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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멸의 여인

팜므 파탈

치명적 여자, femme fatale

뿌리칠 수 없는 유혹

남자와 여자가 상대방을 보는 시각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남녀 관계는 대개 서로 호감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일방통행적인 관계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한쪽의 주도로 시작해서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고 긴밀한 관계가 이루어졌을 때 남자의 경우에는 "저 녀석은 도도한 퀸카를 정복했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반면 여자는 '정복'이라는 표현보다 '유혹'이라는 어휘를 주로 사용한다.

남자는 여자를 정복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유혹한다는 것이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이다. 정복이나 유혹 모두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지만, 어휘의 의미를 세심하게 살펴보면 유혹 쪽이 훨씬 더 치명적이다. 정복을 당한 상대방은 당연히 정복자에 대해서 저항할 권리를 가지지만, 유혹이라는 것은 저항의 의지를 아예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단순히 '치명적인 여인'이며 우리말로는 '요부(妖婦)' 정도로 해석되는 이 프랑스어 단어는 상당히 복잡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요즈음에는 이 단어를 남용해서 반쯤 드러낸 가슴과 퇴폐적인 화장, 멍청한 표정 세 가지만으로도 아무 여자나 팜므 파탈이 되지만, 원래는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아담을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만든 인류의 어머니 '이브'에서 시작된 여인의 원죄와 관련된 개념이었다.

또한 이 단어는 '유혹'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악마적인 여성상을 의미한다. 악마와 팜므 파탈은 동일하게 유혹을 주 무기로 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엄격한 해석에 의하면, 이브가 아담을 부추겨 선악과를 먹게 한 행위는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는 것과 동일한 범죄 행위였던 것이다. 따라서 팜므 파탈은 신학적으로는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이다.

그런데 중세의 어둠이 걷히고 인간성이 회복되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가 오자 이 팜므 파탈들이 속세에 나타나 전 유럽을 풍미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는 초인적인 영웅들과 아름다운 여인들, 사악한 괴수들이 등장하고 갖가지 모험과 아름다운 사랑으로 가득 찬 로망스 소설들이 유행했는데, 그러한 소설들에는 어김없이 팜므 파탈들이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했다. 이 시대의 팜므 파탈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아서 왕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간 르 페(Morgan le Fay)이다.

모간 르 페(Morgan le Fay)

Voyage of King Arthur and Morgan le Fay to the Isle of Avalon by Frank William Warwick (1888)

아서 펜드래건(Arthur Pendragon)은 영국의 전설적인 영웅이지만, 단순히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물인지 아니면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을 토대로 이야기가 덧붙여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서 왕의 전설은 5세기 후반을 시대적인 배경으로 해서 음유시인(bard)들에 의해서 갖가지 버전으로 구전되어 오다가 9세기 초반 무렵 처음 기록으로 남겨졌다. 실존 여부와는 상관없이 아서 왕이 영국 역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통치자들에게는 잉글랜드 국왕의 이상적인 모델로 여겨졌으며, 대중들에게는 언젠가는 돌아올 메시아로 마음속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아서 왕의 전설은 1485년 출판된 토머스 멀로리(Thomas Malory) 경의 8부작 《아서의 죽음(Le Morte d’Arthur)》으로 집대성되었으며, 이 책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L. Tennyson)이 1856년에 발표한 《왕의 목가(Idyll of the King)》는 아서 왕의 전설을 근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는 멀로리 경이 《아서의 죽음》에 기술한 여덟 개의 이야기 중 하나를 극화한 것이며, 1981년에 만들어진 영화 〈엑스칼리버(Excalibur)〉와 같은 현대의 작품들도 모두 이 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시대를 뛰어넘는 대작이었던 《아서의 죽음》에서 멀로리 경은 모간 르 페라는 멋진 팜므 파탈을 창조하였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대부분은 선악이 분명하고 쉽게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유독 모간의 캐릭터만큼은 현대의 심리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복합적이라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모간은 아서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 시기에 쓰인 샤를마뉴 대제의 이야기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구원하기 위해 200년 전에 죽은 영웅을 부활시키는 착한 마법사이다.

멀로리 경의 저서로 돌아가면, 아서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누이가 세 명 있는데 모간은 그들 중 막내로 어릴 적부터 아서와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켈트인들의 성지인 아발론(Avalon)을 지키는 사제이자 강력한 마법사인 모간은 아서를 위해서 왕을 상징하는 붉은 용의 깃발과 성검 엑스칼리버를 넣기 위한 칼집과 같은 마법의 물품들을 만들어 준다. 모간이 만든 아서의 깃발은 지저분한 것들이 묻지 않아 언제나 새것처럼 보였으며, 칼집에는 치유의 능력이 있어서 아무리 깊은 상처를 입어도 상처에 갖다 대기만 하면 그 상처가 깨끗이 아무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모간은 아서를 친동생으로, 국왕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영웅으로, 또한 한 명의 남자로 끔찍이 사랑한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아서와 카멜롯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며, 클라이맥스에서 마침내 아서와 원탁의 기사들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아서가 반역자들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전투에서 입은 치명상으로 인해 숨을 거두자 슬픔에 가득 찬 모간이 세 명의 여자 사제들과 함께 나타나 아서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그를 나룻배에 싣고 성지 아발론을 향해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모간의 항해를 마지막으로 아발론과 인간 세상과의 인연은 영원히 끊어지게 된다.

