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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의

질병, 인간이 이름 붙인 추상적 총체

신화는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것을 강제적으로 명시하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도록 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그 무엇을 강요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 『신화론』
말은 진리를 통해 비로소 그 지속성을 얻게 되고, 진리를 통해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된다. 그리고 진리를 통해 말에 지속성이 생기는 까닭에 말은 소멸하지 않는다. 말이 생겨 나왔던 침묵은 이제는 진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로움으로 변하게 된다. 진리가 없다면 말은 침묵 위에 드리워진 막연한 말의 안개에 불과할 것이며, 진리가 없다면 말은 하나의 불분명한 중얼거림으로 와해되고 말 것이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육체에서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평가하려면 그 육체의 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 캉길렘은 재미있는 비유를 덧붙인다. 난시와 근시의 결점이 농경사회나 목축사회에서는 정상일지라도 항해사나 조종사에게는 비정상이다. 인류가 기술적으로 이동 수단을 발전시킨 순간부터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이상이 된 어떠한 활동이 금지되어 있을 때 비정상적이라고 느낀다. 인간의 심리적 삶에 대한 정상성 척도와 사회적 삶 전체와 관련된 정상성 표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정상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 보자. 내부와 외부 같은 구별, 정상과 비정상, 미와 추는 경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사실, 우리가 사회적 주체로 구성되기 위해서 경계의 설정은 필수적이다. 모든 사회는 건강과 질병, 미와 추, 남자와 여자, 정상과 비정상 등의 상징적 차이를 구분한다. 따라서 정상 혹은 건강이라는 관념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사회적·문화적으로 끊임없는 도전이 행해졌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적으로 병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의 일반적인 본질을 정의하였다. 그들은 병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크게 공헌한 것이다. 셉티머스처럼 정의된 차이와 경계를 내면화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단, 지나치게 고정된 경계는 주체를 질식시킬 수 있다. 그래서 경계는 세워지는 순간에 위반되고 위반되는 순간에 재설정되는 끊임없는 진행형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노화는 건강의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건강은 진화 과정상 일시적인 적응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경계가 세워지는 구분점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질병은 중립적인 언어이다. 미셸 푸코가 말한 대로 말하는 주체와 말해지는 대상 사이에 존재하던 지식의 태도와 그곳에서 재주를 피우게 된 언어의 새로운 모습인 것이다.

중립적인 언어를 가진 질병에 대해 의학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질병은 의사의 판단뿐만 아니라 환자 스스로의 평가와 사회 환경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과 건강의 경계는 담론적 효과이며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인 것이다. 그리고 병은 환자마다 제 각각이다. 개인을 넘어서는 기준들을 가지고 병에 걸렸다고 결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병은 개인에게 개별적이고도 고유한 징후이다. 결국 고통 또한 개인의 문제로 오롯이 남는다. 모리스 블랑쇼( Maurice Blanchot)의 『죽음의 선고』에서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보낸, 그리고 여전히 아픈 상태의 화자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언어는 “일종의”라고 전제하는 “차디찬 눈사태 같은 것”이며 “공허한 이미지들의 역겨운 붕괴”이다.

그것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으로서, 느껴지는 것일 뿐 언어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파괴시킨다.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비명과 울음, 그리고 신음과 탄식은 몸의 틈새로부터 나오는 소통 불가능한 소음인 것이다. 따라서 누구와도 그 고통을 똑같이 나눌 수 없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오히려 훨씬 더 분명한 느낌들이다. 그것은 폴 발레리(Paul Valery)의 말대로 우리에게 가장 고유한 것이자 가장 낯선 것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질병을 ‘정상성’으로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각주1) ‘정상성으로서의 질병’이란 비정상으로 조명되는 질병에 주목하는 것을 최소화하면서, 질병과 질병이 부과하는 어떤 요구나 제한에도 불구하고 아픈 사람이 ‘정상적’ 삶을 살고 있다는 주장을 핵심으로 담고 있다. 질병 이전의 삶에 근접한 상태로 되돌리지 못한 몸은 질병의 잔여를 담은 장애의 상태로 더 오랜 기간 살아가야 한다. 그때, 몸은 『빌레트』의 루시와 같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자체가 아닌, 몸의 주체로서 자아를 재창조하는 삶 위에 놓여야 한다. 이것은 물론 사회적 상징 질서에 의해 빗금 쳐진 비/정상성이 아니다. 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오히려 그 경계가 희미해질 때, 즉 비정상을 더 이상 비정상이라고 여기지 않을 때 가능해지는 정상성이다.

