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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즐거운 생각이 떠오를 때도 있었다.버지니아 울프, 「새 드레스」
이를테면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을 때, 또는 부활절에 해변의 모래밭에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매끄러운 사기 계란처럼 파랗고 단단한 하늘…… 그 하늘을 향해 비죽비죽 솟아난, 모래밭을 뒤덮은 희끄무레한 염생초……파도의 노래…… 쉿! 쉿! …… 그리고 철썩거리는 아이들의 고함 소리…… 정말 행복한 한때였다. 세상의 여신의 손안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좀 냉혹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신……제단에 놓인 새끼 양을 바라보고 있는…… 휴버트와 함께 있을 때에도 뜻밖의 즐거운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이를테면 특별한 이유 없이 일요일 점심으로 양고기 요리를 할 때라든가, 편지를 뜯을 때라든가, 방에 들어갈 때. 그녀는 그럴 때마다 혼자 중얼거렸다.
“바로 이거야,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났어. 바로 이거야!” 그 반대도 놀라웠다. 다시 말해서, 음악, 날씨, 휴일 등 모든 행복의 요소가 갖추어져 있을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생활이 무미건조할 뿐이었다.
질병이나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준비된’ 사람만이 가능하다. 광고매체와 언론, 소비시장은 그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상품을 팔기 전에 시청자에게, 그리고 소비자에 현명해질 것을 권고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흥청망청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고, 암 보험과 각종 질병 보험, 종신 보험, 연금보험 등의 노후 자금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말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미래에 대해 무책임하고 무모하며, 자식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몰염치한 자아상을 유도한다. 그렇게 하여 소비시장은 활성화되지만, 여과 없이 쏟아지는 담론 방식은 오히려 현대인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하는 소음이 되고 말았다.
경고성 소음들은 특히 아무것도 준비할 의식 없이 살아온 베이비붐 세대의 50대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체험하는 불안은 다시금 40대를, 30대를, 20대를 불안하게 만든다. 상품들은 상품 자체의 유효성 대신 ‘불안’이라는 이미지를 생성해 낸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지적한대로, 이러한 이미지는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인 것처럼 어느 날 신화한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TV와 라디오, 인터넷이 전해주는 대로 체험하며, 원래 그런 것처럼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원래 그래서가 아니라 지식을 진리로 반복해 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뇌될 뿐이다.
이때 ‘대세’, 혹은 ‘유행’이라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자율적인 인간으로 보장받았다 해서 대세에서 벗어난다면 어리석고 한심한 사람이 된다. 의학이 신종 질병을 발견할 때마다 질병은 유행한다. 이전까지는 불투명해서 불치로 방치해 두었던 질병이 치료 방향을 찾게 된다면, 개인은 신종 질병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이렇듯 대세와 유행은 질병을 초기에 근절한다는 달콤한 약속과 더불어 ‘앎’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킨다.
OECD국가에 가입한 후 자주 듣게 된 것은 수치화된 평가였다. ‘자살’과 ‘행복’, 심지어 ‘불행’ 등의 항목에 대한 수적 평가가 행해지면서, 이런 추상적인 관념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국민이 되었다. 행복의 정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은가?”에 대한 조급증을 유발시키면서, 행복해야 한다는 담론은 하나의 대세가 되었다. 행복은 마치 길어진 노년을 준비하는 것이고, 보험에 드는 것이며, 운동을 하는 것이고, 상조 가입을 하는 것으로 둔갑했다. 그렇게 하나의 기정사실로 환원되며 축소되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붙는 비용 처리만 그만큼 더 늘어났다. 따라서 은퇴는 평생의 노동과 헌신을 내려놓고 편안해지는 시기가 아니라 늙어서 병들어 지낼 불안과 공포의 미래를 예고할 뿐이다.
그러나 미래를 위한 이러한 것들의 준비는 불명료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 불안을 억제하기 위해 현재의 많은 것에 대한 포기가 담보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 이 순간의 놀라운 기쁨이나 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거기’를 위한 소모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많아진 현대인은 더 이상 무모한 모험을 원치 않으며 자유롭다는 자기기만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모든 객관적인 행복의 요소가 갖추어져 있을 때에는 “바로 이거야,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났어. 바로 이거야!”라고 감탄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행복하기는커녕 권태로울 뿐이다. 행복은 현실 사회의 질서에서 욕망에 부응해야 하는 것이 되었고, 더 이상 “열려라 참깨!” 같은 마술적 발명이 아니다.
