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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2. 5. 13, 교황령 세니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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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8. 2. 7, 로마 |
국적 | 바티칸시티 |
요약
교황(1846~78 재위).
본명은 Giovanni Maria Mastai-Ferretti.
개요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오래 재위했고, 자유주의에서 보수주의로 선회한 것으로 유명하다.
재위기간 동안 1854년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공포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를 소집했는데, 이 공의회 동안 교황 무류성(無謬說)이 권위있게 정의되었다(가톨릭 교회).
재위 이전의 생애와 재위기간 초기
세니갈리아의 장관 지롤라모 마스타이 페레티와 여백작 카테리나 솔라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827~32년 혁명이 일어나 혼란한 시기에 스폴레토의 대주교를 지내면서 최초로 명성을 얻었다. 1832년 중요한 이몰라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나, 1840년이 되어서 비로소 산피에로에마르첼리노의 사제추기경이 되었다. 1846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를 계승할 만한 가장 유력한 자유파 후보자가 아니었으나 교황비밀선거회의는 이틀만에 그를 교황에 선출해 보수파 루이지 람브루스키니가 교황이 되는 것을 막았다. 교황이 된 다음 자신의 친구이자 이몰라의 주교를 지냈던 비오 7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비오 9세라는 이름을 택했는데, 이 이름을 택한 것은 어떤 점에서 보면 예언적인 일이었다.
'피오 노노'(비오 9세)는 비오 7세처럼 교황이 되자마자 자유주의 사상을 지원했는데,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성직제도에 자주 반대하고 나선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하여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1846년에는 이 모든 것이 아직 장래의 일이었고, 유럽은 자유주의자가 교황이 되었다는 비상한 현상을 주목하고 있었다.
교황은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다.
아마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를 제외한 유럽 전체는 교황령이 개혁을 해야 할 절박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831년 로마 주재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프로이센 대사들이 서명한 각서는 지방 정부를 돕기 위한 협의회를 세울 것,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되는 중앙 기구가 재정을 통제할 것, 더이상 성직자들이 행정과 사법 체제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시했다. 자유파는 그레고리오 16세의 교황재위기간을 통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이 조치들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외에도 교황청은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반도에 대해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해온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리소르지멘토).
1848년 혁명
이 혁명은 시칠리아에서 시작되어 곧 유럽 전체를 달아오르게 했고, 비오는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요청들을 받았다.
3월 14일 강요에 굴복하여 양원제(兩院制) 의회를 수립하는 내용의 헌법을 승인했다. 3월 23일 사르디니아의 카를로 알베르토는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비오는 한동안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4월 29일 추기경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은 이탈리아를 휩쓸고 있는 혁명활동들에 대해 사심 없는 구경꾼일 뿐이며, 자신의 개혁작업은 오랫동안 권력으로부터 압력을 받아온 작업을 이행하는 것일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분위기에서 이러한 감정표현은 민족주의 진영에 대해 철저한 거부감을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로마에서마저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기있는 인물들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데 동의했으나,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그 상황을 장악할 능력이 없었다. 상황은 꾸준히 악화되어가다가 11월 5일 마침내 그들 가운데 하나가 암살당하는 것으로 치달았다. 급진적인 성향의 장관이 임명되었고, 스위스 군인들로 구성된 교황청 수비대가 해체되면서 교황은 사실상 포로가 되었다.
11월 24~25일 프랑스와 바이에른 대사들의 도움으로 나폴리 왕국에 있는 가에타로 도망했다. 그가 없는 동안 제헌의회를 위한 선거가 치러졌고, 1849년 2월 9일 이 의회는 교황의 세속통치권이 끝났음과 민주공화정 수립을 선포했다. 이에 교황은 프랑스·오스트리아·스페인·나폴리 군주들에게 공식적으로 지원을 호소했다. 교황이 복귀할 수 있으려면 교황령에 있는 입헌정부를 어느 정도 선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고, 또한 새로 선출된 프랑스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도 이러한 정책에 찬성했으나, 비오는 어떠한 양보에도 반대한다고 밝히면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자신의 세속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일정 기간 군사 및 외교 정책을 편 결과 교황통치는 무조건적으로 회복되고 1850년 4월 12일 비오는 자신의 수도로 되돌아왔다.
