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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멸의 여인

옐리자베타

Yelizaveta Petrovna Romanov

역사상 가장 인기 있던 차리나

요약 테이블
출생 1709년 12월 18일
사망 1762년 01월 05일
국적 러시아

옐리자베타(Yelizaveta Petrovna Romanov)는 러시아 역사뿐 아니라 유럽의 역사에서도 외모가 가장 아름다웠던 여왕으로 꼽히는 미인이다. 그녀의 눈부신 미모에 대해서는 유럽의 왕가에 어릴 적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인생의 황금시절에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실패한 약혼 이외에는 청혼을 받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옐리자베타는 가장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뼈아픈 배신을 경험하면서 권력의 어두운 이면을 경험하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과 귀족들은 권력을 놓고 항상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다. 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가장 쉬운 상황은 통치자의 나이가 어려서 판단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나이가 어린 통치자들을 선호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역량이 모자라는 통치자를 세우려고 한다. 예카테리나 1세가 후계자를 지정하지 못하고 죽은 다음 러시아의 상황이 이에 해당한다.

예카테리나 1세의 사후 권력 구도

이때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옐리자베타의 언니인 안나 페트로브나(Anna Petrovna)였다. 안나는 아름답고 총명하며 지적인 여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1727년 5월 어머니 예카테리나가 급사했을 때 열아홉 살이었다. 그녀는 홀슈타인-고토로프 왕가의 젊은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Karl Friedrich, Duke of Holstein-Gottorop)와 2년여 전에 결혼한 상태였으며, 카를 프리드리히는 당시 왕궁 수비대의 사령관 직을 맡고 있었다.

프랑스의 석학 볼테르의 표현대로 당시 러시아 차르의 자리는 '선출제도 아니고 세습 제도 아닌 점령제'였으므로 안나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표트르 일가의 진영에서 배신자가 발생했다. 권력의 실세였던 알렉산드르 멘쉬코프 공작이 보수파들과 협상을 벌여 알렉세이의 유일한 아들 표트르 2세를 새로운 차르로 옹립한 것이다. 멘쉬코프는 예카테리나가 표트르 2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유지를 조작했다.

표트르는 당시 열한 살이었는데, 멘쉬코프는 표트르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궁각주1) 에 머물게 하면서 자신의 딸 마리아와 결혼시켜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욱 큰 권력을 누릴 야심을 키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멘쉬코프의 천하는 오래 가지 못했다. 보수파들이 차르를 모스크바로 빼돌리면서 그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멘쉬코프는 모든 직위와 재산을 박탈당하고 그의 일가와 함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안나 페트로브나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멘쉬코프를 축출하면서 권력을 잡은 사람은 표트르 시절에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바실리 돌고루코프 대공(Prince Vasily Lukich Dolgorukov)이었다. 그 역시 멘쉬코프와 비슷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표트르와 어울리는 딸이 없었으나 그의 삼형제가 모두 추밀원의 멤버라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생 이반의 딸 예카테리나를 내세웠다. 이런 식이었으니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보수적인 대귀족들과 표트르 시절 출세한 개혁주의자들의 충돌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옐리자베타의 언니 안나가 독일 홀슈타인에서 첫 아이를 낳고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안나의 남편 카를 프리드리히 공작이 그 전해 멘쉬코프와 충돌하였고, 이들 부부는 그들의 영지인 홀슈타인으로 떠나 줄곧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각주2) 개혁파들은 구심점을 잃고 분열되었으며, 표트르의 측근들 중에서 외톨이가 된 옐리자베타와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사람은 연로한 표트르 톨스토이 백작(Count Pyotr Andreyevich Tolstoy)각주3) 한 사람뿐이었다.

바실리 돌고루코프 대공은 표트르 2세의 통치기간에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지만, 그의 운도 멘쉬코프와 마찬가지로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차르가 그의 조카 예카테리나와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것이다. 돌고루코프 대공 역시 표트르의 유지를 조작해서 그가 약혼녀인 예카테리나 돌고루코프를 후계자로 정했다는 황당한 발표를 했으나, 곧 현실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를 철회했다.

표트르의 후계자가 결정된 상황은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생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표트르의 유일한 직계이자 군부와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옐리자베타를 피해 엉뚱하게 그동안 후계자 서열에서 배제되어 있던 표트르 대제의 이복형 이반 5세의 혈육 중에서 후계자를 선정하기로 했다. 이반 5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만 다섯 명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 넷째인 안나 이바노브나(Anna Ivanovna)가 기회를 잡았다.

