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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375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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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BC 316 |
본명 | 미르탈레(Myrtale) |
국적 | 마케도니아 |
"어느 정도 정신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정신적인 결함이 거의 없는 사람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평범하게 행동하는 '보통 사람'이다.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어머니들이 자식을 키우는 일은 분명히 보통 힘이 드는 일이 아니지만, 자식에게 이렇게 문제가 있을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 장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소문난 망나니였던 아들을 난폭하기는 해도 그런대로 통제가 가능한 남자이자 대단한 영웅으로 키워냈던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필리포스 2세
유럽의 고대사에서 최고의 영웅은 마케도니아 출신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그런데 그는 심각한 수준의 정신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의 정신과 의사라면 분명히 조울증과 정신 분열증 증세를 경고하고 격리조치를 내렸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살 때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희생자는 그에게 천문학을 가르치던 가정교사였다. 정황을 쉽게 표현하자면, 정서가 불안한 초등학교 6학년 아이에게 선생님이 좀 더 집중해서 공부하라고 다그치자 짜증이 잔뜩 난 아이가 경호원의 창을 빼앗아 내질렀고, 가정교사가 이에 찔려 사망한 것이다. 그는 분명히 정서적인 문제를 상당히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의 정서불안은 부모의 불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할리우드의 단순한 개념에 의해서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Pilippos II)는 성격이 불안하고 난폭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정복욕과 명예욕과 허영심이 남보다 많기는 했어도 알렉산드로스보다 훨씬 정상적인 사람이었고 진정한 투사이자 구국의 영웅이었다.
필리포스는 아민타스 3세(Amyntas III)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 마케도니아 왕국은 그리 강력하지 못했고 그리스의 폴리스 테베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필리포스는 테베에 인질로 보내져 그곳에서 강력한 군사조직 테베 신성단(Sacred Band of Thebes)을 이끌고 있던 파메네스(Pammenes) 장군의 집에 살면서 군사와 외교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이 테베 신성단은 동성애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이었다.각주1) 필리포스와 파메네스 사이의 오랜 우정은 필리포스가 장성한 다음에는 동성애 관계로 발전했다.
필리포스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마케도니아는 존망의 위기에 빠졌고 그는 급히 귀국했다. 그의 두 형들은 차례로 왕이 되었는데, 큰형 알렉산드로스 2세를 계승했던 작은형 페르디카스 3세(Perdiccas III)가 동쪽 국경으로 침입한 일리아인들과 전투를 벌이다 대패하고 자신은 전사한 것이었다. 필리포스가 귀국했을 때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수도 펠라에 가까운 남쪽 해안에 마케도니아의 배신자 아르게우스(Argeus)의 사주를 받은 아테네 함대가 상륙해서 교두보를 완전히 확보한 것이다. 주로 최정예 보병부대 홉라이트(Hoplite)로 구성된 이들은 수도로의 진격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필리포스는 막대한 공물 등 굴욕적인 조건을 감수하고 일단 일리아인들과 휴전한 다음 아테네의 침입자들과 상대해서 이들을 격파했다. 아테네는 약 3천 명의 홉라이트를 잃었다. 그는 다음해에 일리아인들과 전투를 벌였다. 이번에는 소극적인 수비전이 아니라 적극적인 기습침공이었다. 그는 무려 7천 명의 일리아인을 사살하면서 마케도니아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그렇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양쪽의 침입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승리를 이룬 결과 국제 관계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 남쪽의 테베와는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테베는 마케도니아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사방에는 적대적인 세력들뿐이었다.각주2) 그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험한 산악 지대를 너머 북쪽에 자리 잡고 있던 에피루스(Epirus) 왕국 단 하나였다.
바르바로이 미르탈레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는 에피루스 왕국의 왕녀 올림피아스(Olympias)이다. 원래 그녀의 이름은 미르탈레(Myrtale)였다. 당시의 에피루스는 미르탈레의 숙부인 아림바(Arymbas)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정당한 왕위 상속자인 미르탈레의 남동생 알렉산드로스 1세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필리포스가 에피루스를 처음으로 공식 방문했을 때 미르탈레는 열다섯 살이었다. 두 사람은 정략결혼이 논의되기도 전에 격렬한 사랑에 빠졌고,각주3) 2년 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에 격렬하게 사랑하고는 다음날 아침에 치열하게 싸웠다가 바로 그날 저녁에 화해하고 다시 사랑하는 식이었다.
