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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상드
오로르 뒤팽(Aurore Dupin), George Sand출생 | 1804년 07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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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6년 06월 08일 |
본명 | 오로르 뒤팽(Amantine Aurore Lucile Dupin) |
국적 | 프랑스 |
대표작 | 《장미와 백색(Rose et Blanche)》, 《앵디아나(Indiana)》, 《렐리아(Lélia)》, 《루크레치아 플로리아니(Lucrezia Floriani)》 |
언젠가 이 세상은 나를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상관할 일은 아니다.
나는 다른 여성들을 위해 길을 열어 줄 뿐이다.
조르주 상드(George Sand)는 19세기를 풍미했던 여류 소설가이자 극작가, 수필가였다. 조르주 상드는 그녀의 본명이 아니라 필명이다. 1804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녀의 원래 이름은 오로르 뒤팽(Amantine Aurore Lucile Dupin)으로, 폴란드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삭스 백작(Comte de Saxe) 가문의 후예이면서 프랑스 육군 장교였던 모리스 뒤팽(Maurice Dupin)의 외동딸이다. 상드의 어머니는 서민 출신으로 센 강변에서 새를 파는 상인의 딸이었다고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네 살 때 아버지를 낙마 사고로 잃고, 뒤팽 가의 장원이 있는 노앙이라는 프랑스 중부의 작은 마을로 옮겨 와 할머니 마리 오로르(Marie Aurore de Saxe)의 손에서 자랐다. 마리는 대단히 지적인 여자였고 오로르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많은 교육을 시켰다. 후일 조르주 상드가 되는 오로르가 가졌던 폭넓은 지성의 근원은 대부분 할머니 마리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할머니와 손녀 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지만, 그들 사이에는 심각한 긴장 관계가 존재했다. 오로르는 기질적으로 반항심과 모험심이 충만한 자유분방한 아이였으며, 마리는 엄격한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귀족 여인이었던 것이다.
마리는 말괄량이 손녀를 파리에 소재한 앙글레스 수녀원의 기숙학교에 보내어 그녀의 행동을 고치려고 시도했다. 오로르는 그런대로, 최소한 겉보기에는 학교에 잘 적응하면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완성해 갔다. 그렇지만 비극은 갑자기 찾아왔다. 오로르가 열여섯 살 때 마리가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것이다. 오로르는 3년 만에 파리 수녀원의 생활을 청산하고 노앙으로 돌아왔다. 바로 그 다음해에 마리는 죽고 장원과 거대한 저택은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오로르에게 상속되었다.각주1)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녀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할머니를 잃고 나서 1년 남짓 지난 1822년, 오로르는 아홉 살 연상인 뒤드방(François Casimir Dudevant) 남작과 결혼했다. 그는 자존심 강한 귀족이라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무미건조한 보통 사람으로 개성이 강한 오로르를 어떤 면에서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남자였다. 그렇지만 결혼 생활은 8년이나 지속되었고, 5년 터울로 아들 모리스(Maurice)와 딸 솔랑주(Solange)도 얻었다.
불행하고 지루한 결혼 생활에 싫증 난 오로르에게 뒤드방 남작이 하녀와 바람을 피운 사건은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녀는 1831년 초 혼자 파리로 갔다. 이때 오로르는 예전에 할머니와 함께 파리를 여행하면서 만났던 같은 마을 출신의 작가 지망생 쥘 상도(Jules Sandeau)각주2) 와 만나 정신적,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후일 프랑스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크게 성공할 쥘 상도였지만, 나이가 오로르보다 일곱 살이나 아래였으며 아직은 지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로르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에는 역량이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오로르는 상도와 관계를 하는 짧은 기간 동안 작가로 데뷔했다. 그녀의 첫 번째 소설 《장미와 백색(Rose et Blanche)》은 쥘 상도와 공동으로 집필한 것으로, 이들은 '쥘 상드(Jules Sand)'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바로 그 다음해에 오로르는 자신의 독자적인 소설 《앵디아나(Indiana)》를 발표하면서부터 '조르주 상드'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이후로는 줄곧 이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재치가 넘치는 이 소설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독자들은 작가가 여자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성들의 자유로운 연애를 묘사한 낭만주의 소설 《앵디아나》는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녀는 다음해에 자전적인 연애소설 《렐리아(Lélia)》를 발표해서 다시 한 번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조르주 상드는 이 시기에 1년에 여러 권씩 소설을 써내는 초인적인 일정으로 집필을 하면서각주3) 동시에 유력한 일간지에도 수시로 기고했는데,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그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작가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는 와중에 그녀는 남편 뒤드방 남작과의 이혼 소송에 들어가 1835년에 완전히 이혼했으며, 두 아이들의 양육권도 얻었다. 그녀는 이혼 이후 할머니 마리로부터 물려받은 뒤팽 가의 대저택을 점유하고 있던 남작에게 다시 소송을 걸어, 2년 후에는 그를 그녀의 집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노앙에 위치한 조르주 상드의 대저택은 프랑스와 다른 나라 출신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거쳐 간 명소로 자리 잡게 된다.
