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대중문화의
겉과 속

대중은 리얼리티 쇼에 열광하나

리얼리티 쇼는 원래 보통 사람을 출연시켜 그들의 사생활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치를 통해 시청자의 엿보기 심리를 충족시키는 형식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선 무엇보다도 제작비가 싸게 먹힌다는 장점이 있다. 2000년대 들어 전 세계가 리얼리티 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건 좋은데 출연자들이 자살하는 등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스티븐 존슨(Steven Johnson)은 "리얼리티 쇼의 전율은 '정말로 일어나고 있구나'라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포르노가 거대 사업으로 성장하기 전, 실제 성행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떨림처럼 말이다"라면서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감정들이 밀려와 얼굴에 드러나는 단 0.5초의 시간일지라도 지금 TV에 나오는 사람의 표정은 연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시청자를 열광케 하는 이유라고 했다.

리얼리티 쇼의 원조는 네덜란드에서 1999년 가을에 방영된 <빅 브러더>다. 이 프로그램은 9명의 사람들이 100일 동안 한 집에 사는 모습을 24대의 카메라로 촬영해 시시콜콜 방영한 것이었는데, 일주일에 여섯 번씩 모두 114회에 걸쳐 방영되면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미국에서 대박을 터뜨린 리얼리티 쇼는 2000년 2월에 방영된 폭스TV의 <누가 백만장자와 결혼하고 싶어하는가>였다. 백만장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성들을 공개 모집해 한 시간 만에 결혼을 성사시키는 내용이었다. 상대인 백만장자는 방송 전까지 신원이 공개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지만 백만장자니까 무조건 결혼하겠다는 여자들의 신청이 줄을 이었다. 폭스TV는 그 가운데 50명을 후보로 선정했다. 여성단체 등에서 '여성을 비하하고 결혼 제도를 모욕한다'고 비난을 퍼부었지만 이 프로그램은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2000년 8월 CBS의 <서바이버>는 한 무인도에서 16명의 사람이 생존 투쟁을 벌이는 게임으로 최종 승자는 100만 달러를 차지하는 형식이었다. 혹독한 악조건과의 싸움은 물론 인간들 간의 배신, 음모, 질투, 권모술수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걸 몰래 엿보는 재미 덕분에 이 프로그램은 5,100만 명의 시청자를 끌어 모아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외국의 한 리얼리티 쇼를 방영하는 방송국 조정실 모습. 여러 대의 카메라가 비추는 화면에는 리얼리티 쇼에 참가한 사람들의 사생활이 보인다. 시청자들은 출연자의 사생활을 보며 엿보기 심리를 충족한다.

ⓒ 인물과사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국내 방송도 외국 리얼리티 쇼를 수입 방영하는 한편 자체 제작해 방영함으로써 리얼리티 쇼 붐을 일으켰다. 이와 관련,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황상민은 "사람들이 진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정치나 사회, 관습 등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자체다. 즉, 타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특정 상황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한 것이다. 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고, 내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과거엔 우리 속 동물들을 보며 내 모습을 발견했다면, 지금은 리얼 프로 속의 '인간 동물'을 구경하면서 내 모습을 발견한다. 또 낯선 이성에 대한 유혹이나 극단적인 상황에서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출연자들을 보면서 평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숨겨진 욕망을 대리만족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양성희는 "리얼리티 쇼 전반에 깔려 있는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 구조"에 주목하면서 "리얼리티 쇼의 주류는 매회 탈락자를 정하며,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경쟁을 노골화하지 않더라도 깔려 있는 전제는 같다. 경쟁은 지고의 선이며, 그보다 더한 선은 승리라는 것이다. 언뜻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의 패러다임을 닮았다. 하필 리얼리티 쇼가 글로벌 TV 장르로 우뚝 선 시점이 신자유주의 팽창기와 겹쳐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고 분석했다.