미르탈레가 펠라의 왕궁 생활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그리스인들이 경멸하는 바르바로이(Barbaroi)라는 사실이었다. 미르탈레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아킬레우스의 직계 후손으로, 당시 그리스인들의 기준으로는 '고대인'이다. 아킬레우스는 미케네인이었고, 미케네인들은 생긴 모습부터 지중해 종족인 당시의 그리스인들과는 완전히 달랐고 사용하는 말도 달랐다.각주4)
미케네인들은 키가 크고 금발이었으며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에피루스인들은 지중해 민족인 헬레네스가 아니라 미케네인의 후손인 몰로시안(Molossian)이었다. 현존하는 올림피아스의 조각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녀는 미케네인의 특징적인 모습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었다. 미르탈레는 아무 옷이나 입고 숨어 있어도 사람들의 눈에 확 띄는 굉장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 기록 역시 그녀의 조각상으로부터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남쪽 지중해의 그리스인들로부터 바르바로이라고 멸시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은 순수한 그리스인에 속한다고 믿고 있었다. 즉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바르바로이는 정복의 대상이며 노예가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지 왕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나운 성질로 이야기하자면 필리포스보다 훨씬 더했던 미르탈레가 이러한 마케도니아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열아홉 살에 아예 짐을 싸서 에피루스로 돌아갔다. 강력한 군사동맹으로 묶여 있는 두 나라의 관계를 염려한 아림바는 노발대발했지만, 미르탈레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그리고 몇 달을 버티다 마케도니아로 돌아왔다. 그녀에게는 돌아올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필리포스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 펠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는 알렉산드로스를 출산해야 했다. 그 이전에 마케도니아 왕가에는 두 명의 알렉산드로스가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는 공식적으로 알렉산드로스 3세였다.
필리포스는 미르탈레가 에피루스에서 벌였던 화려한 애정행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당연히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사실을 근거로 해서 알렉산드로스가 필리포스의 자식이 아닐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지만 임신에서 출산까지 걸리는 시간을를 고려하자면 이 주장은 근거가 없다. 또한 필리포스가 미르탈레와 싸우면서 알렉산드로스를 가리켜 '순수한 마케도니아의 혈통'이 아니라고 한 말은 그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이 비난에 대해 미르탈레는 알렉산드로스가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응수했지만, 이것 역시 상징적인 의미였다. 미르탈레는 에피루스의 왕녀인 동시에 디오니소스의 신전을 지키는 무녀이기도 했다.각주5)
며칠간 격렬하게 싸운 후 두 사람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시 화해하고 바로 다음해에, 정확하게 열 달 만에 알렉산드로스의 여동생 클레오파트라(Cleopatra)를 연년생으로 낳았다. 이러한 상황이 두 사람의 관계를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사실 필리포스가 미르탈레에게 큰 소리칠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양성애자이면서도 여성 편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공식 비공식 여부를 떠나서 순서로만 보자면 미르틸레는 필리포스의 네 번째 부인이었다. 필리포스에게는 이 시기에 이미 '비합법적인 아들'도 여러 명 있었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로스 남매의 출산을 계기로 미르탈레는 필리포스에게 상당히 순종적이 된 듯하다. 누가 보아도 몰로시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신의 이름도 필리포스의 올림픽 우승을 기념하여 그리스적인 취향이 물씬 풍기는 올림피아스로 바꿨다.
