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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602경,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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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680. 4/5, 다마스쿠스 |
국적 | 우마이야 |
요약
초기 이슬람 지도자이자 대(大)우마이야 칼리프 왕조의 창건자.
본명은 Mu⁽āwiyah ibn Abī Sufyān. Mu⁽āwiyah는 Moawiyah라고도 씀.
목차
접기개요
4대 칼리프 알리(마호메트의 사위)와 싸워 이집트를 장악했으며, 661년 알리가 암살된 뒤 칼리프 지위를 차지했다(661~680 재위). 이슬람 제국을 다시 통일하고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정했다.
젊은시절
이슬람의 정치·종교 지도자가 된 그가, 예언자 마호메트를 메카에서 추방하고 메디나로 쫓아낸 뒤에도 계속 전쟁을 벌인 아브드 샴 씨족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마호메트가 메카를 정복하고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적대적인 이 씨족과 화해하고서야 비로소 무아위야는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마호메트는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무아위야를 그의 서기(書記)로 쓴 것 같다. 그가 이슬람 역사에 공헌하게 된 것은 시리아에서의 활동과 관계있다. 마호메트가 죽은 직후 그는 형 야지드와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막기 위해 아라비아에서 시리아로 파견된 부족군대에서 복무했다.
640년 야지드가 죽자 우마르는 그를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임명했고, 그뒤 점차 시리아의 다른 지역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647년 시리아 부족군을 비잔틴 제국의 공격에 견딜 수 있을 만큼 강성하게 육성해 이듬해부터는 비잔틴 제국을 공격해 키프로스(649)와 로도스(654)를 함락시켰고, 655년 아나톨리아의 리키아 해안에서 비잔틴 해군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동시에 아나톨리아에 주기적으로 육상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칼리프에 즉위하자 중단되었는데, 이때부터 무아위야의 생애는 새롭고 결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
살해된 칼리프 우스만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무아위야는 복수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칼리프 알리가 우스만 살해자를 체포해 처벌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에 무아위야는 그를 칼리프 암살의 공범자로 간주해 칼리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뒤 곧 알리는 시리아 유프라테스 국경지대로 진군했고 무아위야 군대는 유명한 시핀 전투(657)에 참가하게 되었다. 무아위야는 거의 패배할 지경에 이르자 꾀를 써서 휴전을 성립시켰다. 알리 군대의 종교적 민감성을 십분 활용한 계략을 쓰면서 적에게는 협상에 들어가도록 설득해 결국에는 알리의 칼리프 위(位)에 대한 정통성에 회의를 품게 함으로써 알리 지지자 상당수를 그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들(하와리지파)이 알리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알리가 이라크에서 곤경에 빠진 틈을 이용해 이집트에 군대를 파견해 지배권을 획득했다. 661년 알리가 암살당하자 그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모두 장악했다. 이슬람 제국에서 최대의 군대를 지휘하게 된 그는 가장 강력한 칼리프 위의 요구자로 떠올랐다. 알리의 아들 하산은 무아위야가 주는 특별 보조금을 받는 대가로 공적인 직위에서 물러났다.
칼리프 통치
20년간의 시리아 총독 시절, 그리고 알리와 전쟁을 하는 동안 무아위야는 그에게 전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아랍 부족군을 대규모로 모집해 훈련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칼리프 체제가 시리아에 근거를 두고 다마스쿠스를 이슬람의 새 수도로 정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무아위야가 주로 시리아의 부족에게서 지지를 받은 반면 다른 지역 부족은 그의 통치에 위협을 주는 주된 세력이었다. 그러므로 우마이야 왕조의 초기 통치정책은 아랍 부족의 충성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부족적 원리를 따랐다.
이러한 정책은 무아위야가 채택한 2가지 부족 기구에서 단적으로 나타났다. 그중 하나는 귀족협의회 슈라(shura)로서 자문과 위임을 받기 위해 칼리프가 소집했다. 다른 하나는 각 부족이 자기들의 관심사를 알리기 위해 우푸드(wufud)라는 대표자를 칼리프에게 파견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무아위야는 전통적인 아랍 족장과 같은 위상으로 통치했다.
유목민의 공격적인 성향을 이슬람 세계의 확장과 자신의 권력안정화를 도모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비이슬람 지역에 대한 새로운 전쟁을 의도적으로 조장한 것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의 치세 동안 전쟁이 이같은 목적을 충족시킨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점에서 무아위야가 국내방어와 시리아 국경을 위협한 비잔틴에 대한 원정에서 언제나 시리아 군대만을 동원했던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내전 기간 동안 무아위야는 비잔틴과 휴전해 알리와의 싸움에 군대를 모두 투입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칼리프에 즉위하자마자 그는 공물상납을 중단하고 거의 매년 비잔틴에 원정을 계속했다. 이러한 전쟁으로 그는 이교도에 대한 성전(jihad)을 수행하고, 또 자신의 시리아 군단을 항상 전투태세로 유지한다는 2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잔틴과의 전쟁은 의미없는 일이었다. 원정대는 2번이나 콘스탄티노플 부근까지 진격했지만 타우루스 산맥 너머의 소아시아 영토를 영구적으로 차지하지는 못했다. 무아위야 제국의 다른 지역에 배치된 군대는 더 멀리 떨어진 지역의 전투에 파병했다.
