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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은 내가 고통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는 것뿐이야.프리다 칼로, 『나… 프리다 칼로』
병원 치료가 일단락되면 환자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만으로 정상적인 일상을 회복한다는 뜻은 아니다. 홀로 방안에 틀어박혀야 하며, 병의 징후가 딱지처럼 달라붙어 있다. 방 안에는 환자의 침묵이 있다. 침묵 위에는 더 큰 침묵이 덮고 있다. 뒤이은 통원 치료라는 것이 남아 있고 재진이 기다린다. 그리고 수많은 약들이 예전의 시간 개념과는 다른 시간성으로 맞춰져 철저하게 복용되어야 한다. 나의 몸은 마치 약물에 절여 놓은 것처럼 약 냄새를 풍기는 것 같다. 언제까지 이 약들을 먹어야 하나? 증상이 사라질 때까지. 혹은 죽을 때까지일지도 모른다. 협소한 방에서 환자의 생활이 시작된다. 아무런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격리되어 미래나 사교는 접어 둬야 한다.
멕시코 출신의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독특한 그림 형식뿐만 아니라 ‘고통’이라고 하는 문제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인물이다. 18세 때 타고 있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면서 그녀의 척추와 골반, 왼쪽 어깨,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오른발이 으깨졌다. 게다가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버스의 승객용 손잡이가 달린 쇠 파이프가 몸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옆 가슴을 뚫고 골반을 통해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오는 중상을 입는다. 이 사건이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되어 그녀만의 독특하고도 위대한 그림이 세계유산으로 남게 되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 큰 것이었다. 프리다는 3개월을 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고, 다시 9개월 동안 석고 보정기를 착용하여 척추를 고정해야 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 따랐다. 그녀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지금 나는 고통으로 가득하고 얼음처럼 투명한 행성에 살고 있어. 한 순간에 모든 걸 알아 버린 것 같아. 내 친구들은 서서히 여자가 되겠지. 나는 잠깐 사이에 늙어 버렸고, 이제 모든 것이 지루하고 단조로워.
활동적이었던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캐노피 침대의 지붕 밑면에 부착된 거울을 통해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거나 손거울을 비쳐 석고 깁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병은 평생 그녀를 놓아 주지 않았다. 평생 척추와 오른발의 통증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수 차례의 수술과 깁스를 하는 동안 통증이 있기 전 자신의 몸이 어떠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삶은 병과 무기한 동거 상태에 들어갔다. 항상 미래의 계획에 대해 묻곤 하던 아버지는 더 이상 딸에게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어떤 미래도 약속할 수 없는 삶의 중단을 의미했다. 그러나 프리다는 “가족에게 짐은 되지만 자기 앞가림은 하는 불구자가 되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에 다짐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깁스에 그림을 그리던 딸에게 이젤과 캔버스를 선물한다.
다른 어떤 것도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수단을 발휘하였다. 고통은 그 고통을 담아내는 그림을 통해 서사화되었다.
마침내 걷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물리치고 프리다는 걷는다. 그러나 그녀의 상태는 완치를 의미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재발하는 허리 통증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통을 내면화하면서 살아야 했고, 잇따른 수술이 사고보다 더 큰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곳이 다 아프지만 대신 세상이 끝나는 날엔 그만큼 더 잘 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위안 삼는다. 임신하게 되었을 때 고통을 걱정하는 남편에게 그녀는 “고통에 익숙하다”는 대답을 한다. 그러나 아이를 갖는 것 자체가 위험이었기 때문에 유산을 하는 또 다른 시련을 겪는다. 이런 자신의 몸을 그녀는 “부서졌다 다시 부서지는 직소퍼즐”에 비유한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그녀의 그림 속에 투영되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듣는 인생에 대한 “인생의 쓴맛처럼 냉혹하다”는 비유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비유 이상으로 그녀의 그림은 직설적인 인생의 쓴맛을 보여 준다.
