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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우리가 우리 것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지시와 자취, 각인된 자국, 그리고 흔적들뿐이다.장-뤽 낭시
의식주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기본적인 요소다.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이니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요즘에는 특히 의(衣)가 으뜸일 것이다. 잘 입는 것. 그런데 막상 옷 자체보다는 ‘살’에 더 관심이 많다. 예전에는 옷으로 자신의 미적, 혹은 사회적 수준을 과시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옷뿐만 아니라 외모, 특히 젊고 건강한 몸에 주력한다. 오죽하면 ‘피부’와 ‘치아’로 경제적 수준을 가늠한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현대성과 자아정체성』에서 신체에 대한 이와 같은 관심에 주목했다.
신체는 더 이상 전통적 의례에 따라 ‘받아들여지고’ 먹여지고 꾸며질 수 없다. 신체는 자아정체성의 성찰적 기획의 중심부가 되는 것이다. 위험 문화와 관련된 신체 개발에의 지속적인 관심은 따라서 현대적인 사회적 행동의 본질적 일부이다. 신체와 관련한 생활 설계가 꼭 자기도취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탈전통적 사회 환경의 정상적 일부로, 외부 세계로부터의 방어적 후퇴이기보다는 외부 세계에의 참여이기가 더 쉽다.
이제 신체는 ‘자아정체성의 성찰적 기획의 중심부’가 되었다. 특히, 질병과 노화를 오래 겪지 않아 느껴지지 않던 예전의 몸에 비하면 길어진 수명에 비례하여 질병과 노화 기간이 길어진 현대의 몸은 아주 가까이에서 경험된다. 식(食)에 대한 관심은 수명 연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진지 잡수셨어요?”라고 아침 인사를 하던, 먹고 살기 힘들었던 과거와는 다르게 먹는 것에 대한 걱정이 줄고 의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것이다. 현대세계 문명의 성과가 ‘장수’(長壽)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자기 나이보다 평균 10년쯤 젊게 보여야 ‘정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마냥 기분 좋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빛나는 문명의 성과인 ‘장수’에 요즘 꼭 따라다니는 말이 있다. ‘유병장수’(有病長壽)다. 젊음보다 노화와 질병을 가진 채로 살아가야 할 날이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노년의 삶과 질병으로 인해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미래에 대해 걱정을 품고 불안에 떨고 있다.
시빌과 스트럴드브러그
‘유병장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희랍신화의 무녀 시빌이 떠오른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시빌은 신이 아니었지만 천 년이나 살았다. 희랍의 식민 도시였던 이탈리아 쿠마의 무녀였던 시빌은 앞날을 점치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그 능력을 널리 인정받으면서, 마침내 아폴로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녀는 신의 선물을 받아들일 것처럼 먼지더미를 가리키며 그만큼의 장수를 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젊음이 없다면 불멸도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놓치고 만다. 그녀는 자신이 젊었기 때문에 젊음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아폴로 신이 그녀가 그의 사랑에 굴복하기를 바라며 영원한 젊음도 약속하지만 그녀는 신의 선물을 일축해 버리고, 결국 길고 오랜 시간의 희생물이 된다.
세월이 흘러 늙고 병들어 더 이상 걸어 다닐 수가 없게 되자 새장 속으로 들어간 시빌은 시장 한복판에 매달리는 신세가 된다. 온몸이 늙어 작은 새의 크기만큼 쪼그라든 것이다. 그렇게 시장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소리만 남는다. 이제 그녀의 소원은 단 하나, 죽는 것이다. 그녀는 “죽고싶어!”라고 말했다.
T. S. 엘리엇의 『황무지』 에는 로마시대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Satyricon)을 인용한 늙은 시빌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요.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천 년을 살 수 있었던 시빌이지만 온몸이 늙고 병들어 쪼그라드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한 일이었다.
