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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완아
上官婉兒출생 | 6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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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710년 |
국적 | 중국 당(唐) |
이제 나뭇잎이 깊은 궁궐 정원에 떨어지는데(葉下洞庭初)
만 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임을 그리워하는 나.(思君萬里余)
이슬은 짙어져 향긋하던 이부자리는 차갑고(露濃香被冷)
달마저 떨어지니 비단 병풍은 허전하기만 한데(月落錦屛虛)
마음으로는 강남의 사랑노래를 부르고 싶건만(欲奏江南曲)
멀리 계북 땅으로 보내는 편지를 봉하고 있구나.(貪封텺北書)
글 사이사이에 마음을 모두 넣어 보냈더니(書中貢別意)
오랫동안 홀로 지낼 빈 장막만 덩그러니 남았구나.(惟帳久離居)
이 시는 당나라 측천무후 시절 천재적인 여류 시인이자 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상관완아(上官婉兒)가 지은 〈채서원(彩書怨)〉이라는 시이다. '편지에 원망을 그려 넣는다'라는 의미로, 멀리 북방의 임지에 나가있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상관완아는 이러한 주옥같은 서정시를 수백 편이나 지었지만 거의 모두 실전되었고, 현재는 《전당시(全唐詩)》각주1) 에 실려 있는 32편의 작품만 전해지고 있다.
서기 705년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성 황제였던 측천무후가 세상을 떠나고, 무후의 셋째 아들 중종(中宗) 이현 (李顯)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여인들의 손에 있었다. 이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명실 공히 '여인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여성들이 부각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들은 무후의 막내딸 태평공주(太平公主), 중종의 황후 위(韋) 씨, 그녀의 딸 안락공주(安樂公主), 그리고 상관완아(上官婉兒)를 꼽을 수 있다. 이 여인들 중에서는 완아만 유일하게 황실 출신이 아니다.
상관완아의 첫출발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녀는 멸문의 화를 입은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무후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 한참 전, 아직 고종(高宗)의 태후로 있을 때인 664년 자신이 죽은 후 무후가 권력을 잡아 분란을 일으킬 것을 경계한 고종은 당시 재상인 상관의(上官儀)각주2) 를 시켜 그녀의 폐위를 도모하다 계획이 드러나자 자신은 발뺌을 했다. 대역죄는 모두 상관의가 뒤집어썼다.
이 일로 인해서 상관의와 그 일가족은 모두 참살을 당했는데, 갓난아기였던 완아와 그의 어머니 정(鄭) 씨만은 죽음을 면하고 궁중의 노비 신분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녀의 외가가 무후의 측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언제 복권이 되었는지는 《당서(唐書)》나 《신당서(新唐書)》에 기록이 남지 않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릴 적부터 시(詩)와 서(書)를 공부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노비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완아의 할아버지 상관의는 일찌감치 정계에 진출한 정치인이었지만 당대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완아는 어릴 적부터 재능이 출중해서 할아버지를 능가하는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 소문은 인재를 발탁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무후의 귀에 들어갔다. 완아에 대한 역사서의 서술은 그녀가 열네 살의 나이에 처음 입궁해서 무후를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상관완아를 처음 만난 무후는 "아버지를 죽인 자신을 원망하느냐?"라는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는데, 이 질문에 대한 맹랑한 대답으로 인해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후의 측근으로 스카우트되었다.
"원망하면 불충(不忠)이요, 원망하지 않으면 불효(不孝)입니다."
완아가 이 시기부터 정치에 개입한 것은 아니었다. 측천무후는 그녀의 시가 《전당서》에 실릴 정도로 시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문학과 예술을 무척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완아가 처음 맡은 일은 문학 분야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무후는 종종 신하들에게 시의 제목을 내리고 그 제목에 맞추어 시를 짓게 했는데, 이 시기 완아의 역할은 이렇게 지은 시들에 대해 심사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십 대 천재 소녀는 곧 순수함을 잃고 권력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때는 무후가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있던 시기였고, 그녀로부터 개인적인 총애를 받게 된 완아는 점차 무후의 조칙을 쓰는 일까지 맡게 되었다. 완아에 대한 무후의 총애는 부모들의 내리사랑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질적으로 예술가였던 완아는 십 대 시절에는 무후에게 상당히 반항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는 무후가 낳은 여섯 형제 중 막내인 태평공주의 영향도 상당히 컸을 것이다. 완아와 태평 두 사람은 같은 또래라는 점각주3) 말고도 몇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그 시대의 대표적인 미인들로 꼽힐 정도로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용모와 성격이 어머니를 그대로 빼닮은 태평 역시 완아만큼이나 대단히 당차고 영리한 여자였다.
