 일부 주교들에 의해 대립교황각주5) 호노리오 2세가 선출되자 마틸다는 턱수염 고드프리와 함께 다시 로마로 진군했다. 이때 마틸다는 고드프리와 동행한 정도였고, 전투에서 실질적으로 맹활약을 한 사람은 궁수대와 기병대를 지휘한 그녀의 무술 선생 아루두이노였다. 그는 귀베르트(Guibert)각주6) 라는 신부가 지휘하는 군대를 격파했으며, 호노리오 2세는 교황에게 용서를 받기는 했으나 결국 은퇴했다.

이 와중에 마틸다는 상당히 어린 나이에 의붓오빠인 고드프리와 결혼했다고 전한다. 일부 기록에서는 두 사람이 정신적인 교감 없이 의무적으로 육체적인 관계만을 가졌다고 하지만 이는 마틸다에게 신성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기록이 확실하다. 고드프리는 신체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기는 했어도 대단히 용감한 전사였으며 존경할만한 남자였다. 마틸다에게 '성처녀(Sacred Virgin)'의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한 불확실하고 막연한 주장 이외에 이 어린 부부의 소원한 관계를 전하는 신뢰할만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마틸다와 고드프리가 후일 끝내 결별하게 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 빚어낸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마틸다가 크게 의존했던 의붓아버지 턱수염 고드프리는 마틸다가 스물한 살이던 1069년에 사망했다. 그는 마틸다와 함께 토스카나를 공동으로 통치하는 영주인 동시에 멀리 북부 독일에 위치한 로렌의 공작이기도 했다. 마틸다의 의붓오빠이자 남편인 고드프리는 그에게 남겨진 로렌의 영지를 통치하기 위해 북쪽으로 떠나야 했지만, 마틸다는 토스카나의 영지를 통치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머물러야 했다.

고드프리는 2년 정도 토스카나에 머물다 마틸다가 딸 베아트리체각주7) 를 낳은 후에 로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것이 이 부부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고드프리는 독일의 어린 왕 하인리히 4세를 위해서 그에게 반란을 일으킨 작센 공작 마그누스(Magunus, Duke of Saxony)를 격파하고 연이어 위트레흐트 주교령(Archbishopric of Utrecht)각주8) 을 노리고 침공한 홀랜드와 플랑드르의 연합군을 상대하던 도중에 비열한 방식으로 암살되었다. 1076년의 일이었으며 마틸다의 어머니 베아트리체도 바로 이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마틸다는 보호자 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자신의 영지를 사수해야 했다. 이 시기에 그녀보다 네 살이 어린 하인리히 4세도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고 줄곧 어머니인 아그네스 황후의 섭정체제하에서 순탄하지 않은 성장기를 보냈다.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3세는 강인한 군주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독일에 있는 제후들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으며 교황을 세 사람이나 폐위시킨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아그네스 황후는 아들에게 상속된 광대한 영지 중에서 바이에른 공작령과 슈바벤 공작령을 작센 백작 오토와 사위인 루돌프에게 양도해서 왕실의 위세를 스스로 하락시키는 실책을 범했다. 하인리히 4세는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으로 성격이 호방해서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몰렸고 예술과 문학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던 개명된 군주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 유괴를 당했던 아픈 기억으로 인해서 아집과 권력욕이 남달리 강하고 성급하면서도 고집이 세고 무모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의 독특한 개성은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난 치세 초반에 그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작센과 바이에른의 영주들을 적대시하는 바람에 하인리히 자신이 보름스까지 피난해야 하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던 작센 지역의 반란은 그의 무모한 성격과 영토 확장에 대한 욕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가 재위 기간 내내 교황들과 벌였던 처절한 투쟁 역시 타협했을 경우와 비교하여 그가 얻을 수 있는 정치적인 실익이라고는 거의 없는 일종의 기세 싸움이었다.

