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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시에서 보다 더 독특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에 이르러 겪는 어려움이다. 사실 어려움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못 된다. 불편함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병을 앓는 것이 기분 좋을 적은 결코 없지만 어떤 도시나 고장은 병을 앓는 동안에 의지가 되어서, 거기서는 이를테면 마음을 푹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병자란 부드러움을 필요로 하며 무엇엔가 기대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오랑에서는 지나치게 거센 기후, 거기서 거래하는 사업의 중요성,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황혼, 쾌락의 특질 등 모든 것이 한결같이 건강한 몸을 요구한다. 이곳에서 병을 앓는 사람은 아주 외롭다.알베르 카뮈, 『페스트』
카뮈는 그의 책 『페스트』에서 프랑스 오랑 지방에 대해 질병을 사용하여 묘사한다. 도시는 ‘아주 흥미진진하지는 못한 곳’으로, 활기차고 분주해 보이는 일상도 습관이 되면 만사가 순조롭다. 그는 게오르그 짐멜이 사회학적으로 묘사한 대도시 삶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짐멜은 1903년에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현대의 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이 급속도로 바뀌는 외적·내적 자극들에 의한 심리적 영향으로 신경과민을 겪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삶은 급속도로 교체되었고 외부 환경의 흐름과 모순들은 삶에 대한 위협이었다. 외부 상황에 대해 제대로 반응할 능력이 없어지면서 무감각해졌지만, 이 무감각은 오히려 개인들을 방어해 줄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이제 삶에 적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바로 무감각이다.
시민들은 권태에 절어 있었지만 또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낌새가 없는 도시였지만 거센 기후와 사업 거래, 그리고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황혼과 쾌락 때문에 그들은 건강해야 했다. 이와 꼭 같은 정서가 오늘날의 도시를 지배한다. 빠르고 분주하게 돌아가는 현대 도시에서는 조금만 주춤하는 사이에 그 속도로부터 밀쳐지면서 외톨이가 될 것이다. 병을 앓는다는 것은 삶의 속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도시는 건강한 몸만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쥐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은 ‘말이 안 나게 조용히’ 처리해야 할 문제다. 그것은 병 자체보다 사람들에게 불안과 동요를 유발해서 도시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페스트』에서 의사 리유는 진찰실을 나서다가 죽어 있는 쥐를 발견한다. 재미있는 것은 건물 수위의 반응이다. 이 건물에는 절대 쥐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의심이나 의문도 배제되는 ‘단호함’이다. 다음날 피투성이가 된 쥐 세 마리를 본 수위는 누군가 쥐덫으로 쥐를 잡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아예 쥐덫을 놓은 ‘범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쥐의 출현은 다른 누군가의 탓, 즉 책임질 누군가를 먼저 지명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소홀함을 이유로 자신이 지명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수위에게는 쥐가 나타나거나 죽어 뒹굴고 있을 가능성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그러나 리유는 왕진을 돌면서 죽은 쥐들을 목격한다. 병원으로 돌아온 리유가 수위에게 또 쥐를 보았느냐고 묻자 수위는 “제가 지키고 있단 말씀예요. 그래서 그 나쁜 놈들이 감히 가져오질 못하는 겁니다”라고 강하게 부정한다.
전염병이 생기기 전 유럽은 위생 상태가 아주 불량했다. 길거리에 오물들이 넘쳐났고 목욕은 거의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전염병의 발발은 인간이 자신의 몸을 돌아보게 하였고 또 사적 공간이 증가하게 하였다. 전염병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격리였기 때문이다. 『페스트』에서 수위에게 쥐 ‘따위’가 중요했던 것은 건물의 명성에 손상을 입히는 일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관리인의 책임에 대한 문제지 쥐 자체가 아니다. 건물의 이미지를 책임져야 하는 자신이 관리하는 건물에서 죽은 쥐가 발견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틀 또는 사흘 만에 죽는 일이 20건이 있어도 병명은 삼가는 상황이었다. 확증은 없으나 증세가 불안한 상황만이 계속되고 의사끼리 주고받는 대화에는 “분석의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마침내 “페스트가 확실하다”고 명시된다. 그들이 ‘페스트’를 입에 올리기를 삼간 것은 페스트의 원관념이 가진 ‘속수무책’의 성격 때문에 ‘재앙’이라는 말 외에는 적합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방은 열광이나 쾌락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해도 권태와 무심함, 습관이 팽배한 도시다. 이곳 사람들은 어떤 무언가의 낌새 때문에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재앙의 존재 따위를 믿지 않는다. 재앙이란 비현실적인, 그저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의사인 리유에게는 페스트가 멈추거나, 혹은 계속되더라도 병의 정체를 알게 될 것이며, 그에 따른 대비 조치와 싸워 이기는 방법을 발견할 것이라는 사실만이 있었다. 그는 문득 창 밖 공장으로부터 나오는 노동의 소리를 듣는다. 질병 때문에 모든 것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수행해 가야 할 뿐이다.
