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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계 국가들에서도 프랑스에서부터 퍼져나간 반성직주의 사상 및 조처들을 다른 형태로 받아들였다. 이탈리아의 반성직주의는 민족주의·자유주의와 결합되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교황령을 다스리는 세속 군주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 통일에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카밀로 카보우르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피에몬테 의회에서 몇 차례에 걸쳐 반성직 입법을 단행하고 교회재판소의 세속 사법권을 박탈했으며, 많은 수도원을 탄압했다. 카보우르가 내건 '자유로운 국가의 자유로운 교회'라는 구호는 이탈리아 반성직파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채택되었다. 이탈리아가 통일된 뒤에도 성직자파와 반성직자파 사이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가 됨으로써 교황은 세속권력을 잃었다. 반성직주의 입법으로 수도원의 숫자가 줄었고 대학교 신학교수들은 탄압받았으며 세속결혼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혼법은 공포되지 않았고, 학교의 종교교육도 금지되지 않았다. 또한 보장법으로 교황이 영적 기능을 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했다. 그러나 피우스 9세는 이탈리아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1874년 가톨릭교도가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1919년까지 이러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으면서 한동안 반성직주의가 강화되었는데 이는 파시즘이 국가에 의한 절대통제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이 종교자유 축소에 계속 반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대립이 없었다.
1929년 라테란 조약의 체결로 교황이 바티칸 시티라는 작은 국가의 군주가 됨으로써 세속권력을 둘러싼 분쟁이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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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탈리아의 반성직주의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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