개미는 어느 쪽 띠로 걷고 있는가?

경계는 세워지는 순간에 위반되고 위반되는 순간에 재설정되는 끊임없는 진행형의 과정이다. 건강은 진화 과정상 일시적인 적응 상태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경계가 세워지는 구분점이 될 수는 없다.

뫼비우스의 띠 II M.C.에셔, 1963년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이 엄격한 집단적 구속력을 갖지 않고 개인적 상태와의 관계에서 변화하는 기준을 가진다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경계는 불분명해질 것이다. 대신한 사람 개인에서는 그 경계가 분명하다. 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개인이다. 새로운 환경이 그에게 부여하는 업무를 수행하기에 부족하다고 본인이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 괴로움을 겪는 것은 개인인 것이다. 절대적인 권위가 사라진 현대성의 특성은 개인 자신에 대한 집중을 강화시키기에 이르렀고, 개인의 경험 범위에 따라 정보의 수집은 다양하게 이루어지지만, 이것은 여러 권위의 집약일지 맹신이 될지 알 수 없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에 의한 의료 방식의 수집은 자본주의의 상품화된 경험으로 확립된 것일 수도 있다.

제약회사들은 단지 의약품의 광고만을 하지 않는다. 먼저 질병을 목록화한다. 목록화한 질병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면서 이상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한다. 운동과 비타민과 좋은 식단을 소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적으로 참는 데 익숙한 고통도 최근에는 질병으로 확장되어 목록으로 재정립한다. 속쓰림 같은 일상적인 고통이나 수줍음과 같은 자신감 상실이 그렇다. 이러한 것들은 예전에 미처 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속쓰림 대신 ‘위 식도 역류’로, 수줍음 대신에 ‘사회불안장애’로 병명이 재정립되는 순간, 의학 분야로 넘겨지면서 치료를 요하는 질병처럼 취급된다. 그리고 병으로 의식하지 못했던 과거를 미개의 탓으로 돌린다. 이제 광고는 당당하게 “생리 전 증후군은 질병입니다”라고 말한다. 내려앉아 있던 침묵이 걷히면서 불투명했던 증상은 속 시원한 질병으로 규정된다. 물론 특정 병명이 있다는 것은 특정 치료약이 있다는 말이다. 이제 이름을 얻은 질병은 더 이상 예전의 불특정한 증상으로 퇴화할 수 없고, 그 자체가 진리가 된다. 그리고 전복되지 않는 한 진리는 지속되는 권위와 명성을 걸치면서 신화로 남는다.

그러나 언어의 속성은 불완전함이고, 가장 간결한 언어로 복잡한 질병의 증상을 집약하는 일은 마치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 어떤 한 질병과 다른 질병은 주로 유사성에 의해 판단된다. 따라서 수많은 질병에 ‘유사’ 또는 ‘의사’(擬似)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에 유행했던 상상병처럼, 오늘날의 건강 염려증은 의학기술에 따른 질병의 세분화에 따라 건강뿐만 아니라 질병까지 장려한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종양을 떼어 내는 수술만 받고 항암 치료는 포기했다. 그가 수집한 정보 중에는 주류적인 의학의 입장 뿐만 아니라 그에 불일치하는 대안적 입장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쪽이 옳은가?”의 문제에서 그가 내린 결정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삶에 미칠 직접적 영향과 관련한 위험의 전망은 지식을 놓고서 의심과 맹신이라는 문제를 한층 복잡한 층위에 올려놓는다.

불신과 맹신

의사의 치료를 어디까지 믿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심은 기든스가 지적한 현대성의 추상적 체계에서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현대성과 자아정체성』에서 환자의 딜레마와 의사의 딜레마에 관해 지적한다. 완치가 어려운 질병으로 고생한 환자는 좋다는 여러 가지 치료를 경험한다. 상이한 접근법을 가진 다양한 주장들을 저울질하면서 어떤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지만 어떠한 압도적인 권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수고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경쟁적인 치료법을 찾는 중에 환자의 행동 양식이 갖춰지는데, 이 속에는 라이프스타일과 존경과 같은 것들이 결합하면서, 추천 받은 의사에게 결정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 속에도 여러 위험 요소들이 숨겨져 있다. 전문가들 또한 불일치하기 때문에 최종적 권위자가 없는 체계에서 전문가 체계를 뒷받침하는 가장 선호되는 신념들조차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환자는 “충분히 성찰하여 얻은 신념을 가지고 이행하지만 전문가가 가진 딜레마 때문에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보증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푸코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의사들이 각 환자들에게 알맞은 치료법을 찾아 주기 위해 객관적인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기적’을 발견하는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의사의 권위와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맹신하고 싶은 마음, 또 그만큼 가까이에 달라붙어 있는 의심 간의 투쟁은 소비 시장이 부추기는 개인적 불충분함에 대한 공포, 불안, 고통에서 기인하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 속에서 가난은 더욱 부각되고, 질병은 더욱 비정상적인 것으로 분류된다. 인간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죽음을 의미화했던 때와 달 리, 의학기술 시장의 소비 문화를 통해 현실적 질서에 대한 명료한 자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임상의학은 질병을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것으로 바꿔 놓으면서 발전되어 왔다. 전통적인 민간의학이 과학적인 의학으로, 종교적 세계관이 세속적 세계관으로 변화하면서 질병의 고통에 맞서는 방식과 치료법 또한 변모하였다.