당시 서른일곱이었던 안나 이바노브나는 20년 전 쿠를란드 공작각주4)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Duke of Courland)과 결혼했으나 1년 만에 과부가 되었으며, 자신의 공작령을 직접 통치하고 있었는데 통치자로서 그리 좋은 평판을 얻고 있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도 독일계 하층 귀족 출신인 에른스트 비론(Ernst Johann von Biron)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비론은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해 정규교육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자로, 실제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공작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안나 이바노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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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루코프 대공과 드미트리 갈리친(Dmitri Galitzin) 대공을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최고 추밀원은 이번 기회에 아예 차르를 무력화시키고, 러시아의 정치체제를 군주제에서 추밀원이 주도하는 일종의 입헌 군주제도로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 그들은 안나 이바노브나가 차르의 권한을 제한하는 아홉 개 항목의 합의서에 서명하는 조건으로 차르로 옹립했다. 그 항목 중에는 후계자 지명, 전쟁 수행, 결혼 조약, 과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적인 발전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 동기가 불순한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안나 이바노브나라는 인물 자체를 잘못 판단했다. 비록 정치적인 역량이 떨어진다고 해도 권모술수와 야심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비밀경찰을 강화하면서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아홉 개 항목의 합의는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돌고루코프 대공은 표트르 2세의 유지를 위조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10년 가까이 갖가지 고문으로 시달리다 안나의 통치 말년에 참수형을 당했다.

안나 이바노브나는 정치에서 러시아인들을 배제하고 그 자리를 발트 해 연안 출신의 독일인들로 채웠다. 그녀의 연인인 비론을 비롯해서 외교 분야의 안드레이 오스터만(Andrei Ivnovich Osterman), 군사 분야의 부크하르트 뮈니히(Burkhard Christoph von Münnich) 같은 독일인들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녀 자신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니라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무지한 자신의 시녀들과 시시덕거리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 비론의 통치 자체는 그리 문제될 것도 없었으나, 드러나는 그의 인격이 문제였다. 비론은 정치 감각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탐욕스럽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안나 이바노브나가 그저 자신의 애인으로만 삼았으면 별로 문제도 되지 않았을 인물이었지만, 그녀는 그에게 통치를 위임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쿠를란드 공작령을 계승시키기까지 했다. 대귀족뿐 아니라 표트르 대제 시절 형성된 개혁주의 성향의 관료들과 군부, 개혁의 혜택을 입은 중산층, 그리고 일반 평민들까지 점차 그녀의 통치에 반발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옐리자베타의 등극

옐리자베타는 표트르 2세와 안나 이바노브나의 통치기간 내내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표트르 대제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 주는 존재였다. 표트르가 생전에 가장 귀여워했던 딸인데다 외모도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성격마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급하고 격정적이었으며 긍정적인 면으로는 밝고 활달했다. 더욱이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외모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러시아 왕실에서 최고의 미인으로 꼽혔다. 때문에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차르 안나 이바노브나로부터 경계심과 질투심을 유발할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각주5)

옐리자베타는 어려서부터 언니인 안나 페트로브나와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되었다. 안나는 대단히 총명하고 학문에 관심이 많은 모범적인 아이였지만, 옐리자베타는 엉뚱한 면이 많고 통제가 아예 불가능한 말괄량이였다. 옐리자베타는 천성이 게으른데다가 도통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 예카테리나는 그녀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으며, 아버지 표트르는 얼굴 한 번 붉힌 적이 없을 정도로 항상 그녀의 편이었다. 그녀가 재능을 보인 분야는 춤과 스포츠였다.

그렇지만 옐리자베타는 근본적으로 영리한 아이였다. 따분한 공부 대신 춤과 음악, 검술과 승마에 열중하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외국어만은 관심을 쏟아 어릴 적에 일찌감치 프랑스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마스터했다. 그녀는 후일 외교석상에서 이러한 언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옐리자베타가 성장하면서 그녀의 미모에 대한 찬사는 러시아를 넘어 전 유럽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녀는 열여덟 살 때 로마노프 가와 전략적 제휴 관계에 있는 홀슈타인-고토로프 가의 카를 아우구스투스(Karl Augustus)와 약혼했다. 그렇지만 약혼자가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로 사망하여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옐리자베타는 한때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와 혼담이 오갈 정도로 유럽 왕실에서 주목받는 공주였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은 후 상황은 급변했다. 바실리 돌고루코프 대공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들은 표트르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녀를 증오하여 왕실에서 아예 축출하려고 했으며, 안나 이바노브나의 시절에는 옐리자베타에게 청혼하는 일 자체가 차르에게 불경죄를 범하는 것이었다.