그녀의 그림에서처럼 그녀는 석고 보정기가 아닌, 보철을 몸 속에 넣어야 했다. 여기서 나는 한 여인의 감동적인 일화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동적이라기보다 고통 그 자체를 보여 준다. 무엇보다 그녀의 모든 상황이, 의학적 개입을 뛰어넘는 개인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러나 프리다는 정상적인 일상과 불편한 환자로서의 삶을 구분 없이 살아 냈다. 그녀 또한 미스 마치몬트가 될 수도 루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이력서는 인상적이다.
프리다의 이력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 “내 그림들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 그림이 내 삶을 완성했다. 나는 세 명의 아이를 잃었고, 내 끔찍한 삶을 채워 줄 다른 것들도 많이 잃었다. 내 그림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
전 12년 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통사고 때문에 일 년 가까이 누워 지내야 했던 때였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항상 제 느낌에 따라, 자발적인 충동에 의해 그림을 그립니다. 특정한 유파나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말로 할 수 없던 것들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에서 얻는 만족감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 제 그림의 주제는 늘 제 감각과 감정 상태, 제 내부에서 일어나는 깊은 반응들이고, 저는 종종 이런 주제들을 자화상으로 구체화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과 내 앞에 있는 것들에 대해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진지하고 진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이력서에는 불구에 대한 자기방어나 감동을 유도하는 그 어떤 표현도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사고가 계기가 되어 그림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되었고, 그림이 자신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 지독한 통증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병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재현한 그림들은 고통스럽지만 자기 자신을 느끼고 깨닫기를 멈추지 않는 데에서 가능해진 재현이다. 마침내 고통은 그녀가 제일 잘 다루는 일이 된다. 가다머가 고통을 ‘체험’이라고 칭한 배경에는 고통의 완화와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다른 현상에서는 볼 수 없는 고통의 경험이 유한한 주체성을 지닌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인생을 “우리에게 더 가깝게 접근하도록 하는 것”(가다머, 『고통』)이다.
이렇듯 프리다는 평생 여러 번의 수술과 유산을 경험했고 거의 언제나 고통 속에 있었다. 고통이 삶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의지가 되었다 해서 그녀가 고통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몸을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성적인 고통이 오히려 몸을 끊임없이 자각하게 했을 터이다. 그러니 아픈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외부 세계와도 투쟁해야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몸과 의식, 자아 간의 관계와 거리를 조절하고 재설정하면서 닥쳤을 좌절감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죽기 직전의 일기에서 그녀가 남긴 말은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다. 그녀는 그녀 앞에 다가온 삶을 거부하지 않고 힘차게 살았지만, 다시 살고 싶지는 않을 만큼 뼈저리게 고통을 경험했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그녀의 삶을 살고 싶지 않을뿐더러 그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프리다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삶이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과 그런 삶을 방해하는 것이었기에 고통에 저항해야 했을 뿐이다.
자신의 사고와 고통, 유산의 슬픔을 수용하는 것. 그리고 끝없는 시련 앞에 저항해야만 살 수가 있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그녀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그 누구가 아닌, 자신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겪은 사건은 흔치는 않지만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 경험은 그녀를 통해 고유한 힘을 발휘하여 신비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어떤 특정한 고유의 가치를 갖는다.
어머니, 한 여자
예전에는 몸이 아프면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요양을 했다. 크게 치료약이 없으니 쇠약해진 심신을 쉬도록 하는 것이 최고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형의 집』의 노라는 남편 헬메르를 이탈리아로 데려가 요양을 시키기 위해 빚을 져야 했다. 『페스트』의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아픈 아내를 멀리로 요양 보내야 했다. 이후에는 자연 치유법이 아닌 전문 요양소에 일시적 혹은 장기적인 입원이 장려되었다. 앞 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댈러웨이 부인』에서 휴의 아내 이블린 또한 신경쇠약으로 입원한다. 셉티머스는 요양소에 가는 것이 두려워 자살한다. ‘전문’ 요양병원 혹은 병원은 의사의 진단을 최우선으로 해서 선택되는 곳이다. 격리를 시켜야 전문적 치료가 보장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그런데 요양병원의 상태는 요양시설이 제일 발달했다는 프랑스를 보아도 환자를 보살피는 일이 서비스이지 휴머니티일 수가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해 준다.