필리포스의 정복욕
알렉산드로스의 출생 이후 올림피아스가 필리포스에 대한 자세를 바꾸면서 다시 단란한 가정으로 돌아왔지만 그 평화도 잠시, 그들 사이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필리포스가 남부의 강력한 도시국가들인 테베와 포키스(Phocis) 사이에 벌어진 전쟁각주6) 에 개입한 것을 신호탄으로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필리포스는 올림피아스를 어린 남매와 함께 펠라에 놓아둔 채 전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필리포스는 올림피아스와 자주 다투기는 했어도, 열정적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언제나 그녀의 충실한 보호자였다. 그렇지만 이제 올림피아스는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케도니아 귀족들을 혼자의 힘으로만 상대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그녀는 필리포스 대신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거의 병적인 수준으로 집착했다.
이러한 모습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아들이 그녀 자신과 어린 남매로 이루어진 작은 가족을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필리포스는 전장에서 승승장구했다. 테살리아 지방각주7) 을 장악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유리한 전략적인 고지를 차지했다. 이 지역에는 광산이 곳곳에 산재해 있을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강한 기병들을 징집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를 위협하던 아테네인들의 마지막 거점 메톤을 공략할 때 한쪽 눈을 잃어 잠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부상이 남쪽을 향한 그의 야망을 막지는 못했다. 그의 목표는 분명해졌다. 이제는 테베에 대한 군사지원이 아니라 그리스 반도의 통일이 목표이었다. 반도의 남쪽 끝에는 많이 쇠락했다고 하지만, 최강의 폴리스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건재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열 살이 넘었을 때야 아테네와의 분쟁이 종료되고 영토를 확정하기 위한 폴리스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아직 스파르타가 남아 있었으나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로 돌아왔다.각주8) 이때부터 대략 3~4년 정도가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가 큰 문제없이 모범적으로 가정을 꾸려갔던 유일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 짧은 가정의 평화는 필리포스의 정복욕 때문에 쉽게 깨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방향을 북쪽으로 잡았다. 트라키아각주9) 라고 불리던 그곳은 막강한 초원의 전사들인 스키타이인들도 활동하고 있던 위험한 지역이었다. 필리포스는 현재의 이스탄불인 비잔티움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했다. 비잔티움 바로 앞쪽으로는 좁은 바다를 건너 페르시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풍요로운 아시아 대륙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광경이 그가 아시아 원정을 계획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필리포스는 집요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끝내 비잔티움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패전으로 인해 그의 권위가 손상되면서 그리스 전체가 요동쳤다. 테베와 아테네는 그리스 전역에 대한 주도권을 회복할 기회로 삼았다. 필리포스는 급히 회군해야 했다. 열여덟 살이 된 알렉산드로스가 에피루스로부터 지원받은 병력을 지휘해서 남하, 필리포스에게 합류했다. 마케도니아군은 주로 테베와 아테네의 시민으로 구성된 폴리스 연합군과 그리스 중부에 위치한 카이로네이아에서 정면승부를 벌였다.
이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싸웠으며, 긴 시간의 전투 끝에 최종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아테네의 병력 손실도 심각했으나 테베의 경우는 완전 전멸 수준이었다. 특히 한때 필리포스 자신이 몸담았던 최정예 부대 테베 신성단의 경우는 총 300명의 병력 중에서 254명이 전사하고 46명이 중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전체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필리포스는 테베나 아테네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는 그리스의 폴리스 전체가 하나의 동맹체를 이루고 더 이상 폴리스끼리의 전쟁은 벌이지 말자고 호소했다. 이렇게 해서 결성된 것이 바로 '코린토스 동맹' 혹은 '헬레닉 동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스파르타와 스파르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키프로스 섬을 제외한 모든 그리스 폴리스와 식민지가 이 동맹에 가입했다.