당시 교황은 그레고리오 7세였다. 성 베드로 이후 현재까지 역대의 교황 중에서 가장 개혁적이었던 교황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로 가톨릭 역사에서는 그의 통치를 '그레고리오의 개혁(Gregorian Reform)'으로 부른다. 마틸다의 근거지인 토스카나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인 그는 불과 몇 년 전에 새롭게 확립된 공식적인 절차에 의해서 동료 주교들과 일반 신부들의 지지를 얻어 교황으로 추대된 사람이었다. 가톨릭 교회의 성립 이후 철저하게 세속화, 권력화의 길을 걸어왔던 교회에서 그의 즉위와 함께 최정상으로부터 하향식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오랜 세월 반목하고 지내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화해를 시도해 성사시켰으며, 이교도인 사라센의 군주들과의 관계 개선도 시도했다. 또한 그는 주교 이상의 고위직에 있는 성직자들에 대해서 기록적인 횟수의 파문장을 날린 사람이기도 했다. 그레고리오 7세가 가장 치중한 일은 교황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작업이었으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주들로부터 성직자의 임명권을 독립시키는 일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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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3세기 전인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 날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의 정복자 샤를마뉴에게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씌워줄 때 바티칸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고대 로마의 법체계에 따라 황제의 영향력 안에 들어간 셈이었다. 그레고리오의 시대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뿐 아니라 모든 군주들이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 내에서 군주가 성직자 임명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레고리오의 의도가 명확한 이상 젊고 야심만만한 황제와의 충돌은 불가피해 보였다.

교황에게는 현실세계에서 하인리히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항할 수 있는 무력이 필요했으며,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은 마틸다뿐이었다. 당시 시칠리아와 로마가 위치한 남부 이탈리아에는 바이킹의 일파인 노르만인들의 왕국이 성립되어 그곳의 워로드들이 스스로 바티칸의 수호자임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워로드들 중에서 오직 마틸다만이 세속적인 권력 대신 천상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카노사의 굴욕

개혁주의자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아직까지는 황제로 등극하지 못하고 있던 하인리히는 1076년 밀라노 대주교의 임명권을 두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원래 밀라노 대주교가 공석이 된 시기는 이보다 3년쯤 전이었다. 밀라노의 개혁주의자들각주9) 이 교황의 지지 아래 그들 스스로 대주교를 선임하자 롬바르디아의 주교들이 크게 반발했다. 그들은 하인리히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가 새로운 주교를 임명하자 교황은 여기에 관련된 주교들에 대해서 전원 파문 조치했다.

하인리히는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작센에서 대반란이 일어나자 서한을 보내서 겸손하게 주교 임명권을 포기했다. 그러자 교황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로마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해 세속의 권력자가 성직자를 임명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으며, 하인리히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작센의 반란이 수습되자마자 하인리히는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교황은 그에게 서신을 보내어 '사울왕의 슬픈 운명'각주10) 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주교 임명권에 대해서 그와 타협할 의사가 있음을 시사했다.

이 시점에서 하인리히의 성격이 문제를 크게 만들고 말았다. 교황의 서신에 발끈한 그는 1076년 정월 초하루부터 교황을 폐위하겠다고 선언하며, 당시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26명의 주교들을 보름스로 소집해서 교황의 명령에 따르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로써 밀라노 대주교가 누가 될 것이냐 하는 사소한 문제가 교황과 황제 내정자 사이의 'Dead or Alive'식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단호하게 회의에 참가한 주교 전원과 하인리히에 대한 파문으로 응수했다. 이 파문의 여파는 컸다. 주교들이 하나 둘 교황에게 백기를 들었고, 하인리히에 대한 충성의 의무에서 벗어난 독일의 영주들은 새로운 황제가 될 국왕각주11) 을 선출하기 위해서 모였다. 이때가 10월이었다. 하인리히는 영주들에게 단지 일 년의 기간을 유예받는 조건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겠다고 다급하게 약속했다. 그 다음 장면이 바로 이 글의 앞부분에서 묘사한 '카노사의 굴욕'이다.

카노사 성에서 하인리히의 청원을 듣고 있는 마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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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하인리히는 전면적인 군사행동도 고려했지만, 마틸다와 그녀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사나운 롬바르드 전사들이 지키고 있는 알프스를 돌파하는 일이 큰 부담이었다. 그는 군사적 모험 대신 정치적인 해결책을 선택했다. 그는 교황이 마틸다의 주성인 카노사에 머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맨발에 수도복 차림으로 그곳에 나타났다. 그러나 교황은 며칠 전에 출발하고 난 다음이었으며 교황 대신 그를 맞아들인 사람은 마틸다였다.