역사상 흑사병으로 알려진 페스트는 약 30차에 걸쳐 대대적으로 1억에 가까운 인명을 빼앗아갔지만, 1억의 시신은 실감 나지 않는 상상의 것일 뿐이었다. 그들은 지금 이 도시에서 벌어진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시켜 버리는 페스트의 재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앞에서 명시한 ‘페스트’라는 이름은 의사끼리 주고받은 말이고, 관청 직원에게조차 알려 봐야 도움이 되지 않을거라고 말을 삼간다. 주목할 것은 어떤 것에 대한 명명이다. 단정적으로 진단을 내리는 것, 그래야만 조치가 취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리유의 동업자인 리샤르는 병 자체가 저절로 멈추지 않는 한 법률에 규정된 중대한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자면 그 병이 페스트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확실성이 절대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심사숙고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국은 행정 처리를 위해 ‘공식적으로’ 그것을 페스트라는 유행병으로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표한다. 현청의 지사는 “당신은 이것이 페스트라고 확신하십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리유는 “질문을 잘못하셨습니다. 이건 어휘 문제가 아니고 시간 문제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리유는 “표현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시민의 반수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한 후 물러난다. ‘페스트’는 이미 중세를 휩쓸었던 흑사병으로서의 시니피앙각주1) 을 가지고 있다. 절대적인 재앙으로서의 상징성 때문에 페스트가 선포된다는 것은 페스트의 과거 이미지를 전부 끌어오는 것이다. 중세 유럽을 휩쓴 페스트. 몰살을 의미하는 이 병은 따라서 명명하는 순간, 명명한 사람과 그를 지지한 모든 사람이 후폭풍에 대한 모든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오랑의 풍경에 대해 언급했다. 이것은 카뮈가 상당히 할애하여 쓴 부분이다. 다시 그 부분을 짚어 보자. 도시와 일상생활의 평범한 모습. 일단 습관을 붙이고 나면 힘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습관이 붙도록 이 도시는 만사가 순조롭다. 이 틈에 이 곳 사람들 전체의 삶을 통째로 개입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아가 병에 있어서도 ‘믿음’과 ‘불신’라는 단어가 깊이 침투한다. 사람들은 유행병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열 명쯤 죽어 나가면 이 세상이 끝장이라도 난 듯이 떠들어 댄다. 환자 가족들과의 담판과 환자와의 옥신각신이 이어진다. 환자들은 의사가 하는 일의 힘을 덜어 주고 자신들의 몸을 그에게 완전히 맡겼다가 점차 꺼려하고 불신으로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멍울의 절개 수술이 효과를 보인 것은 불과 몇 명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입원하면 의사들의 실험 재료가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 갈 뿐이었다. 사망자 수가 의미하는 것은 ‘우려’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었다. 마침내 공문이 전보로 내려진다.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말, 말, 말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는 『고통 받는 몸의 역사』각주2) 에서 질병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인간이 그것에 부여한 역사만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이름을 붙인 추상적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인간이 겪는 불편함의 원인이나 그 원인이 될 소지의 것들을 한데 모아 지적인 개념을 만들어 내고, 이렇게 모여진 내용에다 진단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놓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증상이나 그 원인에 작용할 치료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이나 그 원인이 될 소지의 것들을 한데 모아 어떤 증상을 유사점에 의해 특정 병명으로 확정 짓는 것은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공무가 수행되는 것에 대한 책임, 그리고 말과 지위에 대한 책임이다.
『페스트』에서 의사 리유는 당시의 페스트가 중세의 흑사병과 같이 수용되는 것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토로한다. 사실 증상은 유사했다. 그러나 유사 페스트라고 진단할 수도 없다. 페스트가 “맞다”로 진단이 내려져야 행정적인 업무가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진단이 내려지면 병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병 자체보다 더욱 위험한 덫이 될 수 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병보다 해결책을 빨리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기 때문에 그 증상과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큰 것이다. 리유가 “표현에는 관심이 없으며” “다만 시민 반수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매독이나 에이즈에 대한 은유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문란한 성관계의 은유가 공통적으로 개입되고, 에이즈에는 더 나아가 ‘동성애’와 ‘아프리카’라는 은유들이 포개어진다.
