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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

한국은 드라마 공화국이 되었는가

"<아씨>가 방영되는 동안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문단속을 잘 하여 도둑을 조심하고 수도꼭지가 꼭 잠겼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한 뒤에 이 프로그램을 시청해달라는 내용의 이색 스포트가 방송된 것은 방송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아씨의 남편(김세윤 분)이 한창 외도를 하며 아씨를 냉대하는 장면들이 속출되고 있을 무렵 부인들이 떼를 지어 방송국으로 몰려와 남편을 작품에서 죽여주든가 개심시켜달라고 사뭇 협박조의 간청을 하던 일도 있었다."

1970년 3월 2일부터 다음 해 1월 9일까지 253회 방영된 TBC의 일일연속극 <아씨>에 관한 이야기다. 또 <아씨>에 이어 KBS가 1972년 4월 2일부터 211회 방영한 <여로>의 인기는 어떠했던가? 드라마가 시작되는 매일 밤 7시 30분만 되면 영화관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다 말고 휴게실로 몰려가서 텔레비전을 보고 돌아오는 바람에 아예 20분간 영화 상영을 중단했으며, 이 시간에 도둑맞는 집과 밥 태우는 집이 많았다.

<아씨>는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문단속을 잘하여 도둑을 조심하고 수도꼭지가 잠겼는지 확인하라는 이색 스포트를 내보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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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의 인기에 대해 방송인 정순일은 "특히 고생 끝에 부산까지 내려오는 데 성공한 태현실이 장욱제를 만날 날이 점점 가까워 오자, '오늘 만난다', '아니 내일이다' 하는 논쟁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고,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에 장관들이 한담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자주 화제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였다"며 "작가가 시청자의 애간장을 태울 만큼 태우다 드디어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 날 저녁 필자는 고려대 경영대학원 강의실에 있었는데 7시가 좀 지나면서 수강생이 한둘씩 휴게실로 빠져나가더니 방송 시간이 다 되어서는 그만 강의실이 거의 텅 비어버리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MBC는 <여로>에 대항해 일일극 <새엄마>를 편성했는데, <새엄마>는 1972년 8월 30일부터 다음 해 12월 28일까지 방영돼 "우리나라 일일극 사상 최장수를 기록"했으며, "이른바 '김수현 드라마' 시대를 알리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여로>와 <새엄마>의 인기는 1973~74 시즌에 일일극 홍수 사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일일극을 낳게 했다. KBS, TBC, MBC 세 채널을 합해 하루 15편 안팎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방영되는 기현상을 빚기까지 했다. 두 민영방송은 편성에서도 '5분 앞당겨 편성하기'나 드라마와 드라마 사이에 5분짜리 미니 프로를 편성하는 등 5분 단위의 경쟁 양상까지 보였다.

그로부터 30여 년 후 국민 드라마라는 말이 생겨났다. 한국 사회 특유의 쏠림 현상이 텔레비전 드라마 시청에도 나타나 이른바 대박을 터뜨리는 드라마를 말한다. 2005년 신윤동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국민 드라마는 무섭다. 드라마 안 보면 국민이 못 되는 나라는 무섭다. 절반이 넘는 국민이 같은 시간에 같은 드라마를 보는 나라, 흔치 않다. 시청률 50퍼센트는 넘기는 국민 드라마라니, 다른 나라에서 알면 웃는다. 우스워서 웃고, 무서워서 웃는다."

국민 드라마가 퇴조한 건 인터넷 등과 같은 다른 매체의 발달 때문이지만, 아직 꿈은 살아 있었다. 2006년 『조선일보』는 방송 작가들이 말하는 대박 드라마 성공 공식을 소개했다. 이 공식은 한국 드라마의 전반적인 흐름을 잘 짚어준다. 중복되는 내용도 있지만, 작가들이 말하는 성공 공식 10개를 감상해보자.

① 출생의 비밀, 콩쥐팥쥐 구도, 그리고 암. 이 세 가지가 요즘 드라마의 큰 축이다. 개인적으로는 폭넓은 감동을 주는 스토리 라인이 우선! - <노란 손수건>의 박정란

② 시청자들은 신데렐라 얘기를 보며 '식상하다' 불평하지만, 그러면서도 신데렐라 구도를 제일 좋아한다. - <올인>의 최완규

③ 한 인간보다 가족과 휴머니즘에 집중해야 반응이 온다. 노련한 작가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눈물짓게 만든다. - <제5공화국>의 유정수

④ 신분 상승을 다룬 성공 스토리, 혹은 가족·도덕관념을 뒤엎는 드라마! …… 급격한 변화를 겪는 시청자들은 드라마에서도 강렬한 자극을 찾는다. - <신돈>의 정하연

⑤ 대중은 판타지, 권선징악, 해피엔딩을 원한다. 지나치게 구체적인 리얼리티는 싫어한다. 숨기고 싶은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것을 싫어하니까. - <금쪽 같은 내 새끼>의 서영명

⑥ 감정의 진정성? 삼각관계·콩쥐팥쥐·캔디 공식은 1990년대 후반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선과 악의 구분도 모호해졌다. '공감'이 관건. - <이 죽일 놈의 사랑>의 이경희