여기에 고무된 필리포스는 한발 더 나아가 폴리스와 왕국들은 모두 단결해서 그리스의 오랜 숙적인 페르시아를 타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모든 그리스인들이 열광했다. 필리포스는 갓 마흔이 되었을 때 그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듯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그에게는 불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 불길한 기운은 그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
이 가족의 관계 중에서 먼저 부자 관계를 보자면, 필리포스가 알렉산드로스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거금을 투자해 당대 최고의 석학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초청해서 아들의 스승으로 붙여 주었다. 또한 그가 아들을 신뢰했다는 사실도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에는 알렉산드로스가 국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도록 전권을 위임해 놓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마보이에다 철없는 망나니였지만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능력을 증명해 보였다. 필리포스는 최종적인 항복 조건을 협의하기 위해 아테네로 보낼 전권대사를 임명할 때 알렉산드로스를 선임했다. 이것은 분명히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즉 알렉산드로스를 가운데 두고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가 경쟁을 벌이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쉬지 않고 전장을 누비고 다녔던 필리포스는 이 경쟁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사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알렉산드로스와 같이 철저하게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마마보이이자 술과 여자에 빠져 있는 망나니는 정말 한심했을 것이다.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헤파이스티온(Hephaestion)각주10) 이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각주11) 와 같은 절친한 친구들을 멀리 쫓아 보낸 적이 있었다. 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주색잡기에 탐닉하는 알렉산드로스가 못마땅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 책임을 아들이 아니라 부인에게 묻게 된다.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의 관계를 본다면 이들은 조금 유별나기는 했어도 서로 사랑했던 사이임에는 틀림없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 부부와 유사한 관계를 '애증이 공존하는 관계'라고 부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잡아먹을 듯이 격렬하게 싸우는 것도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일 때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증오도 없고 싸울 일도 없다. 사랑이 식게 되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는 서로 열렬하게 사랑했던 사이가 분명하다.
그런데 이 애증이 공존하던 부부 관계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코린트 동맹이 결성된 바로 그해에 당시 마케도니아의 최고 실력자인 아탈루스(Attalus)는 자신의 조카인 클레오파트라와 필리포스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군의 공동 사령관이기도 했다. 당시의 그리스 문화권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아주 흔했기 때문에, 이 여인은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Cleopatra Eurydice)'라고 부른다. 위험한 원정을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한 시기니만큼 필리포스도 이를 환영했다.
과거에 그가 얼마나 열렬히 올림피아스를 사랑했는지는 몰라도 애석하지만 사랑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때 필리포스의 나이는 마흔세 살로 세월과 함께 지나간 옛사랑보다는 현실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치적인 실익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나이였다. 세상 이치를 알 만큼 아는 올림피아스 역시 그 결혼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식'결혼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릴 뿐 필리포스에게는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항상 연인들이 있었다. 그녀는 이 결혼의 피로연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축하연의 분위기가 상당히 올랐을 때 우발적으로 발생했다. 아탈루스가 신혼부부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면서 '순수한 마케도니아 혈통'의 '적법한 후계자'를 낳으라고 말한 것이다. 마케도니아 귀족들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는지는 몰라도 이 말이 올림피아스를 크게 자극했다.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드로스는 일심동체나 마찬가지였다. 올림피아스 대신 알렉산드로스가 아탈루스를 향해 마시던 술잔을 집어던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필리포스가 벌떡 일어나 알렉산드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술에 너무 취해 있었기 때문에 앞에 있던 탁자에 걸려 방바닥에 넘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아버지를 비웃었다.
"이 방에 있는 한 사람은 페르시아를 향해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탁자조차 건너지 못하는구나!"
화가 난 필리포스는 올림피아스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알렉산드로스와는 의절하겠다고 말한다. 이 말은 올림피아스에게 큰 충격이었다. 사실 말로 하자면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는 그때까지 벌써 수백 번은 이혼을 한 사이였다. 그러나 그 관계 단절의 대상에 자랑스러운 아들 알렉산드로스까지 포함된다면 이것은 어머니로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범죄 행위였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만을 데리고 연회장을 빠져나와 그길로 에피루스로 출발했다.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드로스는 일 년 가까이 에피루스에 머물렀다. 당시에는 올림피아스의 남동생 알렉산드로스 1세가 왕위에 올라 있었다. 이 사람은 후일 이탈리아로 원정을 단행해서 큰 성공을 거둔 상당히 유능하고 괜찮은 왕이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구분하기 위해서 '에피루스의 알렉산드로스'라고 부른다. 잔뜩 독이 오른 올림피아스는 이 착한 동생을 윽박질러서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쪽은 필리포스였다. 에피루스인들은 하나하나가 강인한 전사들이었고, 에피루스의 알렉산드로스는 북방의 스키타이인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마케도니아가 그동안 주로 상대해 왔던 그리스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팔랑크스 군단각주12) 과 그들이 알고 있는 세계에서는 가장 유능한 경기병각주13) 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판이었다.