또한 가장 결정적으로 두 사람 모두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상관완아와 태평공주가 죽을 때까지 깊은 신뢰와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특별한 유형의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강한 연대감을 갖기 마련이고, 그녀들이 십 대 초반이었던 무렵에 황궁에서는 또래의 여인들을 찾기 힘들다는 환경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 보였던 완아의 반항아적 기질은 결국 사고로 이어졌다. 이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그리 상세하지 않지만, 무후와 완아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많은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정사 역사서인 《신당서》와 이를 인용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짧은 기록에 의하면 완아는 자주 '무후의 뜻을 거슬렀다'라고 한다. 그러다 사형을 당할 정도의 중한 죄를 범했다.
684년 당대의 대문호인 낙빈왕(駱賓王)각주4) 이 유주사마(柳州司馬) 서경업(徐敬業)이 일으킨 반란에 가담했을 때 완아가 이 반란 모의를 사전에 알고도 낙빈왕에 대한 연민의 정과 존경심 때문에 이를 무후에게 알리지 않았다. 사태가 수습된 이후에 그녀가 사전에 모반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난리가 났다고 일부의 역사소설 저술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정사(正史)의 기록들은 사실 여부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고 있다.각주5)
측천무후가 상관완아를 끔찍하게 아꼈던 것은 확실한 사실로 생각된다. 무후는 완아를 처형하는 대신 주사(朱砂)와 청사(靑砂)로 그녀의 얼굴에 작은 매화 모양의 문신을 새기는 것으로 처벌을 마무리했으며, 황제의 조서를 작성하는 막중한 일도 계속하도록 했다. 완아는 이 문신 때문에 사람을 만나도 고개를 숙이면서 부끄러움을 많이 탔는데, 이 모습이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당시 여자들 사이에서는 얼굴에 매화 문양을 그려 화장을 하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이러한 사고와는 상관없이 상관완아는 측천무후의 최측근이자 실세였다. 무후는 완아를 친딸만큼이나 아꼈고, 그녀도 무후를 충심으로 보좌했다. 이 시절 황제의 명으로 내려진 조칙(詔勅)은 모두 완아에 의해 작성된 것들이다. 현대와 비교하자면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는 막강한 여성 대통령 밑에 막강한 여성 비서실장이 있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완아에 대한 논란은 황실 내외에서 끊이지 않았는데 바로 그녀의 남성 편력 때문이었다.
완아는 자유연애주의자였으며, 그녀의 화려한 남성 편력은 막강한 무후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여러 명의 연인들이 있었다. 당시 조정의 대신들을 포함해서 많은 선비들이 그녀에게 시문을 배우고자 했기 때문에 괜찮은 남자를 찾을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신당서》는 완아가 측천무후의 조카인 무삼사(武三思)와 사통했다는 사실을 비난하고 있다.각주6) 한때 황제가 될 야심까지 가졌던 무삼사는 역사적으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 아니며 더욱이 애가 줄줄이 딸린 유부남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굳이 비난받을만한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에게는 어쩔 수 없는 정치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완아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녀의 유일한 보호자는 측천무후뿐이었고, 그 무후는 늙어가고 있었다. 완아의 일가는 모두 그녀가 어렸을 때 처형되었으며, 그녀가 정식으로 결혼을 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 698년 황태자로 복귀한 중종 이현을 유혹해서 육체 관계를 맺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즉 의지할만한 인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완아는 무후가 죽은 다음을 대비해야만 했던 것이다. 무삼사도 마찬가지지만 이현도 완아가 매력을 느낄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황태자로 복귀하기 전에 멀리 귀양을 가 있던 이현은 무후로부터 황태자에 복귀하라는 조서가 도착하자 어머니가 자신을 죽이려는 줄 지레 짐작하고 그 조서를 읽어 보기도 전에 자살을 하려고 했던 심약한 인물이었다.