어머니는 이곳 병원에 도착했을 때 집에서 가져왔던 옷가지들과 안경을 몽땅 잃어버렸다. 6개월 전 우리 집에 계실 적에 그토록이나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이었다. 여기서는 한 번 잃어버린 물건은 다시는 찾을 수가 없다. 키가 크고 검은 머리에 간호사 캡을 쓴 간호원장은 거만스러웠다. 어차피 이 노파들은 죽게 될 것이라는 식의 냉담한 태도가 역력했다.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의 요양병원에 관한 묘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치매 환자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공허함도 그렇지만, 가까운 사람이 병을 앓을 때 일상 세계는 크게 달라진다. 그리고 그 병이 병약한 육체일 경우만이 아니라, 정신의 것이라면 더 큰 일상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노년이 길어지고 노령 인구가 증가했다는 것은 치매나 알츠하이머와 같은 정신질환의 증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질병이야말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공포에 떨게 만든다.
딸은 어머니처럼 일체 사물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갔다. 미스 마치몬트가 루시의 모든 것이 되어 협소한 생활 세계로 들어갔던 것처럼, 아니 에르노 또한 모든 것에 대한 욕망을 상실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니의 모습을 잃어 가는 어머니는 본능적인 행동만을 보여 주는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어머니가 바로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용서가 안되다가, 다시금 어머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든다. 여기저기 오줌을 누는 어머니를 때려 주고 싶은 분노와 공포, 그리고 두려움이 교차했던 것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은 어머니의 과거 삶 속에서만 어머니와 공유한 것들이 존재할 뿐, 현재 어머니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그녀의 어머니였지만, 이젠 더 이상 어머니 자신은 아니었다. 그런 어머니에 대해 딸은 부끄럽게 생각한다. 누구나 이 병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아픈 가족에 대해 감정적인 상태가 되는 까닭은 가족에 대한 자신과의 동일시 때문이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였고 ‘내 유년기의 그 여자와 같은 여자’였다. 어머니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체감이 크면 클수록 어머니를 냉담하게 대하게 된다. ‘내가 바로 그녀’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모와 사촌들마저 “넌 네 엄마를 쏙 빼닮았어. 꼭 네 엄마를 보고 있는 것 같아!”라고 말했던 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무엇보다 언어와 시각의 불안정성에 대한 것이다. 그녀조차도 기록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나는 어머니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 내지 못하고 항상 미흡하게 전달할 뿐이다.” 그녀는 죽어 가는 어머니의 몸을 눈앞에서 보고 있지만, 그 모습은 무릇 비현실적이다. 점차 쇠약해져 가고 동물적인 본능만이 강하게 드러나는 어머니는 예전의 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모습을 어머니의 참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현재의 모습을 어머니의 참모습으로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과거에 붙들려 있는 자신의 기억 때문에 어머니의 비현실적인 현재 상태를 언어로 재현해 내는 것은 어머니를 지켜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는 곧 회복될 것이다. 침대와 안락의자에만 머물러 있는 형편이 되더라도 그런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딸의 믿음과 달리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그런 상태로 여러 해를 사신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말했다. 모두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더 나았다. 그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의 문장, 하나의 확신이었다.
어머니를 좀 더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오해 없는 소통을 꿈꾸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사물에 집착함으로써 세상에 매달려 있고자 고군분투하던 어머니는 개인 소지품들을 하나씩 하나씩 전부 잃어버리는 어머니가 되었고, 마침내 어머니에게 하는 말들은 어머니에게 의미로 가닿지 못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하는 말들은 말이 채 되지 못하는 말들뿐으로,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상상의 세계에만 복종하는 단어들이 되어 갔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프기 전에도 이미 어머니와 딸은 비껴가는 대화를 일삼았었다. 어머니는 딸에게 “넌 집에 있는 게 지겹지도 않니?”라고 물었었다. 그때는 어째서 어머니가 그런 질문을 하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니 에르노와 연관 지어 무슨 말을 할 때에는 어머니 자신의 상태가 바로 그렇다는 뜻이었다. 집에 있는 것이 지겨웠던 것은 바로 어머니였던 것이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시는 동안 에르노 자신도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각자 제각각인 질병의 고통을 어머니의 고통과 동일시할 수는 없었다. 고통을 바라보는 것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확연하게 다른 일이었다. 김훈의 소설 「화장」에서 전립선염을 앓는 남자는 뇌종양으로 죽은 아내를 빈소에 두고 방광의 오줌을 빼러 병원을 찾는다. 아내의 임종 소식을 듣던 순간, 터질 듯한 방광의 무게에 짓눌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남자에게 있어 아내의 고통은 시각적이었던 반면, 자신의 병은 신체 내부의 자극에 의하여 일어난 통각에 의해 전달되었다.