로마 문제
비오가 과거에 자유주의자였다가 편협한 반동주의자가 되어 로마로 돌아왔다는 주장들이 종종 있어왔다.
물론 로마로 돌아온 뒤 그의 정책이 바뀐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교회의 이익이 언제나 그의 최우선적인 관심사였다.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교회에 해를 끼치지 않을 때는 이에 대해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었지만, 경험을 통해 이것이 혁명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배웠고, 처음부터 그런 줄 알았으면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 편에서 정치적인 양보를 함으로써 영적인 권력에도 공격을 당했다고 판단하고서, 영적인 권력은 오직 세속 권력을 꾸준히 행사함으로써만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오는 자신의 주권이 지니는 이 2가지 면이 일단 확고하게 연결되자 당연히 세속 군주로서 자신의 지위를 변경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비오는 1846년 교황에 즉위하면서 교황령 내부 개혁과 이탈리아 국가들의 체제 변화를 위한 적법한 요구들에 대처하려면 새출발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가 교황에 즉위하자마자 단행한 행정상의 개혁작업들 가운데 대부분은 여전히 추진되고 있었고, 1850년대 이후 유럽의 부(富)가 전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교황령도 그 덕을 입었다.
그러나 입헌정부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고, 교황의 복귀에 대해 내려진 사면(赦免)은 가치가 없을 정도로 반대가 심했으며, 교황은 민족감정을 표출하는 일체의 행위를 적대시했다. 교황정부가 전제적이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교황정부는 정치에 관심이 쏠린 이탈리아인들의 통일의 길에 철저히 장벽을 쌓았다.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를 점령했고, 10월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그결과 절대 다수가 로마를 이탈리아 왕국에 포함시키는 데 찬성했다.
비오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여생을 바티칸에서 죄수가 된 상태로 보냈다. 이탈리아 정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거부했고, 따라서 교황청과 정부의 관계는 11월 이탈리아 의회가 통과시킨 법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이 법은 교황이 비록 영토는 상실했으나 그 주권은 훼손되지 않았으며, 영토를 상실한 대가로 매년 일정액의 돈을 받게 된다고 명시했다.
또한 교황에게 다른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는 권한과 바티칸 자체와 그 주위의 작은 구역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명시했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다고 명시했다. 이로써 교황청이 비록 1929년의 정교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이 사실을 공인하지 않았으나 로마 문제는 해결되었다.
교황지상주의
위에 기술한 사건들이 교황권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듯이, 비오의 재위기간 동안 이러한 정치적 재난들에서 직접 발생한 교리의 발전도 대단히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교황지상주의는 갈리아주의와 요제프주의에 반대한 조제프 드 메스트르가 교회를 교황권에 더욱 밀접히 연결시킴으로써 교회를 세속권력의 통제라는 사슬에서 해방시키려는 데 그 뜻이 있었다. H.-F.-R. 드 라므네는 전반적으로 정치적 자유가 확대됨에 따라 교회도 그 덕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레고리오 16세는 라므네가 자유를 종교마저도 부인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단죄한 바 있다. 1846년 비오 9세는 자유주의로서 실험을 시도했으나, 나중에는 그레고리오 16세가 그것을 의심했던 것이 옳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비오가 이탈리아에서 한 가지 교훈을 배웠다면, 샤를 드 몽탈랑베르를 대변인으로 삼은 프랑스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은 성직권을 지지한 샤를 10세 때보다 루이필리프의 자유주의 체제 때 교회가 더욱 번영을 누린 프랑스에서의 발전상을 보고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반면에 제2제국이 등장하자 구식 교황지상주의를 주장한 루이 뵈이요가 이끌던 프랑스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은 자유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고서, 혁명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고 하던 권위주의 국가에서 교회의 자유를 얻으려고 했다.
