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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멸의 여인

예지황후 소작

연연(燕燕), 叡智皇后 蕭綽

중국사 최고의 여걸

요약 테이블
출생 953년
사망 1009년
국적 중국

우리나라의 국사 교과서에서 요(遼)나라를 '계단(契丹)'이라는 한자로 표기하며 '거란'이라고 읽는 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서기 903년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해서 세워진 이 나라는 얼마 후에 그를 계승한 태종 야율덕광(耶律德光) 시절에 '요'라는 정식 국명을 갖췄다. 또한 거란이라는 종족에 대한 호칭도 원래 이들을 부르는 정확한 발음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나라에서는 요나라를 건국한 이 사람들을 가리켜 '키탄(Khitan)'각주1) 이라고 부른다. 키탄은 고대에 동호(東胡)라고 불리던 유목민들의 후예이며, 한때 동북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던 유목민 제국 유연(柔然)과 이들은 혈연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각주2) 이들은 유라시아 초원에서 활약하던 유목민 중에서는 상당히 일찍부터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중국사에서 수(隋)-당(唐)의 왕조 교체기인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엽부터 키탄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적인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소작의 정치

200년 이상 지속된 이 왕조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 바로 예지황후(叡智皇后) 소작(蕭綽)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중국의 정통 역사나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 연극에서 예지황후는 대단히 사악하고 교활한 캐릭터의 악역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키탄이었고,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모두 한족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엄정하게 이야기하자면 같은 시대인 송나라 초기의 한족 중에서 그녀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요 왕조는 태조 야율아보기 시절부터 후계 문제로 상당히 시끄러웠다. 왕위 찬탈을 위한 골육상잔과 반역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키탄이 이러한 권력 투쟁 속에서도 만리장성 이북의 영토 전체와 연운 16주(燕雲十六州)라고 불리는 현재의 베이징 인근의 장성 이남 지역까지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중국이 5대 10국(五代十國)이라는 군웅할거 시대에 돌입해서 극도로 혼란한 시절이 약 70년간이나 지속됐기 때문이다.

소작의 아버지인 소사온(蕭思溫)각주3) 은 요나라 황실의 일가로 남경유수(南京留守)라는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의 황제는 목종(穆宗)이었으며 뛰어난 지략가로 이름난 소사온은 황제로부터 신임을 얻는 중신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목종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재위 19년 만에 사냥 도중 급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요나라 황실은 다시 한 번 골육상잔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소사온의 기지로 전 황제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인 야율현(耶律賢)이 무사히 제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야율현은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고 무사히 승계과정까지 마치게 해 준 소사온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그를 위왕(魏王)에 봉하고 북원추밀사 겸 북부재상으로 임명했다. 현재 한국의 행정체제를 적용한다면 국회의장 겸 국무총리로 임명된 셈이었으니, 문자 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을 누리게 된 것이다.

소작은 소사온의 셋째 딸로 서기 953년생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연연(燕燕)'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장성한 다음에는 '세랑(細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연연은 제비를 의미하고, 세랑은 북방의 말로 한자어 '절세가인'과 동의어였다. 그녀의 별명들로 추리해 보면 몸매가 호리호리한 스타일의 뛰어난 미인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남경은 중국 문화의 보물창고나 마찬가지인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분야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쌓았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후일 그녀의 활약상을 보면 이 시기에 승마와 검술, 궁술 같은 군사훈련으로 자신의 몸을 단련시켰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키탄 귀족 여인들의 전통이었다. 야율아보기가 키탄국을 세울 때에도 그의 부인 술율평은 여인들만으로 군대를 편성해 직접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그의 위업에 크게 기여했다.

야율현이 황제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으며, 소작은 열여섯 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소문이 자자한 세랑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리 없었다. 야율현은 소작을 일단 귀비(貴妃)로 책봉해서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는데, 태후와 황후가 모두 공석이고 귀비가 가장 높은 품계의 여인이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내명부를 이끌어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야율현은 다음해에 그녀를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황후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작은 충격적인 비극을 당했다. 그녀의 아버지 소사온이 정적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반역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황실의 인물들과 그를 시기한 대신들이 꾸민 음모였다. 음모는 분쇄됐지만 그것은 앞으로 오랫동안 그녀가 시달려야 할 크고 작은 모반의 서막이었다.