변기에 앉아서 방광에 힘을 주었더니, 고환과 항문 사이로 날카로운 통증이 방사선으로 퍼져 나갔다. 성기 끝에서 오줌은 고드름 녹듯 겨우 몇 방울 떨어졌다. 붉은 오줌방울들이었다. 요도 속에서 오줌 방울들은 고체처럼 딱딱하게 느껴졌고, 오줌이 빠져나올 때 요도는 불로 지지듯이 뜨겁고 쓰라렸다. 몸 속에 오줌이 남고 사지가 모두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밤새 나온 오줌은 붉은 몇 방울이 전부였다. 배설되지 않는 마려움으로 내 몸은 무겁고 다급했다. 다급했으나 내보낼 수는 없었다. 밤새 다섯 차례나 화장실을 들락거렸지만, 오줌은 성기 끝에서 이슬처럼 맺혔다가 떨어졌다. 죽은 아내의 시신이 침대에 실려 나갈 때도 나는 방광의 무게에 짓눌려 침대 뒤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 느낌은 자신의 몸을 낯설게 만드는 동시에 수치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과는 종류가 다른 아내의 고통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입장에서만 한정적으로 이해되는 시각적인 것이다. 아내가 발작적인 두통을 호소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먹던 것을 뱉어 내다가 마침내 시퍼런 위액까지 토해 놓고 정신을 잃던 모습을 통해서 겨우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내의 병에 대해 의사가 설명하던 말 또한 의미화되지 못한다. 종양이란 생명 속에서만 발생하는 또 다른 생명으로 종양과 생명을 분리시킬 수가 없다는 것도, 죽은 자는 종양에 걸리지 않고 살아 있는 자만이 종양에 걸리는 것이기에 종양 또한 삶의 증거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남자에게는 비어 있는 말이었다. 의사는 종양을 들어낼 수는 있어도 종양을 빚어내고 키우는 환자의 생명에 개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남자는 그 뻔한 소리, 그 하나 마나 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뻔함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것은 속수무책의 다른 말이었기 때문이다. 의학과 처방약의 매끄럽지 못한 접근이 완치로부터 벗어나는, 따라서 지속되는 삶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질병에의 투쟁을 환자와 가족은 고스란히 안고 가야 할 뿐이다.
아내의 뇌 속 종양은 MRI사진 속에서 골프공 모양으로 존재한다. 첫 번째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러나 아내의 종양은 여섯 달 뒤에 재발했다. 이때도 의사는 남자를 불러 아내의 뇌 사진을 보여 주면서 재발이 아니라고 말한다. 먼젓번 종양은 없어졌고 새로운 종양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의사의 말은 아내가 보이는 후각과 미각의 이상, 30킬로그램까지 떨어진 체중으로 대신 증명되었다. 이것은 대화를 통한 이해가 아니라 시각을 통한 이해였다. 이처럼 언어의 소통 불가능성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소통 불가능성. 남자의 아내는 해부학 교실에 걸린 뼈처럼 앙상한 두 다리와 검버섯 피고 늘어진 피부를 하고 있다. 아내의 몸을 씻기고 닦자마자 똥물을 흘리던 아내는 미안하다고 울면서 말한다. 남자는 아마도 아내가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래고 또 가망 없는 병 수발의 피로감은 가까이에 있는 죽음이지만 얼마나 가까워야 가까운 것인지 알 수 없음에도 지속시켜야 할 일상의 일부였다. 그리고 시각과 후각을 통해 삶을 지배하는 질병을 놓지 않고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사랑의 추상성이 필요했다. 그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질병의 추상성과 투쟁할 수단이었고 남자에겐 절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행동으로 이행할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그를 지탱시켜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대상이면 족했다.