완아는 무삼사와 이현을 유혹해 연인으로 삼는 사전조치를 통해서 705년 장간지(張柬之) 등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이른바 '오왕의 난(五王之亂)'으로 무후가 퇴위하고 이현이 황제에 복위했을 때에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현뿐 아니라 황후 위 씨로부터도 신임을 얻게 된 완아는 오히려 더욱더 권력의 핵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녀는 계속 황제의 조칙을 기초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으며, 이현의 후궁으로 들어가 최종적으로 여섯 번째 서열인 소용(昭容)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가졌던 소용의 직위는 명목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황궁 바깥에 자신의 집을 따로 가지고 있었으며, 여전히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완아는 이미 사십 대에 접어든 나이였는데도 뛰어난 미모는 시들지 않았고 오히려 원숙함을 더해 주었다. 그녀는 남자들을 계속 갈아치우면서 극히 현대적인 스타일의 인생을 즐기고 있었지만 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절대적인 권력자였던 측천무후도 결국 못 본 척하고 말았던 것이라 아무리 이현이 황제라도 이 문제에 관한 한 그녀를 제어할 힘은 없었다.
완아는 천부적인 시인의 재능 못지않게 뛰어난 정치적인 감각도 가지고 있었다. 무후가 죽은 다음에 무씨 일가는 당연히 숙청대상 제1호였다. 그렇지만 완아는 황후 위 씨를 설득해서 오히려 황실과 무씨 일가와의 정치적인 연합을 성사시켰다. 무후를 축출한 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던 장간지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녀는 이현의 복위로 실각했던 무후의 중신들까지 복귀시켰다. 결국 장간지는 위 황후와 무삼사의 협공을 받아 실각했다.
중종 이현의 황후 위 씨는 명문가 출신으로 상당히 부덕했다고 알려진 여인이었다. 이현이 황제가 된 지 두 달 만에 무후에 의해 쫓겨나 귀양을 간 후 의기소침해져서 번거로운 삶까지 벗어던지려고 하자, 위 씨는 그를 잘 다독여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했다. 그녀는 이현이 복위된 다음에도 무후가 생존해 있을 때에는 말과 행동으로 궁궐 여인들에게 모범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무후가 죽고 나자 그녀의 태도는 완전히 돌변했다. 권력의 달콤한 맛에 눈을 뜬 것이다. 여기에 그녀의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가 가세했다. 안락공주는 무삼사의 아들인 숭훈(崇訓)과 결혼한 사이였다. 그녀는 이현이 가장 총애하던 자녀였으며, 이를 믿고 자신이 황태녀(皇太女)가 되려는 야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당시 황태자는 이중준(李重俊)이었는데 이현의 큰아들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위 황후가 아니라 지체가 아주 낮은 여인이었기 때문에 황후와 안락은 그를 '노예'라고 부르며 경멸하고 있었다.
이 음모를 알게 된 황태자 이중준이 반격을 시도했다. 그는 황궁에 들어와 있던 말갈인 장군 이다조(李多祚)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먼저 당시의 최고 실력자들인 무삼사와 숭훈 부자를 죽이고 그 다음에 황궁을 공격했다. 위 황후와 안락공주를 제거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었지만, 그의 살생부에는 상관완아의 이름이 가장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제거하고 안락공주를 후계자로 만들 수 있는 정치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중준의 쿠데타는 아슬아슬하게 불발로 끝났다. 황궁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다.각주7) 완아는 다행히 이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황궁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그 과정 자체가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권력에 취해 있던 그녀에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위 황후와 안락공주와는 거리를 두면서 원래부터 밀접했던 태평공주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완아는 중종 이현을 가까이 모시면서 충심을 다해서 그를 보좌하기 시작했다. 대략 3년 정도가 그녀가 헌신적인 정치인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했던 기간이었다. 그동안 위 황후는 측천무후의 전례를 따라 자신이 황제가 되면서 안락을 황태녀로 삼으려는 생각을 굳혔다. 그녀가 선택한 방식은 무후보다 훨씬 더 악랄한 것이었다. 황제 이현을 독살한 것이다. 그녀는 당분간 이현의 죽음을 비밀로 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완아는 태평공주와 연합해서 일단 위 황후의 계획을 저지했다. 열두 살 먹은 이현의 막내아들 이중무(李重茂)가 황위를 계승하면서 위 황후와 함께 예종(睿宗) 이단(李旦)을 섭정으로 하는 것이 황제 이현의 유지였다고 발표한 것이다. 예종 이단은 독살된 이현의 동생으로 무후 시절 중종이 퇴위한 후 꼭두각시 황제 노릇을 했던 인물이다. 황후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 이단은 일단 섭정에서 제외되었지만, 완아가 창작한 중종의 유지는 그대로 집행되었다.
