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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
사람을 지루하게 만드는 건 죄악인가
사람을 지루하게 만드는 건 죄악이다. 그런 좌우명에 따라 엔터테인먼트가 모든 걸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엔터테인먼트라는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오락'이 되겠지만, 오락보다는 넓은 개념이다.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의 어원이 "특정한 틀로 붙들어두다"라는 뜻의 12세기 프랑스어 앙트르트니르(entretenir)라는 사실이 시사하듯이, 엔터테인먼트는 우리의 일상적 삶의 구도와 풍경 자체를 바꾸는 틀로 군림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는 관련 업계에선 아예 '엔터'라고 줄여서 말할 정도이며 '한국엔터테인먼트학회'가 생겨났을 정도로 이미 외래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선 엔터테인먼트라는 단어를 쓰도록 하겠다. 한국엔터테인먼트학회 외에도 여러 학술단체들이 엔터테인먼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엔터테인먼트법학회,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 한국스포츠엔터테인먼트법학회, 디지털엔터테인먼트학회 등이 있으며, 2003년 한양대에는 '엔터테인먼트 최고과정'마저 생겼다. 엔터테인먼트라는 단어는 수많은 합성어를 만들어내는 것도 그만큼 엔터테인먼트의 가치가 치솟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엔터테인먼트가 정보와 결합한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 디지털과 결합한 디지테인먼트(digitainment), 다큐멘터리와 결합한 다큐테인먼트(docutainment), 아나운서와 결합한 아나테인먼트(annatainment), 스포츠와 결합한 스포테인먼트(sportainment), 예술과 결합한 아트테인먼트(art-tainment), 광고와 결합한 애드테인먼트(adtainment), 판촉과 결합한 프로모테인먼트(promotainment), 마켓과 결합한 마켓테인먼트(marketainment), 쇼핑과 결합한 쇼퍼테인먼트(shoppertainment), 유통과 결합한 리테일먼트(retailment), 식사와 결합한 이터테인먼트(eatertainment), 자원봉사와 결합한 볼런테인먼트(voluntainment), 교육과 결합한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 의학과 결합한 메디테인먼트(meditainment), 일과 결합한 워크테인먼트(worktainment), 정치와 결합한 폴리테인먼트(politainment) 등등.
환자의 치료를 게임 형태로 구현하는, 즉 치료와 엔터테인먼트가 결합된 테라테인먼트(theratainment)도 나타났다. 팝송 스타일의 새로운 성가를 따라 부르기 좋게 하려고 대형 스크린 텔레비전을 설치하는가 하면 예배에 록 밴드와 댄서들까지 동원하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자 처치테인먼트(churchtainment)라는 말도 등장했다. 심지어 티티테인먼트(tittytainment)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가 만든 말로 세계화로 인해 '20 대 80'(부유층 20퍼센트, 빈곤층 80퍼센트)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선 티티테인먼트가 판치게 될 것이란다. 이는 엔터테인먼트와 엄마 젖을 뜻하는 속어인 titty를 합한 말인데,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을거리를 절묘하게 결합해서 제공함으로써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이미 1990년대 중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매년 4,800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렸는데, 이는 공사립 초중등학교 교육비로 지출되는 금액보다 많은 액수였다.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인 마이클 울프(Michael J. Wolf)는 1999년에 쓴 『엔터테인먼트 경제(The Entertainment Economy)』에서 현대의 경제활동은 모든 분야에서 오락(엔터테인먼트)의 요소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울프는 이것을 이팩터(E-Factor)라고 명명하고 유통, 음식, 패션, 항공, 호텔, 금융 등 업종의 경계를 뛰어넘는 경제의 오락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실제 비즈니스와 엔터테인먼트 사이의 경계는 이미 사라졌다"고까지 단언했다.
그렇다면 왜 이 같은 엔터테인먼트의 팽창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기술 발전으로 노동생산성이 높아지고 여가 시간이 늘어난 데다 세계화로 인해 국경의 장벽이 약화되고, 경제구조의 축이 제조업에서 서비스 산업으로 옮겨가고 있는 가운데 콘텐츠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엔터테인먼트의 핵심은 콘텐츠이고, 콘텐츠의 특징은 그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 아닌가. 그래서 멀티미디어 산업은 통신, 컴퓨터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수렴으로 형성되고 있다. 또 인터넷에서는 비즈니스와 엔터테인먼트가 최종적으로 하나로 수렴되고 있다.
사실 굳이 엔터테인먼트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이 엔터테인먼트화되었다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2008년 6월초 스웨덴 남부에 있는 도시 예테보리에서 열린 세계신문협회 총회와 세계편집인포럼에서 스웨덴의 안나 세르너와 카타리나 그라프만은 스웨덴 젊은이들의 미디어 이용 실태를 조사한 뒤 "요즘 젊은이들은 엔터테인먼트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의 생활 자체가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아니 이 세상 자체가 곧 엔터테인먼트는 아닐까? 뉴욕의 금융투자가 펠릭스 로하틴(Felix Rohatyn)은 그렇게 믿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크라이슬러 자동차는 쇼 비즈니스다. 스포츠도 쇼 비즈니스고, 헨리 키신저도 쇼 비즈니스다. 이것이 시장의 현실이다. 언젠가 내가 말했듯이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쇼 비즈니스로 바뀌어가고 있다."
로하틴의 주장이 과장스러운 건 분명하지만,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니다. 엔터테인먼트의 위력에 대한 증언은 무수히 많다. 역사학자 닐 게이블러(Neal Gabler)는 "20세기 말, 미국을 이끌어가는 사업은 더 이상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엔터테인먼트다"라고 말한다. 경영 컨설턴트 톰 피터스(Tom Paters)도 "모든 사람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말해도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젠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투표마저 엔터테인먼트의 유혹 대상이 되고 있다. 낮은 투표율을 올리기 위해 쇼핑몰처럼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많은 장소에 투표소를 설치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게 그걸 잘 말해준다. 생각해보자. 투표 안 하면 민주시민의 자격이 없다고 욕하는 것과 투표하기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 가운데 어떤 게 더 효과적일까? 이런 발상을 공공적 목적에 적용하는 걸 가리켜 '공익 마케팅'이라고 한다. 공익 마케팅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요소의 도입은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바탕에 깔고 있는 소비문화가 공공 영역마저 점령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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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사람을 지루하게 만드는 건 죄악인가 – 대중문화의 겉과 속,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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