아내의 처절한 울음과 두통 발작과 수치심이 수면제 주사로 잠잠해지는 시간에 그에게 밀려오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향해 있는 생명력을 그대로 간직한 존재이자 이름, 젊은 여인의 살과 식욕과 그녀의 아이였다. 아내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계통 없는 냄새들을 덮을 수 있는 것은 출산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젊은 여인의 엷고도 비린 젖 냄새였다. 그는 이 젊은 여인의 몸을 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삶을 작동시키는 허파와 심장과 장기, 그리고 몸 속을 흐르는 피의 온도와 체액에 대한 상상으로 자신의 결핍된 몸과 마음의 구멍을 채우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삶에 매달리고자 하였다. 마침내 아내가 죽자 그의 이 내면 여행 또한 끝을 맺고 남자는 깊은 잠에 빠진다.
침묵의 세계
『댈러웨이 부인』에서 루크레치아 또한 남편 셉티머스가 겪는 고통의 질감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상상해야 했다.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상상력을 다 사용해 봤지만 이미 그 너머에 있는 남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남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남편은 길에서 총성을 듣고 두려워 꼼짝을 하지 못한 채 서있다. 그는 서른 살 가량 되었으며, 날카로운 콧날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갈색 신발과 허름한 외투를 걸치고 있다. 엷은 갈색 눈은 불안한 눈초리를 하고 있어 생판 모르는 사람마저도 불안해질 정도였다. 전쟁이 끝나 평화로워졌으나, 사람들과 셉티머스에게 이 총성은 무시무시한 일에 대한 암시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의 상징이다.
그러나 루크레치아에게는 남편의 안색과 몸짓 때문에 사람들이 그가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들키는 것이 더 두렵다. 그리고 골똘한 시선으로 자기는 보이지도 않는 듯 행동하면 모든 것이 끔찍스럽게 느껴졌다. 하늘과 나무, 노는 아이들, 수레를 끌고, 휘파람을 불고, 넘어지는 아이들, 그 모든 것이 끔찍했다. 셉티머스를 맡았던 첫 의사인 닥터 홈스가 아무 문제 없다 했지만 그런 남편 때문에 결혼반지가 헐렁거릴 만큼 루크레치아는 살이 빠졌다. 무엇보다 남편에 대해, 남편의 실패에 대해, 혹은 그런 남자와 결혼한 자신의 실패에 대해 사람들이 눈치챌 것이 그녀는 두려웠다. 타국에서 온 그녀가 볼 때 영국 사람들과 그들의 자식과 말과 의복은 나름대로 훌륭했지만, 셉티머스가 “죽어 버리겠어”라고 한 마당에, 그들은 그저 ‘사람들’일 뿐이었다. 죽어 버리겠다니, 끔찍한 말이 아닌가. 그러나 아무에게도 그녀의 힘든 상황을 말할 수가 없다. 그녀의 고향인 이탈리아는 너무나 멀었다.
사람들이 눈치챌 것이다. 사람들이 볼 것이다. 사람들이, 하고 루크레치아는 자동차에 정신이 팔려 있는 군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영국 사람들, 그들의 자식과 말과 의복은 나름대로 훌륭했지만, 셉티머스가 “죽어 버리겠어”라고 한 마당에, 그들은 그저 ‘사람들’일 뿐이었다. 죽어 버리겠다니, 끔찍한 말이 아닌가. 사람들이 들었으면 어쩌나? 그녀는 군중을 둘러보았다. 사람 살려요. 살려 주세요! 그녀는 푸줏간 총각들과 여자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사람 살려요!