청혼을 전혀 받지 못했던 옐리자베타가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왕실 사람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이었지만, 이 경우에 그녀는 왕가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이 당시의 법체계였다. 그녀는 왕가의 특권보다도 차르의 후계자 명단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결혼 대신 선택한 것은 자유분방한 연애였다.각주6) 사실 그러한 방식이 그녀의 개성에 가장 걸맞은 것이기도 했다.

안나 이바노브나의 엉망진창이었던 치세는 그녀의 후계자 지정에 비하면 그래도 애교 있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가 차르가 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콩팥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 이 시기에 그녀의 조카딸인 안나 레오폴도브나(Anna Leopoldovna)가 남자 아이 이반(Ivan)을 낳았다. 그러자 안나 이바노브나는 태어난 지 8주된 이 아이를 자신이 입양하여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고 나서 20여 일 만에 사망했다. 이 갓난아이가 이반 6세(Ivan Ⅵ Antonovich)로 차르에 등극했다.

권력은 섭정을 맡은 이반의 어머니 안나 레오폴도브나와 독일계인 안드레이 오스터만 백작의 손에 넘어갔다. 그동안 안나 이바노브나가 그나마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경제 성장이었다. 표트르 대제 시절에 시행된 개혁 정책이 결실을 맺어 무역이 확대되고 경제적 호황이 계속되면서 줄곧 낮은 세율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린 이반 6세 시절에는 전 정권의 권력자인 비론이 저지른 실정과 러시아가 치른 두 번의 전쟁, 그리고 주요 교역 대상국인 스웨덴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서 러시아 경제가 급속히 침체되었다.

정치에 별로 감각이 없었던 안나 레오폴도브나는 줄어든 재정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서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선택했다. 세율의 전반적인 인상을 단행한 것이다. 이 조치는 여론을 들끓게 했으며,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옐리자베타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사실 그녀는 10년 내내 비밀리에 자신의 후원자들을 모으면서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안나 이바노브나 시절의 외교적인 실책으로 적대 관계로 돌아선 프랑스, 스웨덴의 대사들과 접촉해 쿠데타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

옐리자베타는 그동안 굳이 쿠데타 준비라고 하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신의 불안한 위상에 대한 대처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공을 들였던 대상은 과거에 표트르 대제를 무조건 추종하던 근위대 병사들이었다. 그녀는 공식적인 행사뿐 아니라 사적으로도 근위대 병사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덕분에 결혼을 하지 않고도 수많은 아이들의 대모(God Mother)가 되어 있었다. 근위대 병사들이 그들의 아이가 세례를 받을 때 대모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면 마다하지 않고 꼬박꼬박 세례식에 참가해서 대모의 자격으로 축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1741년 11월 25일 자정의 옐리자베타와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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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6세가 차르로 등극한 지 열세 달이 되던 1741년 11월 25일 자정, 옐리자베타는 은색 갑옷을 입고 무장한 상태로 근위대에 소속되어 있는 최정예 여단인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각주7) 연대 사령부에 나타났다. 이 여단은 표트르 대제가 십 대의 차르였던 시절에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하면서 창설했던 바로 그 부대였다. 간단하게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지휘권을 장악한 옐리자베타는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이반 6세와 그의 어머니 안나 레오폴도브나가 머물고 있던 겨울 궁전(Winter Palace)으로 행진했다.

평소에는 항상 게으른 모습만 보여 왔기에 전혀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던 옐리자베타였다. 다른 독일인 관료들과는 달리 상당히 능력이 있던 군사령관 부크하르트 뮈니히 백작이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신속하고 과감한 쿠데타였기 때문에 손을 쓸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가 성공적으로 대응 병력을 출동시켰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근위대에는 나이 어린 차르와 무능한 섭정들에게 충성하려는 병사들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쿠데타는 유혈충돌 없이 마무리되어 이반 6세와 안나 레오폴도브나, 뮈니히 백작이 체포되었으며, 옐리자베타는 다음 달 18일 대관식을 거행하고 차르의 자리에 올랐다. 향후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이반 6세는 가족들과 격리되어 비밀리에 감금되었으며, 안나 레오폴도브나와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 멀리 북방의 백해 부근으로 유형을 떠나는 처지가 되었다.