한국에서 리얼리티 쇼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연예인까지 가세해 예능 프로그램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그래서 리얼리티 예능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무릎팍도사>와 <라디오스타>가 대표적인 예다. 시청자들이 리얼리티 예능 프로들에 열광하는 이유와 관련, 손병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기존 토크쇼에서의 의례적 대화, 즉 가식성을 걷어내고 있다. <무릎팍도사>는 기존 연예 토크쇼와 달리 스타가 하고 싶어 하는 말 중심이 아니라, 시청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끌어내는 데 주력한다. <라디오스타>는 한 걸음 더 나간다. 대본으로 준비한 질문은 하는 둥 마는 둥 건성인 반면, 진행자들 사이에 티격태격하는 쪽에서 재미를 주고자 한다. 이는 비유적으로 말해 본문보다 행간이, 질서정연한 대화보다 무질서한 발언의 엉킴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함을 뜻한다. 가식성보다 진솔함을 택한 것이고, 더 나가 별 의미 없는 낄낄거림을 택한 것이다."

리얼리티 쇼의 붐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곤 하지만, 한국은 모든 오락 프로그램이 사실상 리얼리티 쇼 코드를 취하고 있다. 다매체·다채널 상황의 영향이 결정적 이유다. 케이블방송이 막무가내식 저돌성으로 기존 성역과 금기를 깨부수고, 여기에 인터넷이 2차 타격을 가하면서, 지상파방송은 상대적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혁명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근엄하기만 했던 아나운서의 '망가지기 경쟁'이 프로 근성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게 그런 혁명의 상징적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과거 방송의 성역과 금기로 여겨지던 것들을 하나씩 깨나가는 데 가장 유리한 연예인은 개그맨이다. 그래서 바야흐로 개그맨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 아니 '전 연예인의 개그맨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게 옳겠다.

최근의 토크쇼는 사실상 리얼리티 쇼다. 과거의 토크쇼는 품위·진지 코드로 일관해 리얼리티와 거리가 멀었지만, 요즘 토크쇼는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정도를 넘어서 스튜디오를 아예 퇴근길 포장마차로 옮겨놓은 느낌이다. '과장 리얼리티'라고나 할까? '포장마차 리얼리티'의 대가라 할 김구라가 뜬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거 그 어떤 연예인이 방송 일을 "먹고살자고 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으며, 자기 자식에 대해 "착한 것보다 공부 잘했으면 더 좋겠다"고 털어놓을 수 있었겠는가?

독설을 무기로 삼은 토크쇼의 간판은 단연 <라디오스타>다. MBC 예능 PD 권석의 표현이 재미있다. 그는 "MC인 김구라, 윤종신, 유세윤은 각자 욕쟁이, 깐족, 건방짐을 캐릭터로 삼는 독설의 달인들이다"며 이렇게 말한다. "녹화 때 보면 이들은 마치 굶주린 하이에나 같다. 그들에게 초대 손님은 살점이 두툼하게 붙어 있는 고깃덩이로 보인다. 큐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한꺼번에 달려들어 먹잇감을 물어뜯는다. 가여워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게스트 역시 욕먹는 것을 즐기러 나온 게 아닌가."

독설을 무기로 삼아 인기를 끌고 있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

ⓒ MBC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김헌식은 일부 연예인들의 직설과 독설은 "인기를 끌기 위해 인위적으로 말과 행동을 꾸미는 연예인들에게서 염증을 느낀 군중심리에 어필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막말도 결국 연출에 불과하다. 욕쟁이 할머니도 너무 자주 등장하면 생명력을 잃고 만다. 욕쟁이 할머니를 비즈니스화하는 순간 순수성을 잃은 것이다. 단골 식당에서 학생이 '할머니, 저 지갑을 안 갖고 왔는데요. 내일 드릴게요'라고 하자 할머니가 '왜 그러십니까, 손님'이라고 말을 바꾸었다는 우스개는 이러한 현실을 꼬집는 게 아닐까?"

리얼리티를 앞세운 직설과 독설은 힙합에서 노래로 상대방을 비방하는 행위를 뜻하는 디스(diss)와 맞물리면서 청소년 문화로까지 번져나갔다. 다른 사람을 폄하하거나 비꼬아 공격하는 행위를 일컬어 '디스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디스가 청소년 문화의 한 풍경이 되었다.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의 준말인 '솔까말'이 유행하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박권일은 솔까말이란 말을 쓸 때는 "한껏 냉소적인 표정을 짓는 게 포인트다"라며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

"서점에 넘쳐나는 '실용처세서'를 보라. 온통 '솔까말'이다. '가난한 아빠라니, 솔직히 쪽팔리지 않아? 부자 아빠가 되라고!', '30대에 모은 돈이 고작 5,000만 원? 까놓고 말해 당신 루저야!' 이 모든 솔까말 뒤에 생략된 말은 '돈밖에 없지, 안 그래?'다. …… 끔찍하다. '한국판 자본주의 정신'의 저 투명한 솔직함이."