이들 중에는 19세기의 유럽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수두룩하다.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Honoré de Balzac), 러시아의 소설가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프랑스의 미술가 들라크루아(Fedinand Victor Eugéne Delacroix),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배우 마리 도르발(Marie Dorval),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 리스트(Franz Liszt), 그리고 그녀의 불멸의 연인 쇼팽(Frédéric Chopin)도 포함되어 있다. 상드는 자유연애를 신봉했던 바람둥이였지만, 이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연인들은 아니었으며 대부분 절친한 친구이자 공통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적인 동료들이었다.
상드가 성적인 욕구의 노예였다든가 혹은 수백 명의 남성을 섭렵했다는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다. 그녀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연인을 공개했기 때문에 그들의 명단이 대단히 길긴 하지만 연대기는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물론 시기적으로 겹치거나 중간에 다른 남자들과의 불장난으로 인해 원래의 연인들에게 성실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지만, 이러한 경우도 "연인 관계가 훼손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상드 자신은 표현했다.
그녀는 쥘 상도와의 짧은 인연이 끝나고 나서 곧바로 소설 〈카르멘(Carmen)〉각주4) 의 저자이자 역사학자인 프로스페 메리메(Prosper Mérimée)를 거쳐 시인이자 극작가인 알프레드 드 뮈세(Louis Charles Alfred de Musset-Pathay)각주5) 와 2년 가까이 관계를 지속했다. 연애가 끝난 후 뮈세는 《이 시대의 총아가 하는 고백(La Confession d' un enfant du Siécle)》이라는 소설을 통해 자신의 입장에서 상드와의 관계를 묘사했고, 상드는 《그녀와 그(Elle et lui)》라는 소설에서 이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상드의 연인 중에서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관계가 바로 폴란드 출신의 천재 음악가 쇼팽과의 인연이었다. 1836년 서른두 살의 상드는 그녀의 친구인 리스트와 연인 관계에 있던 다구 백작부인(Marie, Comtesse d'Agoult)이 개최한 파티에서 여섯 살 연하의 쇼팽을 처음 만났다. 쇼팽은 이 시기에 이미 천재적인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로 큰 명성을 얻고 있었다.각주6)
첫눈에 쇼팽에게 빠진 상드와는 달리 쇼팽이 그녀에게 받은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그녀가 여자 맞긴 맞아?'라고 했을 정도였다. 당시 쇼팽은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폴란드 출신의 미녀 마리아 우진스카(Maria Wodzinska)와 비밀리에 약혼을 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이때 마리아의 나이가 겨우 열여섯 살이었고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고, 쇼팽은 이에 심적으로 상당히 괴로워하고 있던 상황이었다.각주7)
상드는 바로 이 작은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당시 연인이었던 뮈세를 차고 쇼팽을 유혹하는 데 성공했으며, 두 사람의 사이는 곧 공공연한 것이 되었다. 상드는 이 관계로 인해서 이미 가지고 있던 악녀의 이미지가 훨씬 강해졌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실질적으로는 플라토닉한 관계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쇼팽은 지병이 악화되어 육체적으로 성 관계가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각주8)
아직까지 정확한 병명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쇼팽의 지병은 상드를 만났을 때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그러한 상태에서 상드는 쇼팽과의 관계를 십 년이나 지속했다. 이들의 관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마요르카 여행이다. 상드는 1838년 겨울에 악화된 쇼팽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대하면서 두 아이들과 함께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으로 떠났다. 그렇지만 이들의 여행은 끔찍한 악몽으로 변했다.