질병 또한 신체의 부위에 나타난 비정상적인 것으로, 제거 대상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다. 질병에 대해 “엄마 손은 약손”이나 “아브라카다브라”각주1) 의 주문은 철없는 어린아이나 하는 것으로,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취미로, 또는 장기자랑에서 보여 주기를 목적으로 마술을 배운다. 마술이 보편적인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제 마술은 더 이상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기적이 아니며, 신비의 힘을 일으키지도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욕망을 투사한 물질적 허구에나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 되었다. 일상을 상상 속으로 옮겨놓은 잡지와 TV광고 속의 그림 같은 옷과 자동차, 집, 가구, 휴가, 여행을 보라. 그것들은 현실적 사물들이지만 손에 넣기에는 불가능한 고가의 것들이기 때문에 허구적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현실적 사물이기 때문에 상상적 소비를 통해 더욱 크게 욕망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만큼 또 마술을 꿈꾼다. 원인 모를 페스트가 번져 간 것처럼 행복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것은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음악, 날씨, 휴일 등 모든 행복의 요소가 갖추어져 있을 때에는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새 드레스」의 여자처럼 가끔 특별한 이유 없이 즐거운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여러 개의 문이 열린다. 사랑의 문이, 모험의 문이 가능해진다. 마술은 믿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것, 그 느낌에 취하는 것이다. 그때 행복이 문을 열고 건너오는 것이다.
날건 말건?!
여기저기 아픈 몸은 일상 세계에 배어 있다. 특히 만성 질병은 개인의 삶 곳곳에 순간마다 발현된다. 많은 예술가들 중에 질병을 앓았던 이들은 질병이 삶의 일부였다는 것을 그들의 작품을 통해 보여 준다. 아니 에르노의 어머니가 기억을 상실해가는 식으로,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우르비노 박사 또한 건망증의 증세를 시작으로 극단적인 망각의 상태에 이른다. 그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주머니에 구겨 넣은 메모 종이가 무슨 의미였는지조차 잊어버렸으며, 안경을 쓰고도 안경을 찾는다며 집 안을 뒤졌다. 문을 잠근 후에도 다시 열쇠로 돌리며 잠갔고, 책을 읽어도 논지의 가정이 무엇인지 혹은 작중 인물들의 관계가 어땠는지 잊어버려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이성에 대한 불신으로 불안에 떨어야 했다. 가톨릭의 골수 신자가 아니었더라면 늙는다는 것을 제때에 막아야 하는 꼴사나운 상태라고 생각했던 친구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를 뒤따랐을지도 모른다.
황동규 시인이 겪은 비문증(飛蚊症)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문증을 앓는 황동규 시인처럼 만성 질병을 몸에 들여놓은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치료를 통해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는 비율보다 높다. 비문증은 마치 눈앞에 모기가 나는 것 같은 현상으로 황동규 시인이 책을 난독해서 생긴 병이다. 어느 가을 증세가 심해져서 눈을 꽉 감았다 떴는데도 안 없어져서 고생을 하는 중, 시를 쓰다가 문득 ‘(모기가)날면 어때’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그것이 시 「비문」이 되었다.
잠깐 스친 비에 젖다 만 낙엽을 밟으며
석양을 만나러 갔다.
어떤 이파리는 아직 살아 있다는 듯
빨갛게 익은 얼굴로 바지에 달라붙기도 했다.
구절초들이 시들고 있었고
날개 가장자리 몇 군데 패인 네발나비가
꽃 위에 앉아 같이 시들고 있었다.
세상 구석구석을 찬찬히 녹이는 황혼,
마치 거대한 동물의 내장 같군,
누군가 말했다.
늦가을 저녁
나무, 꽃, 나비, 새 들이 그대로 녹는 빛 속에
벌레 하나 눈 속에서
녹지 않고 날고 있다.
고개를 딴 데 돌려도 날고 있다.
눈을 한참 꾸욱 감았다 뜬다, 눈물이 고일 만큼.
눈물에도 녹지 않고 날고 있다.
날건 말건!