이 부분에서 독자들이 그녀의 행동에 대해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저자인 토머스 멀로리 경조차 '나룻배에서 내리는 네 명의 사제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저 아름다운 여인은 경이롭게도 모간 르 페가 아닌가?'라고만 썼다. 사랑하는 사람을 파멸시킬 것이냐 아니면 파멸시켜야 하는 상대를 사랑할 것이냐. 이런 경우 남자들은 대부분 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지 모간처럼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지는 않는다. 아마 보통의 여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간의 팜므 파탈적인 모습은 그녀의 스승인 마법사 멀린(Merlin)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멀린은 당대 최고의 마법사이자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현자였다. 그는 어린 모간을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장차 자신은 물론 아서와 아서의 왕국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멀린은 어린 나이에 불우한 정략결혼에 의해 희생된 그녀에게 자신의 끝없는 지식과 강력한 마법을 전수하고, 그 대가로 사랑하는 제자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 영원히 갇히게 된다.

모간의 이름 뒤에 붙는 '르 페(le fay)'는 일종의 별명으로 '정령'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fairy'에 해당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녀의 이름은 '요정처럼 아름다운 모간'이 된다. 요정과 같은 용모, 타고난 총명함과 뛰어난 지성을 갖추고 있는 모간은 뜨거운 피가 끓는 아서뿐 아니라 현명한 노인인 멀린에게까지 치명적인 팜므 파탈이었다.

그렇지만 토머스 멀로리 경이나 테니슨과 같은 작가들은 그녀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아예 무시하거나, 억지로 궁색하게 설명할 뿐이다.

아서의 이야기가 음유시인들에 의해 구전된 때부터 시작해서 1500년 이상 사악한 요녀였던 모간에게 20세기 말엽에 들어서면서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미국의 작가 마리온 짐머 브래들리(Marion Zimmer Bradley)가 발표한 무척 긴 소설 《아발론의 안개(The Mists of Avalon)》는 아서 왕의 전설에 대한 완결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책을 통해서 작가는 모간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모간은 고대 켈트인들의 신앙을 지키는 사제였고, 그녀가 사랑하는 동생 아서는 로마인들에 의해 도입된 기독교 신앙을 카멜롯 왕국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아발론은 브리튼 섬의 사람과 자연을 보호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성지였지만, 공격적인 기독교 신앙에 의해 사람들로부터 배척되자 지리적으로도 점차 멀어졌다. 결국 모간의 시대에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장소가 되고 말았다.

모간은 이것을 되돌리기 위해서 아서를 움직이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냉정한 성격이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서의 왕비 귀네비어(Gwenhwyhar, Guinevere)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격정적이고 급한 성격인 모간과 침착하고 차갑고 음울한 성격의 귀네비어는 각기 과거와 현재의 브리튼을 대표한다. 이 대립구도에 따라 두 여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아서라는 불세출의 영웅은 결국 운명을 극복하지 못하고 극적으로 몰락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아발론의 안개》는 1982년에 발표되어 그해에 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아마존 서점의 판매 순위에서 상위에 올라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수백 년 동안 의문에 쌓여 있던 모간 르 페라는 멋진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모간 자신이 이 책의 주인공이자 내레이터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아발론의 안개》를 저술한 마리온 브래들리는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던 여류작가이다. 여자였기 때문에 이 전설적인 팜므 파탈에 대한 이해와 변호가 가능했을 것이다. 남자에게는 모간의 복잡한 사고방식이 이해조차 불가능한 낯선 것이었을 테니까.

팜므 파탈이라는 존재 자체는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모든 문학작품의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팜므 파탈 중 하나가 모간 르 페이지만, 그녀에게 갖은 고뇌 속에서도 자신의 할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도 치명적으로 위험한 여인은 존재한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이나 위대한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좌절하거나 파멸했을 때 실패의 근본적인 책임을 당사자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기는 하다. 팜므 파탈은 이러한 경우 그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서 상상으로 만들어낸 개념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악마적인 천성을 타고난 사람들이 아니라 주어진 운명을 최선을 다해 헤쳐 나갔던 비범한 여성들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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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 집필자 소개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으며, 대우조선과 대우통신에서 홍보 및 광고 분야에서 일했다. 저술 및 번역, 출판기획 분야에 관심을 기울..펼쳐보기

출처

불멸의 여인들
불멸의 여인들 | 저자김후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를 개척한 위대한 여인들! 우연히 모든 조건이 맞아 힘들이지 않고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닌, 치열하게 투쟁하여 그 결과 권력과 명예를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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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팜므 파탈불멸의 여인들, 김후,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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