그 다음해에는 첫아들 융서(隆緖)를 얻었지만, 키탄 황실에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야율현은 원래 영민한 개혁군주였으며 그가 시행한 갖가지 개혁 정책으로 개국 이래 누적되어 있던 문제점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왕조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에 처절한 골육상잔의 비극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추위에 오래 노출되는 바람에 치유될 수 없는 지병을 얻었던 것이다.

융서가 태어나고 얼마 후부터 그의 지병이 악화되기 시작해서 점차 조회조차 제대로 참석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야율현은 소작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내세웠고, 황제 대신 황후가 조정에 나가 정무를 관장했다. 일반적인 청원에서부터 전쟁 선언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무가 소작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그녀는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지만, 황후가 황제를 대신해서 앞에 나선다는 사실 자체가 불온한 세력들에게는 빌미를 제공했다.

소사온과 함께 야율현을 황제로 내세웠던 공신 고훈(高勛)과 여리(女里)가 주동이 되어 대병력을 동원해서 반역을 꾀했다. 소작은 군대를 동원해서 이 반군들을 기습해 격파함으로써 음모를 분쇄했다. 이 모반 음모는 소작에게 혁신의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세습적인 공신 세력들을 누르면서 키탄이건 한족이건 가리지 않고 충성스럽고 능력 있는 새로운 피를 수혈했다. 이들 중에는 한인 출신으로 남경의 실력자인 한광사(韓匡嗣)와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을 남기게 될 야율휴가(耶律休哥)도 끼어 있었다.

야율현은 직접 정사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사관들을 불러 황후가 하는 말을 기록할 때 '짐(朕)'이나 '여(予)'와 같이 황제만이 사용하는 한자로 바꾸어 기록할 것을 명했다. 이런 상징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황제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여러 번의 반역 음모가 분쇄되고 새로 등용된 관리들의 노력으로 내정 개혁이 이루어지자 요나라는 번영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중국을 통일한 송(宋)나라와 연운 16주를 놓고 밀고 밀리던 접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벗어나 점차 우세를 확보하게 되었다.

연운 16주를 두고 키탄이 남쪽의 5대 왕조나 중국을 재통일한 송나라와 벌인 투쟁은 제2대 황제인 태종 시절부터 거의 매년 반복되어 온 연례행사였다. 원래 연운 16주는 석경당(石敬瑭)이라는 인물이 키탄의 지원을 얻어 후당(後唐)을 멸하고 후진(後晋)을 세우면서 그 대가로 요나라에게 할양한 땅이었다. 후진을 멸하고 선 나라가 후한(後漢)이었는데, 이 왕조는 들어선 지 3년 만에 후주(後周)에 의해 망했다.

이 후한의 왕가는 완전히 몰락하지 않고 현재의 산서성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그곳의 태원(太原)을 중심으로 조그마한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북한(北漢)이라고 했다. 북한은 한인들의 나라였지만, 실질적으로 키탄의 보호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주의 황제들은 당연히 이 나라가 못마땅했으며 대군을 동원해서 북한을 공격하는 일이 연례행사였다.

후주의 대군이 쳐들어오면 북한에서는 즉시 요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이 요청을 받으면 키탄의 경기병들이 출동했다. 기동력을 자랑하는 키탄군이 급하게 남하해서 도착할 때쯤에는 대부분의 경우 수도 태원이 포위되어 있었다. 그러면 키탄군은 장기인 기마전을 전개해 보병 위주의 한인 병사들을 몰아내고 태원을 구원했다. 이런 일이 장장 이십여 년 동안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었다.

서기 960년 후주의 장군 출신인 조광윤(趙匡胤)이 송나라를 세우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십국의 잔재들을 청소하면서 통일 왕조를 세우는 기간에 이 지역은 평온했다. 그러나 968년 통일이 마무리되자 드디어 조광윤도 후주의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태원을 포위했다. 이때에도 바람과 같이 달려온 키탄의 기마군단이 나타나자 이 온화한 성격의 황제는 불필요한 소모전보다는 평화를 선택했다. 송과 요 사이에는 대략 10년 정도의 평화기가 찾아왔다.