이렇듯 삶은 좋은 것이지만, 늙고 병든 채로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늙고 병든 몸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타인에게 추하고 두려운 기피의 대상이 된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도 영원히 사는 스트럴드브러그가 나온다. 걸리버가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라퓨타에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스트럴드브러그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행운이 온다면, 영원한 생명과 죽음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함으로써 나는 진정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걸리버의 이런 생각은 인간이 죽음을 회피하고 두려워하며 영원한 생명을 욕망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그런데 영원히 죽지 않는 스트럴드브러그를 언제든지 만나 볼 수 있는 럭낵의 사람들은 정작 삶에 대한 집착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 스트럴드브러그는 젊지 않았고 건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늙음과 쇠약함이 가져오는 불편과 영원한 생명을 모두 가지는 그들은 죽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기게 되는 절망 속에 놓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사회적으로, 즉 제도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취급된다. 그들이 설사 럭낵의 사람들과 결혼을 한다 해도 법률에 의해 60세가 되면 헤어져야 한다. 그리고 80세에 상속자가 그들의 재산을 물려받는다. 생계를 위한 작은 금액만을 가질 수 있을 뿐 그들은 땅을 살 수도 없으며, 이윤을 위한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서 생겨나는 ‘탐욕’ 때문이다. 그들은 형사재판에서 증인이 될 수도 없다. 90세가 되면 치아와 머리털은 모두 빠진다. 항상 병을 앓고 있지만, 그 병을 낫게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오락도 없다. 따라서 스트럴드브러그로 태어나는 것은 불길한 징후로 간주되었다.
이 끔찍한 이야기는 오늘날의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노년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이것을 알아차린 듯 제레미아드 생타무르각주1) 는 “난 절대로 노인이 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예순 살이 되면 목숨을 끊겠다고 결심한다. 그가 자살한 원인에 대해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각주2) 는 ‘노화 공포증’이라고 불렀지만, 박사 자신의 노화에 대한 느낌은 ‘슬픔’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 나날의 석양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50세 때까지도 의식해 본 적이 없던 몸 속의 내장 하나하나를 마음속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질병과 허약함에 대한 법적 제재보다 무서운 것은 무언(無言)에 의한 무능력자 취급이다. 영원한 삶을 욕망하는 인간에 대한 따끔한 교훈으로 스트럴드브러그가 등장한 것이었다해도 오늘날에 현대인은 스트럴드브러그로 살아가야 한다. 럭낵의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추한 몰골의 스트럴드브러그와 같이 ‘예외 인간’이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에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현대인은 젊고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최대한 궁리한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욕망을 채워 줄 듯 소비시장은 젊음과 건강을 위한 상품 개발에 주력한다. 추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병을 앓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인간은 어김없이 삶을 붙잡을 것이다.
의학 및 제약의 발달뿐만 아니라, 화장품과 미용술의 개발은 그러한 인간의 욕망을 잘 반영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오래 사는 것이 불가피해진 만큼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의 현대인이 그토록 외모와 건강을 챙기는 것은 노년을 ‘나이보다 젊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은 퍽 기분 좋은 칭찬이다. 건강은 젊음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건강은 젊음의 동의어도 아니고 정상을 의미하지도 않지만, 그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의미는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근력 감소가 정상적인 노화 현상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질병의 일종으로 병명이 붙여져 치료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질병은 시대마다 탄생하고 유행하는 것이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예전에는 늙음이 생명의 정상적인 단계‘였다’. 