국민의 지지를 받은 차리나

옐리자베타는 러시아 역사상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던 차리나였다. 비록 어릴 적에 제왕들에게 필요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통치에 필요한 지식은 많이 모자랐지만 타고난 직관력으로 이것을 보완했다. 그녀는 표트르 대제를 연상하게 하는 고집스럽고 다혈질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아버지와 같은 잔인하고 난폭한 면도 있었지만 어두운 일면은 철저하게 숨겨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도록 하는 연기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러시아 역사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와 그녀의 손자 알렉산드르 1세를 개명군주로 꼽지만, 차르로서 남긴 업적만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옐리자베타가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개명군주였으며, 더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유일한' 개명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20년의 재위기간 내내 단 한 사람도 처형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가 특별히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쿠데타가 일어나는 날 유혈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병사들 앞에서 이러한 맹세를 했던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고집 덕분에 두 명의 안나 치하에서 군부의 최고 실세였던 부크하르트 뮈니히 백작은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대까지 올라갔다가 극적으로 풀려났다. 그에 대한 처벌은 시베리아의 펠림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각주8)

에른스트 비론과 함께 국민들의 원성을 들었던 안드레이 오스터만은 옐리자베타의 입장에서 보자면 용서하기가 힘든 비열한 배신자였지만, 그 역시 목숨은 부지했다. 오스터만은 원래 '표트르의 사람'이었다. 그는 발트 연안 출신의 독일계이지만, 안나 이바노브나가 아니라 표트르 대제에 의해서 발탁되었던 인물이다. 1721년에 러시아의 전권대사로 스웨덴과의 종전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외교적인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이 공로로 남작(Baron)에 봉해졌다가 최종적으로 백작으로 승격한 인물이었다.

오스터만은 후계 문제가 불거져 나왔을 때 알렉산드르 멘쉬코프와 함께 표트르 일가를 배신했다. 또한 그는 추밀원이 안나 이바노브나를 내세우면서 제한적인 입헌 군주제를 실시하고자 할 때 추밀원 멤버 중에서 유일하게 동료들을 배신하고 안나의 편에 섰던 사람이기도 했다. 옐리자베타가 쿠데타를 일으킨 그 시기에 오스터만은 인생의 최정점에 있었다. 이반 6세가 차르로 등극하면서 그동안 전횡을 일삼았던 비론 공작각주9) 이 실각하자 오스터만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옐리자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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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오스터만의 배신행위나 전횡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옐리자베타가 정권을 잡았을 무렵 오스터만이 범한 외교적인 실책으로 인해 1721년 이후 20년간 줄곧 선린 관계를 유지해온 스웨덴과 전쟁에 돌입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옐리자베타에게 운이 따랐는지 아니면 병사들이 그녀의 집권으로 사기가 오른 때문인지 전쟁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 러시아군은 핀란드의 거의 전역을 장악했다.

약 1년 반 후 옐리자베타는 유리한 입장에서 스웨덴 국왕과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일 수 있었으며, 스웨덴이 홀슈타인 왕가의 프리드리크(Adolf Frederick)를 차기 국왕으로 내정하고 현재의 핀란드 남부 지방만 할양받는 조건으로 핀란드에서 철군하면서 종전에 합의했다. 옐리자베타는 통치기간 동안 러시아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는데각주10) 이 협상이 영토 확장의 시작이었다.

옐리자베타는 그동안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게 운영되던 차르의 은밀한 내각을 폐지하고 안나 이바노브나 시절 해산되었던 상원(Senate)을 부활시켰다. 또한 각 부처의 대신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모두 위임하고 그 권한만큼 책임을 지도록 했으며, 행정부에서 독일인들을 모두 축출했다. 그녀는 차르가 되면서 자신의 행정부에는 단 한 사람의 독일인도 등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그녀답게 그 약속도 끝까지 지켰다.

옐리자베타의 새로운 체제는 한 사람의 스타를 탄생시켰다. 새로 발탁된 외무대신 알렉세이 베추체프(Aleksei Petrovich Bestuzhev)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베추체프는 프랑스와 프로이센을 러시아의 잠재적 적국으로 평가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인접해 있는 튀르크, 폴란드, 스웨덴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프로이센은 야심만만한 군주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가 강력한 확장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후일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알려진 바로 그 인물이다.