'카노사의 굴욕'은 독일뿐 아니라 모든 유럽의 군주들로부터 성직자 임명권이 박탈되어 교황에게 귀속되는 계기가 된 대단히 역사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당시 훗날의 역사적인 의미를 알고 있을 리 없던 단순한 하인리히는 자신이 파문의 명분을 제거함으로써 교황에 대해 정치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확신했다. 단기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실질적으로도 큰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삼 년 후에 하인리히는 교황과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한 번 대립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의 강력한 경쟁자이자 매형인 슈바벤 공작 루돌프가 죽은 다음이라 배후에 적대적인 세력의 준동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대병력을 몰아 이탈리아로 원정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마틸다는 병력이 현저하게 열세였지만 교황을 지키기 위해서는 싸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알프스를 넘는 여러 개의 길목 중에서 라벤나를 통과하는 한곳만을 제외하고 모두 봉쇄했다.

그러자 이곳으로 통과해 진군한다고 해도 하인리히는 후방에 껄끄러운 마틸다를 두고 로마를 수비하는 노르만인들과 싸워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마틸다는 하인리히에게 정면 돌파를 강요한 셈이었다. 전략은 훌륭했지만 보유하고 있는 전력의 격차가 문제였다. 그녀의 상대는 신성로마 제국 전체였다.

마틸다는 1080년 10월 만토바 부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알프스로 후퇴했으며, 토스카나의 수도였던 루카의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편으로 돌아섰다.각주12) 기가 오른 하인리히는 다음해 여름 그녀의 작위를 박탈했다.

그러나 이 정도 조치로 마틸다의 권위나 영향력이 손상되지는 않았다. 하인리히는 1080년과 1081년 두 번에 걸친 로마 공격에 실패하고 1084년에야 로마에 입성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는 로마를 탈출했다. 이 시기에도 마틸다의 권위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독일의 영주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을 통해 전달되지 않은 교황의 서신은 하인리히에 의해 위조된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과거에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 라벤나의 귀베르트를 클레멘스 3세라는 이름으로 대립교황의 자리에 앉히고 나서, 그로부터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받았다.

자신의 뜻이 이루어진 하인리히는 그의 동맹자들을 남겨두고 독일로 돌아갔고, 그레고리오는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빅토르 3세(Vitor III)가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자 마틸다는 노르만의 워로드인 카푸아의 조르다노(Giordano of Capua)와 연합해서 새로운 교황을 지지했다. 마틸다는 1087년에 대립교황을 축출하기 위해서 로마를 공격했지만 황제파의 반격으로 실패했으며, 이 여파로 빅토르 3세는 은퇴해야 했다.

빅토르 3세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이 우르바노 2세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집단지성의 결과물 중 하나였던 십자군 원정의 첫 제안자로 유명하지만, 그는 그레고리오 교황 시절 그의 개혁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후일 그것을 계승한 개혁주의자로 프랑스의 대단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새로운 교황 우르바노는 마틸다에게 바이에른의 벨프 5세(Welf V)와 재혼할 것을 권했다. 그는 마틸다보다 스물여섯 살이나 연하인 열일곱 살 소년이었다.

마틸다의 첫 결혼과는 달리 이번의 결혼은 명확한 전략적 제휴였으며, 그 기간도 5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벨프 가문이 바이에른 공작의 작위를 대가로 하인리히 4세 편에 가세했기 때문이었다.각주13) 그렇지만 이 기간 동안 마틸다는 그녀의 휘하에 벨프 가의 튜튼 기사단을 보강해서 역공에 나섰으며, 그녀의 주성인 카노사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하인리히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인해서 이탈리아 내에서 황제의 영향력은 큰 손상을 입고 말았다.