그런데 정작 셉티머스로서는 이런 아내가, 말을 걸어 오는 아내야말로 자신을 방해하는 존재이다. 의사들이 맞든 틀리든 어떤 말로도 떨쳐 버릴 수 없는 어떤 침묵이 있는 법이다. 그 침묵은 아픈 사람에게 숨어 있다. 침묵은 셉티머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에 대해 윌리엄 경도, 아내 루크레치아도, 심지어 셉티머스 자신도 진리로 완전히 채운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채워지지 않은 말의 공간 속에는 셉티머스의 슬픔이 가득하다.
결국에 자살한 셉티머스는 클라리사의 파티에 초대받은 윌리엄 경 부부의 발걸음을 늦추게 만든다. 그들의 일상을 방해한 셉티머스의 자살 소식은, 그래서 파티를 개최한 클라리사에게는 재난이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화려한 저녁 파티와는 모순된 불쾌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청년이 창가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는 소식은 동시에 클라리사로 하여금 예전에 자살 충동에 사로잡혔던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그녀에게 죽음은 도전이었다. 좌절이 아니라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자살한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든다. 아니, 그녀 대신에 그가 자살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두려움은 빠져나가고 하늘이 눈에 들어왔고 이상하지만 행복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좀 더 천천히, 좀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셉티머스는 죽었지만 모든 것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불쌍히 여겨서는 안 될 것처럼 느낀다. 그러고는 그녀가 소설 내내 읊조렸던 셰익스피어의 극 「심벨린」의 한 구절을 읊는다.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이것은 그만 삶을 내려놓은 셉티머스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삶을 지속시키려는 클라리사의 선택을 가능하도록 해 주는 주문 같은 시다.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사나운 겨울의 횡포를.
세상에 남은 그대의 의무는 다하였고,
이제 그 값을 취하고 돌아가길 바라노니
빛나던 젊은이와 소녀들 역시 반드시 그래야 하듯이
굴뚝 청소부와 마찬가지로 먼지로 돌아가리.
더는 두려워 말라, 군주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는 이미 그의 폭정을 지나왔나니.
더 이상 염려하지 말라. 입을 것과 먹을 것.
그대에겐 갈대와 참나무와 다르지 않노라.
왕권도, 학식도, 의업도, 그 모두가 진정
이를 따라 먼지가 되나니.
더 이상 두려워 말라, 번갯불과,
그리고 무서운 뇌우를.
중상과 책망을 두려워할 까닭이 있으랴.
기쁨과 신음은 이미 멈추었으니.
모든 젊은 연인들, 그 모든 연인들 역시
그대의 길을 따라 먼지가 될 것이다.
그 어떤 심령술사도 그대를 해하지 못할지니!
그리고 그 어떤 마법도 그대를 홀리지 못할 것이다.
떠도는 원혼은 그대를 눈감아 주고!
그 무엇도 그대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침묵 안에서 온전한 그대 되기를.
기원하노니 그대 묻힌 곳 잊히지 않기를!
클라리사가 자신의 삶을 지속시키려는 의지에서 주문처럼 사용한 이 시는 오히려 셉티머스에 대한 클라리사의 진혼곡 같다. 셉티머스는 죽었지만, 죄를 지었다는 괴로움으로부터, 그리고 병 때문에 사회로부터의 소외되어야 하는 부당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느낄 수가 있다. 결국 한 사람의 삶은 타인의 죽음이 드리운 길을 밟으면서 이어진다. 셉티머스의 죽음이 클라리사에게 시보다 더 강력한 삶에의 주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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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프리다 칼로, 『나 프리다 칼로』, 이혜리 옮김, 다빈치, 2004
- ・ 아니 에르노,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김선희 옮김, 열림원, 1998
- ・ 아니 에르노, 『한 여자』, 정혜용 옮김, 열린책들, 2012
- ・ 김훈, 「화장」, 『강산무진』, 문학동네, 2004
글
출처
질병은 시대마다 탄생하고 유행하는 것이다‘건강’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것처럼, ‘질병’의 기준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질병, 영원한 추상성]은 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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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직소퍼즐 같은 몸 – 마이크로인문학5-질병, 영원한 추상성, 최은주,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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