베추체프는 전 유럽을 통틀어서 당대 최고의 외교관임이 입증되었다. 당시는 이른바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이 전쟁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를 계승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여자의 황제 계승은 불법이라며 반발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여기에는 슐레지엔 지역의 영유권을 두고 두 나라가 빚은 갈등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베추체프는 러시아와 영국, 오스트리아 등의 강대국과 바이에른 왕국, 작센 공작령 등 여러 나라의 복합적인 동맹을 성사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의 활약은 서로 껄끄러운 관계인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동맹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와 프로이센을 따로따로 고립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프로이센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옐리자베타의 측근들이나 친구들 중에도 프로이센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다.

프리드리히 2세와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베추체프를 실각시키기 위해서 집요하게 비밀스러운 공작을 벌였다.각주11) 그러나 측근들의 모함과 외국 첩보기관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베추체프에 대한 옐리자베타의 신임은 굳건했다. 그녀는 베추체프의 외교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 약 3만 명의 병력을 라인 강 유역까지 진격시켜 무력 시위를 했다. 그의 외교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베추체프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 옐리자베타는 1744년에 그를 총리대신으로 임명했다.

옐리자베타는 공식적으로는 독신이었지만 비밀리에 결혼을 했으며, 이 사실을 굳이 감추지도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우크라이나 코사크 출신인 음악가 알렉세이 라주모프스키(Alexey Razumovsky) 백작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알렉세이는 옐리자베타와 동갑이었으며, 안나 이바노브나 시절에 근위대 소속으로 활동하던 우크라이나 성가대의 일원으로 왕궁에 데뷔해 귀부인들을 사로잡았다. 라주모프스키는 대략 1731년경부터 옐리자베타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

라주모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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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는 삼십 대 중반에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었는데, 그 이후에는 반주자 겸 근위대의 병참 장교로 활동했다. 그는 옐리자베타가 일으킨 1741년의 궁정 쿠데타에서 몇 사람 되지 않는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공로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두 사람은 1742년 가을에 모스크바 교외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비밀이었기 때문에 알렉세이는 '밤의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출신지인 우크라이나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정치에는 가급적이면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그녀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더라도 귀족들의 이익보다는 러시아 자체의 국익을 우선시하고 일반 민중들의 이익을 대변해서 옐리자베타에게는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했다. 옐리자베타가 측근들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베추체프를 끝까지 신임한 데는 알렉세이의 꾸준한 격려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알렉세이는 계속 왕궁에 머물면서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고 친위대 소속으로 옐리자베타의 경호 책임자로 일했다. 옐리자베타는 자유로운 정신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알렉세이 이외에도 여러 명의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해 마지막에는 항상 알렉세이에게로 돌아갔으며, 그럴 때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를 다시 받아들였다.

옐리자베타가 러시아 역사에 가장 크게 공헌한 업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문화 부문의 개혁에 착수한 것을 꼽고 있는데, 이것 역시 알렉세이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을 개연성이 크다. 그녀는 여러 분야의 러시아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은 물론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중을 상대로 하는 국립극장을 처음 건립하고 이탈리아 출신의 음악가와 무용가들을 다수 초청했다. 자연스럽게 러시아어로 쓰인 민족시가 유행하고 대중들을 상대로 한 연극과 음악회가 공연되면서 러시아의 평민들도 고급 문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녀가 가장 결정적으로 향후 러시아의 발전에 기여한 프로젝트는 1755년에 모스크바에 설립한 러시아 최초의 대학교였다. 이 대학은 처음부터 평민들에게도 입학이 개방된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으며, 현재 러시아의 최고 명문인 로모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학(Lomonosov Moscow State University)각주12) 으로 발전하였다. 이보다 2년 후인 1757년에는 러시아 예술원(Russian Academy of Arts)을 창설했다.

건축 분야에서 옐리자베타는 유명한 건축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미오 라스트렐리(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각주13) 를 고용해서 여러 개의 걸작을 남겼다. 이 중에는 차르스코예 셀로의 예카테리나 궁전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몰니 성당, 새로 지은 겨울 궁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라스트렐리는 러시아 고유의 건축 양식에 후기 바로크 양식을 접목시켜 탄생한 이른바 '모스크바식 바로크(Muscovite Baroque)' 양식을 완성한 사람이다.

