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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링거

다른 표기 언어 Johann Joseph Ignaz von Döll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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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9. 2. 28, 밤베르크 밤베르크
사망 1890. 1. 10, 뮌헨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사학자이자 뛰어난 로마 가톨릭 신학자.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가 선포한 교황무류성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공의회가 끝난 뒤 바티칸에서 분리해 나오면서도 자신들이 가톨릭의 진정한 교리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는 복고 가톨릭교(Altkatholiken)에 가담했다. 1822년 서품을 받고 1826년 뮌헨에서 교회법과 교회사 교수가 되었다.

1835년부터 바이에른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1873년에는 의장으로 일했다.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1세가 동료 4명을 해고한 데 대해 항의하다가 1847년 교수직을 잃었지만, 곧 뮌헨에서 대주교 다음가는 직위를 얻었으며, 1849년에는 교회사 교수로 재임명되었다. 그의 역사학 연구와 종교의 자유에 대한 확신은 교황의 정책과 마찰을 일으켰으며, 교황 무류설을 지지했던 교황권 지상주의자들에게 반대하다가 독일에서 교황 반대파 지도자로 선정되었다.

1869년에 일련의 논문을 썼는데 나중에 야누스라는 필명으로 〈교황과 공의회 Der Papst und das Konzil〉(1869)라는 제목으로 증보 출판되었다. 워릭셔 버밍햄의 주교 울라손은 이 논문을 가리켜 "1,000년 만에 나온 교황청과 예수회, 특히 로마의 정책에 대한 가장 위대하고도 엄격한 비판"이라고 했다. 이 책은 즉각 바티칸의 금서 목록(Index of Forbidden Books)에 올랐다.

될링거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반포한 교황 무류설을 반대한 후 파문당했으나(1871), 같은 해 뮌헨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될링거를 비롯해 파문당한 그의 동료들은 공의회의 교리에 반대하기 위해 회의를 조직했다. 1871년 9월 22일 뮌헨에서 열린 이 회의에는 복고 가톨릭 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에서 약 300명이 참석했다. 될링거도 회원이었던 위원회는 분리된 조직을 갖기 위한 교리적 근거와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될링거는 처음에 이 프로그램에 반대했으나 나중에는 전적으로 찬성했다. 그는 바티칸의 도그마에 반대하고 과오없는 가톨릭 교회를 지원하며 그리스도교를 재결합하는 것이 복고 가톨릭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말년에는 F. H. 로이슈와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도덕논쟁 Moralstreitigkeiten in der römischkatholischen Kirche〉(1889, 2권)을 비롯해 다른 여러 작품들을 공동집필했다. J. 프리드리히의 〈이그나츠 폰 될링거 Ignaz von Döllinger〉(3권)는 1899~1901년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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