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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9년 토마스는 그 당시 서방 인문주의의 중심지였던 교황청의 신학 고문과 신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재위 말년에 아나니에서 2년을 보냈고, 우르바노 4세와 함께 오르비에토에서 4년을 보냈다. 1265~67년 그는 로마의 산타사비나 수도원에서 가르친 뒤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요청을 받고 비테르보의 교황청으로 갔다. 1268년 11월 교황청은 갑자기 그를 파리로 파견했으며, 그곳에 가서 막 시작되었던 치열한 교리논쟁에 관여하게 되었다.
아베로에스의 저작들이 그당시 파리의 대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코르도바 출신의 아베로에스는 스페인에서 아랍 철학을 대변하는 탁월한 학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뛰어난 주석가와 해석자로 유명했다. 아베로에스가 이슬람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지식이 이성적 지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종적인 분석 차원에서 보면 2가지 진리, 곧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은 이슬람 정통주의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더욱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제르 드 브라방이 등장한 뒤 1266년부터 파리대학교의 교양학부 학생들은 우수한 아베로에스의 주석서와 이성적 경향을 띠고 있던 그의 사상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동료 교수들인 아베로에스와 시제르에 반대했으나, 양편은 모두 상대방을 높이 평가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자마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제르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시제르가 정통주의도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퀴나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아우구스티노적인 전통과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의 틈바구니에 있었다. 1270년 급진적 아베로에스주의는 정죄당했고, 이와 동시에 신앙 아래서 이성이 누리는 자율성을 인정했던 토마스도 신망을 잃게 되었다.
이 논쟁이 진행되면서 신학의 방법 자체가 의문시되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이성은 신앙 안에서 그 나름의 법칙에 따라 활동할 수 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고 구체화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신비는 적극적·의식적·조직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이성 활동의 규칙과 구조가 신앙의 빛과 통합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신학은 '과학'이다(물론 이 말은 현대적 의미의 '과학'을 가리키는 것은 아님). 그것은 하느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전제들로부터 이성적으로 추론된 지식이다.
신학자들은 권위와 신앙을 출발점으로 받아들인 뒤 이성을 사용하여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 이에 반해 철학자는 전적으로 자연적인 이성의 빛에만 의지한다. 토마스는 신학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러자 여러 진영에서 아퀴나스에 대해 극심한 반대가 있었으며, 이러한 반대는 오늘날까지도 종교적 열광주의자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는데, 이들은 특히 이성을 신비적인 영성체, 관상, 복음적 열정에 사로잡힌 갑작스러운 황홀이 지배하는 세계에 뛰어든 침입자로 본다.
아퀴나스의 저술이 취하고 있는 문학 유형은 그의 방법론과 관련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아퀴나스는 찬반의 논거와 함께 비판적 연구를 제시하는 '질문'의 형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는데, 이것은 당시 대학교들에서 사용되던 교수법 체계에 따른 것이다. 그 형식은 공식 문서에 대한 단순한 주석으로부터 중세 대학교 생활의 중요한 이벤트가 되었던 공개 논쟁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토마스의 저작들은 3가지 범주로 나누어진다. 첫째, 〈구약성서〉, 〈신약성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신학 명제집 Sentences〉(대학교에서 사용되던 공식적인 신학 교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등에 대한 주석들, 둘째, 질문들에 대한 논박(논쟁들에서 대가의 자격으로 자신의 교리를 설명한 것), 셋째, 2편의 독창적 종합서인 〈대이교도대전〉·〈신학대전〉(이 책들은 초보자들을 위한 종합적인 입문서로 쓰임) 등이 있다.