송 태조 조광윤을 계승한 사람은 그의 동생인 조광의(趙光義)였다. 그는 너그럽고 따뜻한 성품의 형과는 달리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조카를 제거한 잔인하고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조광의는 황제에 오르고 나서 바로 다음해인 979년에 50만 대군을 몰아서 태원을 공격했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키탄의 구원군이 나타났지만, 조광의는 이들을 격파하고 북한을 멸했다. 자신감에 충만한 그는 곧바로 연운 16주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목표는 이곳의 중심지인 남경이었다.

소작의 고향이기도 한 남경은 50만 대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굳게 버텨냈다. 이 방어전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남경유수 한사광의 아들인 한덕양(韓德讓)이다. 한덕양은 이민족인 요나라의 중신으로 활약했지만, 후일 중국 역사가들에 의해 역사상 최고의 명신 중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될 인물이다. 소작은 야율휴가와 야율사진(耶律紗軫), 그리고 10만의 병력으로 남경의 구원에 나섰다.

여기에서 야율휴가는 세계의 전쟁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될 고량하(高粱河) 전투각주4) 의 주역이 된다. 이 전투에서 그는 10만의 병력으로 50만 대군을 상대하면서 유인, 교란, 포위, 섬멸의 순으로 대전과를 올렸다. 후일 '기동전략의 교과서'로 평가될 정도로 멋진 전투였다. 결정적인 최후의 전투에서 야율휴가는 불과 3만 명 남짓의 병력으로 열 배가 넘는 대군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고량하에서 화살에 맞아 부상까지 당했던 조광의는 3년 동안 권토중래해서 다시 한 번 대군을 동원하여 연운 16주를 공격하지만, 이때에도 야율휴가의 기동전술에 말려 참패했다.

야율현은 키탄이 고량하에서 대승을 가두고 3년이 지난 후에 오랜 투병 생활을 청산하고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경종(景宗)이라는 시호가 붙여졌으며, 소작은 승천황태후(昇天皇太后)라는 칭호를 얻었다. 소작의 나이는 스물아홉 살이었으며, 경종과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다. 그녀는 나이가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야율융서를 대신해서 태후의 신분으로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훈구대신들이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도전하고 있었지만, 송나라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계기로 권력층 내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승리의 주역이었던 야율휴가나 야율사진같이 황후에게 충성하는 황실의 일가들이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능력 있는 관리라면 키탄이건 한족이건 가리지 않고 중용되었다. 이들의 힘을 배경으로 소작은 대대적인 내정 개혁에 착수했다.

그동안 요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세습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던 개국공신의 일가들이었다. 그녀는 이들을 무장해제시키면서 병권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고량하 전투 직전 벌어진 처절했던 남경 방어전의 영웅이었던 한덕양도 중용되었다. 한덕양의 아버지 한사광은 한족이지만 태조 야율아보기 시대의 중신으로 소사온의 전임으로 남경유수를 역임한 사람이었다.

비록 출신 종족은 달랐지만 태후의 소(蕭)씨 가문과 한(韓)씨 가문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양대 명문가로 아주 긴밀한 사이였으며 소작과 한덕양 두 사람도 개인적으로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각주5) 어릴 적부터 소작과 자주 어울렸던 그의 궁 출입이 잦아지면서, 두 사람에 대한 스캔들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실질적인 내연의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태후의 입지는 확고했다. 그녀는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던 보수적인 키탄의 귀족 세력을 누르면서 새로운 질서를 잡아가고 있었다. 요나라는 시작부터 키탄 자신들을 포함한 북방의 여러 유목민들과 한족들이 뒤섞여 있는 나라였다. 상이한 법체계 아래에 살던 다양한 민족이 급작스럽게 통합되는 상황에서 태조 야율아보기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찾았다. 그는 관리를 임명하면서 아예 북면관(北面官)과 남면관(南面官)을 나누어 임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키탄을 비롯한 유목민 출신들에게는 북면관이 초원의 법을 적용하지만, 한족들에게는 남면관이 전통적인 한나라의 법체계를 적용했다. 최고의 의사결정기구인 추밀원까지도 남추밀원과 북추밀원으로 나누어 운용했다. 이런 시스템은 건국 초기에는 그런대로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점차 같은 사안에 대해서 두 가지 기준이 적용된다는 문제점이 발생했으며, 더욱이 요나라의 형법체계는 그들과 경쟁하고 있는 송나라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