과거시제 ‘였다’를 강조한 것은 늙음이 생명의 정상적인 단계라는 정의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화에 따른 근육량과 근력의 감소는 더 이상 정상적인 노화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질병으로서 의학적 치료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질병, 노화, 죽음의 건강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노화는 건강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단지 노년이 장기화되다 보니 단계적으로 나눈 인생 과정으로 놓고 볼 때 불균형을 이루면서 노년의 질병과 고통을 감당해야 할 기간이 늘어난 것뿐이다. 같은 나이에 다른 사람보다 현격하게 상처나 부상에 대한 치유의 능력을 보이거나 이전의 몸으로 복구가 가능하다면 건강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건강은 몸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이다. 내가 일하고 활동할 때 내가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태가 건강인 것이다. 그러나 건강은 정확히 정의될 수 없다. 그것은 ‘영양’의 문제일 수도, ‘위생’에 대한 내용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인간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지표를 삼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60대 부부가 똑같이 감기에 걸렸다. 남편은 화들짝 놀라 원거리에 있는 대학병원까지 달려간다. 아내는 뜨거운 쌍화탕 하나 마시고 한숨 푹 잔다. 병원에 가 있는 남편의 상태가 아내보다 더 나빠서가 아니다. 병원에 간다는 것은 상당 부분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환자가 된다는 것도 선택이다. 어떤 증상이 생활을 방해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데 불편을 끼칠 때 자신을 환자로 받아들이며 병원에 갈 것을 결정한다. 남편과 아내는 각자 자신이 받아들이는 병의 정도와 수용 능력, 그리고 감정이 다르기 때문에 해결 방법도 다른 식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병도 개인마다 다른 개별적이고도 고유한 징후이다. 남편이 병원에 가야겠다고 결정할 때 받아들인 불편의 정도가 아내의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 이때 병원에 가 있는 남편은 비정상이고 집에 남은 아내는 정상일까? 우리가 느끼는 징후 또는 증상은 상당히 추상적인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증상이 어떤 특정 질병 하나의 이름에 가장 부합된다면, 그 증상은 바로 그 질병이 된다. 특정 질병이 명명된다는 것은 의약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혹은 적어도 고통을 감소시킬 방안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18세기에는 증상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처방하였고 약을 복용했다. 상상병이라고 하는 것이 질병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오늘날에는 소비시장의 판촉을 위해 병명이 늘고, 장사가 될 법한 약품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덕분에 증상에 맞는 거의 모든 약이 존재한다. 많은 건강식품과 의학기술, 운동, 그리고 의료정책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에 몸도 상품을 고르는 것과 같은 맞춤형의 선택 사항이 되었다. 비용만 지불된다면 체질 개선, 피부, 근육, 바디라인의 목적에 맞추어 몸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다. 이 시에서 ‘그’는 이전에 아무도 아니었지만 나의 호명을 받으면서 특별한 ‘그’가 된다. 이와 같이 호명을 통해 존재성이 부여되는 것을 질병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꽃’은 ‘질병’으로 바뀐다. 증상이 특정 병명으로 불리면서 질병의 구체화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광고 속의 증상에 내 몸을 꿰맞추는 나는 언제나 잠정적인 질병 상태에 있다. “어! 저거 내 증상과 똑같아”라고 말하는 순간 환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18세기의 상상병을 앓았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쇠약함의 종류를 미세하게 분류하여 맞춘 의학 처방은 증상을 ‘더 정확하게’ 분석한다는 위엄을 보여 주지만, 그만큼 공포심을 조장한다.
영국의 풍자만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그림 중앙에 한 여성이 앉아 있다. 그녀는 신체적으로 무해한 증상에 대해 과다하게 반응하여 자신이 심각하게 아프다고 생각한다. 즉 상상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왼쪽으로는 그녀를 괴롭히는 다양한 생각들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증상을 의사에게 설명하는 모습이 보인다.
통증을 안고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통증을 완화시킬 방법이 있다면 굳이 통증을 안고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첨예하게 대립했던 의학계와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고통 논쟁은 그렇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다머는 100세의 나이에 ‘고통’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바 있다. 그는 신체 조직적 부위를 제거하는 문제로서가 아니라 평생에 걸친 과제로서 고통을 바라보았다. 쟁점은 화학적 진통제에 익숙해지면서 현대인의 몸이 잘못 길들여졌기 때문에 갈수록 자연적인 치유 과정에서 인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견에 대립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진통제가 있다면 인내가 필요할까?” 하고 의문을 표한다.
