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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북한연감

김병률

2003년 연감 보러가기 / 북한인명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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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중앙재판소장, 당 중앙위 위원, 제11기 대의원

출생 연ㆍ월ㆍ일

1926년(평북)

학력

체코 프라하공대

경력

1969.11 평북도 당 책임비서 1970.11 당 중앙위 위원 1972.12 최고인민회의 제5, 7~8기 대의원 1985.6 평북도 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 1995.10 군 대장 1998.7.26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제454호 선거구) 1998.9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회 위원 1998.9 중앙재판소장 1998.12 전문섭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9.9 리종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장의위원 2003.8.3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현. 제313호 선거구)

활동사항

1984.9 평북도당 대표단장으로 중국 방문 1988.6 김정일의 평북도 건설사업 부문 현지지도 수행 1991.11 군 중대장대회 개막식 참석 1998.11 전국 검찰ㆍ재판기관 일꾼 열성자 회의 참가 2001.7.9 평양방송에 소개됨 2002.5.2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마련한 베트남 천득렁 주석 환영 만찬 참석 2002.5.3 북한-베트남간 회담 참석 2002.12.10 김정일 노작 사회주의 법무생활을 강화할데 대하여 발표 20돌 기념 연구토론회 참석 2002.12.11 전국법무일꾼대회 참석

프로필

김 주석의 항일빨치산에 들어가 싸우다 전사한 아버지를 두었다는 가정배경에 힘입어 일찍부터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아버지 김중권은 1931년 중국 만주일대에서 김 주석이 소집한 명월구회의에 청년대표로 참가한 뒤 지린(吉林)성 왕칭(汪淸) 일대를 근거지로 한 ‘왕칭유격대’ 결성에 주역을 담당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김 소장은 당시 최고사령부 정부호위총국 군관으로 입대해 복무한 뒤 1951년부터 57년까지 체코 프라하공업대학에 유학했다. 귀국 후 노동당 내 여러 부서를 오가며 지도원, 과장, 부부장으로 일하다가 1969년께 김 주석이 빨치산 유자녀 출신의 간부들을 각 도당 책임비서로 배치할 때 30대에 평북도 당 책임비서로 발탁. 이듬해에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지난 72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으로 각각 선출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려 20여년간 평북도당 책임비서를 맡아온 그는 지난 89년께 갑자기 중병에 걸려 현직에서 물러난 후 약 3년간 고위간부 전용병원인 평양 봉화진료소와 독일 등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당시 김 주석과 김 총비서가 자신을 무조건 살려내야 한다면서 “강력한 치료진을 조직해주고 다른 나라에 가서 치료받도록 조치를 해줬다”고 밝혔다. 1991년께 리동춘(1994년 사망) 호위사령부 정치위원이 지병으로 물러나자 상장계급을 달고 후임자로 전격 등용됐으며 95년 10월에는 대장으로 승진한 뒤 지난 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에서 중앙재판소장으로 임명되면서 군복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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