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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
왜 우리는 쇼핑몰에 열광하는가
미국에서 1950년대 중반은 "절약은 반(反)미국적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풍요가 만끽되고 소비가 권장되던 시절이었다. 이때 쇼핑몰(shopping mall)이 탄생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몰은 원래 품위 있는 산책에 좋은 장소라는 뜻이다. 이걸 쇼핑과 연결시킨 사람은 건축가 빅토르 그루엔(Victor Gruen, 1903~1980)이다.
그루엔은 1956년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교외의 에디나(Edina)에 사우스데일 몰(Southdale Mall)을 개장했다. 사우스데일 몰은 계절에 관계없이 실내 온도를 일정하게 조절함으로써 밀폐된 공간 안에 마법의 세계를 방불케 하는 환상적 환경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소비자들은 이곳에서 바깥 세계의 소음, 산만함, 사고, 긴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이후 미국의 거의 모든 쇼핑몰이 이걸 모방함으로써 사우스데일 몰은 쇼핑몰의 원형이 되었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자동차를 만드는 일보다 파는 일이 더 어렵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인간 자체가 인간에게 과학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했는데, 쇼핑몰은 그런 과학이 활용되는 집결지였다. 1973년 노스웨스턴대의 마케팅 교수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는 분위기학(atmospherics)이라는 새로운 과학의 도래를 알리는 일련의 글을 발표했다. 코틀러는 "분위기는 모든 구매 상황에 언제나 존재하는 요소"라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극히 최근까지 분위기는 우연히 또는 유기적으로 발달했다. 그러나 분위기학에서는 구매자의 구매 성향을 부추길 수 있는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계획한다. 다른 마케팅 수단이 극심한 시장 경쟁에서 점차 무력화하고 있음에 따라 분위기학은 차별적인 우위를 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기업들에 있어 점점 더 그 역할이 증대할 것이다."
때마침 1970년대에는 행동 심리학이 크게 유행했다. 행동 심리학의 연구 성과는 마케팅에 곧바로 도입됐다. 1970~1980년대 동안 10여 개가 넘는 호텔 및 카지노 경영 관련 학술 잡지에서 카지노 운영을 위한 원칙들이 발표됐다.
카지노 설계 시 창문은 만들지 말라. 빛이나 소리가 외부에서 들어올 수 없는, 철저히 밀폐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카지노에 흐르는 공기는 항상 일정한 온도와 산소 농도를 유지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변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고객이 집에 갈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시간 감각을 무디게 만들기 위해 시계도 없어야 한다. 실내 장식은 가능한 한 빨간색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 열광과 자극을 위해서다. 고객이 일상의 소심함에서 벗어나 화끈해지게끔 만들어야 한다. 웨이트리스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술은 공짜로 제공하라. 고객을 헷갈리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손님이 고독감을 느끼게끔 하라. 자리를 뜨지 말고 계속 도박에 몰두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카지노의 이와 같은 마케팅 원리는 쇼핑몰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연구자들은 쇼핑몰 바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간파했다. 내부 바닥재는 카펫이나 부드러운 비닐 재질을 쓰지만 통로엔 대리석이나 딱딱한 나무를 사용했다. 고객이 발에 불편을 느껴야 상점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또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을 까는 것은 빛을 반사시키고 생동감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
쇼핑몰은 카지노와는 달리 고객이 어느 정도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는 편이 오히려 '쇼핑 오래 하기'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그래서 복잡한 조명 장치와 에어컨 시스템을 가동해 시간대별로 자극에 변화를 주는 방법이 도입됐다. 실내 온도는 정오경에 최고가 되도록 했고, 조명도 오전에는 밝은 색조의 형광등 불빛을 쓰다가 저녁 때에는 백열등에서 내뿜는 따뜻한 색조로 바꾼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배경음악도 중요했다. 패스트푸드점에선 박자가 빠른 음악을 들려줄 때 고객들의 음식을 씹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화려한 옷은 생음악으로 연주되는 시끄러운 음악을 들려주면 잘 팔리며 액세서리도 마찬가지라는 것도 밝혀졌다. 그 이유는 고객들이 물건의 질을 잘 살펴보려고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매장 음악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뮤잭(Muzak corporation) 같은 회사들이 생겨났다. 이제는 대형 비디오 스크린과 함께 음악을 들려준다. 분위기학의 일환으로 향기학(aromacology)도 가세했다. 냄새가 판매에 영향을 미친다는 오랜 상식이 하나둘씩 과학화되기 시작했다. 과자는 냄새를 잘 풍겨야 매출이 늘어난다. 계피 냄새를 맡으면 사람이 너그러워진다. 빅토리아시크릿이라는 여성용품 전문 매장은 고객의 여성적 느낌을 부추기기 위해 포푸리 향을 사용한다. 어느 카지노는 냄새가 나는 화학물질을 의도적으로 방출해 슬롯머신 이용률을 45퍼센트나 증가시켰다.