시에서 “날건 말건!”은 자신의 눈에 비문이 보일 때마다 타이르는 주문과도 같다. 시인이 그 증세가 생길 때마다 이 말을 썼더니 효과가 있었다. 그 뒤로는 생각날 때만 모기가 날고 보통 때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증상이 완화되었다. 비문증은 노화와 관련된 질병으로 호전되기 어렵다. 어떻게든 그 증상에 익숙해져야 했을 것이다. 그는 이것을 삶과 시의 공생으로 설명했는데, “날건 말건!”을 통해 “자신의 통증을 의식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설득의 내면화 과정”(최은주, 「일상으로서의 질병과 몸」)을 거쳤다. 이로써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경계는 개인이 느끼는 괴로움의 정도에 따라 병원에 가거나 혹은 가지 않는 선택 상황이 되면서 불분명해진다.
이처럼 병원 치료로도 아프기 이전의 몸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완치’의 개념은 일상으로 복귀가 가능해지는 것이지 아프기 이전과 똑같은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 폐결핵을 앓고 완치가 되었어도 폐는 상당한 손상을 입는다. 나이가 들어 폐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그러한 상흔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몸은 나의 의식을 건드리면서 어떤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지만, 증상을 불가피하게 내 몸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따르는 것이다. “날건 말건!”의 ‘느낌표’로 우리 몸을 다독이면서 삶을 지속시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황동규 시인의 “날건 말건!”의 자기 주문식 느낌표가 “날건 말건?”의 물음표로 전환되고 있다. 과학기술 전문가인 라메즈 남( Ramez Naam)이 『인간의 미래』에서 지적한대로 인간은 계속해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걸리버처럼 인간은 영원한 삶을 원했고 그것은 새로운 도전과 발견으로 진행되어 왔으므로 더 나은 치료법은 물론 인간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의료기술까지 가능해졌다. 그것은 더 이상 종교에서 우려하는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가능한’ 영역의 확장인 것이다.
그런데 눈부신 의료기술의 발달과 반대로 여전히 의학 분야에서 놓치거나 간과하는 구멍들이 있다. 그 구멍들은 의학 개발이 지향하는 방향성과도 관계가 있다. 생명 구제의 지평이 질병 자체의 제거 및 절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거기에 달라붙는 부작용이나 합병증은 부수적이다. “이건 상당히 아픕니다”라든가 “재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와 같은 식의 설명은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비어 있는 언어인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질병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 추상적 총체이다. 인간이 이름붙인 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에 질병의 추상성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증폭시킨다. 그래서일까. 질병은 재앙이자 추한 것으로, 회화의 전통 속에서 악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처럼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 나타나는가 하면,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기 때문에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눈부신 의학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앓았던 질병의 흔적이 몸속에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어느 정도 불치병 하나쯤을 안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관상의 장애로 질병이 드러나는 몸을 가졌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집에나 있지, 뭐하러 나왔어?”라는 핀잔과 눈총을 받는다. 질병은 개인이 겪는 고통을 넘어 보는 사람에게 혐오스럽고 비위 상하는 것으로 비친다. 따라서 질병을 앓는 사람은 수치심을 느끼고 그것이 자신의 결함인 듯 숨어들게 되는 것이다. 재활할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스 마치몬트처럼 상실감과 좌절감에 빠져든다.
2010년에 미국, 네브라스카주에 잠시 머물 때 지역 신문에서 소개된 전시회에 가게 되었다. 그날이 전시 오픈식이어서 작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작품은 특이한 이력을 담고 있었다. 작가는 뉴멕시코 출신의 에디 도밍게즈(Eddie Dominguez)라는 조각가였다. 그의 작품은 어깨부터 허리까지의 토르소 모양의 세라믹으로 색색의 꽃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는 예전에 사고로 허리 부상을 입었고,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 후, 치료가 끝나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통증과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 치료는 사고 이전의 몸을 완전히 복원시키지 못했다.
셉티머스의 아내가 남편을 숨겨야 하는 실패로 여기는 것과 달리, 에디 도밍게즈의 고통은 가장 밝고 화려하게 재현된다.