물론 방송도 솔까말의 무풍지대는 아니다. 아니 어쩌면 방송이 솔까말을 선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가장 두드러진 경향이 바로 솔까말이 아닌가. 리얼리티 쇼에서 버라이어티 쇼에 이르기까지 주요 오락 프로그램의 과감한 '자기노출', '까발리기', '독설', '멱살잡이'는 최고조에 이른 느낌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나라한 속물근성이 경쟁적으로 발휘되는 방송 현실에 대해 개탄해야 할 것인가? 개탄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시청자 입장에서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솔까말, 재미있다. 왜 재미있을까? 앞서 소개한 스티븐 존슨의 주장은 우리의 경우에도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다. 실은 고도의 연기일지라도 시청자들이 보기엔 '연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시청자를 즐겁게 만든다.

그래서 앞으로 방송은 '위선의 제도화'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쪽으로 나아갈까? 우리는 진실을 빙자한 무례를 계속 즐기면서 견뎌내야만 하는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위선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예의와 배려의 본질은 위선일 수 있다. 예의와 배려조차 없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으론 살아갈 수 없다. 방송은 곧 다시 지속가능한 위선 체제로 복귀했다가 다시 배격하는 왕복운동을 반복할 것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 홍석경, 「텔레비전 장치와 재연의 재현 양식」, 황인성 편저, 『텔레비전 문화연구』(한나래, 1999), 201쪽.
  • ・ 고성호, 「사람 잡은 '리얼리티 쇼'」, 『한국일보』, 2005년 5월 25일, 15면.
  • ・ 스티븐 존슨, 윤명지·김영삼 옮김, 『바보상자의 역습』(비즈앤비즈, 2006), 98쪽.
  • ・ 신중돈·이현상, 「미 폭스TV 부도덕 상술 도마에 올라」, 『중앙일보』, 2000년 2월 23일, 9면.
  • ・ 변창섭, 「미국 안방 강타한 '너 죽고 나 살기': CBS 프로그램 <서바이버> 올 여름 최고 시청률 기록」, 『시사저널』, 2000년 9월 14일, 80~81쪽.
  • ・ 이지은, 「"어, 내 이야기 내 마음과 똑같아": 케이블TV 리얼 프로그램 인기 상한가 … 타인 훔쳐보기 통해 숨겨진 욕망 대리만족」, 『주간동아』, 2005년 12월 27일, 45면.
  • ・ 양성희, 「리얼리티 쇼」, 『중앙일보』, 2006년 11월 25일, 35면.
  • ・ 손병우, 「의미와 형식으로부터의 떠남, 리얼리티 연예오락」, 『연세대학원신문』, 제164호(2008년 10월), 8면.
  • ・ 권석, 『아이디어는 엉덩이에서 나온다: 잘 마른 멸치 권석 PD의 방송일기 세상 읽기』(새녘, 2012), 170쪽.
  • ・ 김헌식, 『의외의 선택, 뜻밖의 심리학』(위즈덤하우스, 2010), 33쪽.
  • ・ 김난도 외, 『트렌드코리아 2013』(미래의창, 2012), 58~60쪽.
  • ・ 박권일, 「끔찍하다, 그 솔직함」, 『시사IN』, 제45호(2008년 7월 26일), 89면.

강준만 집필자 소개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사회에 의미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 대표 저서로는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펼쳐보기

출처

대중문화의 겉과 속
대중문화의 겉과 속 | 저자강준만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국인을 위한 최고의 대중문화 입문서로 최신 대중문화 현상의 전반적인 작동 방식을 분석한다. 케이팝부터 웹툰까지 대중문화에 관한 모든 것을 담았다.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왜 대중은 리얼리티 쇼에 열광하나대중문화의 겉과 속,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