소작의 시기에도 북면에 대한 업무는 한덕양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행정가였던 야율사진이 책임을 지고 남면에 관한 업무는 한덕양이 책임을 지면서 군사에 관한 문제는 야율휴가가 총괄하는 형태였다. 소작은 각 사안에 달리 적용되는 법체계를 통일하고 가혹한 형법을 개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한 송나라 출신 포로들을 모두 해방시켜 평민의 신분을 주었고, 반역죄에 대한 연좌제를 폐지하였으며, 키탄 고유의 부족을 기반으로 하는 행정체제를 오경(五京)을 중심으로 지역에 기반을 두는 체제로 개편했다.

한편 과거를 시행해서 출신을 가리지 않고 관리를 등용해서 새로운 피를 꾸준히 수혈했으며, 인사에서 청렴도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세워 놓았다. 한덕양을 위시해서 야율사진이나 야율휴가와 같은 권력자들 중에서 부정부패와 관련하여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동일 범죄에 대한 동일 처벌'의 원칙이 엄격하게 시행되고, 그간 형법 집행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었던 특권층들까지 형법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로써 민족적인 갈등이 급속도로 해소되었고,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인 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송과의 일전

이 시기에 요나라는 단단한 기반을 닦고 있었지만, 송나라의 황제 조광의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 어린 황제와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태후의 독주, 더욱이 한족 출신 신하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서 요나라의 지도층에 균열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경종이 죽고 나서 6년 후인 988년 조광의는 드디어 마지막 승부를 걸었다.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에 총동원했고, 수십만의 대군을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 동시에 두 방향에서 연운 16주를 공격했다. 초기에 원정군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자 크게 고무된 조광의는 자신도 중군을 직접 지휘해서 북상하기 시작했다. 송나라 황제의 친정에 대해 소작 역시 자신의 친정으로 대응했다. 무장을 하고 직접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송나라의 대군은 초기 전투에서 연달아 승전을 거두어 여러 개의 주현을 점령하면서 곧장 남경과 대동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그러자 대동 쪽으로 접근하던 동군을 야율휴가가 막아섰다. 그는 자신의 장기인 기동전을 전개하면서 송나라의 동군을 기습하여 그들을 교란시키고는 송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때쯤이면 멀찌감치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기회를 기다리다 그들이 진격하면 또다시 교란시키고 바로 물러나는 전술을 반복하면서 보병 위주의 대병력으로 편성된 송나라 군대의 진을 뺐다.

이러한 교란전술에 말려 송나라 동군의 움직임이 현저하게 둔화되자 야율휴가는 갑자기 공세로 전환했으며, 그와 때를 맞춰 소작이 직접 지휘하는 키탄의 중군이 길게 늘어선 송나라 동군의 옆구리를 기습했다. 양쪽에서 협공을 받은 송의 동군은 견디지 못하고 사하(沙河)로 후퇴해서 부대를 재편성했다. 그렇게 해서 사하 강변에서 송나라 병력 사십만과 키탄군 이십만 병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건곤일척의 대회전이 벌어졌다.

이날의 전투에서 소작은 한 사람의 장수로 직접 육박전에 참가했다. 화려한 흰색 갑옷을 입고 긴 창으로 무장한 태후는 전장을 누볐으며, 그 모습은 양쪽 병사들 모두의 눈에 잘 들어왔다. 키탄군은 병력면에서는 절대 열세였지만,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가 있었다. 반면 송나라의 대군은 혼란과 공포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직접 병사들을 지휘해서 송나라 동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그날의 전투 결과에 대해 사서는 '송나라 병사들의 시체로 강물이 막혔다'라고 기록했다.

주력 부대인 동군이 전멸하자 조광의는 급히 서군을 후퇴시켰지만, 이들 역시 키탄군의 우익을 맡고 있던 야율사진의 추격을 받아 진가곡에서 와해되었다.