그들은 적당한 숙소를 찾지 못해서 예전에 수도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에 머물러야 했으며, 쇼팽의 피아노는 세관에 묶였다. 상드가 거금을 들여 이 피아노를 통관시켰고 가까스로 다음해에야 쇼팽은 작곡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겨울 마요르카 섬의 기후는 예년과는 다르게 아주 혹독했다. 이러한 환경은 쇼팽의 건강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그러한 와중에도 쇼팽은 마요르카에서 주옥 같은 작품들을 작곡했으며, 그중에는 일생의 걸작 중 하나로 '빗방울'이라는 별명을 얻은 〈전주곡 Op. 28-15〉가 포함되어 있다.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들은 급히 마요르카 섬을 떠나 마르세유에서 몇 달 동안 머물면서 그의 회복을 기다렸다. 그 이후로 쇼팽은 주로 노앙에 있는 상드의 저택과 파리를 오가며 머물렀다.각주9) 10년이라는 긴 연애 기간 동안 이들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쇼팽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작곡되었으며, 조르주 상드 역시 이 시기에 자신의 대표작들을 발표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이했다. 쇼팽과 상드의 관계가 끝난 이유는 상드가 1847년에 발표한 소설 《루크레치아 플로리아니(Lucrezia Floriani)》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부유한 여배우와 병약한 왕자의 사랑을 그린 러브 스토리였지만, 쇼팽은 이 소설을 상드가 자신과의 관계를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고 불같이 분노했다. 그들의 친구들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했지만 워낙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라 요지부동이었다.
그해 쇼팽이 노앙의 저택을 방문하지 않으면서 그것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끝이 났다. 쇼팽은 상드를 다시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아이들과는 그로부터 2년 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각주10)
상드는 근본적으로 정치와는 무관한 낭만주의 작가 군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정치에도 깊이 개입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 시기에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혼란스러운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때문에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의 한 사람이었던 그녀 역시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789년의 대혁명으로 왕정이 붕괴되고 혁명정부의 공포정치와 나폴레옹의 시대를 거쳤던 프랑스에서는 이 시기까지도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해는 1815년이었으며, 이때 상드는 열한 살이 되기 직전이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프랑스에서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분열된 여론을 극복하지 못하고 국민들의 신망도 얻지 못하다가 1830년 7월 혁명을 통해서 왕정체제가 무너지면서 입헌군주정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국왕은 루이 18세의 사촌동생이면서 볼테르의 사상을 신봉하는 개혁주의자로 국민들의 인기를 얻고 있던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각주11) 였다. 이 체제가 18년이나 유지되자 점차 보수적인 색채를 띠게 되면서 경제가 정체되고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했으며 국민들의 신뢰도 잃어갔다. 민들의 인기를 잃었다. 바로 이 체제의 후반기가 상드가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사실 그녀는 작가로 데뷔하던 무렵에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토로한 적이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시인이고 열렬한 법치주의자(Legislative)이다. 필요한 경우에는 법도 무시하는 대단히 호전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단연코 의회주의자(Parliamentary)는 되지 않을 것이다."각주12)
그렇지만 그 시대의 프랑스 지성들에게 정치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루이 필리프의 통치가 막바지에 달하던 시기에 다수의 정치 팸플릿을 제작해서 개혁주의자들을 대변했다. 1848년 초 루이 필리프의 군주정이 무너지면서 잠정적으로 제2 공화정이 수립되었으나 혼란은 계속되었다. 대중들은 일할 권리와 평등한 선거권을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보장하라는 두 가지 혁신적인 요구를 내세우며 정치인들을 압박했으며, 6월에는 대대적인 소요까지 일어났다.
그렇지만 6월 혁명의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보통 선거에 의해 75퍼센트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 Napoléon Bonaparte)였다.각주13) 그는 얼마 지나지 않은 1851년 겨울 쿠데타를 통해서 종신 대통령이 되었고, 1년 후에는 제2공화국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되어 제2 제정 시대를 열 사람이었다.
