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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20차 세계 공의회(1869~70).
교황 비오 9세가 당시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집했다. 비오 9세는 당시 차츰 영향력을 더해가던 합리주의·자유주의·유물론에 주목하고 있었다. 교황청 관리들로 이루어진 중앙위원회 및 소위원회가 공의회 준비를 맡아 51가지 계획, 즉 가(假)교령들을 작성했는데, 그중에서 6가지만 공의회에 상정되었다.
1869년 12월 8일 공의회 개회 당일에는 약 1,050명의 주교들과 그밖에 참석 자격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약 700명이 참석했으며, 이후 더 많이 참석했다. 공식적으로 해산된 적이 없었던 이 공의회는 가톨릭 신앙교리를 크게 압축해서 신앙과 이성,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를 다룬 〈하느님의 아들 Dei Filius〉과 교황의 권위문제를 다룬 〈영원한 목자 Pastor Aeternus〉의 2가지 교리규약을 공포했다.
교황의 권위에 대한 진술은 공의회가 시작되기 이전과 회의기간 동안 길고 열띤 논쟁을 거친 후에야 승인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베드로의 참된 계승자(교황)는 모든 교회에 대해 완전하고도 가장 높은 사법권을 갖는다는 것, 모든 교회의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자유롭게 대화할 권한을 갖는다는 것, 교황의 수위권 가운데는 최고의 교도권이 포함되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덧붙여준 무류의 특권이 있어서 교황이 모든 교회에 대해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믿으라고 확고하게 가르칠 때 오류에서 면제된다는 것 등을 결의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원래의 가교령에 교황 무류성에 대한 진술이 없었으며, 공의회에 참석한 신부들 대다수가 교황 무류성을 공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 부적절하다며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을 묵살하고 비오 9세의 촉구에 따라 교황 무류성을 교리적으로 확정했다. 무류성에 대한 논쟁이 끝난 뒤에 공의회 참석자들은 몇 달 동안 로마를 떠나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로마로 돌아오기 전에 피에몬테 군인들이 로마를 점령했다. 1870년 10월 20일 비오 9세는 다음 회기를 알리지 않은 채 공의회를 정회했다. 이 공의회는 계획된 의제 중 극히 소수의 안건만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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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바티칸 공의회(제1차)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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