이때부터 사고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자신의 몸에 대해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함이었다. 그때부터 토르소 모양의 세라믹을 캔버스로 삼고 조각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바로 자신의 불편함을 다루는 작업이었다. 그는 세라믹을 놓고 자신의 허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부위와 꼭 같은 위치에 가장 화려한 꽃들이나 십자가를 새겨 넣었다. 이러한 작업은 질병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그리고 그것을 몸에 길들이면서 마치 원래부터 자신의 것인양 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설득의 과정이었다.(최은주, 「그로테스크한 몸인가, 그로테스크한 세계인가」)
이렇게 했다고 해서 그가 회복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작업을 통해 황동규 시인과 마찬가지로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날건 말건” 대신에 “아프건 말건”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그가 치료를 거부했다는 것이 아니다. 의학은 주로 표준적 증상에 대략적으로 맞춘 회복을 돕는다. 내가 치료로 인해 아프기 전의 몸을 복원할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개인마다 정도가 다르게 고통이 남기도 한다. 이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고통에 좌절할 수도 있고 고통을 이겨낼 수도 있다. 혹은 좌절과 극복이 순간마다 교차하기도 한다. 이때 나의 자세는 건강한 사람과는 다른 층위의 삶을 경험한다. 삶이 확장되는 것이다. 그것은 기계적으로 삶을 반복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느낌들이다. 사건과 부딪치고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만 삶을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확장은 깊은 사색을 통해 이루어진다. 질병이 가진 침묵에 다가가는 순간, 사물도 이전의 똑같은 사물이 아니다. 질병의 침묵 속에서 사물은 언어활동에서 해방된다. 시간 또한 다르게 인식된다. 시간은 더 이상 숫자로 인식되는 그 시간이 아니다. 그냥 1분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일 수도 있다. 또는 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일 수도 있다. 전자레인지 앞에 서서 기다리는 1분과 출근 시간이 정해진 아침 침대에서 “1분만 더”라고 외칠 때의 1분이 엄연히 다르듯이 말이다. 고통은 전진하던 삶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그동안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과 우선시했던 것들을 순식간에 바꿔 버리기도 한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뇌졸중에 걸린 어떤 교수에 대해 소개한다. 교수는 “이전에는 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너무 쉽게 말이 나왔다. 그러나 그 말은 다른 어떤 말로부터 재빨리 튀어나온 것이지, 침묵으로부터 천천히 솟아오른 것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지금은 ‘병 덕분에’ 한마디 말이 음성으로 변할 때 하나의 사건이 되고, 침묵으로부터 다시 한마디 끌어내면 그것은 하나의 창조와 같다. 건강했을 적에 결코 이루지 못했던 것, 즉 침묵으로부터 말이 나오는 것을 비상한 일로서 체험하는 일을 병을 통해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교수는 그렇게 자신의 병을 초월했다. 병을 통해 그는 더 이상 이전의 그가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활동적이던 프리다 칼로가 교통사고 후 석고붕대에 꽁꽁 묶여 누워 있어야 했던 그 기나 긴 시간들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삶과 같다.
병의 통증은 다른 경험과 마찬가지인 하나의 경험이다. 뇌졸중에 걸린 교수와 프리다 칼로는 관찰자의 태도를 가지고 자신의 몸과 함께 공존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수전 웬델(Susan Wendell)각주2) 이 제시한 ‘초월’의 자세와 맞닿는다. 즉, 현재의 통증이 삶의 전부가 아니고 전적으로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도 아님을 깨달으면서 아픈 가운데에서도 할 일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태도이다. 병과 맞서야 하지만, 고통에 의한 다른 차원의 존재 양식, 타인과는 절대 공유될 수 없는 새로운 인식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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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버지니아 울프, 「새 드레스」, 『버지니아 울프 단편소설 전집』, 유진 옮김, 하늘연못, 2006
- ・ 황동규, 「비문」, 『꽃의 고요』, 문학과지성사, 2006
- ・ 최은주, 「일상으로서의 질병과 몸」, 『일상 속의 몸』, 몸문화연구소 편, 쿠북, 2009
- ・ 라메즈 남, 『인간의 미래』, 남윤호 옮김, 동아시아, 2007
- ・ 최은주, 「그로테스크한 몸인가, 그로테스크한 세계인가」, 『그로테스크의 몸』, 몸문화연구소 편, 쿠북,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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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질병은 시대마다 탄생하고 유행하는 것이다‘건강’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것처럼, ‘질병’의 기준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질병, 영원한 추상성]은 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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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브라카다브라 – 마이크로인문학5-질병, 영원한 추상성, 최은주,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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