⑦ 한국 사람은 유난히 성공 스토리를 좋아한다. <대장금>에서도 위기나 갈등보다 명쾌하게 성공을 거두는 장면에서 반응이 더 뜨겁더라. - <대장금>의 김영현

⑧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잘 되는 이야기. 시청자들은 '근사하게 사는 부자의 이야기'를 싫어하는 척하면서도 열심히 본다. - <그 여자네 집>의 김정수

⑨ 권선징악·삼각관계·출생의 비밀. 이 세 가지 키워드는 이미 시청자의 정서에 '프로그래밍'되지 않았나? 중요한 건 시대에 맞는 캐릭터. - <변호사들>의 정성주

⑩ 어둡고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 안 통한다. 요즘 주인공은 경쾌하고 실수투성이다. '95퍼센트의 상투常套'와 '5퍼센트의 신선함'이 만나야 대박 시청률이 나온다. - <파리의 연인>의 김은숙

쌓여 있는 드라마 대본. 성공 스토리, 권선징악, 출생의 비밀등 대박 드라마의 성공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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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드라마든 아니든 대한민국이 '드라마 공화국'인 것은 분명하다. 2009년 1월 지상파 3사는 주당 5,520분, 하루 약 13시간씩 드라마를 방송함으로써 한국이 드라마 공화국임을 입증해보였다.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홍성일은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 공화국의 은유. 만일 이 은유가 진부하다면 이는 전적으로 공화국이라는 용어의 적절치 않음 때문이다. 공화국은 최소한의 민주적 선거 절차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한국의 방송은 드라마 독재, 드라마크라시(dramacracy)다."

김환표는 2012년에 출간한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에서 "한국인의 드라마 사랑을 키운 건 팔 할이 수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암울한 근현대사였다"며 이렇게 말한다. "그런 험난한 세월은 끝났는가? 아니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 한국인의 드라마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몰입은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요구하는 한국인의 고강도 스트레스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공화국'은 '스트레스 공화국'의 다른 얼굴이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할 때 '드라마틱하다'는 말을 즐겨 쓰는데, 이 말에 드라마 공화국의 답이 있다. 김환표가 잘 지적한 대로, 한국은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바로 그 파란만장의 동의어가 드라마인 셈이다. 한국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압축 성장(condensed economic growth)을 이룩한 나라다. 김진경은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100년 동안에 서구의 근대 300년의 변화를 압축해 따라갔다면 한국은 1960년대 이래 30년 동안에 서구의 300년을 압축해 따라갔습니다. 이러한 속도 속에서, 이러한 광기 어린 변화 속에서─좀 과장해 말한다면─우리는 30년의 생물학적 시간에 300년의 서사적 시간을 살아버린 것입니다. 무서운 속도의 서구 흉내 내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았고 필요한 일로도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잘 살아보세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내달려온 반세기의 역사 동안 한국인을 사로잡은 삶의 문법은 놀랍게도 앞서 드라마 작가들이 지적한 대박 드라마 성공 공식과 같다. 성공에 대한 열망과 판타지, 고통과 시련의 눈물, 가족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근거라 할 혈통주의, 그러면서 착하게 산 자신을 위로하는 권선징악의 메시지, 이것들을 담아내 매일 제공하는 게 바로 텔레비전 드라마다. 어찌 그런 드라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가끔 드라마 공화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부침은 있을망정 드라마 공화국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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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한국방송공사, 『한국방송사』(한국방송공사, 1977), 823~825쪽, 582쪽
  • ・ 정순일, 『한국방송의 어제와 오늘: 체험적 방송 현대사』(나남, 1991), 196~197쪽.
  • ・ 최창봉·강현두, 『우리 방송 100년』(현암사, 2001), 222쪽.
  • ・ 조항제, 「1970년대 한국 텔레비전의 구조적 성격에 관한 연구: 국가정책과 텔레비전 자본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신문학과 박사 학위 논문, 1994년 2월, 183쪽.
  • ・ 신윤동욱, 「시사넌센스: 시청률도 '뿜빠이' 하자」, 『한겨레 21』, 2005년 12월 13일, 10면.
  • ・ 「'대박 드라마' 성공 공식 있다」, 『조선일보』, 2006년 1월 21일, A4면.
  • ・ 「'과연 드라마공화국' … 드라마 편성 하루 13시간」, 『연합뉴스』, 2009년 1월 21일.
  • ・ 홍성일, 「드라마 비평에 쏠린 PD저널」, 『PD저널』, 2007년 10월 22일.
  • ・ 김환표,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인물과사상사, 2012), 407, 410쪽.
  • ・ 김진경, 『삼십년에 삼백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당대, 1996), 82~83쪽; 정영태, 「개발연대 지식인의 역할과 반성」, 장회익·임현진 외, 『한국의 지성 100년』(민음사, 2001), 175~176쪽에서 재인용.

강준만 집필자 소개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사회에 의미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 대표 저서로는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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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겉과 속
대중문화의 겉과 속 | 저자강준만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국인을 위한 최고의 대중문화 입문서로 최신 대중문화 현상의 전반적인 작동 방식을 분석한다. 케이팝부터 웹툰까지 대중문화에 관한 모든 것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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