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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서
1169~95년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부분의 작품들(예를 들면 〈논리학 Organon〉·〈영혼에 관하여 De anima〉·〈자연학 Physica〉·〈형이상학 Metaphysica〉·〈수사학 Rhetorica〉·〈시학 Poetica〉·〈니코마코스 윤리학 Nicomachean Ethics〉·〈동물의 신체기관에 관하여 De partibus animalium〉·〈자연에 관한 단편들 Parva naturalia〉·〈기상학 Meteorologica〉)에 대한 주석서들을 썼다.
그는 요약서와 중편 혹은 장편의 주석서를 썼는데 한 작품에 대해 흔히 2, 3 종류를 모두 썼다.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Politica〉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주석서(이것은 형식상 의역서이자 중편 주석서임)를 저술했다. 그의 주석서는 모두 라틴어역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에 실렸다. 이들 주석서들은 아랍어 원본이나 히브리어 번역본 또는 2가지가 모두 남아 있다.
그리고 번역본 중의 일부는 분실된 것으로 보이는 아랍어 원본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귀중한 주석서 등을 대신할 수 있는 유용한 것이다.
이븐 루슈드의 주석서는 이후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명석한 통찰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정확히 대변해주었고 그의 사상에 대한 이해력을 상당히 증진시켰다. 그는 고전적인 주석가들인 테미스티우스와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 그리고 이슬람 철학자들인 알 파라비, 이븐 시나, 이븐 시나와 같은 고향 사람인 이븐 바자 등을 비판적으로 능숙하게 활용했다.
자연과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문의 주석서에서는 이븐 루슈드의 대단한 관찰력이 엿보인다.
철학에 대한 이븐 루슈드의 옹호
그의 첫 저작은 1162~69년에 쓴 〈의학 Kulliyāt〉(라틴어로는 Colliget)이다.
법률에 관한 저술은 소수가 현존하며 신학에 대한 저술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진 종교 철학적 논쟁에 관한 3권의 논문이다. 즉 1179, 1180년에 씌어진, 부록이 딸린 〈파슬〉과 〈마나히즈〉및 철학을 옹호한 〈타하푸트〉가 그것이다. 앞의 두 책에서 이븐 루슈드는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즉 예언적으로 계시된 성법(聖法:Shar⁽ 또는 Sharῑ⁽ah) 속에 내포된 교의를 해석할 능력과 자격이 있는(동시에 해석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이슬람의 무타칼리문(mutakallimūn:변증술을 쓰는 신학자)이 아니라 바로 형이상학자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타칼리문은 변증적 논증에 의존하지만 형이상학자는 삼단논법의 증명방법을 써서 완전하게 해석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앙과 신념의 진정한 내면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의 목표이다. 이러한 내면적 의미는 대중들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대중들은 성서(〈코란〉)의 이야기와 직유와 은유 속에 담겨 있는 분명하고 외면적인 의미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3가지 논법(논증적인 것, 변증적인 것, 설득적인 것, 즉 수사적인 것과 시적인 것)을 철학자·신학자·대중에게 적용했다.
3번째 저서는 특히 그의 선배 철학자 알 가잘리가 이븐 시나와 알 카라비에게 가한 공격을 반박하고 철학을 옹호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옹호는 비록 기백있고 성공적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철학을 예전의 지위로까지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당시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 사회는 자유롭게 사색을 추구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븐 투마르트(1078경~1130)는 순수한 유일신교를 회복할 목적으로 개혁 활동을 펼쳤는데 그결과 알모라비드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베르베르 왕조인 알모하드 왕조가 세워져 이븐 루슈드는 이 왕조하에서 활동했다.
당시 법률학의 강조점은 이슬람 성법을 이전의 권위에 의존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것에서 탈피하고, 성법 원리에 대한 연구와 이븐 투마르트의 가르침에 근거한 독립된 법률적 판단의 부활에 동등한 강조점을 두는 쪽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보다 널리 영향을 미친 것은 실천과 지식이 겸비될 수 있도록 아직까지 무지한 대중들에게 샤리아의 명백한 의미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이븐 투마르트의 사상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철학자들(falāsifah:이븐 루슈드의 〈파슬〉에 의하면 '사색의 길을 따르고 진리를 알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샤리아의 이론적인 가르침에 대한 해석에 논증적 방식을 적용하도록 고무시켰다. 그러나 재판관과 신학자들의 세력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철학에 대한 이븐 루슈드의 옹호는 불리한 상황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븐 루슈드는 아부 야쿠브의 지원에 사례를 표하는 뜻으로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주석 Commentary on Plato's Republic〉을 그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그는 카디들과 함께 고관의 지위를 차지하고 광신적인 대중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던 무타칼리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철학적 탐구를 계속했다. 이것이 아마도 그가 아부 유수프의 후원을 갑자기 잃게 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1195년 아부 유수프는 스페인의 그리스도교도들과 지하드[聖戰]를 벌이면서 이븐 루슈드를 고위직에서 해임하고 루세나로 추방했다.
대중들의 전폭적인 충성심과 지지가 필요했던 칼리프는 이런 방식으로 신학자들을 무마시켰던 것이다. 이런 설명이 아랍 측 자료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아마도 재판관과 신학자들의 사주로 폭도들이 이븐 루슈드를 공격했다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븐 루슈드의 불명예는 그에게는 뼈아픈 고통을 준 긴 시간이었지만 단기간에 그쳤다. 칼리프는 마라케시로 돌아온 다음 이븐 루슈드를 그의 궁정으로 다시 불렀던 것이다. 이븐 루슈드는 죽은 뒤 처음에는 마라케시에 묻혔지만 후에 코르도바의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
통치자가 공식적으로는 철학을 부정하고 철학의 지지자들을 박해하며 철학서적을 불태우고 종교법의 준수에 필요한 것 이외의 세속학문의 연구를 금지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철학자를 총애하고 그들과 교분을 갖는 것은 이슬람 세계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칼리프의 격려가 없었다면 이븐 루슈드는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주석〉·〈파슬〉·〈타하푸트〉, 그밖의 독창적인 철학 논저(예를 들면 능동 지성과 인간의 지성의 통일에 관한 논저 등) 등에 반영되어 있듯이 신학자들에 대항해서 철학을 변호하기 위해 전생애를 바쳐 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븐 루슈드가 섬긴 2명의 군주이자 후원자들이 이븐 투마르트의 신학을 점차 멀리하고 이슬람의 성법에 심취된 것도 아마 그에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이븐 루슈드는 자신의 공적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동시에 철학연구를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의 신체기관에 관하여〉에 대한 주석 등 곳곳에서 스스로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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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븐 루슈드의 저작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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