필리포스는 예쁘게 자라난 자신과 올림피아스의 딸 '마케도니아의 클레오파트라'를 데리고 에피루스에 나타났다. 그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올림피아스에게 화해를 청했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그 어떤 쪽이든 올림피아스의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올림피아스의 기준으로 필리포스는 어떤 경우라 해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이미 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올림피아스는 넉살좋게 용서를 구하는 필리포스와 극적으로 화해했다. 최소한 완전히 화해를 한 것처럼 보였다. 이 화해의 제스처는 에피루스의 왕 알렉산드로스와 마케도니아의 왕녀 클레오파트라와의 성대한 결혼으로 마무리되어 극적인 효과를 추가했다. 필리포스는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드로스를 데리고 마케도니아로 귀국했다.
그리고 그는 서둘러 페르시아 원정군의 출정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스인들은 풍요로운 동방에 대한 약탈의 달콤한 꿈에 빠져들었고, 그리스 반도 전체가 들떴다. 대규모의 원정군이 편성되고 각 폴리스에 속한 함대에도 집결명령이 하달되었다.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의 옛날 수도였던 에게(Aegae), 이 고도에서 에피루스의 알렉산드로스와 필리포스의 아름다운 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성대한 피로연이 열렸다. 이 피로연은 페르시아 원정을 위한 실질적인 출정식이기도 했다. 마케도니아뿐 아니라 그리스 전역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모두 모여들었다. 필리포스는 스무 살의 장성한 아들 알렉산드로스와 측근들을 데리고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답하면서 연회장으로 입장했다. 일행들은 모두 비무장이었으며 일곱 명의 경호원들만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 경호원 중의 한 명인 오레스티스 출신의 파우사니아스(Pausanias)가 갑자기 창으로 필리포스를 깊게 찔렀다. 치명상을 입은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품에서 절명했다. 파우사니아스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또 다른 경호원 레오나투스(Leonnatus)가 던진 창이 그의 등으로부터 몸통을 관통했다. 파우사니아스는 필리포스의 동성애 파트너였다가 새로운 왕의 남자인 아탈루스의 조카각주14) 가 나타나면서 왕으로부터 버림받은 비련의 연인이었다. 파우사니아스도 필리포스와 함께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암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지자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임이 밝혀졌다. 파우사니아스가 도주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된 말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암살과 관련되어 두 사람이 더 기소되어 처형되었다. 레오나투스는 암살자를 충분히 생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살했다는 의심을 받고 관련 여부와 증거인멸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나고 계급이 강등되는 징계만 받았다.
그리스 전체가 충격을 받을만한 큰 사건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기민하게 사태를 수습했다. 그는 필리포스의 뜻에 따라 즉각적인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해서 이미 집결해 있는 원정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그는 서둘러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모든 사태의 책임을 아탈루스에게 물어 그를 처형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청한 다음 원정군을 필리포스가 세워 놓은 일정에 따라 페르시아를 향해 출발시켰다.
원정군이 출발하자 올림피아스는 멋진 무덤을 하나 세웠다. 그 무덤은 필리포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암살자 파우사니아스를 위한 것이었다.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사람은 공식적으로는 필리포스의 두 번째 부인인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였다. 그녀가 낳은 두 아이가 올림피아스에 의해 살해되자 그녀는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자살을 강요받았다고 한다.각주15)
알렉산드로스와 올림피아스
필리포스의 암살 사건으로 가장 수혜를 받은 사람은 알렉산드로스였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는 혐의를 두지 않고 올림피아스의 단독범행으로 기술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고대 유럽사의 최대 영웅이며 그 위대함을 훼손하는 역사 서술은 일단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올림피아스가 절망에 빠진 암살자를 사주해서 남편을 살해하고 또 다른 자를 매수해서 그 암살자를 다시 살해하는 이중의 음모를 꾸몄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기술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올림피아스는 자유분방하고 격렬한 성격을 가진 여자였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로스 남매가 태어난 이후에는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억제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목적은 단 하나,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여자의 본성이 아닌가?