역설적으로 생각해 보자. 인내를 하지 않아도 되려면, 더 많은, 더 강력한 진통제가 필요하다. 면역력이라는 것은 세균이나 질병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항생제나 진통제에도 생긴다. 약을 사용하는 문제는 그러한 점에서 깊이 성찰될 필요가 있다. 22세에 걸렸던 척수성 소아마비로 인한 통증은 평생 가다머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그가 다른 누구보다 고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가 생각할 때, 울음소리로 고통을 표현하며 태어난 아이와 노쇠하여 지속적인 통증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늙은이 모두에게서 고통을 떼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그것을 ‘이겨 내야 할’ 것으로 바라본다.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저항하지만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자신의 고유한 삶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다른 식으로 의미화가 가능하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고통을 저주가 아니라 다른 경험에 대한 인식적 지평으로 확장할 수 있다. 가다머가 볼 때 “기술과 지식의 진보는 인생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단절을 준다는 점에서 고통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통』)
그러나 의학은 고통이 빠르게 만성화되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것 또한 의학이 할 일인 것이다. 그러나 진통제로 인해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통증은 잔여로 남는다. 화학 진통제에 의해 아주 서서히, 그리고 껄끄럽고 요란하게 빠져나가는 소음처럼, 고열에서 빠져 나온 후 미열과 구토증의 서걱거리는 통증이 남는다. 그때 또 진통제를 쓴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표준 증상에 맞춰 조제된 진통제는 이미 할 일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내가 감당할 문제이다. 통증은 찌꺼기처럼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 기관 하나하나로 스며들어 자리를 잡은 후 이따금씩 나를 괴롭힌다. 그때마다 몸은 나의 것이지만 바깥처럼, 그리고 가깝지만 낯설게 다가온다.
잠정적 환자 상태
질병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개인의 삶에 두루 나타나면서 여러 가지 해석학에 맞춰져 의미화되었다. 구조화된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에서 비정상으로 분리되었고, 무엇보다 의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치료약 덕분에 제약회사와 대중매체에 의해 질병이 만연하였다. 그러나 폭우나 천둥을 받아들이듯 어떤 설명도 없이 질병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있었다. 구체화시킨 병명이 없었으므로, 모호한 통증을 몸의 일부처럼 수용했을 것이다. 반면 현대 서구사회에서 질병은 무권력이자 소외이며, 비인간화이다. 따라서 질병은 그 자체로서의 특징이 아니라 그 범주들과 문화, 계층, 시간에 묶여 있어 사회적으로 편향된 선입관의 산물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이 편집증적인 사회와 얽히면서 공포심을 자극하는 은유로서 해석되었다고 지적한다. ‘질병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지가 병약해서다’라든가, 그래서 ‘환자 자신이 질병의 병인’이라든가 하는 식의 은유가 질병에 들러붙는다. 이런 터무니없고 위험한 관점은 질병의 책임을 환자에게 돌려 환자의 재활 의지를 꺾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프다’, ‘비정상적이다’라는 의료적 진단 범주는 그렇게 보편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문화의 변화는 지식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지식은 동시에 과잉과 소비 욕구를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농약을 뿌린 나무가 또다시 농약에 의존해야 하는 반면, 농약을 뿌리지 않은 나무는 큰 손상 없이 스스로 치료하면서 나무의 균들끼리 식물 연쇄를 일으킨다. 식물연쇄란 동물의 시체나 마른 식물이 땅속에서 박테리아에 의해 분해되어 식물의 양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에 이르러 농업은 관찰 능력보다 농약과 비료에 대한 수학적 계산만 앞세웠다. 이와 같이 현대인도 아프다 싶으면 의약품을 찾고, 부족한 것 같으면 영양제를 찾는다. 이미 아프기도 전에 집에는 열 가지쯤의 상비약을 구비하고 있다.