옐리자베타는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후대의 역사가들로부터 가장 비난을 많이 받았던 점은 한계를 모르는 사치였다. 그녀 시대의 건축은 그녀의 후계자인 예카테리나 2세의 표현에 의하면, '커피의 거품 크림'처럼 현란하게 외장을 장식하고 인테리어 역시 갖가지 정교한 조각과 회화로 복잡하고 화려하게 치장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조각가의 성향이 아니라 그녀의 사치스러운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녀의 왕궁에서 열리는 파티나 가면무도회는 동시대의 유럽인들이 놀랄 정도로 화려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이러한 장소에서 어릴 적부터 갈고 닦은 춤 실력을 과시하며 밤늦도록 즐겼다. 그녀는 왕궁의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의상과 장식품을 규정하는 칙령까지 내렸을 정도로 신경을 썼는데, 1,500벌의 파티복과 수천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아집도 대단히 강해서 다른 사람들은 그녀와 같은 것을 절대 착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헤어스타일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녀의 사치와 비슷한 정도로 비난받는 부분은 나태하고 무지하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국정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으며 모르는 것을 아예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옐리자베타의 통치는 경이로울 정도로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녀가 사람을 관리하는 데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자리건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적임자를 찾아내고 그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면서 자신은 가장 기본적인 정책 방향만 결정하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각주14)

표트르 대제의 근본적인 목표가 '러시아의 유럽화'였다고 하면, 이 목표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 바로 옐리자베타였다. 러시아 지도층의 사고방식을 고쳐놓은 사람은 표트르가 아니라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말도 많고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던 차리나였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의 치하에서는 귀족들이건 농민들이건 단 한 번의 반란도 일으키지 않았는데, 이 점은 러시아 역사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말년의 국제전

전쟁은 물론이고 폭력 자체를 극도로 싫어했다고 하는 옐리자베타였지만, 통치 말년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러시아를 국제전에 밀어 넣었다. 거의 모든 국정 분야에서 무관심한 것 같은 태도로 일관하던 옐리자베타는 1757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한 번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른바 7년 전쟁이 발발하자 여기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야심가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러시아에 대한 위험요소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후일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이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대규모로 벌어진 국제전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관여했으며, 전쟁의 무대가 유럽 대륙만이 아니라 대서양과 인도와 아메리카 신대륙의 식민지에도 번졌고, 백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기록했다. 이 전쟁에서는 프로이센과 영국이 한 축을 형성해 포르투갈과 다른 작은 국가들을 끌어들였으며, 반대 축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역시 다른 국가들을 끌어들여 대항했다.

먼저 동맹을 맺은 쪽은 영국과 프로이센이었다. 국가의 크기로 볼 때는 불리해 보이지만 당시 프로이센은 유럽 최고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영국은 유럽 최고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중립만 지켜 준다면 오히려 우세한 쪽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옐리자베타는 초강경 노선을 택했다. 러시아는 15년 전의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에서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실리를 챙길 수 있었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동맹국들을 주도하는 입장이 되었다.

참전한 러시아군은 영국이나 프로이센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총 8만 명의 병력을 지휘한 러시아의 표트르 살티코프(Pyotr Semyonovich Saltykov) 백작은 유럽 최강의 육군이라는 프로이센군의 완강한 방어선을 분쇄하며 한 걸음씩 차분히 진격해서 1758년 말에 프로이센의 동부 지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놀랍게도 현재는 폴란드의 영토인 이 지역의 주민들은 러시아군의 진격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프리드리히 2세의 군사적 모험주의와 이에 수반되는 철권통치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1759년 여름에 카이, 쿠네르스도르프각주15) 에서는 전쟁의 향배를 결정하는 대회전이 일주일 간격으로 연이어 벌어졌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다 기습을 받았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오스트리아 기병대 1만 8천 명이 합세한 두 번째 전투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가 직접 참전한 프로이센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팽팽하던 균형이 무너지면서 프로이센이 밀리기 시작했다.