1850년 이후 한동안 비오의 정책은 어느 편의 교황지상주의에게든 주목을 끌지 못했다. 교황청 국무장관이며 추기경인 자코모 안토넬리는 비오 7세 때 국무장관을 지낸 콘살비와 같은 길을 걸으면서 가톨릭 군주들로부터 더욱 유리한 정교조약을 얻어내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해서 체결한 조약들은 정치적으로는 가치가 있었는지 몰라도 지적인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를 막는 데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비오는 교회 앞에 놓인 진정한 위험은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이 교리에 포함시키려고 노력하는 현대 세속 사상들에 있음을 점차 확신하게 되었다. 1860년의 사건들을 계기로 마침내 '자유국가 내의 자유교회'라는 개념이 함정이었음을 깨달았다. 1861년 교황회칙 〈Jamdudum Cernimus〉를 발행하여 피에몬테 사람들의 침략뿐만 아니라 현대 정치론까지도 비판했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19세기 이탈리아 국가통일 운동)를 겪으면서 비오는 교회에서 자유주의를 반드시 뿌리뽑아야 한다고 확신했고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은 비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지원을 호소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몽탈랑베르가 주장한 대안은 더이상 구체제의 원칙들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권위를 교황에게 집중시켜야 할 필요를 강조하는 새로운 형태의 교황지상주의였다. 이로써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무류성 교리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자유주의세력을 물리쳐야만 했다.
1863년 몽탈랑베르는 말린에서 열린 대규모 가톨릭 대회에 연사로 초청되었고, 이로써 '자유국가 내의 자유교회' 사상을 옹호하고, 불관용을 비판할 기회를 잡았다. 비오는 답변에서 자신은 이 2가지 관점에 대해 비오 6세와 그레고리오 16세의 권위주의적인 선언들에 반대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몽탈랑베르는 이 답변만 가지고도 1864년 말린에 와달라는 2번째 초청을 거절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나, 그의 지지자 F.-A.-P. 뒤팡루가 대리자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한편 1863년 뮌헨에서 열린 대회에서 J.J.I. 폰 될링거는 학자들에게 독자적인 연구를 할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호소했다. 교회가 국가 및 현대 학문과의 관계에 대해서 권위 있는 선언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따라서 이 목적을 위해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소집 가능성에 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로마 문제가 다시 한번 결정적으로 끼어들었다.
1864년 9월 15일 프랑스 정부와 이탈리아 정부는 2년 안에 프랑스 수비대를 로마에서 철수하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실제로 군대가 최종적으로 철수한 것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시작된 다음의 일이었지만, 비오는 9월 회담의 결과를 보고 자유주의에 대한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했다. 1864년 12월 8일 교황회칙 〈Quanta Cura〉에 '우리 시대의 주요오류들' 80가지를 나열한 유명한 〈교서요목 Syllabus〉을 덧붙여 발행했다.
이 오류들은 이미 공식연설들과 회칙들, 그리고 그외 목회서신들을 통해 단죄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교서요목〉은 새로운 내용이 없었고 따라서 이의를 제기할 만한 것도 없었다. 이 회칙의 중요성은 과거에 오직 주교들을 통해서만 설교를 듣던 세계를 대상으로 발행되었다는 점과 과거에는 특정 사건들에 관련된 구체적인 단죄들이었던 것을 일반화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아마 가장 유명한 항목으로서 "로마 교황은 진보와 자유주의, 그리고 현대문화에 적응하고 동의할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견해를 비판한 80번째 항목은 교황의 권위를 〈Jamdudum Cernimus〉에서 수립된 이탈리아 왕국과의 교류를 거절한 데 두려고 했다. 〈교서요목〉은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의 지위를 훼손시켰는데, 이로써 지식인들은 그들을 추종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계획을 하찮게 여겼다.
뒤팡루는 〈교서요목〉의 배경을 요구하면서 그 안에 담긴 부정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평가절하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교서요목〉은 자유주의 가톨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 1864년 이후로는 더이상 가톨릭 논쟁가들에게 부담을 주는 주요쟁점이 되지 않았다.
루이 뵈이요의 일부 추종자들은 장차 공의회가 열리면 교회가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확고한 정통교리 진술이 〈교서요목〉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내용들을 대치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대다수는 그 싸움을 이미 이겨놓은 것으로 보고 관심을 신(新)교황지상주의 계획(로마 교회의 권위를 세속 국가의 통제에서 충분히 벗어날 만큼 중앙집권화하는 계획)의 핵심인 교황무류성을 정의하는 문제로 돌렸다.