양분을 주면 박테리아가 활동을 쉬는 반면, 주지 않아야 활동하면서 흙을 만든다. 인간의 장도 마찬가지다.각주3) 이러한 점을 인식하면서 철학은 고통에서 의미를 찾는다. 고통의 만성화를 피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는 의학과는 대조적이다. 문제는 올바른 가능성을 파악하여 자신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하는가이다. 자신을 유용하게 한다는 것은 고통과의 관계를 갖는 것을 빨리 잊기보다는, 자신을 충족시킬 만한 어떤 것에 몰두함으로써 견딜 만한 삶을 스스로 이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질병의 경험은 고통스럽다. 개인에게만 일방적으로 고통을 내면화하고 인내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분명한 것은 질병이 의학기술에만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식과 사회구조, 그리고 제도, 정치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면서, 추상적인 질병이 의학적 시선에 의해 공간적인 분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질병을 구분하기 위하여 그 사이에 놓인 거리를 유사성만을 가지고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인데, 이것이 분류하기의 시선인 것이다. 이것은 ‘질병의 질서’인데, 일찍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했듯이 인간의 삶을 그대로 옮겨 놓은, 분배하기와 질서 지우기의 체계인 것이다.(『임상의학의 탄생』) 구조적으로 정의되어 있는 정상성에 맞추어 질병은 비정상으로 규정 지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류하기의 시선’은 급작스런 발작과 마비와 같은 징후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개인의 몸에서 겪는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의 위험 인식에 따라 판매되는 치료와 의약품, 백신, 또는 건강검진이 권장된다. 그러나 권장 방식은 항상 겁을 주는 것으로 전개된다. 즉 모든 가능한 건강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우리의 일상생활에 방향을 잡아 주고 라이프스타일을 구속하는 것이다. 선택은 개인의 자율적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하지만, 붉은 육류와 설탕, 초콜릿, 커피, 견과류에 대한 상반된 전문 지식이 우리를 식탁 앞에서 주저하게 만든다. 그리고 음식점의 위생 상태나 농작물 유전자 조작 등의 뉴스가 우리로 하여금 위험 사회에 살고 있다는 불안감만을 심어 준다. 이런 지식 주장은 우리가 극한 위험에 처한 것처럼 조장되는 분위기 때문에 질병의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든다. 질병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질병 자체가 반드시 척결되어야 할 ‘비정상’, 또는 ‘오염’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흐릿하고 뭉근하게만 전달되던 고통은 마치 새로이 밝혀진 질병처럼 둔갑되지만, 이것은 오히려 질병의 발굴에 더 가깝다. 질병이 규명되는 동시에 신약이 출시되면 질병 치료령이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속에서 현대인은 누구나 정도는 다르지만 잠정적 환자 상태에 놓인다. 질병에 대처하는 국민 의료 정책을 보면, 국민 건강에 대한 관심을 높여 질병 비율을 줄인다는 목표를 지향한다. 이 목표를 위해 전문가와 의사, 교수의 협조를 받은 광고와 방송 토론, 기자회견 등이 질병 예방이라는 목표에 꼭 맞는 언어를 사용하여 진리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목표는 질병에 대한 위험 인식 못지않게 건강과 젊음에 대한 과열된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여, 일상을 자본시장의 수익성 추구에 맞추어 변화시키려는 일상성의 수익성화를 부추긴다. 결과적으로 환자 개인의 상태를 관찰하는 느린 치료 방식은 간과 되고 만다. ‘빨리빨리’의 속도 지향적 사회에서 질병의 예방과 척결이라는 목표만이 지향되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항생제가 사용되면서 자가 치유 능력을 키워내는 면역 기능은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조차 잊혀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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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앤서니 기든스,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권기돈 옮김, 새물결, 1997
-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고통』, 공병혜 옮김, 철학과현실사, 2005
- ・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이재원 옮김, 이후, 2002
- ・ 미셸 푸코, 『임상의학의 탄생』, 홍성민 옮김, 이매진, 2006
글
출처
질병은 시대마다 탄생하고 유행하는 것이다‘건강’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것처럼, ‘질병’의 기준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질병, 영원한 추상성]은 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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