조르주 상드는 이러한 혼란기 동안에 페미니스트 그룹에 의해 의원직에 출마하라는 압력을 줄기차게 받았다. 그녀는 이에 응하지 않았지만, 팸플릿 제작을 통해서 줄곧 개혁적인 공화주의자들을 대변해 왔다. 최종적으로 제정으로 마무리된 정치 현실은 그녀에게 큰 좌절감만을 안겨 주었다. 그녀는 루이 나폴레옹에게 6월 혁명과 그의 집권과정에서 체포된 인사들에 대한 선처를 청원하는 것으로 정치적인 활동을 모두 마감하고, 그 이후에는 창작에만 전념했다.각주14)
의심할 여지없이 조르주 상드는 당대 가장 많은 비난을 받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비난 중에는 '창녀'나 '걸레'의 의미에 해당하는 원색적인 것도 있으나, 최소한 지성인들의 사회에서는 그녀의 화려한 남성 편력에 관한 비난이 주류를 이루지는 않았다. 사실 프랑스 사회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조르주 상드가 남성들이 세운 사회적 권위에 말이나 글이 아니라 행동으로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1년 중 파리에서 머무는 절반의 기간 동안 외출할 때 주로 남성복을 입었으며, 여성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장소에도 이러한 복장으로 버젓이 출입했다. 그녀는 자신이 남장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백작 가문의 상속인이자 남작부인의 지위에 맞는 여성복보다는 남성복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거나 그녀가 남성복을 입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욱이 그녀는 공공장소에서도 내놓고 흡연을 했다. 당시 상류층 여자들은 거의 담배를 피웠지만 어디까지나 혼자 있을 때나 살롱과 같은 장소로 국한된 이야기이지 공개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상드는 공공연히 줄담배를 피웠으며 그것도 주로 굵은 시가를 애용했다. 이 행동 또한 남성들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도전행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그 시대 프랑스의 지성은 그녀에 대해 격렬하게 비난하는 그룹과 그녀를 무조건 지지하는 그룹, 단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각주15)
시대의 스캔들 메이커로 남장을 하고 시가를 연신 피워대는 겉모습과는 달리 조르주 상드는 대단히 여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 그녀는 자신의 욕정이나 성적 충동을 숨긴 적이 없으며 이 문제에 관한 한 자신에 대한 비난에 대응한 적도 거의 없다. 그렇지만 실제 삶에서 그녀와 남자들과의 관계는 육체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진한 모성애가 바탕이 된 정신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르주 상드는 자신의 연인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연인 관계였던 사람들은 그 관계가 끝나도 오랫동안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가 쇼팽과 사귀기 직전에 버림받았던 천재 시인 뮈세는 죽으면서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그리 많이 했는지 상드에게 좀 물어봐 주겠소?"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상드가 일반적인 편견이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남자들과의 우정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는 플로베르(Gustave Flaubert)각주16) 는 타고난 성격과 가치관, 문학적인 성향, 문학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상드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은 평생 아주 진한 우정을 유지했다.
상드는 나이가 들면서 노앙의 저택과 파리나 베르사유 부근의 아파트를 오가면서 저술에 몰두했다. 또 부지런히 여행을 하면서도 많은 후배 작가들과 그녀 특유의 끈끈한 우정을 나누면서 그 시대에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던 프랑스 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남성 편력도 여전히 건재했다. 그녀는 열 살 이상 연하인 애인들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일흔두 살까지 장수했다.
그녀는 당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작가였지만, 죽은 후에 급격하게 독자층을 잃었다. 그녀는 100편이 넘는 소설과 수십 편의 희곡을 남겼는데, 현재까지 살아남은 것은 한국에서는 《사랑의 요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소녀 파데트(La Petite Fadette)》각주17) 와 프랑스에서 영화로 만들어진 《모프라(Mauprat)》 정도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조르주 상드는 뛰어난 작가로서보다는 쇼팽의 마지막 연인이나 대단한 남성 편력의 바람둥이로 더욱 유명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피상적인 모습만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상드가 그 시대의 인물들, 특히 여성들에게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는 일생을 통해서 '여성이 남성을 지적으로 압도한다면 지배할 수도 있다'라는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남긴 명문장을 보면 이것을 특별히 의식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덤불 속에 가시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원하는 꽃을 꺾기 위해서라면 내 손을 거두지는 않는다.
나는 원하는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내 영혼의 상처를 감내한다.
덤불 속의 꽃이 모두 아름답지는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그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법.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받는 것이므로 사랑하라.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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