바티칸 공의회
교황무류성 교리 자체에는 새로운 것이 없었다.
이 교리는 이미 1854년 12월 8일 성모 마리아가 잉태하는 순간 원죄의 모든 오염에서 깨끗하게 되었다는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변호할 때 쓰인 바 있다. 교황은 이미 주교들과 다른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폭넓은 조사활동을 벌여 자신의 분명한 대권행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1862, 1867년 로마에서 주교들과 그외 고위성직자의 모임에서 무류성 교리를 권위있게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 뒤팡루는 이 계획에 반대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계획을 반대한 근거로서, 이러한 정의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고, 교회와 현대사회 사이의 틈을 더욱 넓게 벌려놓으며, 교회에서 권위의 근원에 대해 한편으로 치우친 견해를 내놓게 될 것이라는 점들을 들었다. 교황이 하느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권력을 소유한다면 주교들도 똑같은 권력을 소유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주교들의 일반적인 사법권은 교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임명이나 제도가 아닌 하느님에게서 유래하며, 따라서 교회의 본질이 지니는 다른 면들을 참고하지 않은 채 교황의 권력을 정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비오는 공의회로 하여금 원래 계획했던 포괄적인 쟁점은 제쳐둔 채 편협한 정의 문제에 몰두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했다. 물론 이것이 교황지상주의자들이 바라던 바였다. 실제로 교황지상주의자들은 많은 교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는데, 그것은 지난 몇십 년간 발생된 정치적인 재난들 때문이기도 했고, 비오가 오랫동안 비극적으로 교황에 재위하면서 누린 폭넓은 명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당시에 지식주의에서 벗어나 경건에 치중한 신앙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1869년 12월 8일에 열렸다.
독일·프랑스·미국의 주교들로 구성된 반대파는 〈교서요목〉이 제시한 원칙에 따라 교회의 교리와 본질을 정의하는 것을 막을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교황지상주의파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입장을 가지고 무류성 문제를 의제로 상정했다. 비오는 1870년 2월 20일과 4월 29일에 공의회 절차를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개입했으며, 그결과 무류성에 관한 논의를 제외한 모든 논의들을 차후로 연기했다. 7월 13일 결정적인 투표가 실시되어 451명이 무류성 교리에 찬성하고 88명이 반대하고 62명이 일부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했다.
그뒤 소수파는 로마를 떠났으며 7월 18일 최종 정의안이 533:2로 통과되었다. 무류성은 교황의 성좌선언(聖座宣言 ex cathedra)에 해당하는 경우들에만 한정되었다. 비오는 그뒤 8년을 재위하면서 이탈리아 정부와 더욱 멀어졌고, 서유럽 전역에서 반(反)성직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독일에서는 이 운동이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Kulturkampf)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에 대해 비오는 1875년 2월 5일 회칙 〈Quod Nunquam〉을 발행하여 단죄하고 문제 해결은 후임 교황에게 남겨두었다.
1878년 오랜 재위기간 동안 근대 교황권을 확립한 다음 죽었다.
그의 재위기간에 대한 평가
재위기간 동안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비오의 정확한 책임은 아직도 쟁점으로 남아 있으나, 그 결과는 훨씬 분명하다.
교회와 국가는 최종적으로 갈라섰고, 교회의 권위는 로마에 집중되었으며, 교회는 주요정치세력들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비오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사건들의 중요성은 평가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방향으로만 단정했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의 재위기간에 발생한 큰 사건들은 그때문에 일어났다기보다는 그를 무시하고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교서요목〉에서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 사실 자체를 단죄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사상 최초로 세속 가톨릭 군주들이 초청되지 않음)가 해결해야 할 작업으로 보았다.
비오는 수시로 당대의 중요한 운동들을 이끈 지도자들, 자유주의파 추기경들, 교회정치가들, 개신교에서 개종한 금욕주의자 H. E. 매닝의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본래 가지고 있던 정치원칙들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는 개인 신앙생활 원칙을 제외하고는 어떤 원칙도 갖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언제나 경험에 따라 살았다. 그러나 세속 권력을 잃음으로써 교회에 이익을 가져다 주었는데 세속 권력을 잃게 하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세속 권력을 유지하려던 비오의 결심이 아니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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