이들은 북아프리카의 틀렘센(지금의 알제리)과 같이 먼 서쪽 지역까지 침략했다. 트리폴리타니아와 이프리키야 정복은 보다 영속적이었다. 이 지역은 670년 카이로 안에 요새도시가 세워지면서 합병되어 곧 우마이야 왕조를 더욱 팽창시키는 근거지가 되었다.
동시에 동쪽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를 통해 이슬람 국경선은 옥수스 강까지 확장되었고 호라산 지역이 우마이야 왕조의 주가 되었다.
정통 칼리프들이 치세하는 동안 부족의 전통과 메디나에서 마호메트가 취한 관행은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 부적절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아위야는 시리아에서 언제든지 손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이용했다. 그것은 로마와 비잔틴 제국이 그곳을 통치하는 동안 발전시킨 행정절차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의 도입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옛날 전통에서 영향받아 몇 가지 조치를 취한 것은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그는 계속 확대되는 영토를 통제하기 위해 칼리프 정부조직의 확충과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정부의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디완(diwan)이라는 부서를 둠으로써 위의 목표를 달성했다. 옛 아랍 사료는 특히 무아위야가 2개 디완을 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무국인 디완 알 하탐과 체신기구인 바리드로, 분명히 제국 내의 의사소통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부서의 출범 초기 주요직책은 대부분 그리스도교도가 차지했다. 그들 중 일부는 비잔틴 정부에서 일했던 가문 출신으로서 그리스도교도의 기용은 정복지역, 특히 시리아 지역 내에 많은 그리스도교도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관용적인 종교 정책의 일부였다.
부족적 전통을 지키면서 이러한 행정적 변혁을 이루었기 때문에 후대 역사가들은 무아위야가 칼리프라는 종교적 칭호보다는 '왕'(malik)이라는 칭호가 알맞다고 생각했다.
'말리크'라는 칭호는 부분적으로는 비(非)이슬람적 전통에서 유래한 세속적 성격이 칼리프 체제에서 점증해간 당시 사정을 보여주는 상징으로서, 무아위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우마이야 왕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무아위야는 아들 야지드가 칼리프로서 통치할 때에도 부족들이 계속 충성을 바치게 함으로써 이슬람에서 칼리프 위 세습제를 확립했다. 이것을 무아위야가 이룬 가장 놀라운 변혁이라고 볼 때 위의 평가는 특히 적절하다.
칼리프 선출에 있어서 이전의 믿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대안으로서 마련된 이 방법은 확실히 그동안 무아위야 칼리프가 행해온 정책과 업적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무아위야 정책을 요약해서 말하면 부족의 요구와 제국의 필요에 부응해 더욱 적절한 다른 전통을 차용함으로써 이슬람 신정(神政)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무아위야에 대한 평가
무아위야는 모든 이슬람 역사서와 근대 학문서에서 이슬람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졌다고 서술되는 소수 칼리프 중의 하나이다. 그가 걸출한 인물로 평가되는 한 가지 확실한 이유는 그가 논쟁의 여지가 많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수니파 골수 학자들은 물론 소수 시아파 저술가들도 무아위야에게 항상 비난을 퍼부어댔다. 수니파는 예언자 마호메트와 '올바르게 선도된' 칼리프들이 세워놓은 통치방식에서 이탈했다는 이유로, 또 시아파는 그가 알리에게서 통치권을 찬탈했다는 이유로 비난했다. 무아위야는 이 두 진영으로부터 그의 과오에 대해 비난받아왔고 아직도 비난받고 있지만 아랍 문헌에서는 이상적인 군주로서 아낌없이 칭찬받고 있다.
다시 말해 무아위야는 대부분의 다른 칼리프와는 달리 양 극단의 종파성을 끊임없이 자극해왔기 때문에 이슬람 역사에서 크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이슬람 역사서에 나타난 이러한 왜곡된 모습의 밑바닥에는 종파적 가치판단이나 해석과는 완전히 다르게 큰 의미를 갖는 실제적 업적을 이룬 인물이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정치와 군사 행정을 들 수 있는데, 무아위야는 무정부상태에 빠져 있던 이슬람 국가를 정치와 군사 행정으로 재건해 비이슬람에 대해 아랍-이슬람 군의 공격태세를 갖출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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