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현재 이탈리아의 라치오, 움브리아, 마르케 지방 전체와 에밀리아로마냐 지방의 일부가 여기에 속했다. 그러나 교황령의 범위는 교황권의 위세에 따라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다.
일찍이 교황들은 4세기 때부터 로마 근처에 상당한 지역을 획득했다. 750년대에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넘보며 위협을 가하자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피핀은 이탈리아에 개입해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대한 비잔티움 제국의 소유권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로마 교황청 관구로 '복구'시켜주었다. 이같은 피핀의 기증(754)을 근거로 교황은 그 뒤 세속적인 권력을 요구했고, 1870년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기 전까지, 천 년 넘게 이탈리아 반도의 주요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1929년 라테란 조약에서 바티칸 시국이 독립국으로 인정받아 교황의 영토 주권이 회복되었다.
현재 이탈리아의 라치오·움브리아·마르케 지방 전체와 에밀리아로마냐 지방의 일부가 여기에 속했다.
그러나 교황령의 범위는 교황권의 위세에 따라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다.
일찍이 교황들은 4세기 때부터 로마 근처에 상당한 지역을 획득했다(성 베드로 세습령이라 부름).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게르만족이 쳐들어와 이 지역 주민들이 교황에게 보호를 요청하게 되면서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
750년대에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넘보며 위협을 가하자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 왕국의 단신왕(短身王)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피핀은 이탈리아에 개입해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대한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의 소유권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로마 교황청 관구로 '복구'시켜주었다.
이같은 피핀의 기증(754)을 근거로 교황은 그뒤 세속적인 권력을 요구했고, 한편 롬바르드족의 왕 아이스툴프와 파비아 조약(756)을 맺어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지역을 양도받았다(→ 피핀의 기증). 뒤이어 교황은 라벤나 인근지방, 펜타폴리스(리미니에서 안코나에 이르는 아드리아 해 연안지방), 로마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으며 11세기 말에는 노르만족과 연합해 1077년 베네벤토 공작령을 차지했다.
9, 10세기에 봉건 영주들이 발흥하고, 11세기 중반부터 14세기까지는 성직임명권 논쟁 때문에 신성 로마 황제들과 충돌했으나 교황들은 교황령에 대한 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황과 황제와의 관계는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데의 사유지를 놓고 일어난 분쟁 때문에 더 나빠졌는데, 이곳은 교황에게 헌정되었으나(1102) 결국은 황제 하인리히 5세에게 넘어갔다(1111). 그러나 교황의 주권은 사실 명목상이었고 특히 로마냐 지역에 자치정부가 들어서면서 교황의 권위는 약해졌다.
교황이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김에 따라(1309~77) 교황령 안의 여러 지방이 제각기 독립하기 시작했고 1417년 대분열시대(Great Schism)가 끝날 때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다. 많은 도시들이 교황에게서 명목상으로 교황 대리 관할구역이란 자격을 부여받았고 실제로 그 지방 유력 가문의 통치를 받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15세기 중반부터 중부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애썼다.
율리오 2세(1503~13 재위) 때는 교황령의 정확한 경계가 정해져 북쪽으로는 파르마와 볼로냐에서 시작해 아드리아 해안선을 따라 내려와 움브리아를 지나고 로마 남쪽 캄파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황들은 교황권을 국제정치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고 16세기 말엽이 되자 교황령은 이탈리아의 여러 작은 도시국가들과 비슷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여러 지역의 독립을 억누름으로써 중앙집권을 이룩하려 했으며 17, 18세기에도 이런 경향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다스린 정부는 교황령의 낙후한 경제 상황을 거의 호전시키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지배한 프랑스가 1790년대말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권을 확보했을 때 교황은 교황령을 빼앗겼고(1798~99:로마 공화국과 치살피나 공화국에 편입), 1808~09년에도 이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다(이탈리아 왕국과 프랑스 제국에 편입).
프랑스 혁명 때 교황령에 들어온 자유주의 사상은 교황령이 빈 회의(1815) 결과에 따라 교황에게 다시 돌아간 뒤에도 계속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시대의 조류를 깨닫지 못한 성직자들의 통치에 대항해 1830~31년과 1849년에 폭동이 일어났다. 2번째 폭동 때는 과거 로마 공화국과 같은 이름의 다른 로마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 무너졌다.
교황령은 이탈리아를 2개로 양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교황령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외세가 개입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리소르지멘토(19세기에 일어났던 이탈리아 통일운동)를 통해 교황령은 이탈리아 통일의 걸림돌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1859년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자 교황령에 속해 있던 로마냐·움브리아·마르케 지방이 투표를 거쳐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1870년 프랑스군이 로마에서 물러나자 마지막 남은 교황영지인 로마와 그 주변지역은 이탈리아군이 장악했고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가 됨으로써 결국 교황령은 이탈리아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그뒤에도 교황들은 여전히 세속적인 권한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바티칸의 포로'로 남아 있었다. 교황과 이탈리아 정부와의 문제는 계속 풀리지 않고 있었으나 1929년 라테란 조약에서 바티칸 시국(市國)이 독립국으로 인정받아 해결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