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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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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7년 |
중국의 청나라 말기부터 현대까지 활동했던 화가로, 우리나라에서는 제백석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중국 미술가협회 주석을 역임했고, 중국 예술가중 최초로 인민 예술가라는 호칭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남과도〉, 〈하엽도〉, 〈화훼화〉 등이 있다.
중국 남동부 후난 성의 샹탄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치황(齊璜)이지만 태어난 곳의 지명(바이시장(白石莊))을 따라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병 때문에 학교를 1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중퇴한 뒤 목동이 되었다. 도장 파는 일과 목수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서른이 넘어서 글과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1917년 고향을 떠나 베이징으로 건너왔고 여기에서 혁신적인 그림으로 이름을 떨치던 첸스청을 만났다. 첸스청은 치바이스보다 열세 살 어렸지만 치바이스의 그림에 스스럼없이 평을 해 주며 발전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다. 이후 10년간 두문불출하면서 그림에 매진했다. 실력은 출중했으나 곤충이나 물고기, 동물 등을 소재로 한 그의 그림은 주류 화가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어쩌다 팔리는 그림 역시 보통 화가들이 받는 그림 값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다.
1928년 유럽 유학을 마치고 베이징에 온 쉬베이훙은 우연히 치바이스의 그림을 보고 ‘소재가 다양하고 자연의 섭리를 한눈에 표현한 그림’이라며 가는 곳마다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듬해 베이핑 예술 학원 원장에 취임한 쉬베이훙은 보수적인 화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치바이스를 교수로 초빙했다. 치바이스는 자신이 고령인데다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교수가 될 수 없다며 여러 차례 거절했지만, 쉬베이훙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교수직을 수락했다. 예순다섯 살에야 비로소 주류 화단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보수적인 중국 화단은 치바이스를 내보내라며 쉬베이훙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쉬베이훙은 자신이 사퇴하는 조건으로 치바이스의 자리를 지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화집 출간과 파리 전시회 출품을 주선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치바이스는 이때부터 세간의 인정을 받으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1949년 중앙미술학원 명예교수로 초빙되었고, 1953년 중국 미술가협회 주석에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문화부로부터 중국 예술가로서 최고 영예인 ‘인민 예술가’ 칭호도 얻었다.
그는 동물, 풍경, 인물부터 장난감, 채소까지 일상의 모든 소재를 진한 먹, 밝은 색조, 대담한 필치로 그렸다. 말년에는 쥐, 새우, 새 등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새우 그림을 생동감 있게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 중국 산수화의 거장 리커란은 치바이스에 대해 ‘가슴에 삼라만상을 품고, 손끝으로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도달한 화가’라고 평했다. 아흔세 살 되던 해인 1957년 베이징 화원을 창립하고 원장에 부임하였으나 몇 개월 후 사망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 35위. 〈송백고립도 전서사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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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거래 역사상 가장 비싼 그림들을 정리하고 각 작품의 예술사적 가치와 비싸게 거래된 이유들을 소개한다. 등장하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한 내용과 각 작..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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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치바이스 –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이규현, 알프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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