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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화될수록 아날로그를 찾게 되나

'디지털화의 전도사'로 불리는 니콜라스 네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는 디지털화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팩스야말로 정보 환경에 심각한 오점을 남겼으며, 정보화를 후퇴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보아야 할까? 팩스에 대한 평가에 관한 한, 네그로폰테보다는 또 다른 미래학자인 존 네이스비트(John Naisbitt)의 손을 들어주는 게 옳을 듯하다.

네이스비트는 삶에 더 많은 하이테크(첨단기술)를 도입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하이터치(고감성) 균형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팩스를 '하이테크-하이터치'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기술적으론 전자우편이 팩스에 비해 훨씬 우월하지만, 팩스가 더 편리한 점도 있다. 팩스 전송을 받으면 팩스 용지를 뽑아 복사하거나 자기만의 표시를 할 수도 있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거나 밑줄을 그어 반송할 수도 있다. 즉, 자기가 받은 데이터와 물리적인 접촉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네이스비트는 이것이 바로 하이터치의 개념이라고 말한다. 반면 전자우편의 경우에 하이테크는 있지만 하이터치가 개입될 여지는 없다.

미래학자 존 네이스비트. 그는 우리가 삶에 더 많은 하이테크를 도입하면 할수록 더 많은 하이터치 균형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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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시밀리가 전자우편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팩스는 플러그만 꽂으면 그만이다. 즉, 전원을 연결하고 전문을 끼우기만 하면 어디로든지 송신할 수가 있다. 모든 팩시밀리는 호환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기종과 호환 가능한지 고심하거나, 접속을 위해 데이터를 변형시켜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도 필요 없다. …… 팩시밀리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팩시밀리에 전문을 끼워 넣는 것은 서류를 봉투에 넣는 일과 비슷하고, 전화처럼 착신지 다이얼만 누르면 된다. 익숙하고도 간편한 방식이다."

네이스비트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미국에서는 기술 중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첨단 기술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하이터치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의 삶이 기술에 젖어들면 들수록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더 많이 원하게 되고(극장에서, 박물관에서, 독서 클럽에서, 아이들 축구 경기장에서), 의학이 하이테크 쪽으로 접어들면 들수록 대체 치료제나 치료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육체가 아닌 머리로 컴퓨터에 몰두하면 할수록 레저 활동이 더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방향(정원 일, 요리, 목공일, 새 키우기 등)으로 기운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수준을 넘어서 종교·명상 서적의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1991년부터 1997년에 이르는 동안 미국에서 종교 서적 판매는 150퍼센트라는 경이적인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영혼의 안식과 일상의 행복을 강조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위권을 차지했다. 『사소한 일에 땀 흘리지 마라』,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단순한 풍요』와 같은 책 말이다. 새로운 기술 활용에 적극적이었던 여피(yuppie)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기(yogi: 요가 수행자)와 그런 점에서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순인가?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당연한 현상이라는 게 네이스비트의 주장이다. 그게 바로 하이터치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최근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날로 세를 더해가고 있는 '단순하게 살기' 운동이다. 단순성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각광을 받고 있으며, 최소주의에 대한 열정적 추구가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자발적인 간소화 운동'을 전개하는 작가 바버라 브랜트는 그 운동을 "하이테크 기계, 특히 텔레비전에 중독된 우리를 구하기 위한 운동"으로 정의한다.

이 같은 '하이테크-하이터치' 코드로 세상을 보는 건 의외로 많은 걸 설명해줄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돈에 대한 이중성도 '하이테크-하이터치'의 비유로 설명해보는 건 어떨까? 황금만능주의가 위세를 떨치면 떨칠수록 사람들은 돈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돈이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럽기 때문인지 부당하거나 공정치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에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돈에 대해 의연하거나 심지어 경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상업주의라는 말처럼 오남용되는 말이 또 있을까. 마땅히 상도덕을 따져야 할 일도 상업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속여서 팔거나 공정치 못한 담합이나 유착을 해서 상행위를 하면 그건 법이나 윤리를 어긴 행위지, 그걸 상업주의라고 비판하는 건 온당치 못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상업주의라는 말을 오남용하는 심리의 이면엔 돈에 대한 심리적 균형을 취하고 싶은 욕구가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개인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런 개인적 성향의 사회적 총합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네이스비트는 하이터치를 하이테크의 반작용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둘의 결합을 역설한다.

하이테크가 독자적으로 작용할 때보다 하이터치가 가미될 때라야 기술 혁신은 훨씬 큰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양극단만 존재할 뿐 중간이 빈 것 같은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즉, 극단적으로 하이테크에 빠져들고 또 극단적으로 초월주의적인 명상이나 '나 혼자만의 행복감'에 빠져드는 건, '극단에 의한 극단의 치료'가 아니냐는 것이다. 애초부터 그 중간 지대는 존재할 수 없는 걸까?