송나라의 조정에서는 전쟁을 일으키면서 태후의 문란한 생활이 요나라에 국론의 분열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유교 문화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그들의 치명적인 오산이었다. 한덕양과 태후의 관계는 이미 널리 공개되고 받아들여진 상황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소태후는 한덕양의 처소에 나가 대신들 부부를 모두 초청한 가운데 큰 연회를 열었다. 《요사(遼史)》에서는 이때 사람들이 짝을 이루어 즐거움이 다하도록 즐겼다고 기록했다. 소작과 한덕양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결혼피로연을 열어 두 사람의 관계를 당당하게 공개한 셈이었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거리끼지 않고 함께 다녔다. 이것이 소태후가 난관을 돌파하는 방식이었다.

사하 전투 여파로 송나라가 입은 타격은 컸다. 국제적인 위세가 크게 추락하면서 서쪽에서 그동안 한족에게 눌려오던 탕구트인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이계천(李繼遷)을 앞세워 독립을 선언하고 서하(西夏)를 건국했다. 소작은 이들에 대한 지원에 나서 수천 필의 군마를 공급하고 황실 간의 통혼을 통해서 송나라에 대한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송나라가 서하 쪽으로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줄기차게 변경 지역을 공략했으며, 직접 출병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그녀가 전선으로 자주 나설 수 있는 이유는 왕권이 안정되고 황제가 이미 장성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들 야율융서는 후일 고려와 세 차례의 전쟁을 벌임으로써 우리와는 악연이 깊은 황제이지만,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성스러운 통치자라는 의미의 '성종(聖宗)'이라는 영광스러운 시호를 얻은 현군이 된다.각주6) 이는 어린 시절부터 소작이 엄격하게 교육시켰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소태후는 황제가 직접 정무를 관장한 이후에 그의 결정을 번복하거나 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황제가 물건을 사용할 때 지나치게 헤프게 사용하지 않는지 옷을 입을 때에는 너무 사치한 것을 입지는 않는지 상을 너무 후하게 내리지는 않는지 등 작고 개인적인 사항들만 철저하게 간섭했다. 그래서 정식 역사서인 《요서》에까지 성종이 요나라의 성군이 된 데에는 태후의 가르침이 결정적이었다고 기록되었다.

송의 태종 조광의는 사하 전투가 있은 지 9년 후에 가슴에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를 계승한 조덕창(趙德昌)은 우유부단하지만 합리적인 군주로 능력 있는 신하들을 등용하고 내정을 안정시키면서 국력을 신장시키고 있었다. 소작은 나이 쉰을 넘겼고 융서는 그녀의 간섭이 필요 없을 정도로 훌륭한 군주로 성장했다. 그녀는 요나라를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1004년 가을, 소작은 이십만 대군을 몰아서 송나라에 대한 전격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야율휴가나 야율사진 같은 전설적인 명장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덕양이 그녀를 수행했으며, 선봉장은 태후의 일족인 소달름(蕭撻凜)이었다. 이에 황제인 야율융서가 기겁을 하고 쫓아와서 그녀에게 합류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키탄군의 공격방향이 이상했다. 진격하는 곳은 연운 16주 중에서 유일하게 송나라가 확보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연운 16주 중 동쪽에 위치한 영주(瀛州)와 막주(莫州)는 후주의 세종이 요나라로부터 탈환한 지역으로 현재의 지형과는 달리 늪지대가 군데군데 숨어 있는 습지였다. 영토로서의 가치도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태행산맥의 구릉 지대를 제외하고는 접근이 어려워서 군사적인 공격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 송나라는 이 구릉 지역에 난공불락의 요새 와교관(臥交關)을 세우고 습지대에는 수만 개의 말뚝을 박아 기병 위주의 키탄군이 아예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군이 말을 탄 채 이 위험한 습지를 통과한다는 소작의 선택은 대모험이었다. 송나라는 다른 지역에는 탄탄한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으나, 키탄군이 대담하게 이 방향으로 공격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송나라는 물론이고 요나라에서조차 이런 식의 침공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허를 찔린 송나라의 방어선은 급속하게 허물어지고 패전을 거듭하면서 현재의 하남성에 위치한 전주(휚州)까지 순식간에 밀렸다. 전주는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2~3일이면 도달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수도인 개봉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졌지만 재상인 구준(寇準)은 황제를 설득하여 오히려 황제가 대군을 지휘해서 전주로 북상하도록 했다. 그러자 그동안 패전으로 땅에 떨어졌던 송나라 병사들의 사기도 올라갔다. 양쪽에서 동원한 수십만 대군이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소작이 이번 원정에서 세운 목표는 송나라를 타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막주에 주둔하고 있는 송나라의 장수에게 밀사를 보내 평화를 원한다면 송나라에서 먼저 제안해야 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 밀사들이 요나라 태후 소작과 송나라 재상 구준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소작은 천주와 막주의 할양을 요구했다. 천주는 송나라의 수도 개봉과 인접한 지역이고, 현재의 하북성에 위치한 막주는 천주로 들어오는 통로였다. 송나라에서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요구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고집을 세운 것이었다. 몇 번의 막후교섭이 더 이루어지고 드디어 송나라 황제가 임명한 전권대사 조이용(曹利用)이 소태후를 공식적으로 방문했다.