옐리자베타는 전혀 그녀답지 않게 매일같이 전황을 보고받으면서 부지런히 러시아 원정군에 대한 갖가지 지원 정책을 추진했다. 사실은 이것이 그동안 감춰왔던 그녀의 본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러시아군은 그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1760년에는 혼전을 벌이던 와중 살티코프 백작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혼성군을 전격적으로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으로 진격시켰다. 러시아-오스트리아군은 쉽게 베를린을 점령하여 프리드리히 2세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프리드리히 2세에게 다음해인 1761년은 더욱 끔찍한 악몽이었다. 완전히 수비로 돌아서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가운데, 크리스마스에 프로이센군의 마지막 전략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콜베르크 요새가 함락되었다. 사기가 한껏 올라 있는 러시아군이 과감하게 단독으로 벌인 작전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옥쇄 아니면 항복을 선택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몰렸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맞은 1761년 크리스마스, 콜베르크 요새가 함락된 바로 그날 프리드리히 2세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숙적인 러시아의 차리나 옐리자베타가 죽은 것이다. 다음해 1월 프로이센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던 러시아군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전세는 극적으로 역전되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전쟁의 뒤바뀐 결과가 유럽 역사의 흐름 자체를 뒤바꿨다고 주장한다.각주16)

양면성을 가진 군주

7년 전쟁에 개입하기 전부터 옐리자베타는 이미 심각한 저혈압 증세를 보이고 있었으며,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옐리자베타가 유독 이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각주17) 친프로이센 노선을 선택할 것이 분명한 후계자 표트르 3세가 집권하기 이전에 러시아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의 병세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으며 의사의 진료마저 거부했는데, 프리드리히 2세에게 희망을 주지 않고 일찌감치 항복을 유도하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1761년 가을이 넘어가면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옐리자베타는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자유분방한 남자 관계에도 불구하고 줄곧 곁을 지켜준 알렉세이 라주모프스키에게 자신과 그의 개인적인 기록을 모두 파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일기와 편지들이 모두 사라져 옐리자베타의 전기 작가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옐리자베타는 러시아 역사상 큰 불가사의의 하나인 타라카노바(Tarakanova) 공주의 전설을 남겼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알렉세이와 옐리자베타 사이에는 타라카노바라고 불리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옐리자베타의 유일한 혈육이었는데,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관련된 모든 기록이 파기되고 그녀의 행방 자체도 완전히 묘연해졌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요점이다.각주18)

옐리자베타는 극단적인 양면성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을 칭송했지만, 옐리자베타는 동시에 잔인하고 냉혹한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의 관대한 성격으로 인해 왕궁은 여러 나라의 공작원들이 꾸미는 음모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정작 본인과 중요한 결정권자들은 그러한 음모에 휘말리지 않았다.

또한 당시 유럽을 풍미하던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과 전혀 교류가 없었는데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철저한 러시아 전통주의자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녀는 교회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교회에 대한 개혁안에는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그녀의 대답은 "내가 죽은 다음에 집행하라."였다. 그녀는 책의 출판을 독려하면서도 러시아에서 발행되는 모든 서적은 러시아 정교회의 사전 검열을 받도록 지시했다.

그녀의 이중적인 태도는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큰 이슈였던 중세식 장원 제도에서도 나타났다. 그녀는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에 거주하는 일반인들에 대한 개별적인 처벌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한 군주였다. 그러면서도 농민들을 토지에 예속시키는 법안을 강화해서 결국 후일 자유민이었던 농민들이 농노화되는 단서를 제공했다. 그녀는 영주들의 특권을 강화하고 그들을 위한 국책은행까지 설립하였다.각주19)

옐리자베타의 치하에서 러시아는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했다. 그 번영은 광활한 농토를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가 매년 곡물을 수출해서 벌어들이는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의 근원인 농촌은 근본적인 개혁이 미루어진 채 중세식의 생산체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녀의 치세하에서는 워낙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모순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후일의 러시아는 미진한 개혁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었다.

1761년 크리스마스에 옐리자베타는 자신의 후계자인 조카 표트르 3세 부부와 영원한 연인 알렉세이와 그의 동생 키릴 라주모프스키(Kirill Razumovsky)각주20) 백작을 자신의 병상으로 불러들였다. 그녀는 표트르 3세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도 알렉세이와 키릴을 보호해 줄 것만을 부탁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이익을 가장 중요시했던 친절하고 영리했으며 경건했지만 유난히 바람기가 많았던 매력적인 차리나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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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 집필자 소개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으며, 대우조선과 대우통신에서 홍보 및 광고 분야에서 일했다. 저술 및 번역, 출판기획 분야에 관심을 기울..펼쳐보기

출처

불멸의 여인들
불멸의 여인들 | 저자김후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를 개척한 위대한 여인들! 우연히 모든 조건이 맞아 힘들이지 않고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닌, 치열하게 투쟁하여 그 결과 권력과 명예를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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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옐리자베타불멸의 여인들, 김후,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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