'단순화'만 하더라도 그것이 가진 사람들의 호사는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단순화가 마케팅 전략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타임워너의 잡지 『리얼 심플(Real Simple)』은 창간호를 내기도 전에 40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하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대부분의 지면은 값비싼 제품들을 선전하는 광고로 뒤덮여 있었다. 어느덧 단순화는 있는 사람들의 호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에서 '자연' 찾으면서 오지에 오두막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 돈깨나 있는 사람들인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러나 최근 한국 사회를 강타한 '힐링 열풍'은 아날로그 문화에 대한 향수가 대중화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교의 템플 스테이나 천주교의 피정에 참여하는 일반인이 크게 늘었고,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당 부분을 대중의 '지치고 피로한 마음을 위로하는' 서적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힐링캠프>를 비롯하여 여러 텔레비전 프로그램들까지 힐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그 점을 잘 말해준다. 힐링 열풍에 대해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달콤한 언어들이 번성한다"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무기력한 개인의 처지에서 달리 기댈 곳이 없지 않은가.

한국인뿐만 아니라 불교의 템플 스테이에 참가하는 외국인이 늘어나는 추세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하이터치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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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살든 단순하게 살든 '인정(認定) 투쟁'이 날로 격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꼭 필요하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경우 가장 큰 장애물이 나 자신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지기 싫어하는 마음은 자기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지거나 무관심해도 될 만한 것들에 대해서까지 경쟁심과 시기심을 느끼게 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불행해진다. 남 탓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다스리는 법을 배우자.

이어령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융합한 디지로그(digilog)의 길을 역설한다. 그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적인(either-or) 선형적 사고에서, 모순되는 두 개의 이것과 저것(both-and) 모두 포용하는 순환적 사고가 필요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인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한국의 아날로그 문화가 디지털과 만나면서 날개를 달고 로컬의 벽을 뛰어넘는 힘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남의 나라 가슴에 못 박지 않고서도 이만큼 사는 나라가 있는가. 디지털 강국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길은 첨단 기술과 한국 문화를 융합하는 디지로그의 동력에서 나온다."

앞으로 그 어떤 디지털 기술이 출현하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의 두뇌가 바로 아날로그 기술이라는 사실이다. 디지털 기술만으론 파악할 수 없는 다른 큰 역량이 있다는 것이다. 아날로그 커뮤니케이션에는 무엇보다도 융통성이 있다. 신체 언어가 대표적인 예다. 아무리 언어가 다른 나라의 사람끼리라도 몸짓으로 소통할 수 있다.

전 사회의 디지털화가 맹렬한 속도로 이루어질지라도 일상적 삶에서 사고방식의 디지털화는 경계할 일이다. 우리의 삶에는 이거냐 저거냐 하는 식의 양자택일식 답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세상이 아무리 단절적인 디지털 혁명으로 들끓어도 우리의 삶은 연속적인 아날로그라는 데에도 관심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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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데이비드 메히건, 「멀티미디어 동물」, 이구형 옮김, 『네그로폰테이다』(커뮤이케이션북스, 1997), 60쪽.
  • ・ 존 네이스비트, 정성호 옮김, 『글로벌 패러독스』(세계일보, 1994), 145~146쪽.
  • ・ Michael Parenti, 『Land of Idols: Political Mythology in America』(New York: St. Martin's Press, 1994), p. 17.
  • ・ 존 네이스비트, 손병두 감역/안진환 옮김, 『하이테크 하이터치』(한국경제신문, 2000), 9~10쪽, 32~33쪽, 75쪽.
  • ・ 존 드 그라프·데이비드 왠·토마스 네일러, 박웅희 옮김, 『어플루엔자: 풍요의 시대, 소비중독 바이러스』(한숲, 2002), 28~29쪽.
  • ・ 김난도 외, 『트렌드코리아 2013』(미래의창, 2012), 94~100쪽.
  • ・ 문강형준, 「감각의 제국」, 『한겨레』, 2012년 2월 25일.
  • ・ 이어령, 『디지로그: 한국인이 이끄는 첨단정보사회, 그 미래를 읽는 키워드』(생각의나무, 2006), 119, 151, 158쪽.

강준만 집필자 소개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사회에 의미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 대표 저서로는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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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겉과 속
대중문화의 겉과 속 | 저자강준만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국인을 위한 최고의 대중문화 입문서로 최신 대중문화 현상의 전반적인 작동 방식을 분석한다. 케이팝부터 웹툰까지 대중문화에 관한 모든 것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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