십 년간의 원정기간 동안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드로스는 꾸준하게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했다. 올림피아스에게 알렉산드로스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었으며, 알렉산드로스에게 올림피아스는 어머니이자 연인이며 스승이었다.각주16) 알렉산드로스의 사생활은 여전히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애정이 가득 담긴 편지와 함께 눈부신 승전보를 연이어 전해왔다. 어머니에게는 가장 큰 축복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인생의 정점에서 맞이한 급작스러운 죽음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마자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의 위업을 찬탈하려는 자들의 준동으로 추악한 권력 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그렇지만 올림피아스는 이 권력 투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친동생과 딸이 있는 에피루스로 돌아와 은둔했다. 그녀에게 아들의 부재는 커다란 상실이었던 것이다.
올림피아스는 에피루스에 머물며 오직 알렉산드로스만을 추도하며 살았지만 그 추도의 기간은 4년뿐이었다. 갑자기 그녀에게 다시 할 일이 생겼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박트리아의 왕녀 록사나(Roxana)가 유복자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알렉산드로스 4세로 불렸다. 올림피아스의 자랑인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나서 4년 후에 며느리 록사나가 손자를 데리고 에피루스로 망명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위업을 찬탈하려는 야심가 카산다(Cassander)각주17) 와 그와 동맹한 세력들을 피해 그녀에게 온 것이다.
올림피아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일단의 에피루스 병력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남하했다. 그녀는 일단 마케도니아의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 나서 약 1년 정도 마케도니아를 철권통치로 공포에 떨게 했다. 이번에는 아무런 권력의 기반도 없는 어린 손자의 미래를 위해서 스스로 악역을 자처한 것이지만, 마케도니아 귀족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그녀의 통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카산다에게 군사적인 패배를 당하고 중립적인 독립 도시 피드나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카산다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올림피아스의 무덤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카산다는 올림피아스가 통치하던 시절 자행한 잔혹한 숙청작업을 이유로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서 매장하지 못하도록 했다. 때문에 누구도 나서서 그녀의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그녀의 시신은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위대한 정복자의 어머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최후였다.
정복자를 소유한 여인
올림피아스는 역사에서 대표적인 '악의 축'으로 매도되는 사람이다. 그녀에 관한 기록을 제공하고 있는 역사 텍스트는 마르쿠스 유니아니우스(Marcus Junianius)라는 후기 로마 시대 역사가에 의한 기록이다. 그는 올림피아스가 죽고 나서 최소한 600년 후의 사람으로 정확하게 어떤 인물인지도 알려지지 않았고, 정확한 역사라기보다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의 역사 저술을 주로 남긴 사람이다.
그는 다양한 인물들의 전기를 남긴 사티루스(Satyrus)라는 전문적인 연대기 작가의 기록을 주로 인용했는데,각주18) 이 사람도 사건 발생 후 수세기가 지난 프톨레마이오스 4세 시절에 저술활동을 하던 사람이고, 그가 평생 머물렀던 지역은 그리스가 아니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다. 이들의 초기 기록 자체부터 상당히 부정확하고 왜곡되어 있었으며, 그 뒤를 이은 기록자들은 부담 없이 그녀에 대한 악의를 첨가해 나갔다.
올림피아스는 단순한 선악의 구분에 따르자면 분명히 사악한 그룹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선과 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그 선택이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주어진 상황에 의해 강요되는 경우가 있다. 세계제국을 만든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그녀의 인생은 그리 축복받은 것이 아니었다.
몹시 사랑하고 있지만 불성실한 남편, 자신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적의로 가득 찬 환경, 믿을만한 사람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외로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식들을 지켜내야만 했던 여인에게 어떻게 선량해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강한 개성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던 여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적인 어머니로 변모했지만, 역사는 그 모성에 대해서 대단히 가혹한 평가를 내렸다. 자식과 손자를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지나친 잔인함이 이유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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