사람들은 이별이라든가 공포라든가 하는 공통된 감정은 가지고 있었지만 페스트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전까지 도시에서 한 주에 몇 사람이 사망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페스트의 발병으로 인해 통계가 처음으로 적용되어, 일주일에 평균 500명씩의 사망자를 낸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이렇게 많은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어도 그들의 불행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추상성이 사람들을 죽이고 구체적인 사망자 수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인이 겪어야 하는 삶은 이 고장 전체의 기류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이 고장에 들어와 있는 외부인 랑베르는 페스트와 자신은 아무 상관없으니 이 고장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하소연을 한다. 리유는 랑베르가 아내와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다시 결합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바지만, 포고와 법률이 있고 페스트가 있으니 자기의 역할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랑베르는 이에 대해 리유가 이성적이며 추상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이 도시에서 나가고 말 것입니다”라고 덧붙인다. 리유는 그 심정 역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런 일은 자기와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랑베르는 “내가 선생님을 찾아 뵌 것도, 이번에 취해진 결정에 선생님의 역할이 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한 건쯤이야, 스스로 만들어 놓으신 일인 만큼 좀 손을 써 주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리유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랑베르는 “선생님은 마이동풍이시군요. 남의 일은 생각해 본 일도 없으시군요. 생이별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으셨어요”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랑베르는 리유에 대해 ‘공적인 일’을 언급하면서, 그러나 “공공복지도 개개인의 행복으로 성립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제 이 지역에 갇힌 사람들은 아무 일이 없었던 권태로웠던 시절의 행복을 깨닫게 된다. 전염병은 이전의 안정과 권태를 교란시켜 그들의 일상을 파괴시켰다. 그들의 개인적인 감정은 모든 사람들 전체의 감정이 되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에 매달려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과 책망이 그들을 괴롭혔다. 그들이 감금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자기 집에서 감옥살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이 겪는 이별의 고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불행을 통해 개개인의 행복이 중요해지는 순간, 페스트라는 추상과의 우울한 투쟁은 삶 전체를 지배한다.
사람들은 이별이라든가 공포라든가 하는 공통된 감정은 가지고 있었지만 페스트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전까지 도시에서 한 주에 몇 사람이 사망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페스트의 발병으로 인해 통계가 처음으로 적용되어, 일주일에 평균 500명씩의 사망자를 낸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이렇게 많은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어도 그들의 불행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추상성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페스트』는 페스트라는 병 자체보다 병이 어떤 식으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변화시키는지에 관한 것이다. 카뮈가 그리는 20세기의 페스트는 병의 추상성만큼이나 신앙심을 부추긴다. 종교는 이 불행을 겪어 마땅할 위치에 올려놓고,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신의 재앙이라고 웅변한다. 종교는 페스트를 더 이상 추상이 아니라 “여러분을 향상시키고,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는” 진리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도시의 후면에서는 박하 정제가 전염병의 예방에 좋다는 말 때문에 동이 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박하 정제를 열심히 빨아 먹는 것이 기도보다 더 효과가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브론테 자매들 중에 앤 브론테(Anne Brontë)가 쓴 『아그네스 그레이』에서도 몸의 고통보다 몸의 고통 때문에 종교에 대한 불신으로 죄책감을 가지면서 겪는 마음의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그네스가 방문한 가난한 아주머니 한 분은 관절염과 부은 눈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교회에 나간다 해도 눈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고, 그런 마음 때문에 목사님의 설교 또한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실로 오히려 더 괴롭다. 자신의 영혼이 말라 버리는 것 같은 데 대한 두려움이었다.
리유는 질병이 사람들을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병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한다는 종교를 비난한다. 그에게는 치료가 급선무이다.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쳐다보는 대신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우는 것이 맞았다. 한편, 이방인인 랑베르는 여전히 보는 사람마다 하소연을 한다. 자신은 이 도시와는 무관한 사람이라고. 그는 어서 이 고장을 빠져나가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뿐이다. 개인의 절박한 현실 속에서 페스트의 추상성은 행정부서가 행한 수치화에 의해 더욱더 구체적인 것이 되어 갔다. 늘어나는 죽어 나가는 자들의 숫자와 외출을 금지하는 포고문과, 위반자를 엄벌에 처한다는 위협이 아프다는 사실보다 더 사람들을 불행에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기다릴까 봐 이 고장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던 랑베르였다. 그런 그가 떠날 수 있게 된 당일에 마음을 바꾼다. 자기가 떠난다면 부끄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렇게 되면 남겨 두고 온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거북해질 것이다. 행복을 택하는 것이 부끄러울 일이 아님에도 랑베르는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도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이제는 볼 대로 다 보고 나니, 나는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들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창궐하는 병을 낭만화시킬 수만은 없다. 병에 걸린 한 사람은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을 위해 격리되어야만 하고 이미 병균에 침식된 어린아이는 고통스럽게 죽어 간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닌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기에, 질병의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지켜보는 이들의 눈앞에서 실체로 보인다. 아이의 고통은 ‘죄’와 연관되면서 “이 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로 주장된다. 베르나르 리유가 그토록 증오하는 것이 죽음과 불행이듯이, 질병은 그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죄로, 불운으로 상징된다.