이단의 셋째 아들 이융기(李隆基)는 영리하고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오십 년 가까이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개원의 치(開元之治)'라는 태평성대를 이룬 명군이자 말년에 양귀비로 인해서 망가지게 될 현종(玄宗)이다. 그렇지만 양귀비를 만나기 한참 전인 젊은 시절의 이융기는 문무를 고루 갖춘 젊은 영재로 당시의 황실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상관완아에 의해 저지되자 위 황후는 폭력을 통한 사태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정은 친황후파와 반황후파로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반황후파의 핵심 세력은 이융기와 태평공주였다. 중종 이현이 죽은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이 두 사람은 연합전선을 구축해 먼저 쿠데타를 일으켰다. 황후와 안락공주는 일가와 함께 살해되었으며 예종 이단이 황제로 복위했다.
이 쿠데타 와중에 상관완아가 이융기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쿠데타 당시 이융기가 완아를 살해한 것은 의외의 행동이었다. 당시 완아는 위 황후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이융기의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도록 정치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당시 완아는 황궁에 머물다 쿠데타군이 진입하자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녀를 보자 이융기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차없이 그녀의 목을 베었다.
이융기가 완아를 제거한 이유는 3년 전에 이중준이 그녀를 제거하려고 했던 이유와 같다. 이 시절의 이융기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그는 차기 황제가 바로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시점에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머지않은 장래에 고모인 태평공주와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계산이 서 있었으며, 태평공주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 바로 완아였던 것이다.각주8)
상관완아에 대한 이융기의 태도는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완아는 쿠데타가 성공한 직후 곧바로 복권되었고, '혜문(惠文)'이라는 시호까지 얻었다. 그녀가 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칭송이었다. 또한 그는 황제에 오르고 나서 곧바로 완아의 시와 사(詞)와 문(文)을 모두 모아서 스무 권의 문집으로 편찬했다.각주9)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녀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상관완아가 천재였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측천무후 시절에는 황궁을 중심으로 응제시(應制詩)가 유행했다. 응제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제목만 주고, 그 다음 다수의 사람들이 일정한 시간 내에 제목에 맞는 시를 짓는 것이다. 그중에서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참가자들 사이에 경쟁을 한다. 완아는 바로 이 응제시의 대가였다.
또한 당시(唐詩)는 대구에 대해 형식적인 엄격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짓기가 대단히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상관의에 의해 처음 제시된 당시의 일반적인 형식은 상관완아가 최종적으로 완성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녀가 정립한 시 이론은 다음 세대에 이태백(李太白),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와 같은 위대한 시인들이 등장하는 데 토대가 되었다.
그녀가 문학 발전에 행정적으로 기여한 바도 대단히 크다. 그녀가 중종을 적극적으로 보좌했던 707년부터 710년까지 3년의 기간 동안 황실의 서관이 크게 확장되고 재능 있는 문사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전국적으로 시문을 대대적으로 수집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황실에서 주도한 이 문화 사업은 현종의 시대에 그대로 이어졌고, 이태백과 두보가 등장하면서 당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분명히 상관완아는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다.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이야 개인적인 문제이니 논외로 하더라도, 정신 차리고 바른 정치에 몰두했던 말년의 몇 년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뇌물수수, 매관매직과 같은 수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겼던 '권력형 부조리'의 화신이었다. 두 손만 가지고는 모두 꼽을 수 없는 다수의 남자 친구들을 정부의 요직에 천거했으며, 그들 중에는 재상에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서는 한밤중에 일어나 머릿속에 떠오른 시상을 미친 듯이 써내려가는 천재 시인의 모습, 삶의 시작과 끝을 권력 투쟁에 희생당했던 불우한 정치인의 모습, 평생을 방종과 탐욕으로 일관했던 여인의 모습을 동시에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그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반항적이기까지 했던 순수한 문학 소녀에게 권력을 쥐어 준 여걸 측천무후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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