니콜라스 튤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 렘브란트 반 레인, 1632년

기든스에 따르면, 지구적 재난에 대한 사회적 환경의 통제 가능성 대신 개인적인 몰두, 즉 정신적·신체적 자기 수련으로 후퇴한다. 그러한 개인주의적 자유는 그러나 소비시장의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선택을 지배당한다. 지배 속에서 마치 개인이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상상할 뿐이다. 시장은 개인으로 하여금 불충분함에 대한 공포, 불안, 고통을 부추기면서 개인적 자율성, 자기 정의, 진정한 삶, 또는 개인적 완성이라는 개인적 욕구들을 재화의 소유와 소비라는 욕구로 바꿔 버리는 것이다. 개인의 자기 자신에 대한 몰두 또한 순전한 몰두일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이 오롯이 자신을 권위와 동일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시장 구조의 소비 전략에 의해 재배열된 인간 행동의 유형을 반복한다. 일상생활의 조건은 소비의 끊임없는 개입에 의해 재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삶에 대한 책임은 의사보다 개인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내가 나의 고통에 먼저 관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엔 약사나 의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아는 체를 한다. 반면 그 상태를 벗어났을 때 불안에 떨며 완전히 의사에게 몸을 맡긴다. 이 양극의 행동이 한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어느 쪽도 위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약의 효과 이전에 내게 부과된 고통을 먼저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극복할 정도의 고유한 차원을 스스로에게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고통의 정도는 진통제 투여로 인해 점점 더 참기 어려운 것이 되어 간다.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한 약이 고통을 더 참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약회사도 소비시장의 이윤을 따른다는 사실, 그리고 그 핵심에 ‘이윤이 될 만 한 병을 찾아내고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의학기술이 명명하기 전까지 모호한 상태의 병은 병으로 의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학 전문가들에 의해 매개되는 지식 주장들이 권위와 진실성을 부여 받아 언어적으로 결정(진단)되면, 일상 전체가 위험 분위기에 놓인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 이 분위기에 맞춰져 제한된다. 신화가 그렇게 결정된다. 바르트가 『언어의 바스락거림』에서 이야기했듯이, 신화란 사회에 의해 반영된다. 문화를 자연으로, 혹은 적어도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 역사적인 것 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뒤집어 놓는다. 가장 ‘순진무구한’ 것처럼 보이는 언어에 의해 보증되면 그 명제는 마치 자연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건강에 대한 편집증 때문에 질병 보유자가 되고, 행복에 대한 편집증 때문에 불행에 도취된다. 그것에서 빠져 나와 바라보라. 내가 도취된 내 몸 자체가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가 보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조성된’ 위험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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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롤랑 바르트, 『신화론』, 정현 옮김, 현대미학사, 1995
  • ・ 모리스 블랑쇼, 『죽음의 선고』, 고재정 옮김, 그린비, 2011
  • ・ 아서 프랭크, 『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최은경 옮김,갈무리, 2013
  • ・ Roland Barthes, The Rustle of Language, Tr. by Richard Howar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9

최은주 집필자 소개

건국대에서 영미문학비평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몸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건국대와 백석대에 출강하고 있다. 어린 시절 많이 아팠던 경험 때문에 질병과 죽음에 대한 의학적·사회문화..펼쳐보기

출처

마이크로인문학5-질병, 영원한 추상성
마이크로인문학5-질병, 영원한 추상성 | 저자최은주 도서 소개

질병은 시대마다 탄생하고 유행하는 것이다‘건강’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것처럼, ‘질병’의 기준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질병, 영원한 추상성]은 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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