"우리는 여러분이 길을 잃기 바랍니다." 1992년 미니애폴리스 근교에 개장한 세계 최대 규모의 쇼핑몰 '몰 오브 아메리카(Mall of America)'를 설계한 디자이너가 개막식장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오늘날 모든 대형 쇼핑몰의 불문율이 되었다. 모든 설계와 환경 조성은 고객들이 길을 잃게끔 해야만 한다. 아니 정신까지 잃게 만들어야 한다. 바로 여기서 그루엔 전이(Gruen transfer)라는 병이 생겨났다. 그루엔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 병은 분명 살 물건을 정하고 쇼핑을 나갔던 사람이라도 물건을 보고 돌아다니는 동안 계획에도 없던 것들을 충동적으로 사고 돈을 낭비해버리는 현상을 가리킨다. 사회학자들은 현대식 쇼핑몰이 생기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고 그와 같은 이름을 붙였다.
소비자는 늘 관찰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미국의 성공적인 소매 기업 어번 아웃피터스는 시장 조사를 하지 않는다. 그건 낡은 방식으로 실효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가게 내에서 고객이 보이는 태도와 행동을 비디오테이프나 스냅 사진으로 촬영해서 그것을 토대로 고객의 특성을 분석한다. 고객의 마음을 끄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을 얻기 위해서다. 이 기업의 철칙은 이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고 사람들의 행동을 믿는다. 당신의 고객이 말하는 것을 무시하시오. 단지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하시오."
소비자는 변덕스러운 동물이다. 소비자가 쇼핑몰의 단조로움과 인공적인 조형에 싫증을 내자 쇼핑몰은 문화라는 테마의 옷을 입고 각종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쇼핑몰에 테마가 있는 각종 행사, 놀이기구, 아이맥스 영화관 그리고 공연이 등장했다. 그건 쇼핑을 정기적인 가족 나들이로 승격시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10대들은 쇼핑몰을 사적인 만남의 공간이자 유행을 퍼트리고 소비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미국 청소년이 집과 학교 다음으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곳이 바로 쇼핑몰이라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사실상 쇼핑몰 전성시대를 연 것은 2009년 서울 영등포에 오픈한 경방 타임스퀘어다. 37만 제곱미터 면적에 호텔·오피스텔·영화관·명품 숍·서점 등을 망라한 타임스퀘어는 주말에 평균 30만 명 이상이 몰리면서 개점 후 6개월 만에 5,200억 원대 매출을 올렸다. 2011년부터는 서울 신도림 디큐브시티, 경기 김포 롯데몰, 2012년 8월엔 서울 여의도 IFC몰 등이 생겼고,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완공을 앞둔 전국의 쇼핑몰만 12개에 이른다. 한국에선 규모를 강조하기 위해 흔히 '복합쇼핑몰'이라고 부른다.
쇼핑몰은 몰링(malling)족 또는 몰워커(mall walker)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쇼핑몰에서 쇼핑·놀이·공연을 한꺼번에 즐기는 새로운 소비계층을 이르는 말이다. 소비자들이 쇼핑을 단순히 물건을 구입하는 행위가 아니라 문화 활동과 결합한 일종의 놀이로 즐기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한다. 용산 아이파크몰은 야외 공간에 이벤트 파크와 풋살 경기장을 만들었으며, 김포공항 인근에 위치한 롯데몰은 전체 부지 면적의 60퍼센트가 넘는 12만 9,000제곱미터를 정원과 산책로, 잔디광장, 수변 공간 등 여섯 개 테마를 가진 공원으로 꾸몄다. 부산의 신세계 센텀시티는 백화점을 비롯해 아이스링크, 골프연습장, 스파랜드까지 각종 문화·레저 시설을 총망라했다.
쇼핑몰은 마켓과 결합한 마켓테인먼트(marketainment), 쇼핑과 결합한 쇼퍼테인먼트(shoppertainment), 유통과 결합한 리테일먼트(retailment)의 진수를 보여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쇼핑몰에서 마음껏 즐기되, 소비자는 늘 관찰과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과 쇼핑의 주체는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쇼핑의 즐거움을 감히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쇼핑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자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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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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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비트 보스하르트, 박종대 옮김, 『소비의 미래: 21세기 시장 트렌드』(생각의나무, 2001), 405쪽.
- ・ Paco Underhill, 『Call of the Mall』(New York: Simon & Schuster, 2004), pp. 85~89; 제러미 리프킨, 이희재 옮김, 『소유의 종말』(민음사, 2001), 228쪽; 마이클 J. 실버스타인·닐 피스크, 보스턴컨설팅그룹 옮김, 『트레이딩 업: 소비의 새물결』(세종서적, 2005), 62~63쪽; 존 피스크, 박만준 옮김, 『대중문화의 이해』(경문사, 1989/2002), 55쪽.
- ・ 오윤희, 「몰링하러 몰린다」, 『조선일보』, 2012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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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왜 우리는 쇼핑몰에 열광하는가 – 대중문화의 겉과 속,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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