마틸다와 벨프가 이혼한 1095년, 하인리히는 다시 한 번 이탈리아를 침공해서 마틸다의 요새 중 하나인 노가라 성을 포위했으나 지원군을 이끌고 달려온 마틸다에 의해 다시 한 번 패퇴하며, 2년 후에 황제의 병력은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마틸다의 시련은 이제야 비로소 끝났다. 그녀는 페라라, 파르마, 프라토와 같이 황제에게 충성하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아버지 하인리히 4세와 전투를 벌이면서도 그를 계승하게 되는 둘째 아들 하인리히 5세는 마틸다에게 우호적이었으며 그녀를 존중했다.

잔인한 정복자, 진정한 투사

마틸다는 이탈리아 내에서 그녀의 권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1115년 응혈(凝血)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얼마간의 이론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에게는 후사가 없었다는 사실이 공식적인 기록이다. 그녀의 영지와 재산은 유언에 따라 모두 교회에 기증됐다. 그러자 아주 당연히 바티칸의 음모설이 제기되었다. 그녀의 유산을 놓고 교황과 황제, 그리고 그녀와 가장 가까운 친척들인 육촌 형제들과 그 후손들이 오랫동안 경합을 벌이다, 1213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마틸다의 유산 전체가 바티칸의 소유임을 선언함으로써 가까스로 사태가 종결되었다.

그녀의 죽음으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은 형식적으로 교황의 직할령이 되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치권을 갖는 수십 개의 도시국가들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가 되었다. 피렌체, 루카, 피사와 같은 도시들은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이 후일 바로 이 지역에서 유럽의 역사를 뿌리부터 뒤바꾸게 될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꽃피는 토양이 되었다.

마틸다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역사가들은 상대를 제압한 후에도 끝까지 추격해 완전히 섬멸했던 그녀의 잔혹함과 정복지에서 자행한 난폭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비난한다. 그녀에게 정복과 학살, 파괴는 일상적인 작업이었으며, 자신의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반 서민들에 대한 착취는 물론 대대적인 약탈까지도 불사했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그 시대를 풍미했던 워로드들 중의 하나였다. 워로드란 오직 자신이 가진 무력으로만 승부를 보는 사람들이다. 그녀의 행동은 그 시대의 기준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으며, 현대의 기준을 그 시대에 적용시키는 것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마틸다는 그녀가 살았던 시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유일하게, 그리고 현대의 기준으로도 쉽게 찾아지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강인한 여인이었으며, 모든 전사들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진정한 투사이기도 했다. 이 여전사가 그 시절의 다른 워로드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은 남다른 용기와 불굴의 투지, 뛰어난 지성 외에도 신앙심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틸다와 성 베드로를 위하여!"각주14)

그녀의 병사들은 전투에 임하면서 항상 이렇게 외쳤다고 전한다. 그녀는 이른바 '그레고리오 개혁'의 바탕이 되는 순수한 신앙이 실현되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정의의 힘을 믿었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종교적 열정으로 한 시대를 정복한 인물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설사 마틸다가 가진 종교적인 열정 때문에 수천의 목숨이 사라지고 수만의 민중이 고통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그녀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였으며, 그녀가 평생 잊지 않고 있었던 종교적인 신념만큼은 분명 숭고한 것이었다.

마틸다의 견고한 요새이자 마음의 고향이었던 바위의 성 카노사는 그녀가 죽은 지 100여 년 후에 이웃한 도시 레기오(Reggio)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후일 이탈리아의 도시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투쟁 속에서 그녀의 영원한 안식처마저 위협받자, 바티칸은 17세기에 그녀의 시신을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으로 옮겼다. 그곳은 숱한 사도와 성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이 조치를 통해서 600년이 지난 다음에도 바티칸은 교회에 대한 그녀의 헌신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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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 집필자 소개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으며, 대우조선과 대우통신에서 홍보 및 광고 분야에서 일했다. 저술 및 번역, 출판기획 분야에 관심을 기울..펼쳐보기

출처

불멸의 여인들
불멸의 여인들 | 저자김후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를 개척한 위대한 여인들! 우연히 모든 조건이 맞아 힘들이지 않고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닌, 치열하게 투쟁하여 그 결과 권력과 명예를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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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마틸다불멸의 여인들, 김후,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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