며칠 후에 양국의 황제는 외교적인 수사로 가득한 종전협정에 조인했다. 이 협정으로 인해서 송나라와 요나라는 형제국이 되었다. 야율융서는 조덕창을 형으로 부르고 조덕창은 소태후를 숙모로 부르게 되었다. 양군은 철수하여 예전의 국경을 지키기로 했다. 이 정도면 송나라의 외교적인 승리였겠지만, 문제는 송나라가 요나라에게 세폐(歲幣)로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제공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이 협약을 '전연의 맹(澶淵之盟)'이라고 하며, 중국인들은 이것을 그들의 역사 중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의 하나로 생각한다. 분명히 돈을 주고 평화를 산 셈이었지만, 송나라와 요나라는 이 협약을 충실하게 지켰으며 이날 이후 120년 동안이나 전쟁을 한 적이 없다. 그 시대를 살았던 송나라 사람들은 후대의 역사가들과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예지황후 소작

전연의 맹이 체결되고 5년 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했다고 판단한 태후는 은퇴를 결심했다. 그녀는 아들 융서에게 키탄 고유의 칸 즉위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시책례(柴冊禮)를 성대하게 거행하도록 해서 자신의 결심을 공포했다. 그녀는 융서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아예 고향인 남경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병이 깊어져 세상을 하직했다. 1009년 겨울의 일이었으며, 향년 57세였다.

성신선언황후(聖神宣獻皇后)라는 시호를 얻고 후일 다시 예지황후(叡智皇后)라는 시호가 추증된 소작은 요나라뿐 아니라 중국 역대 왕조의 왕후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녀가 내정에서 추구한 가치는 극히 현대적인 기준인 '인권'이라고 할 수도 있다. 민족적인 구분에 의한 차별의 철폐와 관대한 통치와 공정한 법 집행이 그녀가 추구하던 목표였다.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쟁포로나 노예들의 신분을 평민으로 회복시켰다. 북방의 피정복민 출신 유목민 한 사람이 야율 가의 시조 묘에서 실화를 해 큰 불을 낸 적이 있었다. 그 어떤 왕조에서도 당연한 사형감이었지만 태후는 그를 용서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노예가 귀족 출신 여자와 정분이 생겨 도망가자 이들을 여진 땅까지 추적해 살해한 황실의 종친에게는 중벌을 내렸다. 법의 집행은 공정해서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소태후에게는 두 명의 언니가 있었는데 이들이 반역에 연루되자 단호하게 처형을 명했다.

그녀는 요나라를 유목민의 왕조에서 중국적인 왕조로 바꾼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황궁에서조차 말 타기와 활쏘기와 같은 훈련을 통한 육체적인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철저한 키탄이었다. 세랑 소작은 현명한 여인이었고 불굴의 전사였으며 위대한 지도자였다. 수천 년의 중국 역사를 뒤져 봐도 그녀와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여성 지도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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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 집필자 소개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으며, 대우조선과 대우통신에서 홍보 및 광고 분야에서 일했다. 저술 및 번역, 출판기획 분야에 관심을 기울..펼쳐보기

출처

불멸의 여인들
불멸의 여인들 | 저자김후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역사를 개척한 위대한 여인들! 우연히 모든 조건이 맞아 힘들이지 않고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닌, 치열하게 투쟁하여 그 결과 권력과 명예를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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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예지황후 소작불멸의 여인들, 김후,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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