사람들은 병의 종말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병이 얼마나 더 계속될지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병이 얼마나 더 오래갈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병이 수그러들지 않자 사람들은 이 불행에 끝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갖기 시작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처럼 누군가의 죄로 인한 천벌로 전염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페스트』에서도 전염병은 여지없는 재앙이었고, 사람들은 성당 안에서 신부님의 설교를 듣기보다 미신적인 비법을 구하거나 예언들에 매달렸다. 질병은 마치 “운명이라고 불러 마땅한 경고”였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병과의 끝없는 싸움은 쓰러지고, 고통 받고,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나 전해지는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 놓고 떠나면서 흘리는 눈물이 전부였다. 보이지 않는 질병은 죽음을 암시하는 나쁜 징조인 동시에 모든 법칙을 깨뜨리고 살아나게 하는 무엇이기도 했다.
질병은 단지 아픈 몸과 죽음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태도를 바꿔 놓았다. 불행이 첨예하게 기승을 부리기도 했고, 그 동안 알지 못한 사랑과 그리움을 처절하게 느끼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도시에 똑같이 살고 있었음에도 도리 없는 유배를 당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병세가 약화되기 시작했을 때조차도 기뻐하기보다는 조심스러워했으며 희망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리유가 페스트로부터 얻은 것은 그가 페스트를 겪었고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우정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애정을 알게 되었으며 언젠가는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이다. 카뮈가 지적한 ‘삶의 체온과 죽음의 이미지’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질병과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내기에 이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의학기술에 동원되는 카메라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점에서 의사도 손을 댈 수 없는 그 어떤 것, 더 이상 의학기술로 손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 그리고 의사가 그것을 진단하는 순간은 모든 것이 불치병이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병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면 모든 것은 죽은 사람의 침묵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가 되고 추억이 되며 부정이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에 대해, 그 어처구니없는 세계에 대해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인생이에요. 그뿐이죠.”
장님의 우화
페스트가 인생을 보여 주듯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또한 전염병을 통해 인간의 삶을 보여 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감염으로 눈이 먼 사람들에 대한 격리를 정당화하려는 정부와 이러한 정부 대처방식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영화의 중심에 놓인다. 정부는 국가의 치료적 간섭과 통제에 기초한 공식 발표를 통해 ‘전염을 막기 위해’ 눈먼 시민들을 격리시키기로 ‘결정’한다. 눈이 먼 사람들은 방독면을 착용한 군인들이 보초를 서는 격리 수용소에 감금된다. 정부는 격리에 대해 “연구를 위한” 것이며, 개인이 눈이 안 보이는 것은 “여러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이 혼자라고 여기면서 강제적인 격리를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들은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인생이에요. 그뿐이죠”라는 말대로 보이지 않는 질병 앞에 가장 원초적으로 변해 간다. 그러나 그 원초성은 다름 아닌 질서와 권력이라는 일상생활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들이다. 더럽고 탐욕스럽게 먹을 것을 놓고 탐하고 싸운다. 이 속에도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이쪽 편과 저쪽 편을 가르며 배급 음식을 탈취해서 금품과 맞바꾸려 한다. 마침내 여자들이 배급품을 탈취한 자들과 잠을 자 줘 가면서 음식을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눈이 머는 사태가 도시 전체를 지배하자 그들을 감시하던 모든 보초병들도 사라진다. 감금된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고, 먹을 것을 찾는 사람들만 거리에서 목격할 수 있다.
“요새 세상은 어떤 모습이오?”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이 물었다. 의사의 아내가 대답했다. “안과 밖, 여기와 저기, 다수와 소수, 우리가 겪고 있는 일과 앞으로 겪어야 할 일 사이에 차이가 없어요.” “그럼 사람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 하고 있죠?”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물었다. “유령처럼 돌아다니고 있어. 이게 바로 유령이라는 말의 의미일 거야. 모두들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 네 가지 감각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하지만 그걸 보지는 못하잖아.”
우리는 모두 볼 수는 있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 아닐까?
