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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시인
출생 연ㆍ월ㆍ일
1933년(함북)
경력
1950.6.25 전쟁중 의용군 입대 1951년 노동당 입당
활동사항
1958년 ‘갈매기’ 조선작가동맹 출판사 간행 1960년 ‘철의 도시에서’(시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간행 1980년 ‘광부의 말’(시) 1981년 ‘인민의 한마음’(시) 1982년 ‘언제건설자의 노래’(시초) 1983년 ‘붉은 화살’, ‘조선아’(시), ‘해빛은 남해 끝까지’(연시) 1986년 ‘유혹과 신념’(시) 1987년 ‘녀전사는 군복을 벗지 않으시였네’(가사), ‘동갑의 모습’(시) 1988년 ‘내 마음엔 언제나 하늘이 열려있네’, ‘사랑하는 내 조국’(가사) 1991년 ‘사랑하는 나의 조국’(남성독창과 합창), ‘용서하시라’(여성 독창), ‘우리 노래의 시작도 끝도’(시) 1994년 ‘그이의 하루’(가사) 2000.11.30~12.2 제2차 이산가족 상봉단으로 방북한 형 김 환 화백 만남 2001.2.17 조선중앙방송 출연 수기 발표
프로필
북한최고의 현역시인으로 자라가 공인하는 북한시단의 원로. 2001년 1월호 ‘조선문학’에 자신의 살과 작품을 뒤돌아 보는 수기를 게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작가들의 수기 또는 회고록 가운데 최고의 명문(名文)으로 꼽히는 이 수기에서 젊은 작가들의 창작태도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기술. 젊은 작가들이 사회에서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으면서도 책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비판의 요지. 그는 “우리 나라 진보적 작가들이 어떤데서 글을 썼는가, 민촌(民材, 리기영)이 죽은 아이를 곁에 눕힌 셋방에서 소설을 씨야 했고 최서해가 아궁이 재 속에서 귤껍질을 뒤져 낸 젊은 아내를 보면서 소설을 써야 하지 않았던가”라며 특히 일부 젊은 작가들의 무절제ㆍ산만성ㆍ개인주의ㆍ영웅주의ㆍ이기주의 등을 질타했다. “진실로 작가로 불릴 만한 사람에게는 출생 년월일은 있어도 사망 년월일은 없다”며 젊은 작가들에 진실한 작품을 쓸 것을 당부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작가학원에 들어가 문학 수업을 받았다 이 무렵 ‘더는 쓰지 못한 시’로 문단에 데뷔했다. 20대 중반까지 비교적 순탄했던 그의 인생은 60년대 초반 반전된다. 이미 시인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날리고 결혼도 한 김 철이 한 여인과의 불륜으로 지방의 노동자로 雲겨나고 만다. 당시 작가동맹은 그의 재능을 아껴 “여인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당원 증명서를 내놓을 것인가”라며 양자택일을 요구했는데 그는 사람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후 단천연합광업기업소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그 좌정에서 건강을 크게 해쳐 한때는 폐인이 되다시피 한 것으로 알려줬다. 김 철 스스로도 수기에서 “수십년을 끈 위장병에 간도 몹시 상한 상태였고 다른 장기들도 많이 병든 것이 확진되어 집에만 누워 있었다. 심장 하나만이 용케 정상으로 뛰고 있었다”며 그때를 회고했다. 지방의 노동자로 쫓겨난지 거의 20년만인 지난 79년 김정일총비서의 ‘배려’로 다시 작가동맹으로 돌아와 오늘에 이르렀다. 대표작으로는 ‘어머니’, ‘철의 도시에서’, ‘끝나지 않은 담화’, ‘갈매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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