이와 아울러 수많은 〈소논문집 opuscula〉도 주목해야 하며, 이 〈소논문집〉은 그것이 씌어진 특수한 상황 때문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신앙과 이성에 대해 아퀴나스가 취한 입장은 그 논리 때문에 자연적 실재의 근본적 일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physis)은 필연적 법칙을 가지며, 이 사실을 인정하면 로고스(이성적 구조)에 따라 과학을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토마스는 기적이나 하느님의 섭리에 소박하게 의지하여 자연의 힘을 신성시하는 유혹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네스크 예술과 사회관습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사물과 인간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초자연적' 세계가 인간의 상상력을 흐리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 자체의 세속적 성격이 폭로된 자연은 그에 합당한 종교적 가치를 가져야 하며, 보다 이성적인 방법에 따라 인간을 하느님에게 인도해야 한다. 이제 자연은 더이상 초자연적인 것의 그림자가 되지 않는다. 아시시의 프란키스쿠스가 새·나무·태양을 찬미한 것은 이러한 이해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Physics〉을 대학교 교과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은 학문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당시 세계에 대한 종교적 이해와 반대되는 자연주의가 영성·사회관습·정치행위 등 모든 영역에 침투하고 있었다. 1270년경 프랑스 신흥도시들을 찬미한 시인이며 파리의 생자크 거리에서 토마스의 이웃에 살고 있던 장 드 묑은 자신의 〈장미 이야기 Roman de la Rose〉에서 물리적 우주를 고찰하고 생식의 법칙을 비난하면서 거칠기 짝이 없는 사실주의를 표현했다.
로마 시인 오비드의 〈사랑의 예술 Ars amatoria〉이 수많은 사본들로 만들어져 읽혔고, 앙드레 르 샤플랭의 〈사랑의 하느님에 관하여 De Deo amoris〉는 대중의 기호에 맞는 세련된 판본으로 출판되었으며, 보다 유혹적인 형태의 궁정 연애가 13세기 문화에서 더 크게 유행했다. 동시에 로마 법이 볼로냐대학교에서 소생하고 있었다. 볼로냐대학교는 자연법을 엄격하게 분석했고, 프리드리히 2세의 법률가들에게 교회의 신정체제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했다.
성서적 상징을 사용하여 훌륭한 경건자들의 모습을 그리며 군주의 역할과 의무를 밝혔던 전통적인 견해는 정부의 실험과 이성적인 논문들로 대체되었다. 토마스도 1266년 키프로스의 왕을 위해 〈군주들의 통치에 대해 De regimine principum〉 같은 논문을 작성했다. 정의를 관장하는 일에서는 사법적 수사와 재판이 시죄법(試罪法)과 하느님의 심판에 호소하는 열광주의적 태도를 대체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직면하자 많은 사람은 자연의 진정한 가치로 마음과 영혼의 혼란스러운 성향을 서로 구별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우려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성향을 보이던 신학자들은 어떤 형태의 결정론적 철학도 배격했다.
그들은 이러한 철학이 자유를 위축시키고 개인의 책임을 해소시키며, 섭리에 대한 신앙을 파괴하고, 창조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하느님의 활동이라는 관념을 부정한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노의 교리에 물들어 있던 신학자들은 죄로 인해 갈갈이 찢긴 자연에 대한 은혜의 필요성과 은혜의 힘을 역설했다. 자연의 종교적 가치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신학의 낙관주의는 그들에게 걸림돌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지고 이단적 교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몹시 경계했다.
그가 볼 때 결정론은 자연에만 해당되고 인간은 자유로우며, 그 자유를 합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섭리신학에서 창조가 계속된다고 가르쳤다. 계속되는 창조는 창조주의 지혜에 대해 피조물이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또한 자연질서의 존재를 보장한다고 보았다. 하느님은 절대주권을 가지고 그가 창조한 만물을 움직인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주에 대해 행사하는 절대적 통치는 각각의 존재가 그 본성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하는 창조주의 섭리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율성은 이성적 피조물에게서 가장 높은 형태로 실현되어 있다. 지적·의지적·신체적으로 실존하는 인간은 문자 그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파괴되지 않으며, 오히려 바로 그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피조물의 완전성으로부터 어떤 것을 분리시키는 것은 창조적 능력의 완전성 그 자체로부터 그것을 떼어내는 것이다." 신비한 원리이기도 한 이 형이상학적 공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여준 영성의 핵심이다(자유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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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황청시절과 파리 복귀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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