마침내 맨 처음 눈이 멀었던 남자가 앞을 볼 수 있게 된다. 원인도 없이 발생했던 병은 다시금 원인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페스트』에서 페스트가 예기치 않은 곳에 나타나는가 하면 굳게 뿌리를 박았던 곳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알 수 없는 병은 기승을 부릴 만큼 부린 후 제풀에 꺾인 듯 서서히 후퇴했다. 유일하게 눈이 보이던 여자는 비로소 자유를 느낀다. 그 동안 자신만이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인간의 모든 추한 모습을 목격해야만 한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형벌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의사의 아내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그녀는 쓰레기로 가득한 거리,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노래 부르는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이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내 차례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리자,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시야가 하얗게 되는 순간 의사의 아내가 생각한 ‘내 차례구나’는 공포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깝다. 그녀는 볼 수 있는 자만의 고통 속에 충분히 괴로웠다. 더 이상 이성을 부여잡지 못하고 무너져 가던 남편과 수용소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녀로 하여금 볼 수 있다는 데 대한 안도감과 기쁨을 모조리 앗아 갔다. 세상은 더 이상 볼 수 있는 그녀를 위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무서운 상황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327」에서처럼 보고 싶다는 욕망 못지 않게 본다는 것, 눈을 어딘가에 고정시킨다는 것이 공포를 유발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해도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알아야 해로운 진실을 비껴갈 수 있는 것이다.
내 눈이 볼 수 없기 전에
나 역시 보고 싶었네
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모르는
눈을 가진 다른 존재들처럼.
하지만 오늘 내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말하리
내 심장이 내 크기만큼 찢어지고 말 것이라고.
초원들을 내가 볼 수 있고
산들을 내가 볼 수 있고
모든 숲들을, 수많은 별들을
그리고 정오를, 유한한 내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볼 수 있고
하강하는 새들의 동작을
아침의 호박색 길을
내가 원할 때 볼 수 있다면
그 소식은 나를 죽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내 영혼을 유리창에 대고
다른 존재들은 태양을 개의치 않고
눈을 어디에 두는지
맞혀 보는 것이 더 안전하리라.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알고 자신의 눈을 뺀 것처럼, 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잔혹하고 무자비할 수 있다. 진실이란 오이디푸스가 앎을 실천하면서 겪은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전체의 안녕을 위한 일이었다 해도, 오이디푸스 개인에게는 파멸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진실을 본다는 것은 그 진실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까지 뒤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16세기 유럽에서 장님 걸인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피테르 브뢰헬의 「장님의 우화」에서 장님들은 전혀 감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의사들이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눈 질환을 묘사하고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 사람은 각막백반증을 앓고 있고 그의 앞사람은 흑내장을 앓고 있다.
피테르 브뢰헬은 그림 속의 장님을 전체 인류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렸다. 잔인하고 무책임한 지도자에 의해 무지한 희생자들이 희생된다.
이 그림은 성서의 『마태복음』과 관련하여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장님이 장님 갈 길을 안내하면 둘 다 참된 신의 세계로 가지 못하고 무지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브뢰헬 자신은 그림 속의 장님을 전체 인류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렸다. 따라서 잔인하고 무책임한 지도자에 의해 무지한 자들이 희생된다는 측면에서 그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림은 경사진 땅과 나무로 된 목발과 더불어,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추락을 강조한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어떻게든 감염을 피하려 하는 고위 관리자들은 눈먼 사람들을 감금하고 감시하는 체제를 선택할 뿐 달리 방법을 마련하지 못한다. 감옥이나 수용소와 다름없는 시설에 격리된 사람들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공포에 떨다가 마침내는 먹을 것을 가지고 싸우고 빼앗고 죽이면서 추락하기 시작한다. 정부의 대책 실패와 감시하는 군인들의 잔인함, 그리고 환자들 간의 싸움은 보이지 않는 질병 앞에서 공포와 절망, 추악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렇듯 질병에 대처하는 인간의 태도는 인간 삶의 우화가 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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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게오르그 짐멜, 「대도시와 정신적 삶」,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김덕영·윤미애 옮김, 2005
- ・ 자크 르 고프, 『고통받는 몸의 역사』, 장석훈 옮김, 지호, 2000
- ・ 앤 브론테, 『아그네스 그레이』, 문희경 옮김, 현대문화센터, 2007
- ・ Emily Dickinson, The Complete Poems, Edited by Thomas H. Johnson, Faber and Faber, 1970
글
출처
질병은 시대마다 탄생하고 유행하는 것이다‘건강’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것처럼, ‘질병’의 기준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질병, 영원한 추상성]은 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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